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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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에 1권 퀀텀 독서법', '1만권 독서법', '48분 기적의 독서법'.

시중에 널리 팔리고 있는 독서법 책들은 경쟁적이고 분석적이다. 마치 남보다 더 많이 읽어야 하는 게 핵심이고, 그렇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활자를 소화해야한다고 주입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제목에 핵심을 모두 녹인, 그래서 너무 긴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이하 <이동진 독서법>)은 확실히 결을 달리 한다. 작가 이동진은 그저 '재미'란 요소가 가장 큰 독서의 목적이자 이유라고 편하게 이야기한다. 이동진은 믿고 보는 유명 영화 평론가이자, <빨간책방>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적'임자며, 북콘서트나 라디오 등에서 맹활약중인 DJ다.
하지만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수식어는 '독서광'이다. 1만 7천 권의 책을 갖고 있고, 본인 스스로 책에 관한 한 많이 실패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시행착오가 많았음을 인정하고, 시간과 돈을 무척 투자한만큼 책을 고르는 법, 읽는 법을 깨달았다는 말에 평소보다 더욱 신뢰할 수 있었다. 마치 독서에 대한 엄청난 비기를 전수해줄 것 같은 달콤한 꾐보다는 솔직하게 본인의 경험에 빗대어 해주는 조언이 훨씬 유익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낸 책을 좋아하는 덕후의 심정이 가득하단 걸 느낄 수 있었다. 1부 <생각-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서재 꾸미기, 책을 고르는 세 가지 방법, 문학 독서의 이유, 읽고 쓰고 말하기의 가치 등을 짧은 호흡으로 가볍게 풀어낸다. 다른 독서법 책들이 실용서라면, <이동진 독서법>은 책을 너무나 사랑하는 덕후의 에세이같았다. 책을 통해 본인이 얻는 행복이 무척 즐거워서 타인에게도 추천하는 설레는 마음이랄까? 2부 <대화- 읽었고, 읽고, 읽을 것이다> 파트는 빨간책방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씨네 21 이다혜 기자와의 인터뷰로 꾸며졌다. 독서에 대한 가치관, 오해, 노하우를 흥미진진하게 논하는 걸 보고 있으면 덩달아 책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몰래 전해주는 독서 비법의 결정체는 3부 <이동진 추천도서 500>이다. 감각과 감정, 대화와 독백, 법칙과 체제, 악과 부조리 등의 테마로 시, 소설, 예술, 우주, 법 등에 관한 책을 차근차근 정리해줬다.
독서의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믿고 따라갈 북극성 같은 리스트였고, 한권씩 도전해볼 의욕에 불탔다.

결국 책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미안해할 것도 아니고 부끄러울 일도 아닙니다. 다 읽지 못한 책을 책장에 꽂아둔다고 큰일 나지도 않고요. 버리시거나 헌책방, 중고서점에 팔거나 그 책을 좋아할 것 같은 사람에게 선물해도 좋겠지요. 그저 안 읽힌다면, 흥미가 없다면 그 책을 포기하시면 됩니다. 굳이 완독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한 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지만, 책을 읽는 과정에서 한번도 슬럼프를 겪지 못했다는 말에 놀랐다. 본인의 관심사가 아닌 부분도 있을 수 있고, 재미없는 책이 걸릴 확률이 분명 존재할 텐데도. 하지만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독서 비법을 엿보고 나니 이해가 가더라. 이동진은 책을 사랑하지만 숭배하진 않기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았다. 책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과 주변의 조언에 휘둘리기 보다는 그저 '재미'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완독을 하지 않아도 되고, 책에 낙서는 물론 찢어도 상관 없다고 조언한다.

문득 나의 독서 습관을 돌이켜 봤다. 물론 책을 읽고, 팟캐스트로 생각을 공유하고, 블로그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데 익숙하지만 어느 순간 독서가 버거웠던 적도 분명 있다. 빨리 책을 읽어야지 팟캐스트를 들을 수 있다며 진도를 못 따라가 초조하기도 했다. 야근과 출장에 치여 독서량이 줄면 내가 게으르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독서는 한번도 내게 강제성을 띈 업무인 적이 없다. 책을 느리게 읽는다고 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많이 읽는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저 내 인생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어줄 유익한 취미활동인데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저 재밌으면 그만인 것을!

