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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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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했고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겠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알게 된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도 책을 읽으며 느꼈던 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누군가 역시 타인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서.

 

 책에는 ‘2020년의 서연씨는 1998년의 미스 김이 부럽다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서연씨는 저자에게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야기를 꺼내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영화가 1995년 얘기거든요. 무려 25년 전인데 거기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직원들은 파견이나 계약직이 아니라 전부 정직원인 거 알고 계셨어요?” 영화는 8년차 직장인임에도 잔심부름이나 하며 진급 걱정은커녕 결혼하면 짤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그 시대의 고졸 여직원들을 조명한다. 분명한 차별의 색에서도 차별을 겪고 있는 서연씨는 그래도 정규직이었던 당시의 미스김들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그의 표정과 말투와 아쉬움이 그대로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느끼고 지었을 마음과 표정이 느껴져서였다.

 

 첫 취업이 어려웠듯이 정규직 직장 경력이 있음에도 이직 역시 잘되지 않았다. 수도권 대학의 문과를 나온 나는 순진하게도 꿈은 이루어진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같은 말을 마음에 품고 자라왔지만 무엇도 잘 되지 않았다. 경력 없는 신입의 처지일 땐 경력이 없어서였고, 경력을 조금 쌓았을 땐 경력이 모자라서였다. 첫 직장 생활은 집과 먼 타지에서 시작했고, 두 번째 직장은 1년 계약직이었으며, 지금은 다시 긴 공백기 끝에 일주일에 36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자리의 채용 응시 과정 중에 있다.

 

 두 번째 계약직 자리를 얻기 전 10개월의 계약직 자리 면접 경험과 3개월짜리 파견직 자리 면접에 임한 적이 있다. 소위 말하는 대기업 혹은 대기업급의 기업들이었다. 그중 파견직 면접에 임하기 전에 겪었던 일들을 잠시 말해보고자 한다. 최저임금을 주는 일종의 알바와 같은 자리임에도 대기업에서의 경험을 쌓을 수 있단 생각 때문인 건지 면접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2~3 군데 파견 업체들마다 열명 남짓한 면접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내가 지원했던 그 파견 업체 직원은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예의를 잘 지켜야 한다는 당부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원자들보다 더 간절해 보이던 그 직원은 초조한 표정으로 뻔한 말들을 하다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을 하나 했었다. 면접에 들어가면 ‘‘절대언제부터 출근하면 되는지같은 질문을 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출근일 같은 건 정해져 있다는 말을 이유로 들었는데 그 말에는 절대 질문하지 말고, , 예만 하라는 즉, 을을 넘어선 병정무의 자세를 잃어선 안 된다는 숨은 의도가 담겨있었다. 지원자로서 당연히 알고 싶을 만한 것들을 궁금해하지 말라던 그 사람의 간절한 말투와 표정을 보며 파견 업체 직원들의 절실함을 보았다. 그 한 분야의 파견직 채용에만 네댓개의 파견업체가 달라붙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저들은 이 채용이 성공하면 얼마를 받길래 저렇게 간절한 자세로 지원자들에게 병정무의 자세를 부탁하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어쩌면 모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을 했던 건 계약직이 수두룩했던 직장에서 서로의 월급을 모르면서 일하고 싶었으나 그걸 밝히기 원하는 몇몇에 의해서 다른 이들의 월급을 알게 되며 쓰라렸던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월급은 제각각이었다. 출신 대학, 직장 경력, 하는 일에 따라 고만고만하면서도 달랐던 액수 때문에 마음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면 숫자를 갖고 장난친 것 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에겐 지급되는 수당이 누군가에겐 지급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또 책에 나온 100인의 월급과 중간착취 액수를 본 후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뇌었다. 월급보다 중간착취 액수가 많은 것도 문제였지만, 박영수(가명)씨의 경우 월급이 300만원인데, 중간착취액은 700만원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정말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내 노력의 대가가 내가 아닌 타인에게 더 많이, 아니 배 이상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실을 알고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분노했지만 곧 분노는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불공정, 불공평함 앞에서 흔히 겪는 과정이었다.

