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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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란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이 책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어섰을 때 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스트 셀러를 잘 보지 않는 나에게 이 책은 무수한 책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을 통해 이 책의 독자 후기를 보면서 정말 괜찮은 책인가 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항상 책을 살 때는 우선 관심 분야와 베스트셀러를 찾아본 다음 인터넷 서점의 독자 후기를 본 후 사는 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 책도 그런 순을 따랐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후기를 써 놓은 걸 보면서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일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후기를 쓰는 것을 귀찮아 하기 때문에 좀 괜찮다 싶은 책에도 몇 개의 후기 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후기를 적어놨다는 것은 이 책이 아무리 못해도 독자들에게 아주 작은 교훈을 주었거나 좋은 간접 경험을 하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정말 생각한 대로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특히 우리 현실에 너무나도 딱 맞았다. 어린 토토의 세세한 행동과 상황 묘사를 통해 학교 현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학교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곳이지 순응과 압박감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학교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줘야 하며, 진정으로 아이들의 바람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학교가 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린 토토에게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하게 보였듯이 아이들에게는 많은 궁금증이 있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가끔은 학교 수업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아이들의 창의성, 즉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감시체제로 되어있는 학교가 아닌 해방된 공간으로 아이를 인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 토토에게 이런 공간은 해방된 공간을 뜻하는 지하철 모습을 띤 학교, 그리고 항상 토토의 질문을 친절히 받아주시는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들과의 대화, 그리고 가끔은 자연을 벗삼아 놀 수 있게 해주는 야외수업장이었던 것이다.

또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른들의 시각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시각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토토의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은 근엄하고 무서운 분이 아닌 너무나도 친숙하고 상냥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시다. 항상 호기심 많은 토토의 질문에 어린 토토의 키에 맞춰 허리를 낯추신 그런 분이시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장애인 학생도 급우이며 이 장애인 학생이 학교 생활에 불편을 겪지 않도록 모든 장애인 시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말하고 있다. 정말 우리에겐 꼭 필요한 시각이다.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와 왕따라는 기이 현상이 펼쳐지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시사점을 현재 다 받아들기에는 아직은 너무나도 열악한 현실 때문에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토토의 학교를 우리에게서도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창가에서 항상 무언가를 꿈꾸는 학생들을 볼 수 있길 바라며. . . 토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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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안도현 / 열림원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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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왜 짜장면이라고 책 이름을 지었을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가장 큰 궁금 거리였다. 짜장면을 통해 어린 시절을 회고하자는 것인가? 아님 지금의 어린이들이 너무 짜장면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보다 더 큰 저자의 바램이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안도현이 꿈꿔왔던 꿈꾸고 싶었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회상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과거 동경의 음식이었던 짜장면을 통해 소년 시절 꿈꿔왔던 일들을 책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어른이 읽는 동화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는 것인줄도 모른다.

짜장면을 통해 소년 시절 가출하고 싶었던 일, 마음껏 오토바이를 몰고 싶었던 일 등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만큼은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집의 배달원이 된다. 이 배달원은 저자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는 저자의 마음 속의 최상의 직업이다. 왜 그럴까?

중국집은 가출한 소년에게는 최상의 숙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중국집의 배달 오토바이는 여자 아이를 태우고 멋지게 달리고 싶었던 저자의 바램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자는 구속된 소년 시절로 다시 한번 돌아가 멋지게 이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 인줄도 모른다. 그래서 맞춤법에 구속되어있는 자장면이라는 단어보다는 짜장면이라는 단어를 통해 소년 시절의 바램을 지금이라도 해보고 싶은 저자의 어린(?) 생각이 담겨있는 것인줄도 모른다.

언제나 우리에게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이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저자의 책을 오늘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소년 시절을 회상하며 삶에 구속되어 있는 자신을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보자. 삶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만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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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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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20대의 청년이 된지도 3년이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아주 평범하게 친구들을 사귀고 공부하고 먹고 자고를 매일같이 반복하며, 우습지만 20년이란 세월(?)을 살아왔다. 너무나 평범해서 때론 너무나 비정상적인 생활처럼 보이는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가끔은 일탈을 꿈꾸는 한 어린 인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꿈도 일탈도 어느 덧 모든 것이 허망한 꿈처럼 느껴질 때가 간혹 있다. 여전히 나의 일상은 반복 되고 있고 내게 있어 어린 시절의 수 많았던 꿈들은 점점 사라지며, 오직 치열한 현실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세상을 볼 때마다 가끔 저 깊은 산사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좀머 씨 이갸기>의 소년처럼 주위에 키가 큰 나무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나무 위로 올라가 영화처럼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좀머 씨처럼 끊임없이 동네 근방을 돌면서 '왜?' 라는 단어를 연발하며 때론 빨리 때론 느리게 걸을지도 모른다. 주위의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고 오직 나 혼자만을 생각하며. . . 삶이 너무나 치열해진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는 너무나 작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수 많았던 꿈들을 이제 차근차근 도전해봐야 할 청년 시절에 세상에 치어 가지고 있던 꿈 하나 조차 도전해보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어쩌면 좀머 씨는 이런 세상이 싫어 마을 근방을 끊임없이 걸어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년은 어머니의 잔소리, 피아노의 선생님의 질책, 그리고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려 했던 것처럼말이다.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삶이 아니 세상이 너무나 정상적이지만 그러나 너무나 지독하고 혹독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때론 너무나 정상적이어서 허무한 삶을 표현하고 싶었던 저자는 결국 좀머 씨의 조용한 죽음으로 글을 맺는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차분히. . .그리고 그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삶은 분명 처음에는 느렸다. 그랬다. 그러나 점점 가속화되더니 아무도 겉잡을 수 없이 빨라져 누구도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삶으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삶은 의미가 없어지고 허무해져 버렸다. 아마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는 이런 현대 사회를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는 이 책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주위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길 바랄지도 모른다.

