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히노 에이타로 지음, 이소담 옮김, 양경수 그림 / 오우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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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


[★★★☆]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2017. 1. 12 ~ 2017. 1. 14 완독]





 삶은 남들과 똑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가장 어울리게'가는 것이니까!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꼭 직업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가?

p98


 정말 신성한 거죠. 인간에게 삶이란 결국 노동을 통해 가능해지는 거니까요. 하지만 누군가 "노동은 신성한 것이니 우리는 죽을때 까지 최선을 다해 노동을 해야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신성한 노동을 노예 노동으로 바꾸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中 p18>



 어떻게 보면 대한 민국의 슬픈 클리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냥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한 만큼만 달라는, 무려 법에 상세하게 적혀있는 의무를 다해달라는 의미인데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삶을 지탱하는 신성한 노동의 보상이 '내 삶을 풍족하기 위한 재화'를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의 보람을 찾자'라는 구호 아래 교묘하게 획책되어 왔다.


 이러한 점을 고치기 위해 전태일과 같은 수많은 노동자가 피와 땀을 흘렸고 현재에 다다르게 되었다. 어떤 어른은 얘기 한다. 예전에는 인건비가 저렴해서 사업을 일으키기가 좋았는데 요즘은 비싸서 사업을 하기 쉽지 않다고 말이다. 가만히 듣다보면 '아~ 예전에는 사업을 할만했구나...'라는 생각 와중에 '그러면 예전에는 노동자 지금보다 올바른 대우를 더 받지 못했다는 소리가 아닌가?'를 깨달았다.


 정당한 일에 대한 댓가를 주고 받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던 자신은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갈아넣어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식은 분명 잘못되었다.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가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고 (아마 불법체류나 서류상의 문제로 인해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분들이) 저렴한 노동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분명 이러한 점도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회사는 야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p19


 '일하면 정당한 댓가를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지극히 당연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p18)는 작가의 말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개개인이 나서서 고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내가 돈을 주지 않으면 어디서 니가 돈을 벌거야?'라는 고압적인 자세의 (일부?) 사용자와 추가적인 업무를 당연하게 여기는 시스템에 물들어 버린 주위 고용자(노동자)로 인해 우리는 매일 매일 야근에 시달리고 시간에 허덕인다.


 잠깐 생각해봐도 개개인의 힘이 미치기 힘든 큰 문제이다. 당연하게 되어야 할 퇴근 시간이 칼같이 제시간에 퇴근하는 칼퇴근이 되어 주변 동료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되고, 이전에 며칠안에 끝나지 않을 일을 퇴근 시간이나 마감 하루 전날에 던져주면 당연히 시간에 쫓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두사람, 세사람이 해야할 일을 한사람에게 몰아주는 '사람을 갈아넣는' 비정상적인 노동의 구조,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라!'는 고압적인 자세의 사용자와 일은 그만 둬서 막상 이직할 길이 막막한 유연하지 않은 노동 시장, 고용 안정성 등은 야근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인생의 레일이 딱 하나 뿐이고, 그 레일을 벗어났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어려워 진다면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대부분 달력에 평일이라고 표시된 날에는 예외 없이 전부 출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전제로 계획을 세운다.

p28


 여기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만드는 과정부터 순탄지 않을 것이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는 대표는 분명 인사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해질 것이다. (아 여기서 노동조합에 폐해는 다루지 않겠다.) 상부가 하부를 쥐어짜내어 것은 '성과'라는 이름 아래 감춰지고 이러한 일을 감독해야 할 국가는 침묵하거나 동조한다. (사실 사명감을 가지고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분도 많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불합리를 자신의 몸 속 깊숙하게 받아들이는 의식을 '사회인'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회인으로 상식이 없어!"라는 말은 왜 이러한 일에 니가 뭔데 의문을 가지지? 불합리 하면 다른 일을 찾아! 라는 말을 하고는 하는데, 그럼 당신이 한달에 갑자기 100만원만 받고 '회사 시스템이 바껴서 이제 이렇게 줄거야'라고 하면 가만히 있을 것인가? (오 ~ 그래 능력이 출중해서 서로 모셔 가려고 할테지?) 대부분 아닐 것이다.


 매일같이 '선진국은 이렇게 한다.'라며 좋아보이는 시스템은 모두 도입하려고 하면서, 진짜로 필요한 노동에 관한 공부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급여 담당자도 헷갈려하는 월급 계산 방식을 시스템에 맡겨 버리고 '회사를 믿어라!'라는 말은 틀렸다. 당연히 계약서에 명시된대로 월급을 깔끔하게 줘야하고 의문을 가지면 답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불합리한 노동은 법을 뜯어 고쳐 더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진짜 '선진국'이고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부 반대로 하고 있다는게 문제지만...)