 

 책에는 몇 번씩 이런 표현들이 묘사된다. 불공정함 앞에서 분노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이들이 쉽게 이해가지 않았다고. 저자는 그런 이에게 관대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다. 그들 역시 분노했을 것임을 그리고 그 분노 끝에 찾아온 불안과 무기력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버둥쳤을 것임을. 이 과정은 지금 내가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는, ‘꿈은 이루어진다와 같은 말을 믿고 꿈을 키워온 내가 아무것도 못 되었을 때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울한 현실에서 버텨내기 위해 내가 해온, 그리고 앞으로 해나갈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꽤 착실한 학창시절을 보냈고,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대학 생활에도 성실히 임했으며,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상황이 어려운 친구들을 만나면 되도록 그들을 도우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그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버텨냈다. 그렇게 서른셋이 됐지만, 조카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꿈이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 꿈들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나를 속여 살아남고자 한다. 희망이나 용기는 도무지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내가 생활할 수 있도록 월급을 밀리지 않고 줄 수 있는 곳에 가 관대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기도하는 중이다. 나 역시 마지 못해 한 선택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희망 연봉에 대한 웃픈 일화가 떠오른다. 대학교 졸업 후 교육원 과정을 마치고 교육원 측에서 마련해준 기업들과의 면접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몇 명이 같이 들어간 곳에서 희망연봉으로 최저임금을 불렀더니 뒤이어 최저임금보다 훨씬 못 미치는 금액들을 차례대로 교육생들이 불렀다는 말을 들었다. 전부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고 경력직들도 있는 상황이었다. 친구도 그런 말을 했었다. 면접 중에 꽤 연차가 있는 경력직이 최저임금을 말하자 자기는 몇 백을 깎아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한 액수는 모두 천만원대였다.

 

 채용 과정 중 서류 전형을 통과하면 몇 명씩 면접 시험에 임하게 된다. 네댓명은 모두 그들이 가진 가능성덕분에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일 텐데, 사실상 합격하는 건 소수의 인원 뿐이다. 비슷한 대학과 스펙, 경력을 지닌 사람도 연줄이나 운이 없다면 일자리를 얻기가, 최저임금을 받기도 어려운 게 요즘 취업 시장이다. 저자가 인턴이나 받는 줄 알았다는 액수를 받고 일하는 고학력자들이 떠올랐다. 비슷한 스펙일지라도, 같은 곳의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최저임금을 겨우 받거나 못 받으며 일하기가 더 쉽고, 그렇게 시작한 첫 직장에서 좋은 곳으로 이직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야간 수당, 주말 수당을 달라는 요청에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같은 말을 들었다는 친구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책에는 당신 아니라도 일할 사람 많다라는 이 말을 마법의 문장으로 표현했다. 저 악덕한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는가.

 

 계약직으로 일하던 시절, 부서 회의를 할 때마다 부장님은 자주 계약직도 정규직이 될 수 있단 말을 했다. 그러니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 말을 믿고 2년 동안 열심히 부서의 주요한 일들을 도맡았던 사람은 채용에 응시조차 못했다. 매년 정규직을 뽑던 곳에서 2개월 일할 인턴만을 뽑았기 때문이다. 정규직을 뽑지 않는 이유로 인성을 보고 사람을 뽑기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세상은 정말 좋아질 수 있을까.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품어도 괜찮은 걸까. 오히려 기대해서, 노력해서 더 아픈 것은 아닐까.

 

 위에서 말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주인공 중 한 명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인자한 부장님이 나올 때였다. 상을 당한 그의 상갓집을 그 부장은 홀로 찾는다. 부장은 조문객이 별로 없는 그곳에 우두커니 앉아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위로의 마음을 건넨다. 그의 상갓집을 직원들이 찾지 않은 건 그가 잔심부름을 하는 여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상갓집이 너무 멀어서였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부장의 말을 옮겨 본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 걸까. 예전에는 하늘이라든가, 사람들이 참 좋았거든. 근데 요즘은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 같고, 사회는 점점 썩어가는 거 같아. 그래도 말이야. 옛날이 좋았다, 옛날이 좋았다. 쉽게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옛날을 안 살아본 사람들한텐 너무 무책임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나에게 지나간 시간이 소중했던 것처럼 지금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시절이면 좋겠어.

