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 김현의 詩 처방전 시요일
김현 지음 / 미디어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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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시 큐레이션 앱 시요일에서 김현 시인이 연재했던 '김현의 시(詩) 처방전'이 책으로 나왔다. 봄부터 겨울까지 지난 1년간 20만 독자와 함께했던 처방시와 처방전의 기록이다. 시요일 앱은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됐고, 김현 시인은 아무튼 시리즈의 에세이 《아무튼, 스웨터》를 통해 처음 만났다. 미처 몰랐던 스웨터의 종류를 능숙하게 나열하고 스웨터라는 소재 하나로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는 솜씨를 보며 글 재주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마침, 나와 같은 독서모임 '청춘통조림'의 멤버인 개미님의 최애 시인이라는 말씀을 들어 덩달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완독하고나니 과연 개미님을 사랑에 빠지게 할만큼 탁월하고 따듯한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에는 처음으로 짝사랑을 앓는 사연부터 나이든 반려묘와 함께 살고 있는 집사의 사연,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사연, 아이돌을 너무 좋아해서 걱정하는 사연, 혼자 상경하여 외로움을 느끼는 사연, 용기를 내고 싶거나 할 말을 하고 싶어 고민하는 사연 등 가지각색의 웃음과 슬픔이 묻은 사연들로 빼곡하다. 개중 첫 이별을 했다는 사연자에게 처방한 이제니의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과(개미님도 이 사연의 처방전 때문에 김현 시인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취준생 사연자에게 처방한 문동만의 <그네>, 아이돌을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사연자에게 처방한 박소란의 <푸른 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제니의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제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애달프고 외로운 이 시에 덧붙여, 시인은 이별할 때 비로소 하나의 연애를 완결한다며 이는 집을 허무는 일과 같다고 비유한다.


두 사람이 한채의 집을 쌓아 올리는 것도, 그 집을 허물어 상대방이 챙겨 가지 않는 벽돌을 하나씩 들고나오는 것도, 그 벽돌만 한 마음의 구멍을 창문 삼아 나와 타인의 마음을 내다보기 위해서지요. 마음이 벽돌 같던 순간과 마음에 벽돌이 떨어진 순간과 마음의 벽돌을 바라보는 순간과 마음의 벽돌이 사라진 곳을 쓰다듬는 순간이 '그래봤자, 첫'입니다.


 머릿속에 절로 그려지는 비유였다. 벽돌을 쥔 내 모습과 벽돌이 빠져나가 텅 빈 공간을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문장이었다. 사실 이별한 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위로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진다'는 상투적인 말이 전부다. 헌데 김현 시인은 같은 위로를 해도 어찌 이토록 따듯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시인이 우리의 슬픔을 훔치는 만큼, 시인의 따듯한 문장을 훔쳐 내 문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어서 취준생 사연자에게 꺼낸 문장 역시 나를 사로잡았다. 처방시 문동만의 <그네>는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 /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 / 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 / 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는 구절이 인상적인 시였다. 취준생 사연자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바로 '성취의 경험과 감정'이 사라져 힘들다는 고민. 나 역시 직장 생활을 할 때와는 달리 너무도 평탄하고 완만한 날들이 지속되면서 요즈음 무기력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내 사연처럼 보이는 사연이 등장하자 눈을 크게 뜨고 사연을 읽었다. 김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는 '성취 중독자'들이 된 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의 인생사를 조금 더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획일화된 성취의 순간들이 아니라 남들은 모르는, 남들에게는 무용한 나만의 성취일지도 몰라요. 가을 저녁에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채로 그네를 타는 일은 어떨까요. 더 많이 흔들릴수록 더 높이 올라가 더 멀리 볼 수 있는 일. 흔들려야 멈추는 순간이 있지요.


김현 시인의 말대로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그저 무용한 나만의 성취를 지금처럼 해나가야겠다. 처방전을 읽으며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됐다. 지금처럼 꾸준히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따금 어려운 책도 읽고, 구몬을 풀고, 올해는 캘리그라피 연습도 해야지. 내가 겪어온 바, 무용한 성취가 늘어갈수록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면면도 늘어가는 듯하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김현의 시 처방전'은 창비 블로그에서도 다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이제니의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처방전 링크를 함께 남겨둔다. 책을 읽기 전 참고로 미리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http://blog.changbi.com/221327594820?Redirect=Log&from=postView




어떤 헤어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순간이 아니라 일생이 필요하기도 하답니다. (……)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8.2초라고 합니다. 4분 37초는 얼마나 긴 사랑의 시간일까요._<4분 37초 동안 우리는 가만히>

사람은 사람에게 기대며 사는 존재라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 수 없지요._<고요와 냉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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