 쩝... 슬프다. 실업률은 매년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안정성은 떨어지며, 그 일도 비정규직/ 인턴으로 싸게 부려지고 있으며, 이 모든 정글을 지나 삶의 내리막에 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싶이 하니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 할까?


 '야근'은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와 동시에 벌어지는 노동 폭력이라고 해야겠다. 제발, 모두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려고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하는 이유가 이러한 법을 만들고 고치고 하는 일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리더가 될 수 없다. 소수의 사람 빼고는 모두 어딘가에 고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노동법'에 대한 교육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복잡하더라고 기본은 알고 있어야지...



 높은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업원이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어 문제야.


 책은 노동에 대한 인식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상한 의식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장사를 하는 사람이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친절한 것은 영업 전략이자 상도덕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는 사람이 '항상' 친절하기는 힘들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 줬으면 싶다. 백화점에서 하루 종일 미소짓는 노동자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는 근래에 들어 '감정 노동'이라며 논의가 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간의 예의를 어느 정도 지켜주자는 말이다. 적당한 선을 지키면 서로간에 감정이 상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거든. 노동에 대한 다양하지만 당연한 측면에 대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쿨함을 장착한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는 슬픈 우리의 자회상이라 하겠다.


 당신에게 묻는다.

일을 위해 사는 삶이 옳은가?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가 기준이 아니라 나의 평가 기준이다. (중략)

내게 가치관을 강요하는 회사도 상사도 동료도 어차피 타인이다.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는 인새의 최대 낭비다. 자신의 가치관에 솔직해지자. 좀 더 나 자신을 위해 살자.

p166

 '무이야, 다 뻔한 소리 잖아'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세상을 아주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이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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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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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보헤미안 누나로 돌아온 그녀]


[2017. 2. 4 ~ 2017. 2. 7 완독]





  "봐봐, 봐바. 저기 저 이상적인 집 말이야. 텔레비전 드라마 장면 같아. 비정상 아냐?"

- 사노 요코의 아들 -

p48


 인연이 닿아 '사노 요코'라는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었었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내게 있어서 독서는 '선택 - 감상 - 정리'의 순서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떠한 사정이라도 '정리'가 되지 않으면 '책을 봤다'라고 잘 얘기하지 않는다.


 한창 책에 푹 빠져 있을 때 노트에 정리한 것을 다시 한번 곱씹으면서 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머릿속 책장에 정리가 잘 되는 기분이랄까? 감상까지만 하고 노트에 잠들어서 정리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책은 이 책장에 꼽히지 못하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모양새라... '언제 주워서 정리하지?'라는 기분이 팍팍 든다.




 융자란 멋지다. 그게 뭐든 멋지다. 인생의 앞날은 모르지 않나. 융자란 멋지다.

p97

 "언니, 언니,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운전할 줄 알고 책 좋아하는 여자는 전부 이혼했어, 내가 아는 범위 안이긴 하지만."

p289



 '아무리 생각해도 본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해서 블로그를 뒤지니 <문제가 있습니다>의 저자였다. 어쩐지 책에서 풍겨나오는 시니컬함이 느껴진다 했다. <문제가 있습니다>가 작가의 유년기를 위주로 쓰여졌다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중년의 사노 요코가 쓰여진 책이다.

 

 결혼도 했었고, 이혼도 했었고, 아들도 있으며, 책을 열심히 읽으며 빈둥빈둥 나태한 그녀는 이웃집 누나에서 '보헤미안 누나'가 되었다. 나라면 숨기고 싶어했을 가난을 '가난한 운명은 쾌락이었다.(p14)'라며 시니컬한 태도로 넘겨버리는 그녀는 정말 멋졌다.





 나의 친구가 무서운 말을 한다. "절세 미녀란 건 시대에 따라서 변해 왔을지 몰라. 하지만 절세 추녀란 건 어느 시대에도 결코 변하는 일이 없을 걸."

p126


... 와... ㅠㅂㅠ



 아니 어쩌면 그냥 내 마음과 같았다. 그저 그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어쩌면 평범한 그녀의 삶. 인테리어 잡지에 大흥분하고, 좋아하는 취미인 책을 열심히 보며, 모두가 바라는 방바닥에서 뒹굴뒹글 거리는 아주 일상적인 삶이 재미있다. 분명 나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도 그러할 터인데 남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다니 조금 아이러니 하다.


