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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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된 아들이 우리 셋집 근처 한 정원에서 놀곤 한다. 이웃 사람들 말로는 정원 주인이 아이들이 거기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정원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벚나무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있다. 아들과 나는 함께 벚꽃을 딴다. 아들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중략)

누군가 내게 오스코루샤에 있는 벚꽃나무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어떤 남자는 곰 가죽을, 또 어떤 남자는 훈제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략)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려 했고, 대부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아들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는 아니다. 세 살 된 아이가 정원에서 노는 걸 못마땅해하는 누군가의 그릇된 시선은 바로 출신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차별이란 현실이다.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랄 수 있는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세상. 여전히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목숨을 건 탈주를 시도하고, 그렇게 떠나온 누군가를 사람들은 난민이라 이름 붙이고 경계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불신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한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은 항상 지배계급의 생각일 뿐이다.그릇된 선택의 반복. 불신은 그렇게 견고하게 쌓아졌다. 우리는 잘못을 바로 봐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사람들은 당연한 권리와 가치 앞에서도 쉽게 분열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만을 위해서. 그 이기심이 끊임없이 너와 나 사이에 벽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생성하는 것이다.

 

 저자는 살기 위해 터전을 떠나온다. 물론 거기에 선택권은 없었다. 그들의 부모는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살기 위해위험으로부터 탈출한다. 그들에겐 전쟁도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불똥이 그들에게 튀었다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했던 그들은 이제 다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출신이란 높은 벽은 새로운 언어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런 현실 한복판에 놓인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내게 된다. 정치학자인 어머닌 세탁 공장에서, 경영학자인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하게 된다. ‘차별이 부모의 세계에서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현재 내가 태어난 나라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나라가 존재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르비아 출신인 아버지와 보스니아-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어머니처럼 말이다. 다민족국가에서 태어난 나는,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 부모님이 만들어낸 결실이고 고백이었다. 서로 다른 출신과 종교의 억압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용광로가 이 두 사람을 해방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꼭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아버지가 폴란드계이고 어머니가 마케도니아계인 사람도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타율과 혈통보다 자율과 혈액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사랑했다. 그 사랑은 출신과 종교로부터 두 사람을 해방시켜줬다. 둘은 함께 꿈을 꾸며 희망을 나누었을 것이다. 우린 그렇게 설계됐다. 쉽게 포기할 수 없도록. 위기 속에서도 삶을, 사랑을 포기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진리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돼 왔다. 나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존재들. 그렇다면 우린 얼마나 앞으로 나아온 것일까. 누군가가 목숨 걸며 지키고자 했던 사랑이란 가치 속에서 살며 살아온 우리는 얼마나 그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와야 했던 는 여전히 그 일을 멈출 수 없다. 출신이란 특권 계층의 의식이 끊임없이 그들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가, 부모가 된 지금.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에 선택권은 없다. 여전히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해내야 한다. 내 아이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해내야만 한다.


 그런데 자꾸만 한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은 항상 지배계급의 생각일 뿐이다.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이고, 실권을 쥐고 있는 건 소수이지만, 우리 세대엔 순응이 아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더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출신에 관한 큰 차별을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생각이 아프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희망이 쉽게 포기되진 않는다.

 

 저자는 "아직도 나는 어떤 일에 대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고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할 기회 있다. 부족하더라도 글로 써 공론화할 특권을 가진 세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금은 희망을 그려봐도 되는 건 아닐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나는 할머니가 떠나간 침실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할머니를 기억하며, 소설을 쓴다. 할머니는 묻는다. "근데 넌 어디 있냐?" “할머니 침실에요” “소설을 쓰고 있냐?” “” “그다음은 어떻게 되냐?”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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