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성, 하나님, 결혼 - 성경이 말하는 결혼과 남녀 관계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아토르]에서 출판된 많은 책들 중에서, 특별히 브루더호프의 에버하르트 아놀드와 그 손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책들을 리뷰할 수 있다는 점은 내게 있어 신이 나는 일이다. 이전에는 읽어보다 나의 생각과 다르다 느껴지는 책들은 리뷰를 고사하거나, 비평이라도 해달라는 부탁에 마지못해 동의하는 부분을 찾아내느라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 신간 <성, 하나님, 결혼>을 리뷰하기로 결정하고 책의 서문을 읽는동안, 다시 한 번 그러한 고생이 재현될까 잠시 고민했다. 왜냐하면 저자는 서문을 통해 "오늘날의 성과 결혼에 대한 문화는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부분에서 나 또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서와 양심을 가지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잘 살아내면 성과 결혼이란 부분에서 하나님께 칭찬받기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던 내 기대가 낙제점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낙제점이 절망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저자의 진지함과 한결같음"으로 인해 이 책을 읽는 시간은 흥미로웠다. 돌이켜보면, 가벼운 만남을 추구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의 만남을 응원하더라도 나의 개인적인 사건들에서는 가벼워지고 싶지 않았다. 저자는 이러한 태도가 "개인의 차가 아닌, 하나님과 우리의 모습을 기록한 성서에 기반을 둔"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닮는, 선물로 주신 성을 훼손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이 공감하면서도, 도저히 현실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40여 년을 자신의 절반이라 표현한 '버레나 아놀드' 여사와의 관계를 이어오고, 수많은 상담자들, 특히 성과 결혼에 대한 고민을 지닌 이들을 상담해 온 그의 입장을 20대의 내가 오롯이, 또한 밀레니엄 세대의 입장으로 전부 받아들이긴 어려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나는 저자의 진실한 서술로 인해 뜨거운 화두인 동성애, 낙태, 혼전성관계, 이혼과 재혼 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인정한다. 그의 입장은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며, 무엇보다 공동체를 사랑한 지난 시간과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화두에 있어서 꽉 막힌 자세를 고수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의 최대의 장점은 뒤이어 이어지는 '스터디 가이드'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존 스토트' 신부의 글들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의 글들은 항상 맺으며 생각해 볼 점들을, 토론할 내용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신간 <성, 하나님, 결혼>에서 제공해주는 기쁨과 유사하다.


모든 부분에서 동의를 구하긴 어렵다. 여전히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주장이 이전 세대가 우리에게 충고하는 고리타분한 성/결혼관일 수 있다. 마치 내가 서문을 읽으며 이 책의 리뷰를 진지하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그 이유는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저자의 생각이 지나치게 전통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나의 이러한 생각들 속에서 여전히 좋은 공동체, 곧 하나님과 상관있는 공동체를 열망하는 마음이 있기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충고는 더 좋은 남성이 되고자,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이 되어 가정과 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꾸려나가야 하는데 가치있는 이정표로 다가온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들을 수 있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자체가 "브루더호프"로 부터 이어져 온 공동체의 덕목이 아닐까 돌이켜 보며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이라는 예배 -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선교는 설거지부터

 

이 문장의 출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일상적인예배의 순서인 설교 가운데 들은 수많은 문장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문장을 참 좋아한다. 선교에 관심이 있어서 이른 나이에 신학부에 들어갔고, 지금은 신학대학원에 다니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로잔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러한 활동들 이상으로 내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것이 선교를 위한 기반이자 그 자체로 선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가 복음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선교를 위한 걸음을 걸어간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선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이라는 예배를 살아가지 못함에도 주일(일요일)과 주중에 있는 갖가지 예배를 드림으로 예배자로 불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성과 속의 갈림길 속에서 과연 누구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

 

오늘의 책 <오늘이라는 예배>의 저자 티시 해리슨 워런은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성공회 신부/사제이다. 개인적으로 고든 콘웰을 졸업한 여러 아시아권 목회자를 알고 있는지라 그들의 사역이 예전과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저자에 대한 소개는 이쯤하고, 신간을 받아들고서 찬찬히 책의 외관을 살펴보았다. 전면 표지에 위치한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라는 물음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특별히 나는 저자가 남편 조너선에게 건내는 이 물음(내 사랑, 내친구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속에서 이 책의 백미가 담겨 있음을 확신했다. 흔하디 흔한 안부의 인사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반려자에게, 또한 가족에게 뱉는 이 안부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예전의 주관자이신 주님을 떠올릴 수 있다. 그 분은 진실로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시고, 우리의 삶을 부르시고 계신다.

