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역시 여름에는 가볍게 쉽게 금방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이 제격이다. 습한 기운을 몰아내는 밤바람을 맞으며, 이따금씩 팔과 허벅지에 달라붙는 벌레들을 때려죽이며 이 소설집을 뚝딱 읽었다. 미스터리 소설집이라는 장르에 걸맞게 후루룩 책장이 넘어갔던 구라치 준의 소설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나는 작정단3기 활동 덕분에 읽게 되었다. 처음 읽는 구라치 준의 소설이자, 제임스 엘로이의 논픽션 《내 어둠의 근원》 이후 오랜만에 읽는 으스스한 장르의 책이다.


 책은 6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 작품을 패러디한 단편으로 시작해 살인 사건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 고양이가 힌트를 던져주는 일상 미스터리, 부드러운 두부를 흉기로 의심하는 바카미스(일본어 '바보'와 '미스터리'를 합친 말로 황당한 트릭을 쓰는 미스터리 장르를 일컫는다.)가 섞여 있다. 아래는 단편 각각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해보았다.



 <ABC 살인>

 빚에 몰린 주인공이 부모님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도가야'에 사는 동생 '다카시'를 죽이려 묻지마 살인을 이니셜 살인으로 탈바꿈한다. 'A' 지역에 사는 'A', 'B' 지역에 사는 'B', 그리고 'D'로 이어지는 동생과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C' 지역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C'를 죽인 주인공. 일전에 일어났던 묻지마 살인사건은 주인공에 의해 이니셜 계획 살인이 되지만, 주인공이 동생을 죽이려고 한 날 수많은 'D' 지역에 사는 수많은 이니셜 'D'가 죽임을 당한다. 살해 욕망을 가진 자들이 주인공의 계획에 편승했던 것.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사내 편애>

 인사관리 시스템이 MFM라는 컴퓨터로 대체된 지금, 평범한 주인공은 마더컴이라 불리는 MFM에게 편애받고 있다. 그에 사내 직원들이 모두 주인공에게 잘 보이려 애쓴다는 이야기. 심지어 마더컴은 주인공이 좋아하는 직원 마리코에게 고백을 강요하여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들고, 주인공은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헌데 이 여성의 사체에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입에 커다란 대파가 꽂혀있다는 점과 여성의 머리맡에 케이크 세 개가 놓여있었다는 점. 담당 경부와 형사는 사건을 추적하다 범인이 피해자의 스토커 '사이가'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파와 케이크는 어쩌면, 그녀가 생전에 정말 좋아했던 케이크와 싫어했던 파로 그녀의 성불을 저지하려 했던 장치로 쓰이지 않았나 짐작한다.


 <밤을 보는 고양이>

 휴가를 내고 할머니 집에 내려온 주인공은 매일 밤 공중을 쳐다보는 고양이 '미코'의 이상 행동을 감지한다. 주인공은 고양이의 이상 행동이 '냄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리해내고, 부정수급 때문에 엄마의 시체를 뒷마당에 유기하려고 했던 아들의 범행 현장을 잡아낸다.


​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태평양 전쟁 말기, 공간전위식 폭격장치(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순간이동 자살 폭탄이나 마찬가지다.)를 실험하는 실험실에서 한 이등병이 후두부를 맞고 쓰러진 채 시체가 되어 발견된다. 그리고 이등병 주변에는 두부가 흩어져 있고, 아무런 흉기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건을 목격하는 주인공은 이 사건에 스파이 암살 기관의 소좌가 연관되어 있고 이등병은 미국쪽 스파이이기 때문에 살해당했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사건을 덮으려는 대위와 소좌 그리고 반쯤 미친 과학자에 의해 사건은 황당무계한 실험의 일시적인 성공에 의한 사고라고 매듭지어진다.


​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기업 연구소에서 밀실 사고가 발생한다. 연구소 실장이 물이 든 양동이에 머리를 맞은 것.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구라치 준의 전매특허 캐릭터인 '네코마루 선배'가 등장해 해답을 이끌어내는 네코마루 시리즈물 중 하나다.



 이 작가는 결말에서 반전을 꾀하는 장치를 좋아하는 듯하다. <ABC 살인>에서 주인공이 본인도 'D' 지역의 'D' 이니셜을 가진 사람이라고 깨닫는 장면이나, <사내 편애> 속 주인공이 이직을 결심한 회사에서 전 회사와 달리 마더컴의 일방적인 배척을 당하는 장면이나,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에서 패전의 기운을 예상하는 주인공의 암담한 혼잣말 장면처럼 반전을 통해 문득 으스스한 감정을 되돌아보게 했다.


 금세 읽어내린 구라치 준의 소설집은 미스터리는 좋아하지만 호러는 싫어하는 내게 있어 딱 적당하게 맛있는 팝콘 공포였다. 잠 못 이룰만큼 선을 넘어버리지 않아서 좋고, 여름밤의 시원함도 음산함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운 소설이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표제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보다 첫 단편 <ABC 살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떤 범죄도 허용되는 끔찍한 12시간을 그린 영화 <더 퍼지>처럼 'C 살인 사건' 이후 기다렸다는 듯 목줄 풀린 사냥개들처럼 뛰쳐나가 'D 살인 사건'을 찾아 헤매고 살인을 시행했을 이들의 모습이 그려져서 소름이 돋았다.


 역자 말에 의하면,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어라'는 말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지하게 구는 고지식한 사람'에게 쓰는 일본의 관용어라고 한다. 즉,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의 살해 현장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누워서 떡 먹다가 죽었거나, 종잇장을 맞들었더니 죽은 현장이나 마찬가지인 셈. 역자 말은 이렇듯 모르던 비하인드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끝까지 읽는 재미가 있다.

이리하여 세 부류의 생각은 의외의 형태로 일치했다.
"그렇다면 컴퓨터가 상사인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부하직원을 책임지는 건 이제 사양이다. 컴퓨터에게 맡기고 싶다."
"아아, 컴퓨터라면 인건비가 안 들 텐데."

"그건 그렇고, 이건 대체 뭔가?"
나도 처음부터 그것이 걸렸다. 시체의 머리 부분을 중심으로 하얀 것이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두부다.
앞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주변에 흩어진 두부. 게다가 시체의 후두부에는 사각 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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