쌓는 독서라고 하면 내가 내 세계를 만들어가는, 내 관심사에 맞는 책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읽을 것 같고요. 허무는 독서는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거나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일 텐데요. 쌓는 독서를 게을리하면 '내 것'이 안 생기고, 허무는 독서를 안 하면 내 세계가 좁아지거든요.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시는지요. 새로 나온 책들을 살펴보실 때, '이건 내가 좋아하겠다' 생각해서 읽으시는 책이 있을 것 같고, '내가 모르는 거다' 싶어서 읽으시는 책이 있을 것 같거든요. 균형을 생각하시는 편인가요. - 이다혜

균형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고요. 다만 본능적으로 넓이를 지향하는 부분이 있어요. - 이동진

3.49/500. 이동진의 추천 도서를 꼼꼼히 살펴보며 다음에 읽을 책을 골라봤다. 여전히 기록하고 줄세우고, 정리하는 나의 '준강박' 독서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동진 독서법>을 읽고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독서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며, 갈팡질팡 흔들렸던 독서 철학도 조금 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다혜 작가의 생각처럼 '쌓는 독서'와 '허무는 독서'의 비중도 조절해 보려고 다짐했다. 내 관심사에 맞는 책을 '깊이' 파는 게 '쌓는 독서'라면, 내가 갖고 있던 고정 관념을 깨거나 다른 생각을 '넓게' 받아들이는 '허무는 독서'다. 과학이나 예술처럼 무지한 분야를 처음 접할 때 오는 호기심, 신비로움은 제법 유쾌한 감정이다. 당연히 모든 책이 기억에 남고 인상적일 수 없다. 그럴 때는 과감히 포기하거나, 다른 책에 관심을 기울여도 된다. 독서의 주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만의 취향이니 말이다.

회사/집/출퇴근길에 읽을 책을 나뉘어 고르는 순간부터 독서의 재미는 시작된다. 비록 두서없을지라도 책을 읽고 난 나만의 감정을 정리해보고, 인상깊은 구절은 스마트폰으로 촬영해보고, 독서리스트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여전히 책을 고르는 순간은 즐겁고, 책을 펴면 설레고, 책을 다 읽으면 뿌듯하다. 먼훗날 나만의 서재가 생긴다면 작가순? 장르순? 흥미순? 어떻게 배열할지를 벌써 고민하는 김치국도 마셔본다. 그만큼 책은 나의 훌륭한 동반자이자,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리 가볍지 않은 친구다. 가장 가성비가 좋고, 재미의 지속성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독서'를 취미로 이어갈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어린 시절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주시며 책과의 첫만남을 주선해준 어머니께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나도 언젠가 내 아이와 책이란 훌륭한 매개체를 통해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싶은 꿈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독서 행위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시간이 남는데 근처에 서점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들어가죠. 꼭 책을 사지 않아도 되고 표지만 보고 쓱 구경만 하고 나와도 그 사람은 마음이 흡족해집니다.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은 곧 독서라고 저 역시 생각해요. 책을 꽂아두는 순간, 책을 빼서 보는 순간도 독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서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고 꾸미는 것도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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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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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분홍빛의 따스함, '나는 잠깐 설웁다'란 고운 제목에 끌려 시집을 골랐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을 책임지는 시인의 짧지만 강렬한 '시인의 말'에 푹 빠졌다. 그녀는 데뷔 7년 만에 펴낸 시집에 그동안의 기쁨과 슬픔을 꾹꾹 눌러담아 한 권에 묶어냈다. 입덧, 출산, 치질.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새롭게 비틀어 놀랍도록 와닿는 시어들이 연이어 흘러나오는 걸 보니 시집을 든 내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소설처럼 내 눈앞에 이들의 눈물, 아픔, 외로움이 느껴졌다. 생명, 그 자체가 주는 날카로운 고통을 녹여낸 시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삶이 시작되지만 동화처럼 해피엔딩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런 부담 없이 떠난 '소풍'을 말하려다 '슬픔'이 와버린 것처럼.

