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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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

창유리에 비친 허위의 먼 풍경에 속은,

 

창유리에 비친 가짜 풍경을 믿었던 여새는 죽었다. 그런데 왜 화자는 여새가 아닌 여새의 그림자라고 했을까. ‘창백한 불꽃의 곳곳엔 죽음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미지가 완성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건 작품을 다 읽고 나서였다. 죽음을 읽으며, 죽음을 읽어내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의미는 독자가 완성하는 것이니까. 과연 누구의 작품인가란 혼란스러움으로 첫 번째 독서를 마쳤을 때, 나는 과연 착한 독자인가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머리말에서 작가는 주석을 먼저 읽거나 두 권의 책을 준비해 주석과 시를 함께 읽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라는 물음에 그냥 차례대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래도 되나 찝찝함을 느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독서는 오직 나의 주석만이 이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자만이나 이런 단언에 나의 친애하는 시인이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란 오만에 혼란스럽지만 어쩌면 편안한 해석을 돕는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시인의 시에 주석을 달았다는 화자는 주석 덕분에 대안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은 때로 시의 구절들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그것은 작가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단어를 골랐을 시인. ‘창백한 불꽃은 본래의 작품인 시의 영역을 침범하는 주석자의 이야기로 대부분이 할애된다. 이때 나의 무의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의식의 영역은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게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소설 마지막에 큰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회상해보니 확인도 하지 않으며, 그저 부러워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고 최근 그런 작품을 직접 읽게 된 것이다. 의미가 있건 없건 자유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발상이,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한 분위기가 그때의 그 감정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니 덩달아 독서도, 해석도 자유로울 수밖에. 때문에 독자인 나는 화자의 말을 듣고 싶은 말만 듣기로 결심한다.

죽음을 보면서도 죽음을 보게 된 건 책을 다 읽고 난 후였다. 화자의 과 시인의 가 있다. 그리고 창백한 불꽃을 읽는 내가 있다. 누구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 슬픔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슬픔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독자인 것일까. 어찌됐든 최후의 말을 하는 것은 독자인 나다.

시인은 자신을 죽은 여새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따라다닌 건 언제부터였을까를 상상해본다. 조류학자였던 부모님. 그들의 죽음.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된 시인.

 

어떤 단어들, 내가 우연히 듣거나 읽은 단어들은,

가령 심장병은 언제나 아버지를

췌장암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부터 그에게, 그의 시에 죽음이 따라붙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은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첫 번째 독서를 마치고부터이다. 생에 죽음이 있다. 누구도 모르지 않지만, 망각하기 쉬운 사실이다.

 

개인의 언어로 공공의 운명을

번역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거룩하리만큼 간결한 시 대신

지리멸렬한 메모들,

 

죽은 시인은 죽기 전 남긴 에서 개인의 언어로 생과 사, 즉 작품에 주석을 다는 일에 대해 지리멸렬함을 표한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유작을 왜 하필 안지 얼마 안 된 이웃에게 넘긴 것일까. 그는 자신의 시보다 몇 배는 더 긴 주석이 달릴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개인의 언어에 이토록 긴 주석이 붙은 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선 놀라움은 계속되고, 부끄러움도 여전한생의 고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2. 큰턱은 죽어도 노래는 산다.

 

라퐁텐의 우화시 매미와 개미에서 여름내 노래만 부른 매미가 겨울에 배고픔을 겪는다는 교훈을 비틀었다고 쓰였다. 그러나마나. 누가 죽든 작품은 산다. “인생은 어둠 속에서 갈겨쓴 메시지다”, “저녁은 낮을 찬미하기 위한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여름이 길까, 겨울이 길까. 낮이 길까, 밤이 길까. 결국, 무엇을 느끼는가 혹은 무엇을 보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시인의 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반려자였던 아내. 그녀는 나무를 응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가버렸어. 아주 작았는데, 다시 올지도 몰라.” 가버렸지만, 다시 올지도 모른다. 상실과 재회. 모든 인간은 뜻하지 않은 이별에 어김없이 희망을 품는다.

그들의 딸은 왜 죽게 된 것일까. 어떤 이들은 길을 잃었을 거라 추측하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부모인 자신은 안다고 답한다.

그날 밤은 얼음이 녹고, 대기에 큰 동요가 이는

폭풍의 밤이었다. 검은 봄이

바로 근처 모퉁이에 서서 축축한 별빛을 받으며

축축한 대지 위에서 떨었다.

(중략)

탁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걷다가 삼켜지듯 물속에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부모는 이에 대해 이렇게 심경을 밝힌다. “나는 작은 꽃이나 살진 파리가 될 준비는 되어 있으나 / 잊을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어린 시절 어떤 단어들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듯, 계절과 삶의 풍경에서 영원히 그녀를 잊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이렇게 바람 부는 한밤중에 누가 말을 타고 달리는가?

작가의 슬픔이다. 난폭한

3월의 바람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아버지다.

    

시인의 아내는 시인에게 여행은 즐거웠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보다 / 나는 내 길을 더듬어 찾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차서 / 돌아왔어라고 답한다. 그것은 희미한 희망이었다. 길었던 자신의 여행에서 그가 보고,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확인하게 된 건 딸의 아름다움이었을까. 딸의 죽음에도 사람들의 지리멸렬한 말들이 붙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 주석 같은 것이라 말한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아비는 이해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인간 모두가 그러하듯 정작 자신의 생은 예측하지 못한다. 죽음을 앞둔 밤, “마땅히 확신하건대,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 사랑하는 내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그는 자신의 시집을 다시 서가에 꽂아두기로 한다. 바로 다음 날, 예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오전 6시에 일어날 것이며, 날씨도 좋으리라 확신하며. 물론, 자신의 죽음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의 생이 활활 타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죽은 여새의 그림자를 자처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창에 비친 배경에 속은 여새. 어쩌면 창공을 날았을 여새. 그래서일까. 그는 유독 아름다운 문장엔 더욱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 내뱉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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