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는 과연 이성의 역사인가? 한번 쯤은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혹은 진보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을. 암흑의 시대인 중세를 넘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 한 없는 동경을 품고 그것을 추구하려고 경주해왔다. 하지만 그 '이성'이라는 단어는 정말 이성적인가에 대해 우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미시 권력론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셸 푸꼬는 바로 이점을 의문시여기고 자신의 평생의 연구 과제로서 이점에 대해 천착해왔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연구 과제를 확대해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 저명한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그럼 그 의문점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흔히 우린 '이성'이라는 단어는 사용하면서 '비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비이성적'이라는 말만 사용할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푸꼬는 자신의 박사 논문인 이 책에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바로 이성을 통한 비이성의 타자화이다.이점을 탐구하기 위해 푸꼬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가 언제,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푸꼬는 16~17세기의 중세 시대에는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중세를 지나 점점 계몽의 시대인 17말~18세기로 오면서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가 점점 나타나면서 권력의 조직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푸꼬는 이 이성과 비이성의 분화의 핵심인 권력을 수용소의 체계적인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단지 나병 환자들을 위한 수용소에서 점점 구조화된 병원이라는 것이 탄생하고 더 나아가 후에는 권력의 경제적 감시의 용이를 위한 감옥이 생기면서 인간은 언제부턴가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권력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인간의 역사는 이 측면을 간과하고 습관화되어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푸꼬는 이점에 대해서 인간의 비이성을 감추기 위한 이성의 타자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의 역사는 비이성적인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광인이라는 존재의 탄압을 통해서 이성의 역사로 보게끔 만든 것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의사라고 말한다. 앞서 보았듯이 비이성을 감추기 위한 감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의사였다. 광인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의 역할을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치료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성의 존재로서의 의사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이성을 자연스럽게 탄압한 것이다. 즉 푸꼬의 이 저작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성에 내재한 비이성적인 권력의 모습이며 그 권력의 모습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내재화되어 있으면서도 차츰 정당성을 띠며 이성의 이름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비이성의 역사를 이성의 역사로 보는 인간의 왜곡된 시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푸꼬의 처녀작으로서 푸꼬의 모든 지식 체계를 다 담고 있고 이 책을 근본으로 하여 그의 모든 책은 출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책을 읽고 사회에 내재된 권력의 모습을 찾아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