 

  부장 역시 기업의 악행을 눈감고 일한 적이 있었으나 그는 후배를 위해 책임을 지기로 한다. 영화를 보며 잘못도, 악행도 누군가 책임을 지면 나아질 수 있음을 보았다. 책에 따르면 국회와 정부가 23년간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에 등 돌린 탓에 근로기준법은 1958년 제정 당시,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용역업체도 파견업체도 없어 간접고용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기의 법이 현재 345만명의 간접 고용 노동자를 한 명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파견 노동자들을 오래도록 상담해온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문상흠 노무사는 파견법에서 세 가지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파견 수수료 상한 설정하기’ ‘파견업체의 수수료를 근로계약서에 명시하기’ ‘파견업체 위장 폐업 시 고용 승계하기등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이 나빠진 건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던 사회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책임자가 책임지기를 미루었을 때, 기업의 성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을 희생시켰을 때, 본인들이 선택한 것 아니냐며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삶을 비아냥거릴 때 삶이, 사회가, 세상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다음의 문장들로부터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장관은 노동자를 보호하라는 의원들의 요구에 그렇게 하면 파견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또 사용자들의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임금 착취 등의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중략)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와 함께 파견법의 도입을 결사반대하는 총파업 계획을 세웠지만, ‘국가 경제위기라는 대의 앞에서는 철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실무자는 원청이 노무비 100퍼센트 지급을 강제하지 않아서, 관련 법이 없어서라며 책임을 미뤘다 했고, 하청업체 사장들은 제 뱃속만 불리는데 혈안이 돼있었고, 법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법을 만들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이 이미 이 문제들은 곪을대로 곪아 사회적 문제로, 이슈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나는 나대로 이 곪아버린 세상을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그렇다고 불공정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책 소개 중 편집장의 선택이란 제목으로 달린 사회과학 MD 김경영씨의 글로 대신 희망을 더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본 작은 희망이라면, 이 피라미드형 착취의 구조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악의 없는 작은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진 커다란 비극은 손쓸 도리 없는 경우가 많지만 뚜렷한 욕망과 이득의 실체가 보이는 구조에서는 법이 개입할 여지도 명분도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저격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p.22 원청이 하청에 지급한 직접노무비는 522만원이었다. 직접노무비는 용역업체의 운영비 등이 포함돼 있지 않은, 100퍼센트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순수 인건비다.
하지만 2018년 11월 그의 마지막 월급명세서에 찍힌 실지급액은 211만7427원뿐이었다. 하청업체를 거치며 311만원이 사라진 것이다. 용역업체는 용균씨에게 이 돈만 주기로 근로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p.39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식대, 교통비, 각종 수당을 하나씩 없앴고, 노동자들에게는 통보만 했다.

p.46 직업소개소가 노동자에게 받을 수 있는 법률상 수수료는 월급의 1퍼센트다. 그러나 그 10배인 10퍼센트를 떼는 것이 워낙 ‘일반적’이라 대부분의 노동자가 착취에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다. () 여전히 관대한 태수씨였다. 착취가 ‘봉사’ ‘더불어 먹고사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탈바꿈하는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나 역시 경계가 흐려지기도 했다’

p.47 그들을 둘러싼 불안은 너무 많았다. 나이가 들어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근본적인 불안부터 언제 당할지 모르는 주민들의 갑질, 다달이 당하는 용역업체의 착취, 그리고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까지. 불안을 대하는 많은 방식 중 태수씨는 체념으로 불안을 지워왔던 게 아닐까.

p.53 신입 직원과 30년 일한 숙련 직원의 월급이 똑같은 건 간접고용 세계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 정부는 비정규직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사용자와 근로계약 기간을 정하고 일하는, 우리가 흔히 계약직이라고 부르는 ‘기간제 노동자’, 일주일에 36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 그리고 용역‧파견 즉 간접고용 노동자와 특수형태근로 종사자, 일용직 노동자 등을 모두 포괄하는 ‘비전형 노동자’다.
이 중 간접고용 노동자와 근무 형태가 가장 비슷한 건 일터 한곳에서 종일제로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다. 계약직은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이고 용역‧파견 노동자는 간접고용됐다는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임금 차이는 컸다.

