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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얇디 얇은 《아이 러브 디스 파트》(원제: I Love This Part) 책장을 펼치면, 이어폰을 나눠낀 연인이 한 데 누워 있는 모습부터 보인다. 어린 학생으로 보이는 여성들은 이어서 함께 공부를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비밀을 나누고, 서로의 약점을 위로한다. 시간의 흐름은 명확하지 않고, 고백과 원망이 무분별한 낱장 속에서 흩어진다. 제목 그대로, 연인이 서로의 시간 속에서 좋아했던 장면들 혹은 (좋아하진 않았지만 잊기 어려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나열한 듯하다.
《아이 러브 디스 파트》는 친절하지 않은 연애 서사를 지닌 작품이다. 비단 퀴어 로맨스를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를 자세히 소개하지도 않고 특정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시간 순서 역시 애매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한 장 한 장 유심히 일러스트를 들여다보며 스스로 숨겨진 이야기를 찾게 된다. 기다란 금발 머리를 가진 엘리자베스(핸드폰 문자 메세지로 알 수 있는 백인 여성의 이름), 흑인으로 보이는 짧은 곱슬 머리 여성의 캐릭터는 다정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이어폰을 나눠끼고 있을 때 슬쩍 엿보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고, 서로만 보이는 그들의 마음처럼 들쑥날쑥한 크기로 표현된 산과 빌딩 건물들 · 주택가 · 도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이 끝났다고 여겨질 즈음, 연애를 뜻하는 보랏빛 채색이 사라지고 흑백의 일러스트가 펼쳐진다. 연인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과거를 회상한다. 칭찬으로 시작한 대화가 시답잖은 대화 몇 개로 연결되고, 서로를 의식하며 눈빛이 마주친다. 서툰 손길로 처음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공장 굴뚝 연기가, 흘러가는 공기가, 창밖 하늘이 다시 보랏빛 채색으로 물들어 간다. 사랑을 시작하던 장면들은 허무하게 다시 이별 장면으로 돌아온다. 미안하다며, 마음 내키면 들어보라고 보낸 몇 곡의 노래가 음표를 그리며 흘러간다. 이제 건물과 주택가는 서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만큼 거대하기만 하고, 눈물을 떨구면서 함께 나눠듣던 노래를 홀로 듣는다. 아직 사랑의 흔적이 남아 보랏빛 채색이 여실한 장소들을, 노래가 소환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책의 맨 뒤 수신지 작가의 추천사에도 그런 말이 있다. '곳곳에 놓여 있는 빈칸에 나의 기억을 채워 넣다 보니 다 읽고 나서는 마치 내 이야기를 그려놓은 만화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사랑의 열병을 함께 앓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또 다른 그녀에게 했던 말처럼, '어떻게 미워하겠는가'. 나의 어떤 시절을 차지한 채 소중한 장면과 소중한 노래를 남겨준 사람일 텐데. 참 여운이 짙은 그래픽노블이다.
《아이 러브 디스 파트》의 작가는 틸리 월든으로, 이 작품은 작가에게 이그나츠 어워드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틸리 월든은 이 작품 외에도 이그나츠 어워드 뛰어난 작가상을 수상한 《The End of Summer》와 《Spinning》, 《On a Sunbeam》 등의 작품을 펴냈다. 국내 출간된 틸리 월든의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틸리 월든의 다른 작품을 서둘러 보고 싶고, 다른 작품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