 

책의 차례를 보자면 하루를 11단계의 과정으로 나누어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다시 잠을 청하는 때까지 세세하게 나누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 단계들 마다 저자는 (친절히도!) 그 단계에 맞는 예전의 순서를 새겨놓았다. 나는 노동이 기도라는 말을 되새기며 매 행동을 기도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나의 일상의 순서들 또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전의 모습임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저자 앞에서 사소한 하루의 연속은 비극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축복의 통로임은 분명했다. 비록 저자처럼 함께할 반려자와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열쇠 분실단원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맞다. 처음에는 이 단원의 제목이 흥미를 자극했다. 개인적으로도 열쇠를 분실하는 것은 일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예전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하는 흥미를 유발했다. 더군다나 내용의 전개는 놀랍도록 나의 일상과 유사했다. 열쇠를 분실한 것을 안 순간, 어디서 열쇠를 잃었을지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왜 잃어버렸는지 자책하며, 감출 수 없는 짜증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하곤 했다. 하지만 그 짜증의 끝은 꼭 찾고 싶다는 절박함이 닿아있다. 이러한 모든 시도들은 마지막 몸부림처럼 처절하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상황은 절망으로 다가온다. 일련의 과정을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흐르면서 깊은 공감을 불러왔다. 그리고 혹시나 이렇게 절망으로 마치는 것인가?” 책장을 서둘러 넘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조함의 감정이 향한 종착은 바로 나의 내면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p.82을 할애하여 이야기 한다. “오늘 잃어버린 열쇠는 나의 내면이 길을 잃었음을, 내가 잘못된 것에 의존했음을 드러내는 계시의 순간이 된다.” 하루의 가장 불행하다 여겨지는 시간이 사실은 우리의 하루를 의미있게, 나아가 거룩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역설인가! 그리고 그 역설이 결국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힘이 되는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서평을 적어내리는 하루가 사소할 수 있다. 여느 날처럼 서재에 들어서서 누르는 데스크탑의 전원, 의자의 좌우에 빽빽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문-신학 서적들 속에서 과연 나는 거룩하다 일컫음 받으시는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을까? 과연 나의 삶은 그 분께 드리는 거룩한 예전이 될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가 사소하고, 우리의 생각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을 살아낸다. 그리고 그 분 안에서는 영원한 삶이 있다는 약속은 우리의 하루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소한 나날들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일부라는 거룩함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의 사소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바뀌는 일은 바로 오늘일어나는 기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 상처 회복하기 - 상처 주는 가족 경험의 순환고리 끊기
로버트 맥기 외 지음, 권은혜 외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3월의 마지막 날 출판된 [가족 상처 회복하기] (로버트 맥기, 팻 스프링글 외 저, 권은혜, 선정현 외 역, CLC, 2019)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 상처를 가슴에 파묻고만 사는 시대에 올바른 가족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상처 회복이라는 처방전을 내려주는 가정 주치의다. 처방전에 따른 치료 과정 또한 전문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은 열 두 단원의 대단원과 각 단원 당 5일간의 내용으로 구성 해두었다. 그 덕분에 평일 5일을 할애한다면 약 3개월 동안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가족 상처 회복을 위한 작전 계획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상처는 순간적이든 지속적이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낸다. 무엇보다 이러한 상처는 사람을 계속해서 그 기억과 상태에 머물러 성숙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제한을 준다. 나이는 들어가고, 우리의 육체적 성장은 진행되고 있음에도, 우리의 정신적 상태는 여전히 상처를 받은 그 때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개인과 우리에게는 큰 아픔이자, 공동체와 이 사회에서는 커다란 손실이다.

 

매일 30분내지 1시간의 공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서문처럼, 이 책의 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 나는 지난 10여일의 기간을 (학업 및 사역과 함께) 이 책의 지시를 충실히, 또는 끈질기게 따라가고자 애썼다. 사실 이 책의 지도를 받으며 느낀 점은 몰아서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이 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밀렸으면 어떻게든 그 시간을 채워서 비워진 자리를 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해야 하지만, 오히려 이런 부담감이 이 책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에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진행하고자 노력하였다. 반가운 점은, 이 책의 저자 또한 이러한 과정의 목적은 삶의 변화이지 빨리 읽는 것이 아님을 기억”(p.12)하라 권면하고 있다.

