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프랑스 문단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라는 『복종』. 미셸 우엘벡은 상당히 유명한 작가라지만, 세계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난 이 책을 처음 읽었던 2016년 3월 이 작가를 제대로 처음 인지했다. 그전부터 작가의 이름에 익숙한 기분이 들었던 탓은, 아마도 죽기 전 읽어야 할 책 리스트를 정리할 때 스치듯 보았거나 <미셸 우엘벡 납치 사건>이었던가 영화 제목을 스치듯 보았기 때문일 거다.


 줄거리는 이렇다. 급진적인 좌파 분위기에 휩쓸린 프랑스는 이슬람 이민자들과 서구 유럽 출신들 간의 싸움으로 혼란스럽다. 마침 모하메드 벤 아베스가 창당한 이슬람박애당이 청년운동, 문화센터, 자선단체의 촘촘한 조직망으로 서서히 정치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사건은 2017년 대선 결선 투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박애당과 사회당이 손을 잡아 극우파이자 프랑스 제1당인 국민전선을 몰아내면서, 프랑스 정권에서 반유대적인 성향이 거세지고 팔레스타인을 강력 지지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도적적 관념과 성평등적 관념에 무감한 자유연애주의자 남교수 장프랑수아 코페의 시선에서 그려내고 있다.


 '완전 재미없어서 중간에 덮었다' 식의 악평도 꽤나 있길래 마음 잡고 읽었지만 생각보다 꽤 재밌었다. 오히려 책장이 술술 넘어갈 지경. 미셸 우엘벡 특유의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독특한 만연체' 식 문체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약간의 몇 분을 제외하곤, 쉬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보인다. 다만,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단 주지의 플롯으로 흘러가는 내용이니 프랑스 내 정치적 이슈와 사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국인 입장에선 완전히 이해하기 조금 어렵다.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가 여남평등적 교육 자체에 불필요를 느끼고 있는 남성 보수주의자 경향이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캐릭터를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 프랑스 사회가 이슬람교와 이슬람 이주민들에게 느끼고 있는 불안감과 두려움, 한국 사회에서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페미니즘적 시선, 이 두 가지 사회의 화젯거리를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종교가 더 뛰어난 교리를 지녔나, 어떤 신이 더 위대한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가 같은 논쟁은 감히 결론 내릴 수 없으며 완전히 무가치하다. 다만, 이슬람교가 프랑스 사회를 철저히 바꾸어놓았을 때 그 변화가 정말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표에 따르는 것이고, 이와 동반된 책임은 우리가 냉철하게 짊어져야 할 부분 아닌가. 그럼에도 역시 진저리치게 되는 대목은, 이슬람교 하에서라면 페미니즘과 여권의 한없는 퇴보가 자명해 보인다는 점. 주인공이 이슬람교에 '복종'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대학 총장의 부인들을 보게 된 순간 느낀 호기심과 부러움에서 기인한다는 점. (물론 무슬림 개종 전부터 주인공 프랑수아가 보이는 전형적인 보수 아재 사상과 천재적 합리화에 이미 신물나 있긴 했지만. 근래 본 주인공 캐릭터 중에 제일 맘에 안 들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특히 '여성으로서' 끔찍한 미래 소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정치적 용어를 많이 접하게 됐다. 이를테면 '살라피즘 추종자들'(살라피즘은 코란과 전통 이슬람 규범인 순나에 기초하여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복고주의),'무슬림형제단'(이집트에서 창설된 이슬람 부흥 운동 조직으로 이슬람세계에서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크다. 이슬람 근본주의인 이란의 시아파와 달리 서구에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이슬람 지하디스트'.(이슬람 원리와 이슬람교 전파를 위해 벌이는 투쟁을 뜻하는 지하드 추종자들. 전쟁과 평화적인 방법으로 나뉘는데, 최근엔 폭력적인 세력을 의미하는 용어로 축소된 경향이 있음.) 즐거운 공부도 겸했던 책이다.


내 인생의 학문적 정점은 논문을 준비하고 책을 출간하던 시절이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십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학문적 정점? 혹시 그냥 정점이 아닐까? 어쨌든 당시엔 내 존재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 나의 칼럼들은 명료하고 예리하고 재기가 넘치는데다 마감 기일을 절대 어기지 않았던 만큼,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한 인생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하기는 무엇 때문에 한 인생이 정당화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동물들 전부가, 그리고 압도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당화의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단지 사니까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논리다. 그들은 아마 죽으니까 죽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고민 끝이다. (pp.55-56)

하지만 거리를 배회한 지 거의 한 시간쯤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문득 무엇이 변했는지를 알아차렸다. 여자들이 죄다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의 허벅지를 관찰하고, 허벅지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을 성기를 상상하고, 노출된 다리 길이에 비례해 성적 충동을 느끼는 이 모든 과정이 내게는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일종의 생물학적 현상이었기에 즉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했다. 원피스며 치마가 사라졌다. (pp.215-216)

"아이샤라고, 새로 들인 제 처입니다. 지금쯤 당황해 있을 겁니다. 베일을 두르지 않은 맨얼굴을 외간남자한테 보이면 안 되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 처의 잘못이죠. 로비로 내려오기 전에 혹시 손님이라도 와 있는지 물었어야 했으니까요. 그게 다 아직 이 집에 익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곧 괜찮아지겠죠."
"네, 무척 어려보이는군요."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되었죠." (pp.295-296)

장소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단순히 그곳에서 지냈던 경험에 기인한다. 좋았든 나빴든 상관없이 과거는 늘 아름다우며, 미래 또한 그러하다. 오직 현재만이 힘들다. 우리는 무한하고 평화로운 두 행복 사이에 수반되는 고통의 종양으로서 현재를 받아들인다. (p.325)

"(……) 자연선택은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긴 하나, 그 형태는 천차만별입니다. 심지어 식물한테도 적용되는데, 식물의 경우는 대지와 물과 태양이 제공하는 영양분으로의 접근성과 직결되죠. 인간은, 물론 동물이긴 하나, 들판의 개나 영양이 아니거든요. 자연선택에 의한 인간의 지배적 위치를 결정짓는 건 발톱이나 이빨이나 빨리 달리기 능력이 아니라, 바로 지성이란 얘깁니다. 따라서 지극히 진지하게 말씀드리자면, 대학교수가 지배적 수컷의 위치에 놓이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pp.354-355)

"(……) 무엇보다 이슬람 문명에는 중매쟁이가 생기게 된 겁니다. 경험이 풍부하고 매우 지혜로운 여자들만이 맡는 중요한 직업이지요. 이 중매쟁이들은 여자이니만큼 당연히 젊은 아가씨들의 벌거젓은 몸을 볼 수 있고, 일종의 평가라는 것을 합니다. 여자들의 신체적 조건과 미래의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비례하도록 말입니다. 선생의 경우는 딱히 불만을 가질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제가 보장하죠." (pp.356-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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