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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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하고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다아시. 활발하고 매력적이며 모두에게 인기 있는 빙리. 차도남 대 엄친아. 지고지순한 순정파에 차분하고 가정적인 제인. 당차며 자기 생각을 똑 부러지게 쏘아붙이는 왈가닥 엘리자베스. 청순녀 대 알파걸. 당신이 남자라면, 여자라면 과연 어떤 이에게 사랑을 고백할 것인가? 어려운 선택의 순간은 18세기 영국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18세기 여성들의 사랑과 삶을 전면에 다룬 제인 오스틴은 여섯 편의 소설은 물론 영화화된 <비커밍 제인>, <브릿지존스의 일기> 등으로 21세기에 환생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로맨스 소설의 대중화를 이끈 그녀는 여전히 영국을 넘어 전 세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그녀는 뻔하고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닌 신분, 결혼 제도, 남녀 간 심리와 사랑을 <오만과 편견>이라는 걸작에 녹여냈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빠질 때 각각 성별의 차이인지 몰라도 너무나 쉽게 오만과 편견에 빠진다. 남자는 여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오만에 빠져 무례한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여자도 남자의 첫인상에 쉽게 좌지우지되며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편견에 사로잡혀 남자를 바라보는 허점을 내보이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도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모두 오만편견에 사로잡혀 핑크빛 사랑에 멀고 먼 길을 돌아서 도착한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부인, 위컴의 방해에 점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불신에 사로잡혀 미워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도착하는 것은 결국 두 사람의 소통과 용기다.

 

신분 상승에 목매는 베넷 부인의 영양가 없는 넋두리도, 허풍쟁이 사기꾼 위컴의 무의미한 정보도 둘 사이를 가깝게 하지 못했다. 다아시는 첫 번째 청혼에 실패한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머무르려 애썼다. 여우 같은 엘리자베스의 능수능란한 밀당에 흔들리며 다아시는 결국 다시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다. 이런 남녀의 미묘한 심리를 들여다보는 재미는 마치 몰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여자 대부분은 차도남,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다아시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만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남자라면 대부분 사교적인 빙리를 선호하겠지만 결국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과 결합, 화합이 중요한 결혼 생활에서 과묵하고 소나무처럼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가 이상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문득 친구가 많은 남편은, 그리고 그중에 술을 좋아하는 친구가 많은 남편은 똥차 중의 똥차다.’라는 현실 생활의 교훈이 떠올랐다. 말을 줄이고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사려 깊게 말해야 사랑받겠구나 새삼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과연 다아시가 권위 있는 가문에 돈 많은 아들이라면 맹랑한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스가 뻥 차버린 콜린스를 붙잡은 샬롯의 사랑은 단순히 허영이며 그릇된 사랑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 <오만과 편견>18세기 영국 소설이지만 고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2012년 대한민국에서도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아 보였다. 특히 결혼 제도에서 집안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은 베넷 부인과 다를 게 없지 않았다. 최근 듀오나 결혼정보업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학벌, 재산, 지역 등 수십 가지 항목으로 등급을 매기는 일을 보면 영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신데렐라 같은 결합을 막기 위한 과학적인 벽이 생겼을 뿐이다. 물론 샬롯의 선택은 상당히 계산적이고 수단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도 많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며 동생들의 사교게 진출을 가로막는 집안의 천덕꾸리기 신세다. 과연 그녀의 선택이 단순히 돈만 따진 선택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최우선이 되는 사회적 풍조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배제된 선택만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저 재력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 외모, , 성격, 가족 관계, 취미처럼 고려 사항이 될 수 있는 하나의 항목일 뿐이다. 나는 샬롯을 비난하는 엘리자베스 자신도 다아시가 궁핍하고 나이 많은 과부였다면 맨 처음 태도처럼 상종도 못 할 인간이라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사랑만으로 살 수 없듯이 결혼은 현실이다. 개인마다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무게추가 달라지고 중요시하는 비율이 달라질 뿐 재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외적, 내적, 사회적 요소가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한 샬롯을 무작정 비난하지는 못하겠다.

 

소설을 덮을 때 사실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침 드라마 시월드의 끝판 왕보다 무서운 샬롯 부인의 거센 반대가 어영부영 뭉개지고, 둘 사이를 갈라놓던 수많은 장애물이 너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기분이랄까? 마치 Part 2.가 남아있는데 치트키를 써서 엔딩을 봐버린 느낌이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 너머에 그들의 둘러싼 사회적 장애물을 하나씩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할 부분이 쏙 빠졌다. 이것은 결혼이 해피엔딩이자 사랑의 최고점이라는 18~19세기 독자들의 인습적인 기대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결혼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21세기 인간인 나에게는 조금 허무하고 심심한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끼리끼리 만난다.’라는 불변의 진리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바로 고집불통 망나니 리디아와 교활하고 찌질한 위컴의 결혼을 보면 알 수 있다. 리디아가 등장하는 부분은 어김없이 한숨과 짜증이 밀려왔다. 실제 여동생이었다면 내가 먼저 속 터져 죽을 것 같은 캐릭터였는데 마지막 축하 편지도 압권이다.