 

매일 해당하는 페이지들을 넘기며 흥미로웠던 점은 페이지의 빈칸을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각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에 원인결과로 코멘트를 달거나, 해당 단어에 동그라미를 그려넣는 등 능동적인 참여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며 해당 부분만 밑줄을 긋고, 계속 되뇌이며 암기만 주구장창 하는 것이 아니었다. 책은 계속해서 내가 자신들의 방식을 잘 따라오고 있는지 물어주며 차근히 이 과정을 이어갈 수 있는 용기와 관심을 주었다. 무엇보다 넓은 페이지 덕에 본문 옆 빈 공간에 나의 생각이나 본문에 대한 정리, 기도 등을 메모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장점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전에 상한 감정이 떠올라 적어두고, 또한 상처를 줬던 그 사건을 세세히 적는 모든 활동이 그 자체로 이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좋은 조건이자 과정이었다.

 

이 책의 뒷 표지에는 이런 문단이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 “SKY 캐슬속 자녀들의 아픔과 고통이 나의 아들, 딸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으로 그들을 치료해주세요.] 가족이란 이름이 무한 경쟁 사회의 동력만을 제공하는 집단으로 전락한 이 세대의 슬픔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의 가족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족 안에서의 상처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에 우리는 오늘 이 책의 세세한 손길 속에서 하나님을 떠올린다. 모든 가족들의 상처를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함께 아파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함께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웨슬리의 일기 세계기독교고전 3
존 웨슬리 지음, 김영운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상의 치열함이 곧 순종입니다.” [존 웨슬리의 일기] 서평

 

존 웨슬리의 생애를 알고 싶어서 그의 이름이 보이기만 하면 책을 구입하여 목차를 뒤적이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그의 저작 보다는 설교에서 그의 사상과 업적을 봐야한다는 선배 신학도들의 이야기에 막연한 절망감(다른 신학교들은 마르틴 루터나 요한네스 칼빈의 저작을 바탕으로 배우고 있던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인생이지만서도, 오늘의 책 <존 웨슬리의 일기>(존 웨슬리 저, 김연운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9)를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아쉬움이 가득하기만 하다. 왜 나는 일찍이 이러한 웨슬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의 설교와 편지에서 오는 담백함을 맛보았으면서도, 존 웨슬리의 자전적 이야기, 곧 일기로 살펴본 그의 일상은 오늘 파트타이머 전도사로 살아가는 나의 일상과 평행선에 놓고 살펴볼 수 있음은 굉장한 행복임을 감출 수 없다. 특별히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내가 속한 성결교회의 교리적 기틀을 제공한 존 웨슬리였기에 나는 그 누구보다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

 

존 웨슬리의 일기는 1735년부터 시작하여 1790년 마치는, 50여년의 기록이다. 최근에는 100세 시대라는 표현도 이전의 이야기일 정도로 생명연장의 시대를 살아내는 우리지만, 존 웨슬리의 시대상을 보자면 50여년의 일기는 사실 그의 인생의 전반을 기록한 내용이다. 목차를 보고서 가장 관심이 있던 내용부터 살펴보았다. 이 책의 3장에 수록된 온 세계는 나의 교구는 내가 웨슬리가 했다는(사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먼저 주창한 것을 앎에도!) 많은 말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공교회라는 표현으로 말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이들에게 존 웨슬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꺼이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이 온당하고 정당하며 나에게 허락된 의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p.86-87)”고 대답하며 자신이 전도집회를 행하고 온 영국을 두루 다니며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곧 기회를 얻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할 뿐이라는 확신을 일기에 담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계획한 일이 번번이 가로막히는 절망감 속에서도,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기억하고 이를 일기를 통해 다시금 다짐하는 존 웨슬리의 모습은 SNS세대인 나의 일상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일기라 생각할 수 오늘날 많은 감리교회와 감리교인들, 성결교회를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저작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오늘을 돌아보며, 오늘의 신간에서 본 존 웨슬리의 치열함이 나의 SNS를 넘어 삶의 치열함으로 적용되는 분기점이 되길 기도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한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이었지만, 아렌트의 삶을 세 번의 탈출 경험이란 타이틀로 적어냈다는 점은 아렌트의 저작을 구입하고도 아직 못 읽은 이들에게나,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알고자 하는 이들, 이미 그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이지만 더욱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의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