 아니면 일상적인 삶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그녀의 시선이 재미있어서 랄까? 그래서 그녀의 글은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항상 자유로운 기운이 느껴져서 좋거든.. 냄새도. 중년이 된 그녀는 분명 어릴적에 하지 않은 영화, 외국어, 여행에 도전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나는 오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에서 그녀를 만나고 또 즐거워했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미지가 조금 깨지는 즐거움이다. 혹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마주하는 즐거움이다.

p289


 나의 독서는 그저 심심풀이다. 나는 따분함을 못 참는다. 하지만 타고난 게으름뱅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음이 분주한 쪽을 선택하고 만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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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 자유로운 예술 정신으로 삶 바라보기 아우름 19
한상연 지음 / 샘터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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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삶은 예술이다!]


[2017. 1. 17 ~ 2017. 1. 18 완독]


[샘터 물방울 서평단 활동]





 "그럼요. 당신도 예술을 할 수 있죠. 우리는 모두 이미 예술가 인걸요."

p6


 '예술'이라는 단어는 어렵다. 기껏해야 미술, 음악, 피아노 따위를 배웠던 학창 시절이 내 예술적 삶이 자리했었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 위대한 건축, 그림, 조각을 봐도 '와~ 좋다!!' 이외의 다른 감상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비루한 예술 감각에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라는 제목의 책은 읽기가 좀 거북하다.


 예술과 몇 발자국(더 많이?) 떨어져 있는 나에게 작가는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본디 네 멋대로 하는거야!(p9)"라며 예술은 재미있는 놀이라고 얘기한다. 물론 예술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놀이만은 아닐 것이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짊어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중압감과 고된 노동,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굳건함이 있을지언데 '단순히 놀이'라고 치부하기는 죄송스럽다.


 


 정말 신성한 거죠. 인간에게 삶이란 결국 노동을 통해 가능해지는 거니까요. 하지만 누군가 "노동은 신성한 것이니 우리는 죽을때 까지 최선을 다해 노동을 해야한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신성한 노동을 노예 노동으로 바꾸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p18


 작가는 예술의 정의, 당위성,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고대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예술'의 순수한 본질에 대해서 말해주려 한다. 예술은 자유로운 것, 삶의 자유와 즐거움이 여러 가지의 도구로 발현되어 온 모든 것을 통틀은 것을 말한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인 '삶의 주인'이 되려면 자유와 즐거움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삶을 보존하고 증진시켜온 '노동'이라는 신성한 단어를 바탕으로 자유와 즐거움을 무기로 자신의 삶의 질을 가꾸어 '나'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훌륭한 도구가 '예술'이라고 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이러한 발언은 예술을 직업으로 하고있거나 없어도 '자신의 삶을 찾는다'는 여정의 시선으로 본다면 전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삶 = 예술'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나도 한번 '예술'을 해볼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술은 직업적인 예술이 아니라 직업과 무관한 예술입니다.

p122

 아무튼 난 살며 사랑하고 싶어. 그냥 모든 걸 긍정하면서 말이야.

p193








<쓰지 않은 책 속 한마디>



- 사실 무엇이든 위대한 것은 틀을 깨려하는 특징이 있죠. 틀을 파괴함으로써 놀람과 경이의 대상이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틀로도 가두어 둘 수 없는 삶과 존재의 힘에 눈뜨게 합니다.

p34


- 정답이 정해져 있는 공부를 하노라면 다양한 가능성에 의해 열려 있는 마음이 위축되기 마련이니까요.

p55






+ 이 리뷰는 <샘터> 물방울 서평단 활동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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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습니다 - 때론 솔직하게 때론 삐딱하게 사노 요코의 일상탐구
사노 요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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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습니다]


[옆집 노는 누나]


[2017. 1. 27 ~ 2017. 1. 29 완독]


[샘터 물방울 서평단 활동]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상상 속의 미래가 현실이 되었고, 어느새 현실이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p16


 생각보다 사노 요코라는 작가가 활동했던 시기가 일제강점기 까지 가는 줄은 몰랐다. 이미 작고(作故)를 했지만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너무나 젊은 아우라를 뿜어내기에, 세월을 반추하는 글을 보더라고 기껏해야 중년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개인이 느끼는 시간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인가? 작가는 작가의 시간을 살았고 나는 나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는 먼지와도 같은 사람의 삶이 친밀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비슷하기에, 죽은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의 아픈 기억이 있을 때라도, 일본인이라도 삶은 삶이었다.