p.154 "우리 사장들이요? 원청업체 ‘낙하산’들이에요."
() "현대자동차 영업본부 출신들이에요. 이사로 근무하다가 2020년 우리 회사 사장으로 ‘내려’왔어요."
‘내려왔다’는 표현은 보통 모기업이 자회사 등으로 직원을 발령 낼 때 쓰는 말이다. 영원씨가 원청업체와 본인의 소속 회사를 한 몸뚱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제조업 하청업체 구조가 원래 그래요.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임원이나 부장들이 정년퇴임 이후에 한 번 거쳐가는 코스예요. 마지막으로 한몫 챙기는 자리인 거죠. 퇴직 이후의 퇴직금이랄까요. 원청 입장에서는 이게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p.253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시작은 ‘공감’이었다. 중간착취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꼭 바로잡아야 한다고 다들 얘기했다. 그다음에는 이유와 고민이 나왔다. 법을 만들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민간 노동 시장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 중간착취 문제를 법으로 막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제약……. 그리고 마지막은 대개 ‘검토’로 끝났다.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현재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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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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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펠리시아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과 조니는 사랑에 빠졌다고.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 힐더치는 펠리시아를 사랑했다고. 그렇다면 아마 펠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던 여성들처럼 사람들은 힐더치는 연쇄살인마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사실 위의 장면 펠리시아가 자신과 조니는 사랑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시선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뉠지 모른다. “항상 널 생각할 거야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진 남자친구이자 펠리시아 뱃속 아이의 아버지 조니를 독자와 펠리시아를 제외한 인물들은 그녀를 이용했다고, 혹은 사랑을 운운하며 정작 중요한 지켜야 할 책임과 도리로부터는 도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펠리시아는 그런 그들에게 다시 한번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항변을 하던 펠리시아가 입을 다물게 된 건 실패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여정 속에서 만난 이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던 그녀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끝내 조니를 찾지 못했고, 아이는 몸속에서 지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온전한 친절을 베풀었던 것은 힐디치뿐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얼굴의 반대편을 보지 못한다. 그 반대편을 따뜻하게 데워주기 위해선 고개를 숙여야 하며,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작가는 세상 어디에나 자비와 경멸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사랑을 더하고자 한다. 힐디치는 펠리시아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녀의 돈을 감춰 그녀를 곤경과 비난에 빠지게 했다. 잘못된 행동, 잘못된 사랑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힐디치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듯이, 그가 전부라고 믿었던 친구들이 하나씩 그를 떠나고, 그가 스스로 착란과 망상을 겪고 있다고 느끼듯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타인의 시선을 늘 신경 쓰던 그가, 사라진 펠리시아를 걱정하며 자기만 아는 이유로 차를 지나쳐 그냥 가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펠리시아를 곁에 두고자 그녀의 돈을 훔쳤다. 이를 자신을 찾아온 캘리거리에게 고백하자, 캘리거리는 펠리시아를 비난했듯이 순식간에 그를 비난한다. “그 남자는 보기와는 다른 사람이었어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없다.

 

펠리시아는 힐디치에게 의지하다 어느 날 밤 문득 그 여자들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정확한 정황을 던져주는 것은 없다. 그저 분위기를 만들 뿐. 심증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힐디치를 살인마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펠리시아의 말을 빌려 대신하고 싶다. 펠리시아는 다시 한번 자신도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되뇌다 조심스러운 회의가 들어, 여전히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만을 선택하리라 생각한다

 

펠리시아도 힐디치도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어머니를 잃었고, 사랑에 실패했으며, 자신의 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들이 절망했을 때 자비가 있었어도, 그들의 울음에 응답해주는 누군가가 있었어도 과연 그들이 삶의 여정에서 방황하고 배회했을까.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끝이 난다. 아이들은 엉망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누군가는 밑바닥 인생이라 부른다. 진실은 감춰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무엇을 볼 것이냐는 선택에 달린지도 모른다. 진실이 감춰진 길 위에 꼭 절망과 경멸만이 있는 건 아니듯, 자신의 존재 이유를 길 위 부랑자들에게 바치던 치과의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펠리시아와 조니가 나눈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차가운 반대편을 데우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과 행동을 하며 끝없이 후회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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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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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된 아들이 우리 셋집 근처 한 정원에서 놀곤 한다. 이웃 사람들 말로는 정원 주인이 아이들이 거기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정원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벚나무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아들과 나는 함께 벚꽃을 딴다. 아들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중략)