시인의 말처럼 물집이 아물어가기 위해선 차디찬 이런 시어들의 홍수가 필요할 것 같다. 옛날 고향의 어르신들에게 전해오던 이야기를 주워듣듯이, 어색한 분위기의 겸상 자리에서 다른 생각을 하듯이, 시는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한글의 아름다움에 힘입어 말장난처럼 이어지는 구절들도 인상적이었다. 잠깐의 설움이라면, 기꺼이 감내하겠지만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느낌이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중에 어떤 게 더 난해한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다 봄이 오겠어'란 말처럼 슬픔을 터뜨리고 풀어내다 보면 어느덧 분홍빛 행복이 곁에 있을 것이다.한편 "산문은 내가 주도적으로 글을 써야한다면, 시는 글이 나를 써내려간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시의 세계는 여전히 신비롭고, 궁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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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지음, 황진희 옮김 / 거북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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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과 파란색만으로 그려진 아이의 세계.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인 아이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꽃내음이 가득하거나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공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프고, 배고프고, 자랑하고, 실컷 노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서서히 의미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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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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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타인의 불행을 개인의 행복으로 치환하는 건 올바른 일일까? 타블로의 솔로 앨범 <열꽃>을 듣고 난후 느낀 감정이었다. 타블로는 '타진요'의 악의적인 학력 의혹 제기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고통의 흔적을 예술로 처연하게 승화시킨 노래는 놀라움 그 자체였고, 역대급 명반에 꼽을 정도로 들으며 행복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충격적이고 소름돋는 작품이었다. 단순히 왕따나 폭력사건일줄 알았던 가해자의 범죄명은 충격적인 총격 사건이었다. 너무나 순진한 표정의 어린아이, 즉 1999년 미국 콜럼바인고등학교를 지옥으로 만든 살인자가 표지에 있었기에 섬뜩하고 강렬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담담히 아픔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수 클리볼드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과연 안도감이 들 수 있을까? 내 아이는, 내 친구는 흔히 말하는 악마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녀는 책의 처음을 총격 사건 당일의 생생한 모습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사건의 전말을 모를 때는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길 기도했지만, 점차 뉴스를 접할 때마다 오히려 아이가 더 많은 이를 죽이기 전에 죽길 기도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예의'를 갖춘 조심스런 참회록이다. 딜런 클리볼드가 사건을 벌이기까지의 17년, 사건 이후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17년을 차분하게 돌이켜보며 적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아이의 범죄를 막을 수 있었을까 고뇌하면서. 고통, 슬픔, 충격이 뒤섞인 감정은 자책, 수치심, 미안함으로 깊어졌고 나아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를 되찾는 과정은 숭고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미화하거나, 범죄행위를 합리화하기보다는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충격적인 사건의 후기는 불편하지 않았고, 그저 시간떼우기용 가쉽거리가 아닌 생각하고 고민할 화두를 여러개 던져주었다.

남자들은 아이가 자라서 어떤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들은 자기가 기억하는 아이를 잃은 것을 슬퍼하곤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차이가 확연했다. 나는 딜런이 아기일 때, 아장아장 걸을 때, 어린아이일 때, 십대일 때의 기억을 끝없이 되새겼지만 톰은 딜런이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게 된 일들에 매달렸다. 딜런의 사라진 미래에 집착하는 게 싫었다. 마치 딜런이 죽어서도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길 바라며 압박하는 듯 여겨졌따. 우리의 다툼의 요인들이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우리는 지독한 폭풍 속에 등을 맞대고 한데 묶여 있었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인 것이 혼자인 것보다 더 괴로울 때도 있었다.

