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평점 :
완전변태
참 이외수 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러나 과연 이외수 답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에 대한 소개를 처음 대하면서 든 생각은 ‘정말 선정적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제목이 ‘대박’감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지 모르지만, 사람은 아는 만큼 생각하는 것이니 그건 내 생각의 한계일 수도 있다.
책은 열 개의 단편집으로 구성되어있다.
소나무에는 왜 소가 열리지 않을까
전직 대통령 조차도 검사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판사에게 심판을 받는 모습에서 오로지 판,검사 만이 가장 세다는 생각으로 판,검사가 되기 위해 모든 걸 건 주인공과 그 아버지.
길에서 만난 노인은 법(法)나무 밑에 썩지 않는 아버지의 손가락 하나를 명심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손가락 자체도 이미 평정 심을 잃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는 법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이 아니라, 억울함과 복수심에서 손가락을 잘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맹과니의 섬
청맹과니가 다람쥐를 뜻한다는 사실을 이 글에서 배웠다. 이야기가 들려주는 다양한 지식이란 게 이런 것이겠지 싶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자연을 통제한다는 것과 사람의 자유 의지를 자신만의 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책을 다 읽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해우석(解憂石)
작가는 절에 있는 변소를 가리켜 해우당이라고 좀 더 높였지만, 우리가 아는 해우소처럼 해우석도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보물을 찾아 온 세상을 헤 메다가 돌아와보니 자기 집 마당에 보물이 있더라는 말처럼, 우리는 잘못된 상식으로 엉뚱한 보물을 찾기 위해 헤 메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으러 떠나기 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완전변태(完全變態)
제목을 한자어로 변형시키려고 글을 적은 후 한자 변형을 누르니 ‘완전변태’라는 단어가 하나로 번역된다. ‘완전변태’라는 말이 생물학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제목을 봤을 때 ‘성적인’ 의미에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본다고 했듯이 내 생각이 그쪽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표현의 자유를 그리고 있다고 본다.
아마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많이 녹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순
군중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읽는 동안에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양심의 새순이 돋았을까? 단지 순이 돋는 것으로만 그칠 뿐 곧 말라 죽지는 않을까?
명장(名匠)
몇 해전 화재로 인해 국민들의 가슴에 좌절을 안겼던 남대문.
국민의 간절한 바람을 안고 복원되어 다시 돌아왔지만, 그 복원 과정에 비리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명색이 대목수라는 사람이 우리의 금강송을 빼돌리고 수입산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몇 해전, 남대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여러 언론과 인터뷰했던 그 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자를 나무라기 전에 아무런 검증 없이 그자를 대목수니 명장이니 하면서 치켜세운 언론이 더 한심하다. 무조건 관심을 받는 것에만 치중하다 보니 기사다운 기사가 없고, 기자다운 기자가 사라져버린 언론이 과연 국민의 눈과 귀가 될 수 있을까?
‘실력 없는 도공은 명품만 골라서 깨뜨린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명품은 모조리 장도리로 박살 내버리고 자신을 그대로 빼 닮은 아집 한 덩어리만 덩그러니 남겨놓았구나.”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파로호(破虜湖)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란 정도로 알고 있던 파로호.
파로호.
오랑캐를 물리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는 원래 화천 저수지라 불리었는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6사단의 대승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앞서 명장에서 언론을 잠시 비난했지만, 이 글은 바로 그런 썩은 기자 정신을 꼬집고 있다.
유배자
가끔 이해하기 힘든 예술 작품들을 보면서 과연 작가들은 부연 설명 없이 저 작품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난해하기만 하면 그것이 무슨 대단한 작품인 냥 하는 위선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작가들의 꼬락서니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라 본다.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썩지 않게 만드는 최상의 방부제다”
글의 첫머리를 장식한 문구다.
예술이 방부제 이기도 하지만, 불량 방부제는 살아있는 영혼을 빨리 썩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흉터
얼마 전, 하나님이 아버지 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논리로 전도를 왔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가 몇 가지 논리로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를 설명 했을 때, 그들은 단지 영접만 강요할 뿐이었다. 믿음 없이 단지 신도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 중요할 뿐 다른 것은 전혀 중요치 않은 종교인들.
과연 예수가 부처가 이 땅에 온다면 저 독실한 종교인들은 과연 알아보기나 할까?
자기만의 종교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재림하는 예수나 부처는 단지 미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대지주
‘우리는 이미 자신에게 속고 있기 때문에 남에게도 속는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한참을 웃었다.
세상 참 재미있는 곳이다.
꼬장꼬장한 영감의 너무 신랄한 현실 비판에 미소가 얼굴에 베어 나올 뿐이다
이외수!
참 그 이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