누군가 내게 오스코루샤에 있는 벚꽃나무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어떤 남자는 곰 가죽을, 또 어떤 남자는 훈제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략)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려 했고, 대부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아들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는 아니다. 세 살 된 아이가 정원에서 노는 걸 못마땅해하는 누군가의 그릇된 시선은 바로 출신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차별이란 현실이다.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랄 수 있는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세상. 여전히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목숨을 건 탈주를 시도하고, 그렇게 떠나온 누군가를 사람들은 난민이라 이름 붙이고 경계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불신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한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은 항상 지배계급의 생각일 뿐이다.그릇된 선택의 반복. 불신은 그렇게 견고하게 쌓아졌다. 우리는 잘못을 바로 봐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사람들은 당연한 권리와 가치 앞에서도 쉽게 분열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만을 위해서. 그 이기심이 끊임없이 너와 나 사이에 벽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생성하는 것이다.

 

 저자는 살기 위해 터전을 떠나온다. 물론 거기에 선택권은 없었다. 그들의 부모는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살기 위해위험으로부터 탈출한다. 그들에겐 전쟁도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불똥이 그들에게 튀었다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했던 그들은 이제 다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출신이란 높은 벽은 새로운 언어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런 현실 한복판에 놓인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내게 된다. 정치학자인 어머닌 세탁 공장에서, 경영학자인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하게 된다. ‘차별이 부모의 세계에서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현재 내가 태어난 나라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나라가 존재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르비아 출신인 아버지와 보스니아-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어머니처럼 말이다. 다민족국가에서 태어난 나는,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 부모님이 만들어낸 결실이고 고백이었다. 서로 다른 출신과 종교의 억압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용광로가 이 두 사람을 해방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꼭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아버지가 폴란드계이고 어머니가 마케도니아계인 사람도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타율과 혈통보다 자율과 혈액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사랑했다. 그 사랑은 출신과 종교로부터 두 사람을 해방시켜줬다. 둘은 함께 꿈을 꾸며 희망을 나누었을 것이다. 우린 그렇게 설계됐다. 쉽게 포기할 수 없도록. 위기 속에서도 삶을, 사랑을 포기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진리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돼 왔다. 나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존재들. 그렇다면 우린 얼마나 앞으로 나아온 것일까. 누군가가 목숨 걸며 지키고자 했던 사랑이란 가치 속에서 살며 살아온 우리는 얼마나 그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와야 했던 는 여전히 그 일을 멈출 수 없다. 출신이란 특권 계층의 의식이 끊임없이 그들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가, 부모가 된 지금.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에 선택권은 없다. 여전히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해내야 한다. 내 아이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해내야만 한다.


 그런데 자꾸만 한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은 항상 지배계급의 생각일 뿐이다.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이고, 실권을 쥐고 있는 건 소수이지만, 우리 세대엔 순응이 아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더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출신에 관한 큰 차별을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생각이 아프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희망이 쉽게 포기되진 않는다.

 

 저자는 "아직도 나는 어떤 일에 대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고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할 기회 있다. 부족하더라도 글로 써 공론화할 특권을 가진 세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금은 희망을 그려봐도 되는 건 아닐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나는 할머니가 떠나간 침실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할머니를 기억하며, 소설을 쓴다. 할머니는 묻는다. "근데 넌 어디 있냐?" “할머니 침실에요” “소설을 쓰고 있냐?” “” “그다음은 어떻게 되냐?”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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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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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상징에 관하여

 