흔히 범죄의 대다수는 성장기 가정 불화가 원인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폭언과 욕설을 일삼는 알콜중독자 아버지, 신경질적으로 학대를 가하며 아이를 방치는 어머니. 내가 생각하는 판에 박힌 범죄자의 가정을 이렇게 화목함과는 거리가 먼 소굴이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쓴 자서전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적 우월감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적어도 내 아이는 이렇지 않으니 다행이다란 안도감이 첫째요,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목표의식이 둘째일 것이라고. 하지만 내 예상은 초반부터 산산조각났다. 수 클리볼드 부부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화목하고 훈육에 대한 철학도 확실했다. 놀러가는 친구네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시청할 영화의 내용까지 조심스레 물어볼 정도로 무관심보다는 극성에 가까웠다. 아이를 '햇살'이라 부를 정도로 아끼고 사랑한 부모, 원칙을 정하고 지키도록 훈육한 보수적인 집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지역 분위기는 흔히 생각하는 악마의 성장 과정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화를 불러일으키는 점은 미디어의 태도다. 마치 신기록을 세우는 스포츠처럼 사망자수를 앞다투어 보도하고, 섣불리 범행 동기를 예측했다. 슈팅게임 '둠(Doom)'의 영향, 학교폭력을 당한 왕따의 복수, 사이비종교나 백인우월주의, 가정 불화. 논리적 근거나 팩트에 기반한 추론이 아닌 그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소설이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참극의 원인은 총기라고 꼬집으며, <볼링 포 콜럼바인> 영화를 찍었다. 딜런이 볼링 수업을 빠지고 총기 난사 사건을 벌였다는 걸 제목으로 뽑았다.) 정작 가해자의 가족을 또 하나의 피해자로 만들면서 말이다. 수 클리볼드는 다양한 전문가를 만나며 조심스레 범죄의 원인을 추리해본다. '트렌치코트 마피아'를 자처한 에릭과 딜런 두 고교생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범죄를 저질렀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에릭의 일기에서는 읽기 힘들 정도로 사악한 폭력과 증오가 끓어오르지만 그래도 에릭의 글은 딜런의 글과 달리 명료하다. 랭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딜런의 글은 뒤죽박죽이고 조리가 없고 구문이나 단어 사용이 엉망이다. 에릭은 사고 자체가 심란하다. 딜러은 사고 과정이 산란하다. 에릭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딜런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였다.

폭력적인 성향의 에릭은 학교에 사람을 죽이기 위해 찾아갔다가 본인도 죽었고, 우울증을 앓던 딜런은 학교에 죽기 위해 갔다가 사람을 죽였다.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겉잡을 수 없이 번졌고, 경악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수 클리볼드는 뇌건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자살은 예방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롭고 힘겨웠지만, 이 사실에서 많은 희망을 얻었다. 모든 자살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좌절하고 손을 놓아버리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그녀는 이 책을 펴냈다. 그녀를 위해, 그녀의 아이를 위해, 그녀의 아이가 죽인 피해자를 위해, 그리고 잠재적인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해.

"연세대 대학원생, 지도 교수 노린 텀블러 폭탄 사건"
"양산 고층아파트에서 시끄럽다는 이유로 작업자 밧줄 끊어 추락사"

 

 

이번달에만 나온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들이다. 총기와 거리가 먼 한국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폭력적인 일들이 만연하고 있다. '분노'에 대한 적절한 해소가 빠진 상태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범죄를 보면 과연 우린 안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심지어, 실제 도로 한복판에서 총격전도 벌어질 정도니 한국도 더이상 총기 사고에서 안전한 국가도 아니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하기 마련이지만, 모두가 타인을 해치거나 자살로 이어지진 않는다. 적절한 조치와 예방만이 이러한 연쇄반응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해결책이다. 이 책이 조금이나마 분노, 우울, 피로, 무력감에 대한 관심과 예방에 도움이 된다면 수 클리볼드의 노력은 성공일 것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자살의 대부분은 방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치명적이다." 딜런의 경우에는 물론 죽겠다는 결정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한장 한장 본인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다 읽고 나니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정말 훌륭한 글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기쁨이 드는 동시에,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해 멍한 상태가 되었다. 성공적인 자녀 양육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실패한 자녀 양육을 피하기위한 조언 정도라도 구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었다. 이상 징후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란 노련한 부모, 심지어 전문가도 어렵기 때문이다. 만연하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내 아이인 것도 두렵지만, 가해자가 될 경우에도 만만치않게 혼란스러울 것 같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나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진다.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세 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따.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

