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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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의 <천장호에서>라는 시를 참 좋아한다. 쓸쓸한 기분이 들거나 마음이 헛헛할 때 한 번쯤 다시 읽으면 더욱 감성에 충만해지는 시다. 이번에 나희덕 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고 하여 서평단에 바로 신청을 했고, 당첨되어 책이 오자마자 서둘러 읽어 보았다. 《파일명 서정시》라는 제목에 걸맞게 처연하고 슬프고 아픈 시들로 가득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제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가 아닐까. 시인은 제2부에서 홀로코스트, 세월호 사건, 일본군 위안부 등 인간의 추악한 이면과 안타까운 희생자를 동시에 목도해야만 했던 시대의 아픈 사건들을 재조명한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경우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시이며, <난파된 교실>과 <문턱 저편의 말>의 경우 세월호 사건에서 어른들의 이기심과 정부의 안일한 대책으로 인해 꽃을 피우지 못한 어린 생명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난파된 교실>을 한 단어, 한 단어 읽으면서 내가 과거에 봤던 뉴스 장면들과 안산의 추모 행사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져 결국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밖에도 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인 자신의 창작의 고통이나 내면의 고통을 내비추기도 하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나 고대 인도 신화를 통해 인간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몇 번을 읽어보며 밑줄을 긋고 참 좋았다 여겼던 시들로는 <눈과 얼음>, 표제작 <파일명 서정시>, <종이감옥>, <나날들>, <주름들>, <마지막 산책>을 꼽겠다. <눈과 얼음>과 <파일명 서정시>는 시인이 시를 쓰고 노래하며 고통을 음미하는 이유를 밝히는 시라고 느껴졌다. <나날들>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청춘이라면 가슴 깊이 와닿을 시였고, <마지막 산책>은 통속적이어서 참 가슴 미어졌던 어느 시대 멜로 영화를 보는 듯한 시였다. 

 책에 수록된 조재룡 해설 <죽음-주검-죽임, 폐허에서 부르는 노래>에서는 이 시집을 '온통 죽음으로 가득한 시집'이라고 칭한다. 이어서 덧붙인다. "당신이 연 페이지는 고통과 상처, 비극과 폭력으로 가득한 어떤 곳과 공간, 어떤 시간과 사건, 어떤 타자와 역사를 당신에게 펼쳐 보일 것이며, 재난과 비극 속으로 들어가 그곳을 고통스레 돌아 나온 자가 마지막으로 내쉬는 최후의 숨결같은 노래, 불가능을 실현한 언어를 내비칠 것이다." 시대의 아픔은 곧 시인의 아픔이다. 시인은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고, 시를 노래해 시대에 경종을 울린다. 역시 나희덕의 시집은 늘 내게 눈물과 환희, 고뇌와 통증을 선사하는구나.

 아래 책 마지막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말'을 기록해둔다. 시인의 말마저 아프고 아픈 시집이다.


이빨과 발톱이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내 안에서도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말들이 돋아났다.


이 피 흘리는 말들을 어찌할 것인가.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


2018년 가을

나희덕


나날들이 나달나달해졌다
끝까지 사람으로 남아 있자는 말을 들었다

(……)

절망은 길가의 돌보다 사소해졌다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축생도의 우기가 너무 길다
축축한 빨랫감들이 내뿜는 냄새를 견딜 수 없다

좀처럼 마르지 않는 나날들이다

_<나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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