상징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물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냄. 또는 그렇게 나타낸 표지(標識기호·물건 따위. 사전 예문엔 다음의 문장이 달려있었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삼다지복의 성자를 읽은 사람이라면 거기다 한국인이라면 가장 인상 깊었을 장면으로 다음의 장면을 꼽지 않을까 싶다. 남아와 여아의 성기 모두를 지닌 아기의 탄생. 아이가 태어나면 성별을 먼저 확인하는 그 문화엔 어떤 억압이 깔려있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끝없이 등장하는 갈등은 허구가 아닌 인도 사회상을 반영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끝없는 불운과 사건, 사고 속에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갈등은 왜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의 첫 장면과도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상적인 관념을 정의내리려 하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안줌은 남아와 여아의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나 불운한 삶을 시작한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기도하며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달라 말하고, 유년시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놀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 그가 자유를 찾아 선택하게 된 삶은 제3의 성 히즈라였다. 아름다움과 자유에 이끌려 선택한 곳. 그러나 그곳 역시 그를 품어주진 못한다. 자신이 걷어들인 아이로부터 엄마는 전혀 행복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에 정확하고 무자비한 이유란 해설을 단다. 행복하지 않아 자유를 찾아 떠난 그곳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을 꿈꾸지만, 그것 또한 실현하지 못한 것이다.

삶은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정의를 내리고, 인종 간, 종교 간의 구분을 지으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정의 내릴 수 없음에 대한 불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립되지 않는 존재 사이에 구분선을 하나 긋는 건 쉬울 테니까. 그렇게 되면 정의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속고 믿기 쉬워지니까.

    

그는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구원이라고 말했다. “각 카스트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카슈미르는 피부가 흰 사람들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런 뒤바뀜이 끔찍한 비방에 일종의 정당성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은 왜 불행해지는가. 차별은 어떻게 지속되어지는가. 보이지 않는 선.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면,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불행의 시작이 아닐까.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다른 점 구석구석에 그리고 계급을 만들고, 거기에 다른 삶의 색을 입히는 것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끔찍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나게 된 안줌이 생존을 위해 찾아 떠난 곳은 묘지였다. 그의 두 번째 선택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듯했다. 그저 살아 숨쉬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곧 묘지에 자신의 터를 마련한다. 사람들이 죽어서야 오는 곳에서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삶을 살아낸다. 아스타브는 그저 자유로워 아름다워 보이는 한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별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죽은 듯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알아보는사람을 만나게 된다. 사담.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방식과 선택하는 단어들까지도. 그리고 자신을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으로 데려온 것을 삶의 조류라 여긴다. 나란히 누워있던 사담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그녀에게 하기 시작한다. “난 아버지를 죽은 폭도의 일부였어요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반복된 이야기를 동시에 비춰낸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순간 동시에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2. 삶의 비극성

 

흔히들 비극을 죽음과 연결짓지만 지복의 성자와 같은 소설을 읽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겐 삶이 더 비극에 가까울 거라고. 삶은 끝없는 죽음을 목격하게 한다. 그런 삶을 반영한 소설이기 때문일까. 소설은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의 이미지를 겹겹이 쌓아낸다. 난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사실상 지옥같은 삶에서 엄마가 되기로 스스로택한 사람들의 선택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본능이라면,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의 무엇인가가 또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끌었던 건 다음의 해설 때문이었다. 우리는 추락하면서 역시 추락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게 되지. 살아있는 한 희망을 꿈꿀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숙명이지 않을까. 한 줄기의 빛만 보아도 희망을 발견해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잘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내 삶이 불행한데, 다른 생명을 꿈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째서 저자는 죽음 한 가운데에서 단순한 탄생의 의미나 삶이 아닌 아이와 엄마의 관계를 그려내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니까. 막 태어난 아기는 힘은 없지만, ‘생명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니까. 어쩌면 소설 속 여성들은 죽음을 살면서 그 작고 작은 생명에 끌린 것은 아닐까. 추락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로 가장 순수한 영혼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줄기 빛을 기대하는 것이다.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이었다. 경력, 욕망, , , 사랑, 젊음 그 자체. 죽음은 또 다른 방식의 삶이 되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이것 뿐이야. 우리 카슈미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척하는 죽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소설의 첫문장은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로 시작되었다. 이 을씨년스러운 문장이 지금 생각해보면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는 건 삶이 보통의 삶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곳에 어둠이 있었던 탓이었다. 신이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기로 결심해 히즈라를 만들었다 말하던 그. 행복할 수 없었던 그들이 꿈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계속된 삶이었을까 혹은 죽음이었을까.