요즘 삶을 좀 느리게 살아보자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도 좀머 씨처럼 이제는 너무나 지쳐 쓰러질 것 같아 지팡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실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20대의 나에겐 아직도 삶은 너무나 정상적인 그러나 너무나 지독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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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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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은 다치나바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라는 생각이 든다. 수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고,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책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의 선택을 통해 그 책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자신에게 의미있는 책이 아니라면, 그 책은 진정으로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모두에게 베스트셀러가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분명 '출판물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항상 잊고 사는 것이 있다. 바로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다. 무엇을 하든 방법론이라는 것이 있다. 책을 고르고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단지 책의 표면만을 통해 그 책을 평가하고 저자의 메시지를 수용하려고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평가와 메시지 수용이 아니다. 책이라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한 책이 되어, 나를 위한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바로 다치나바 다카시는 이런 책을 통한 생각하는 법을 알려준다. 단순히 이 책은 그의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등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바로 우리에게 사고의 틀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서 풍토는 다독을 추구한다. 분명 다독이 중요하지만은 그 다독을 통해 자신을 위한 메시지를 추구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그 책을 통해 자신을 위한 사고의 틀을 확립할 수 있다면, 다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글쓰는 법, 생각하는 법, 지적 생활의 방식 같은 류의 책이 척박한 출판 풍토 속에 이 책은 가장 기본적인 나를 위한 독서를 알려준다. 나를 위한 독서를 통해 나의 사고 방식을 확립하게 하고, 더 나아가 '책은 나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각양각색의 책들 속에 우리는 책을 읽는 의미, 그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 그 의미를 통한 나의 지적 사고의 확립, 지적 사고의 확립을 통한 방법론의 획득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올해 최고의 책으로 추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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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 현대 프랑스 철학총서 11
미셸 푸꼬 지음 / 인간사랑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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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과연 이성의 역사인가? 한번 쯤은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혹은 진보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을. 암흑의 시대인 중세를 넘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 한 없는 동경을 품고 그것을 추구하려고 경주해왔다. 하지만 그 '이성'이라는 단어는 정말 이성적인가에 대해 우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미시 권력론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셸 푸꼬는 바로 이점을 의문시여기고 자신의 평생의 연구 과제로서 이점에 대해 천착해왔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연구 과제를 확대해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 저명한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럼 그 의문점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흔히 우린 '이성'이라는 단어는 사용하면서 '비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비이성적'이라는 말만 사용할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푸꼬는 자신의 박사 논문인 이 책에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바로 이성을 통한 비이성의 타자화이다.

이점을 탐구하기 위해 푸꼬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가 언제,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푸꼬는 16~17세기의 중세 시대에는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중세를 지나 점점 계몽의 시대인 17말~18세기로 오면서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가 점점 나타나면서 권력의 조직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푸꼬는 이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의 핵심인 권력을 수용소의 체계적인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단지 나병 환자들을 위한 수용소에서 점점 구조화된 병원이라는 것이 탄생하고 더 나아가 후에는 권력의 경제적 감시의 용이를 위한 감옥이 생기면서 인간은 언제부턴가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권력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인간의 역사는 이 측면을 간과하고 습관화되어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푸꼬는 이점에 대해서 인간의 비이성을 감추기 위한 이성의 타자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의 역사는 비이성적인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광인이라는 존재의 탄압을 통해서 이성의 역사로 보게끔 만든 것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의사라고 말한다. 앞서 보았듯이 비이성을 감추기 위한 감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의사였다. 광인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의 역할을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치료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성의 존재로서의 의사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이성을 자연스럽게 탄압한 것이다.

즉 푸꼬의 이 저작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성에 내재한 비이성적인 권력의 모습이며 그 권력의 모습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내재화되어 있으면서도 차츰 정당성을 띠며 이성의 이름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비이성의 역사를 이성의 역사로 보는 인간의 왜곡된 시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푸꼬의 처녀작으로서 푸꼬의 모든 지식 체계를 다 담고 있고 이 책을 근본으로 하여 그의 모든 책은 출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책을 읽고 사회에 내재된 권력의 모습을 찾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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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7-30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처녀작은 1954년에 출간된 <정신병리학과 심리학>입니다. <광기의 역사>는 그의 출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