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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은은한 분홍빛의 따스함, '나는 잠깐 설웁다'란 고운 제목에 끌려 시집을 골랐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을 책임지는 시인의 짧지만 강렬한 '시인의 말'에 푹 빠졌다. 그녀는 데뷔 7년 만에 펴낸 시집에 그동안의 기쁨과 슬픔을 꾹꾹 눌러담아 한 권에 묶어냈다. 입덧, 출산, 치질.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새롭게 비틀어 놀랍도록 와닿는 시어들이 연이어 흘러나오는 걸 보니 시집을 든 내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소설처럼 내 눈앞에 이들의 눈물, 아픔, 외로움이 느껴졌다. 생명, 그 자체가 주는 날카로운 고통을 녹여낸 시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삶이 시작되지만 동화처럼 해피엔딩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런 부담 없이 떠난 '소풍'을 말하려다 '슬픔'이 와버린 것처럼.
시인의 말처럼 물집이 아물어가기 위해선 차디찬 이런 시어들의 홍수가 필요할 것 같다. 옛날 고향의 어르신들에게 전해오던 이야기를 주워듣듯이, 어색한 분위기의 겸상 자리에서 다른 생각을 하듯이, 시는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한글의 아름다움에 힘입어 말장난처럼 이어지는 구절들도 인상적이었다. 잠깐의 설움이라면, 기꺼이 감내하겠지만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느낌이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중에 어떤 게 더 난해한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다 봄이 오겠어'란 말처럼 슬픔을 터뜨리고 풀어내다 보면 어느덧 분홍빛 행복이 곁에 있을 것이다.한편 "산문은 내가 주도적으로 글을 써야한다면, 시는 글이 나를 써내려간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시의 세계는 여전히 신비롭고, 궁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