본인만의 세계를 창조한 한 아이를 완벽한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건 오만한 믿음에 불과하다.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대화하며, 나아가 단순히 키가 얼마나 크냐에 주목할 게 아니라 뇌건강에도 신경을 써줘야 한다. 성공적인 양육에 부모의 사랑은 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필요 조건이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따지는 요즘 시대에 행복한 가족을 유지하는 것만큼 축복할 만한 일은 없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표현하고, 따뜻하게 웃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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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시리즈 6
데이비드 파킨슨 지음, 이시은 옮김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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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디자인 및 예술 전문 출판사 로런스 킹(Lawrence King)은 시리즈로 핵심 개념을 정리한 책을 줄줄이 펴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 100가지를 총망라한 시리즈물은 이론을 탄탄히 쌓기 딱 좋아보였다. (아울러 표지 디자인도 매우 매력적!) 건축, 광고, 사진, 예술, 패션. 관심은 있지만 너무나 얕은 지식에 진입장벽을 느꼈지만, 영화만큼은 조금 달랐다. 나름 대학교 교양 강의로 몇몇 개념을 배웠고, 가장 흔하게 시간을 떼우는 취미 생활이 영화인만큼 조금은 덜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120년 영화사를 고작 100개의 키워드로 빠르게 이해한다는 건 오만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대표적인 취미생활이자 일상으로 다가온 영화를 조금 더 깊이 즐길 수 있는 길잡이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물론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선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전문적인 용어들이 자주 등장해 아쉬웠다.)

1895년 50초짜리 활동사진은 이제 3D 입체영상을 넘어 4D 블록버스터를 함께 체험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미국과 유럽으로 양분되던 영화계 힘의 논리는 다양한 제3세계 영역으로까지 다양화되었다. 아카데미 시상식부터 소규모 독립영화제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영화는 대중화되었고, 2017년 오늘도 여전히 수많은 걸작과 망작이 쏟아지고 있다. 환등기, 잔상효과, 키네토스코프에서 시작해 멀티플렉스, 디지털비디오, 컴퓨터 합성영상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따라가다보면 짧지만 폭발적인 영화의 진일보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사례와 생생한 사진들도 가득 담겨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영화관 팝콘을 생각하면.)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의 본질은 특히 이미지다. 움직이는 사진을 보는 원초적인 영화의 정의를 떠올리면 이렇게 다양한 사진 자료의 첨부는 책을 더욱 다채롭게 꾸몄다.

책을 읽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새록새록 영화에 얽힌 추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책으로만 읽던 신비한 해리포터를 거대한 단오극장 스크린에서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위압감과 신비함은 잊을 수 없다. 어찌나 기대를 했으면 개봉 날짜를 당시 버디버디인가, 라이코스인가 비밀번호로 설정해둘 정도였다. 대학교 교양수업 <영화의 이해>에서 발랄한 러시아 교수님이 흥미진진하게 <라쇼몽>을 해설해 주던 것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시험 공부가 더 편했을 텐데.) 한주간의 고된 회사일, 집안일을 마치고 나서인지 꾸벅꾸벅 졸던 심야 영화에도 부모님은 싫지 않은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히 영화가 재밌고, 흥미로운 걸 떠나서 그저 같이 취미생활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고 즐거우셨나보다. 지금은 나란히 푹신한 쇼파에 기대어 극장 동시개봉 IPTV 영화를 보며 야식을 먹는 사소한 시간이 무척 행복하다.

영화만큼 부담없고 가성비가 좋은 취미생활도 없다. 만원 언저리에 2시간 넘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오락거리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간혹 만나는 인생을 바꿀만한 명작을 만나는 재미는 놓칠 수 없다. 물론 영화 자체의 질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영화를 볼 때의 상황, 같이 본 사람, 여러가지가 뒤섞인 추억은 그것만으로도 양질의 추억으로 남는다. 마치 용두사미 반전 영화 <클로버필드 10번지>가 인생을 뒤바꾼 가슴 떨리는 영화로 기억되는 것처럼. 시험을 봐야해서 달달 외우는 입장이 아니라 그저 취미생활로 영화를 맞이하니 편하게 읽고 즐기기 좋은 책이었다. 알면 알수록 더 즐거움이 커지는 건 모든 콘텐츠에 적용되는 말이니, 사소한 촬영 기법, 편집 테크닉, 장르 등을 알아두니 든든하다. 다음에 만날 영화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2%는 더 재밌게 다가올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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