 

 "진게 아니라 끝난거야"

 "진게 아니니까 이긴거야"

 "끝났으니까 이긴거야"

p29


 수많은 삶을 기록한 에세이라는 장르에 '전쟁'이라는 소재는 소재 자체로 봤을 때는 독특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극한의 상황으로 기억되는 그 시대에, 더우기 일제강점기라는 때에 한국인의 심정이 아닌 일본인의 심정이라니. '전쟁 中'에서 '전쟁 後'에 이르는 작가의 유년 시절의 기억은 '끝났을 뿐이지 진것이 아니다'는 그 시절의 기억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나에게 씁쓸함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세대를 초월해서 가깝게 느끼다가 갑자기 멀게 느껴졌지만 '전쟁'이라는 기억을 덜어내면, 수없이 빌려 읽었던 책과 끝없는 느긋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활자만 읽으면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젊은 애들이 듣지도 않으면서 계속 음악을 틀어놓는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까 배경 음악 같은 것이다.

p148

 인격이 고급스러워지는 것도 교양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때 그때 놀라고 싶을 뿐이다.

p149

 책을 읽으면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채 죽어간다.

p151



 읽었던 책을 또 읽고 또 읽으며, 그것도 아쉬우면 활자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책을 보지도 않으면서 일단 사서 집에 쌓아두는 책벌레면서 '책은 읽지마!'라고 외친다. (웃음) 자신이 책을 읽은 것은 오직 스스로의 재미를 위할 뿐이지, 인격 성찰을 위한 깊은 사색이나 세계 평화 따위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대목에 가서는 작가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물론 죽은 뒤에 만날 수 있겠지)


 특히 "잠옷 목둘래 안쪽을 살짝 핥는다. 짠맛이 느껴지면 세탁한다. 그런데 매일 짜다."(p200)라고 말한 구절에서는 옆집에서 배를 벅벅 긁으며 만화책을 보고 있는 사촌 형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몇몇 구절 때문에 멀게만 느껴졌던 작가가 어느 순간 보고 싶어졌고, 바로 옆에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니 참 신기하다.


 하찮은 젊음이 부럽고 책을 보는 대신에 나가서 열심히 놀걸 그랬다는 작가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에세이로 자신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를 만나니 미처 알지 못했던 '에세이'의 매력이 느껴진다.



 친구야, 빨랑빨랑 일하면 나는 부자가 돼. 죽을 때 돈이 남아 있으면 어떡해? 아깝잖아.

p202

 죽어서 염라대왕이 "이름은?"하고 물으면 "엇?, 누구 이름요? 저요? 까먹었어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p264



+ 이 리뷰는 <샘터> 물방울 서평단 활동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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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니 - 옛글 57편이 일깨우는 반성의 힘 아우름 18
김영봉 지음 / 샘터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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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니]


[당신은 어떻게 살기를 바라나요?]


[2017. 1. 23 완독]


[샘터 물방울 서평단 활동]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어떠한 사상, 신념, 꿈, 방향 등 모든 것이 각자가 다를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는 '끊임없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에 대해 말한다. 바로 '정도(正道)'이다. 누구나 다 말한다. 나는 겸손하며 융통성이 있으며, 남을 배려하고 매일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등의 높은 도덕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쉰 살이 되어서 사십 구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

p16

 수많은 사람이 정도(正道)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은 그러한 삶을 살리라고 호언장담을 하는 것을 보는 재미있다. 대부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도의 정반대에 서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짜 정도(正道)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엄격한 감독관이 되어 매일 반복되는 생각과 행동의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남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집중해서 찾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는 기인(奇人)들이다.




 옛사람이 물을 백성에 비유하고 배를 임금에 비유했는데,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능히 배를 뒤집어 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p113



 나는 어떠냐고?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이 아닌가! 나는 높은 도덕성이나 정도를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깊은 질척한 어둠에 몸을 깊숙히 묻고 찬란하게 빛나는 기인(奇人)을 어설프게나마 흉내낼 뿐일 것이다. 겨우 몇가지 장점으로 내가 가진 수만가지의 단점을 덮을 수는 없지 않은가?

 초등학교 '바른생활'이라는 얇디 얇은 책이 알려주는 올바른 길은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엄청 멀리 있는 것 같다. 인간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본질이 정도(正道)라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인디언이 들려주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두 늑대는 나의 마음 속에서 비등비등한 힘으로 치열하게 싸우는데,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 항상 이길 것이라는 이야기. 항시 나쁜 마음을 경계하고 착하게 살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오래된 이야기가 좋기는 하지만 나는 진짜로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을까?


 정말로 뒤로 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 찾아 왔을 때, 나는 올바름을 부르짖을 수 있을까? 그 때가 오기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지켜야할 것들이 많아지면서도, 나의 행동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면 과연 올곧게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만이 있을 뿐, 역시나 모를 일이다. ​


​ 인간은 신이 아니니 완성된 단계가 있을 수 없다.

p20

"말라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아무리 산하의 좋은 형체를 차지하고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후손을 잘 되게 할 수 있겠는가?"

​p166

+ 이 리뷰는 <샘터> 물방울 서평단 활동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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