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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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홍보문구에도 적혀있듯이 미야모토 테루는 서정적인 문학 세계로 유명한 일본 작가다. 나 역시 그의 대표작 <환상의 빛>으로 미야모토 테루의 세계를 맛본 적이 있다. 그랬기에 망설임없이 집어든 2018년도 신작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나는 안산시에서 현재 진행중인 지역서점 바로대출을 통해 빌려 보았다.


 주인공 '오바타 겐야'는 일본 여행 중 지병으로 죽은 고모의 사후처리를 맡게 된다. 겐야의 고모 '기쿠에'는 오래 전 미국인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없이 홀로 캘리포니아주 팔로스버디스 반도에서 살고 있었기에, 서로 사이가 나쁜 겐야의 아버지를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가족은 겐야가 유일하다. 겐야는 사후처리 중에 기쿠에 고모의 고문 변호사 '수잔 모리'로부터 겐야 앞으로 400억 원이 넘는 고모의 유산이 상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더불어 고모가 숨겨왔던 그간의 비밀까지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여섯 살에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졌던 고모의 딸 '레일라 요코 올컷'이 실종 사건으로 인해 행방불명되었다는 것. 겐야는 고치기 전 유언장에 혹여 딸을 찾게 되면 유산의 30퍼센트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쿠에의 첨언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레일라의 실종 사건을 파헤쳐 보기로 한다. 수잔 모리로부터 소개 받은 사립탐정 '니코'는 겐야로부터 전해받은 올컷가 대저택의 힌트를 기반으로 묵혀있던 실종 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의외의 스토리였다. <환상의 빛>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나는 이 책 역시 어떤 상실의 사건이 펼쳐지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와 슬픔이 담긴 흔한 장편소설을 예상했다. 의자에 앉아 멀거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진 책 표지도 의심할 여지없이 단조로워 보였다. 소재는 '연애'나 '가족'쯤 되려나 싶었다. 하지만, 소설은 느닷없이 추리극의 형태를 띠며 전개됐고, 기쿠에가 과연 자살이었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기쿠에가 일부러 남긴 것처럼 보이는 레일라의 행방에 관한 힌트를 해석해간다. 결과적으로, 레일라는 '멜리사'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었고 실종 사건은 레일라에게 흑심을 품고 성적인 접촉을 하는 아버지 이언으로부터 레일라를 보호하기 위해 기쿠에가 만든 가장극이었다. 기쿠에가 일본에서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은 정말 자살이 아닌 지병에 의한 것이었지만, 기쿠에는 자신이 숨겨온 비밀에 대한 두려움을 늘 품고 있었고 조카 겐야에게 레일라의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줄곧 단서를 준비해왔던 것이다. 모든 진실은 기쿠에 고모의 노트북을 통해 교코의 존재를 알게 된 겐야가 니코와 함께 레일라의 생사를 알아낸 뒤, '교코'와 '케빈'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밝혀진다. 교코 매클라우드와 케빈 매클라우드는 레일라를 지키기 위한 기쿠에의 뜻에 가담하고 비밀을 엄수해온 지난 날을 겐야에게 털어놓는다. 기쿠에가 레일라를 그리워하며 가꾼 서른 세개의 거베라 화분과 능소화 등속의 꽃과 자카란다 나무, 덩굴장미 시렁이 가득한 정원에서 말이다. (물론, 기쿠에가 이언 몰래 유괴극을 꾸몄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쯤 어쩌면 이언이 레일라에게 성적으로 못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하긴 했다. 줄곧 신사적이고 조용하고 좋은 남편 모습으로 묘사됐던 이언이 진짜로 끔찍한 일을 벌였다고 하니 더욱 놀랐던 것뿐.)


 400억원이 넘는 유산을 상속받게 된 오바타 겐야가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들 허탈할 정도로 선량하다. 겐야는 고모의 어마어마한 유산을 오히려 '불쾌한 기운'으로 여긴다. 고모의 유산을 온전히 자신의 물건으로 취하려는 마음을 애초부터 갖질 않는다. 그는 다만 '기쿠에의 따뜻한 마음'을 랜초팔로스버디스에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기쿠가 남긴 수프 레시피로 수프 사업을 벌이고 랜초팔로스버디스에 1호점을 세우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 계획에는 레일라의 생사를 알려준 사립탐정 니코가 직원으로 있고(그 역시 혹여나 협박을 걱정했던 겐야의 의심이 무색할 정도로 사립탐정으로서 맡은 일만 끝마칠 뿐이다.), 애연가들을 위한 카페를 꾸려가고 있는 여인 제시카가 조언가로 있다. 겐야의 사업 계획 한편에는, 제시카에게 끌리는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앞으로 그녀에게 고백할 계획도 함께 놓여 있다. 미국에서 터를 잡기 위해 준비하는 겐야의 모습은 랜초팔로스버디스에 기쿠에가 남긴 유산과 삶, 그녀가 한때 인생을 걸고 펼쳤던 모험 모두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모든 일(멜리사가 자신의 실제 부모를 알게 되고, 겐야에게 유산을 청하는 것과 같은 일)과 위험을 관리해나가겠다는 다짐으로 보였다.


 레일라의 실종 사건에 관한 거대한 진실과는 동떨어진 한적한 결말이 신기할 정도다. 읽으면서, 미야모토 테루는 처음부터 이런 걸 쓰고 싶어서 펜을 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막대한 유산과 랜초팔로스버디스의 압도적인 풍경에도 불구하고 악의를 품지 않는 인물들, 그저 아름다울 뿐인 연보라빛 자카란다 꽃나무와 거베라 화분, 능소화.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따뜻한 소설이다. 교코에게 보낸 기쿠에의 편지 중에 나온 말 한 마디, '그녀의 묘석으로 살기로 결심했다'는 문장이 깊게 남는다.


 그러나 뜨악했던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교코가 겐야에게 진실을 말해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던 중에 나온 부분이다. 이언이 레일라의 하복부 어딘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은 장면을 목격한 이후 기쿠에는 레일라의 신변을 걱정하면서 '유괴 가장극'을 계획하고 이를 교코와 함께 나누는데, 이렇게 덧붙인다. 여자로서 레일라에 대한 질투심이 생겨날 것 같은 공포가 있다고, 역겨운 걸 알지만 사실이라고. 아무리 소설 속 캐릭터가 한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이 정말 정말 역겹다고 생각한다. 남성 성기를 소유하기 위해 여성들이 서로 싸운다는 프로이트의 고리짝 이론에서나 나올 법한 말인데, 마침 작가가 일본의 남성 작가니 의심가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여성 작가가 같은 소재로 이야기를 써도 이런 대사를 썼을까? 레일라가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고,(레일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이언이 집에 오면 본능적으로 타월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는 피해자 스스로 방어기제를 펼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는 의미다.) 그 낌새를 어머니가 알아차렸다면 느끼게 되는 것은 오직 '공포' 뿐일 것이다. 수많은 감정이 공포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을 뿐, 그 안에 남편을 혼자서 갖지 못한다는 '질투심'이 섞여있다는 가정은 오직 남성 작가만이 상상 가능한 판타지다. 읽는 내내 무난한 별점 4점짜리 소설이라고 여겼지만, 이 부분이 실망스러워 반점 깎은 별점 세개 반 정도의 소설이라고 평한다. 



가스 불에 그 편지를 태우며 기쿠에 씨는 정말 강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편지의 맨 마지막 부분에 추신으로, 레일라는 4월 5일에 죽는다, 나는 레일라 묘의 묘석으로 살겠다, 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그 의미를 저는 조금 전 겐야 씨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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