3. 그럼에도 다른 세상은 있다

 

 구걸이 금지되었다. 수천 명의 거지들이 잡혀가서 수용소에 갇혔다가 도시 밖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을 고용한 업자들은 그들을 도로 데려오기 위해 큰돈을 물어야 했다.

약자를 위해 일하는 존 신부, 경찰 기록에 의하면 지난해 시내 거리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시체가 삼천 명 가까이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품점에는 음식이 넘쳐났다. 서점에는 책이 넘쳐났다. 신발 가게에는 신발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죽어가지만, 그들의 삶을 돕는 물질들은 넘쳐난다. 구걸은 금지조차 허락되지 않지만, 식품점에는 음식이 넘쳐난다. 그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지켜봤을까. 삶은 계속되어진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지어짐에 반대하는 이들은 제3의 성을 찾아떠나고, 전쟁으로 갈등으로 아내와 자식을 잃게 된 아버지 역시 묵묵히 삶을 살아낸다. 보통의 절망은 그렇게 지속된다. 우울함 속에서 희망을 읽어냈던 건 단 하나의 장면 때문이었다. 순진하게도 순수한 표정으로 그럼에도 계속해보겠다고 말하던 누군가의 또렷한 눈빛을 본 것 같은 착각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던 어떤 이들은 각국의 언어로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담아낸다. 그렇다.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 더딜 뿐 전진하고 있음에 의심을 품을 필욘 없을 테니까.

누군가 버린 아이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그를 버린 엄마가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는 그가 거지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강간피해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추측은 저자의 해설처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문제 해결에 핵심을 쥔 것은 안줌이었다. “저는 이 아이를 키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두고 갑니다라는 쪽지를 보고도, 한치의 의심도 없이 안줌은 누구도 될 수 있는 그녀. 어머니였을 그녀,를 더 나은 삶에서 그를 키우기 위한 어떤 이의 선택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경찰에 신고해서는 안 된다고.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지 않을까.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다른 세상을 꿈꿔보지 않았을까. 나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그래서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는 펜을 든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실망할 필욘 없을 것이다. 그저 함께 외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지 않을까.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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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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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

창유리에 비친 허위의 먼 풍경에 속은,

 

창유리에 비친 가짜 풍경을 믿었던 여새는 죽었다. 그런데 왜 화자는 여새가 아닌 여새의 그림자라고 했을까. ‘창백한 불꽃의 곳곳엔 죽음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미지가 완성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건 작품을 다 읽고 나서였다. 죽음을 읽으며, 죽음을 읽어내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의미는 독자가 완성하는 것이니까. 과연 누구의 작품인가란 혼란스러움으로 첫 번째 독서를 마쳤을 때, 나는 과연 착한 독자인가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머리말에서 작가는 주석을 먼저 읽거나 두 권의 책을 준비해 주석과 시를 함께 읽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라는 물음에 그냥 차례대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래도 되나 찝찝함을 느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독서는 오직 나의 주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자만이나 이런 단언에 나의 친애하는 시인이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란 오만에 혼란스럽지만 어쩌면 편안한 해석을 돕는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시인의 시에 주석을 달았다는 화자는 주석 덕분에 대안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은 때로 시의 구절들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그것은 작가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단어를 골랐을 시인. ‘창백한 불꽃은 본래의 작품인 시의 영역을 침범하는 주석자의 이야기로 대부분이 할애된다. 이때 나의 무의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의식의 영역은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게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소설 마지막에 큰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회상해보니 확인도 하지 않으며, 그저 부러워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고 최근 그런 작품을 직접 읽게 된 것이다. 의미가 있건 없건 자유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발상이,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한 분위기가 그때의 그 감정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니 덩달아 독서도, 해석도 자유로울 수밖에. 때문에 독자인 나는 화자의 말을 듣고 싶은 말만 듣기로 결심한다.

