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위와 같은 짧은 문장이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을 모두 관통하는 말이다. 책을 완독한 뒤 이 말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가슴이 참 저며올 정도로 아팠다.


 황정은의 소설에서는 늘 가난하고 덥고 가련하며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냄새가 났다. 이 단편집에서는 그 냄새가 <양의 미래> 속 창고의 냉랭하고 습한 바람처럼 불어오는 듯했고, <웃는 남자> 속 오물이 찬 변기처럼 우울하고 생기 없이 들끓다가, <복경>의 화자처럼 웃늠 웃늠하고 소리를 내곤 했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이 기이한 힘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디디나 도도, 명실이나 실리, 오제와 호재 같이 이름조차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을 황정은은 때론 공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해체한다. 황정은의 묘사와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은 나보다 '낫지 않아 보여' 안도하게 되는데, 과연 그들이 '나보다 낫지 않은 걸까' 언뜻 자문하면서 진저리를 치게 된다.


 이 책에서 황정은은 특히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사로잡고 있는 '터널'이라는 유산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문제로 굳이 풀어 말한다면 '가난의 종속'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상류엔 맹금류>에서 제희네 집 벽에 붙었던 크고 작은 액자들, <양의 미래>의 화자가 '가난하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라는 식으로 남긴 메모,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해외여행을 처음 가는 부부가 십 사년 전 계곡에 놓고 온 돗자리나 도시락, <누가>에서 화자가 취향을 강요받는 소음, <복경>의 화자가 가지고 있었던 '정수리는 뾰족하고 뒤통수는 납작한' 가난한 머리통 같은 것이 이어지고 남아있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혹은 철학문제로 풀어보자. 완성되지 못한 유산들은 곧 '하나의 몫도 해내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上行>에서 남동생이 창고에 남긴 곡식들, <명실>에서 실리가 남긴 많은 책들, <웃는 남자>에서 도도가 디디 대신 붙들었던 평범한 가방처럼.


 황정은이 내가 체감했던 것보다도 꽤 많이, 자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그려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단편집에서만 해도 <양의 미래>, <명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웃는 남자> 네 편에서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그들은 애틋하다. 황정은이 그려내는 '슬럼'에서 말라가고 있던 인물들은 사람의 상실로 인해 '변함 없는 현실이 변할 수 있으리란 희망'조차 잃고 문드러져 간다. 나는 그래서 특히나, <양의 미래>와 <웃는 남자>가 아팠다.


 <양의 미래>에서 햇볕의 양지와 음지가 나뉘던 지하 서점 계단이나, <명실>의 명실이 실리를 기다리는 책상과 의자가 놓인 벌판, <상류엔 맹금류>에서 짐승들 똥물에서 자리를 펼치고 밥을 먹는 노부부와 젊은 남자와 여자, <웃는 남자>에서 가로등에 따라 주홍색으로 밝혀지는 '현관과 벽지까지 떨어져 단순해진 집'에서 공중에 대고 침을 뱉었다가 눈썹과 턱으로 떨어지는 침을 받는 남자. 이런 광경들이 오래오래 남아 나를 뒤흔들 것이다.


 내 마음에 가장 깊게 잔상을 남긴 단편 <양의 미래> 속 구절을 마지막으로 첨부한다.

 

 


햇빛은 하루중 가장 강할 때에만 계단을 다 내려왔다. 유리를 경계로 바깥은 양지, 실내는 어디까지나 음지였다. 수많은 형광등 불빛으로 서점은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밝았으나 조도가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뭐랄까, 창백하게 눈을 쏘는 빛 속에서 햇빛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후에, 유리를 통해 노랗게 달아오르고 있는 계단을 바라보다가 저 햇빛을 내 피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중에 채 삼십 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나는 여기 머물고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다 갈 것이다.
_<양의 미래> 중에서.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어. 나는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고 그 문장들은 내가 적은 바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난 뒤에도, 어쩌면 백 년이 지난 뒤에도 말이다.
_<양의 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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