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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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타인의 불행을 개인의 행복으로 치환하는 건 올바른 일일까? 타블로의 솔로 앨범 <열꽃>을 듣고 난후 느낀 감정이었다. 타블로는 '타진요'의 악의적인 학력 의혹 제기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고통의 흔적을 예술로 처연하게 승화시킨 노래는 놀라움 그 자체였고, 역대급 명반에 꼽을 정도로 들으며 행복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충격적이고 소름돋는 작품이었다. 단순히 왕따나 폭력사건일줄 알았던 가해자의 범죄명은 충격적인 총격 사건이었다. 너무나 순진한 표정의 어린아이, 즉 1999년 미국 콜럼바인고등학교를 지옥으로 만든 살인자가 표지에 있었기에 섬뜩하고 강렬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담담히 아픔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수 클리볼드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과연 안도감이 들 수 있을까? 내 아이는, 내 친구는 흔히 말하는 악마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녀는 책의 처음을 총격 사건 당일의 생생한 모습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사건의 전말을 모를 때는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길 기도했지만, 점차 뉴스를 접할 때마다 오히려 아이가 더 많은 이를 죽이기 전에 죽길 기도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예의'를 갖춘 조심스런 참회록이다. 딜런 클리볼드가 사건을 벌이기까지의 17년, 사건 이후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17년을 차분하게 돌이켜보며 적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아이의 범죄를 막을 수 있었을까 고뇌하면서. 고통, 슬픔, 충격이 뒤섞인 감정은 자책, 수치심, 미안함으로 깊어졌고 나아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를 되찾는 과정은 숭고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미화하거나, 범죄행위를 합리화하기보다는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충격적인 사건의 후기는 불편하지 않았고, 그저 시간떼우기용 가쉽거리가 아닌 생각하고 고민할 화두를 여러개 던져주었다.

남자들은 아이가 자라서 어떤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들은 자기가 기억하는 아이를 잃은 것을 슬퍼하곤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차이가 확연했다. 나는 딜런이 아기일 때, 아장아장 걸을 때, 어린아이일 때, 십대일 때의 기억을 끝없이 되새겼지만 톰은 딜런이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게 된 일들에 매달렸다. 딜런의 사라진 미래에 집착하는 게 싫었다. 마치 딜런이 죽어서도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길 바라며 압박하는 듯 여겨졌따. 우리의 다툼의 요인들이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우리는 지독한 폭풍 속에 등을 맞대고 한데 묶여 있었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인 것이 혼자인 것보다 더 괴로울 때도 있었다.

흔히 범죄의 대다수는 성장기 가정 불화가 원인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폭언과 욕설을 일삼는 알콜중독자 아버지, 신경질적으로 학대를 가하며 아이를 방치는 어머니. 내가 생각하는 판에 박힌 범죄자의 가정을 이렇게 화목함과는 거리가 먼 소굴이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쓴 자서전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적 우월감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적어도 내 아이는 이렇지 않으니 다행이다란 안도감이 첫째요,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목표의식이 둘째일 것이라고. 하지만 내 예상은 초반부터 산산조각났다. 수 클리볼드 부부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화목하고 훈육에 대한 철학도 확실했다. 놀러가는 친구네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시청할 영화의 내용까지 조심스레 물어볼 정도로 무관심보다는 극성에 가까웠다. 아이를 '햇살'이라 부를 정도로 아끼고 사랑한 부모, 원칙을 정하고 지키도록 훈육한 보수적인 집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지역 분위기는 흔히 생각하는 악마의 성장 과정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화를 불러일으키는 점은 미디어의 태도다. 마치 신기록을 세우는 스포츠처럼 사망자수를 앞다투어 보도하고, 섣불리 범행 동기를 예측했다. 슈팅게임 '둠(Doom)'의 영향, 학교폭력을 당한 왕따의 복수, 사이비종교나 백인우월주의, 가정 불화. 논리적 근거나 팩트에 기반한 추론이 아닌 그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소설이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참극의 원인은 총기라고 꼬집으며, <볼링 포 콜럼바인> 영화를 찍었다. 딜런이 볼링 수업을 빠지고 총기 난사 사건을 벌였다는 걸 제목으로 뽑았다.) 정작 가해자의 가족을 또 하나의 피해자로 만들면서 말이다. 수 클리볼드는 다양한 전문가를 만나며 조심스레 범죄의 원인을 추리해본다. '트렌치코트 마피아'를 자처한 에릭과 딜런 두 고교생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범죄를 저질렀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에릭의 일기에서는 읽기 힘들 정도로 사악한 폭력과 증오가 끓어오르지만 그래도 에릭의 글은 딜런의 글과 달리 명료하다. 랭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딜런의 글은 뒤죽박죽이고 조리가 없고 구문이나 단어 사용이 엉망이다. 에릭은 사고 자체가 심란하다. 딜러은 사고 과정이 산란하다. 에릭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딜런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였다.

폭력적인 성향의 에릭은 학교에 사람을 죽이기 위해 찾아갔다가 본인도 죽었고, 우울증을 앓던 딜런은 학교에 죽기 위해 갔다가 사람을 죽였다.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겉잡을 수 없이 번졌고, 경악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수 클리볼드는 뇌건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자살은 예방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롭고 힘겨웠지만, 이 사실에서 많은 희망을 얻었다. 모든 자살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좌절하고 손을 놓아버리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그녀는 이 책을 펴냈다. 그녀를 위해, 그녀의 아이를 위해, 그녀의 아이가 죽인 피해자를 위해, 그리고 잠재적인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해.

"연세대 대학원생, 지도 교수 노린 텀블러 폭탄 사건"
"양산 고층아파트에서 시끄럽다는 이유로 작업자 밧줄 끊어 추락사"

 

 

이번달에만 나온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들이다. 총기와 거리가 먼 한국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폭력적인 일들이 만연하고 있다. '분노'에 대한 적절한 해소가 빠진 상태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범죄를 보면 과연 우린 안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심지어, 실제 도로 한복판에서 총격전도 벌어질 정도니 한국도 더이상 총기 사고에서 안전한 국가도 아니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하기 마련이지만, 모두가 타인을 해치거나 자살로 이어지진 않는다. 적절한 조치와 예방만이 이러한 연쇄반응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해결책이다. 이 책이 조금이나마 분노, 우울, 피로, 무력감에 대한 관심과 예방에 도움이 된다면 수 클리볼드의 노력은 성공일 것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자살의 대부분은 방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치명적이다." 딜런의 경우에는 물론 죽겠다는 결정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한장 한장 본인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다 읽고 나니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정말 훌륭한 글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기쁨이 드는 동시에,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해 멍한 상태가 되었다. 성공적인 자녀 양육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실패한 자녀 양육을 피하기위한 조언 정도라도 구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었다. 이상 징후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란 노련한 부모, 심지어 전문가도 어렵기 때문이다. 만연하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내 아이인 것도 두렵지만, 가해자가 될 경우에도 만만치않게 혼란스러울 것 같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나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진다.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세 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따.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

본인만의 세계를 창조한 한 아이를 완벽한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자식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건 오만한 믿음에 불과하다.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대화하며, 나아가 단순히 키가 얼마나 크냐에 주목할 게 아니라 뇌건강에도 신경을 써줘야 한다. 성공적인 양육에 부모의 사랑은 충분 조건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필요 조건이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따지는 요즘 시대에 행복한 가족을 유지하는 것만큼 축복할 만한 일은 없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표현하고, 따뜻하게 웃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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