죽음을 보면서도 죽음을 보게 된 건 책을 다 읽고 난 후였다. 화자의 과 시인의 가 있다. 그리고 창백한 불꽃을 읽는 내가 있다. 누구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 슬픔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슬픔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독자인 것일까. 어찌됐든 최후의 말을 하는 것은 독자인 나다.

시인은 자신을 죽은 여새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따라다닌 건 언제부터였을까를 상상해본다. 조류학자였던 부모님. 그들의 죽음.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된 시인.

 

어떤 단어들, 내가 우연히 듣거나 읽은 단어들은,

가령 심장병은 언제나 아버지를

췌장암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부터 그에게, 그의 시에 죽음이 따라붙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은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첫 번째 독서를 마치고부터이다. 생에 죽음이 있다. 누구도 모르지 않지만, 망각하기 쉬운 사실이다.

 

개인의 언어로 공공의 운명을

번역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거룩하리만큼 간결한 시 대신

지리멸렬한 메모들,

 

죽은 시인은 죽기 전 남긴 에서 개인의 언어로 생과 사, 즉 작품에 주석을 다는 일에 대해 지리멸렬함을 표한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유작을 왜 하필 안지 얼마 안 된 이웃에게 넘긴 것일까. 그는 자신의 시보다 몇 배는 더 긴 주석이 달릴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개인의 언어에 이토록 긴 주석이 붙은 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선 놀라움은 계속되고, 부끄러움도 여전한생의 고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2. 큰턱은 죽어도 노래는 산다.

 

라퐁텐의 우화시 매미와 개미에서 여름내 노래만 부른 매미가 겨울에 배고픔을 겪는다는 교훈을 비틀었다고 쓰였다. 그러나마나. 누가 죽든 작품은 산다. “인생은 어둠 속에서 갈겨쓴 메시지다”, “저녁은 낮을 찬미하기 위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여름이 길까, 겨울이 길까. 낮이 길까, 밤이 길까. 결국, 무엇을 느끼는가 혹은 무엇을 보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시인의 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반려자였던 아내. 그녀는 나무를 응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가버렸어. 아주 작았는데, 다시 올지도 몰라.” 가버렸지만, 다시 올지도 모른다. 상실과 재회. 모든 인간은 뜻하지 않은 이별에 어김없이 희망을 품는다.

그들의 딸은 왜 죽게 된 것일까. 어떤 이들은 길을 잃었을 거라 추측하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부모인 자신은 안다고 답한다.

그날 밤은 얼음이 녹고, 대기에 큰 동요가 이는

폭풍의 밤이었다. 검은 봄이

바로 근처 모퉁이에 서서 축축한 별빛을 받으며

축축한 대지 위에서 떨었다.

(중략)

탁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걷다가 삼켜지듯 물속에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부모는 이에 대해 이렇게 심경을 밝힌다. “나는 작은 꽃이나 살진 파리가 될 준비는 되어 있으나 / 잊을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어린 시절 어떤 단어들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듯, 계절과 삶의 풍경에서 영원히 그녀를 잊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이렇게 바람 부는 한밤중에 누가 말을 타고 달리는가?

작가의 슬픔이다. 난폭한

3월의 바람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아버지다.

    

시인의 아내는 시인에게 여행은 즐거웠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보다 / 나는 내 길을 더듬어 찾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차서 / 돌아왔어라고 답한다. 그것은 희미한 희망이었다. 길었던 자신의 여행에서 그가 보고,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확인하게 된 건 딸의 아름다움이었을까. 딸의 죽음에도 사람들의 지리멸렬한 말들이 붙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 주석 같은 것이라 말한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아비는 이해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인간 모두가 그러하듯 정작 자신의 생은 예측하지 못한다. 죽음을 앞둔 밤, “마땅히 확신하건대,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 사랑하는 내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그는 자신의 시집을 다시 서가에 꽂아두기로 한다. 바로 다음 날, 예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오전 6시에 일어날 것이며, 날씨도 좋으리라 확신하며. 물론, 자신의 죽음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의 생이 활활 타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죽은 여새의 그림자를 자처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창에 비친 배경에 속은 여새. 어쩌면 창공을 날았을 여새. 그래서일까. 그는 유독 아름다운 문장엔 더욱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 내뱉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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