 

우리는 남의 도움 없이 살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할 거예요. 일 년에 3,4백 파운드 정도면 어떤 자리라도 괜찮겠지만, 형부한테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 정도면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치가 없고 무례한데 리디아가 뜬금없이 위컴과 결혼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개념 커플덕분에 주인공의 사랑이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효과도 있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I love you, ardently."를 멋지게 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두꺼운 <오만과 편견>의 가족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사실 이상형 남자를 꿈꾸는 꿈 많은 소녀가 아닌 촐싹거리는 25살 남정네라 다시 이 두꺼운 책을 펼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연애에 대한 설렘과 떨림이 여성의 몫이라는 나의 오만한 편견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예절이라든가, 경의라든가, 괜스러운 친절 같은 것이 지긋지긋했던 거에요. 언제나 당신의 인정만 받으려고 말을 건네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이 나 있어요. 제가 그런 여자들하고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흥미가 생겼던 것이죠. 당신이 진정으로 상냥한 분이 아니었다면, 그 때문에 절 미워했을 거예요. 스스로를 감추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당신의 감정은 늘 고귀하고 정당했어요. 마음속으로는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철저히 경멸했던 거지요. 자 어때요, 설명하는 수고를 제가 덜어주었지요. 정말이지 이모저모 따져보아도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히 당신은 저한테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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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글.사진 / 예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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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여행이 무의미한 사진만 남는다면 무언가를 찾아 떠난 여행은 진한 향기를 남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서 타인에게 익숙한 공간을 철저하게 낯설게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은 추억을 남기거나 혹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걸었던 길은 아마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영화'라는 키워드를 찾아 떠난 순교자의 길이었을 것이다. '연인들의 약속, 기억의 흔적, 시간의 자취'라는 세 갈래 묶음에는 영화의 명장면이 고르게 나누어져 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오스트레일리아 울룰루, <원스>의 아일래드 더블린,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대만 단수이, <맘마 미아>의 그리스 스키아토스 섬. 이동진이 조근조근 눌러 쓴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3D 입체 영상이 펼쳐진다.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과 어둠 속에서 그걸 지켜보는 나, 그리고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음악. 여행을 떠나 문득 마주치는 순간 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덧입혀가는 그의 걸음은 지켜보며 내 가슴은 뛰었다. 떠나고 싶다. 그리고 내 추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 공간, 시간을 다시 느끼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평범한 소년은 공부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수능특강> 대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읽고 있었다.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닭장같은 교실이 아닌 홀로 호주 울룰루를 향해 이미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가볍고 공허하고 읽고 난 뒤 텅 빈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책은 끝까지 읽고야 말았다. 첫사랑이란 한 번의 홍역을 치르고 난 뒤 읽는 연애 소설은 확실히 달랐다. 열일곱 소년소녀 아키, 사쿠의 흔해빠진 불치병 이야기마저 가슴 깊이 다가왔다. 백혈병을 앓는 아키를 사랑하는 사쿠는 이미 모의고사를 앞둔 한국 학생으로 변해있었다. 마지막을 알고 달리는 여행마저 아름다워 보였다. 사랑이란 그 나이 그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법이다.

 

"눈을 감으면 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라. 너와의 추억이 내 인생을 빛나게 해줬어. 곁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너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을 잊지 않을게." 십 수년 세월의 바다를 건너, 남겨진 사람의 마음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은 울룰루에서 오차 없이 고스란히 겹친다.

 

책을 덮고 야자를 튀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조만간 상영관에서 사라질 것이란 소식을 들었다. 두통이 심해 병원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두정거장을 뛰어 메가박스로 몰래 잠입했다. 책을 읽고 슬픔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라고 합리화시키기엔 나는 책에, 그리고 영화에 푹 빠졌다. 책의 감동을 그대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 머리 속 주인공은 더욱 연약하면서 아름다웠고, (혹은 내가 사랑하는 여학생의 새하얀 얼굴을 닮았을 거다.) 상상으로만 다녀온 일본의 여름은 더 푸른 빛깔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라이 켄의 <눈을 감고>가 흘러나오는 울룰루는 달랐다. 차가운 돌산이 아닌 흙빛을 머금은 평평한 꼭대기. 감성의 꼭대기에서 결국 울컥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8년이 흐른 지금 솔직히 영화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어떤 문학 작품보다 감동적이던 이야기마저. 하지만 여전히 가만히 눈을 감고 영화를 떠올리면 <눈을 감고>가 내 귓가에서 맴돈다. 추억에 발목 잡혀 과거에 얽매여 산다고 말해도 좋다. 그때 그 시절 보잘없는 내 사랑은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 속에서 나는 아파하며 성장했으니....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를 보고 싶다. 천방지축 예비 신부가 방방곡곡 뛰어다니며 헤엄쳤던 그리스에 가고 싶다. 예배당에 오붓하게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사랑을 외치고 싶다. 아마 그 때는 그곳이 내 사랑, 아니 내 인생의 중심이겠지? 여행과 책, 음악, 그리고 영화. 추억을 먹고 사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물론 이 모든 기억의 조합 과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 사람, 우리 사랑이 꼭 필요하다. 떠나고 새기자.

여행자들은 세상의 구석구석을 떠돌며 기어이 흔적을 남겼다. 어떤 연인은 바위에 하트 문양을 새기고, 어떤 연인은 철망에 자물쇠를 채운다. 어떤 이는 모래밭에 돌탑을 쌓고, 또 어떤 이는 나무에 동전을 박아 넣는다.

여행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허망하다. 가져온 사진 몇 장의 희미한 평면 추억과, 두고 온 잡다한 물건들의 잊혀져가는 잔영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렀던 누군가의 순간은 영겁 속에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그리고 무너진 돌탑과 희미해진 낙서, 녹슨 자물쇠와 닳아버린 동전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운 여행자의 눈동자를 텅 빈 세월의 이명 속에서 무심하게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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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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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장 인기 있는 젊은 작가 김애란. 그녀의 글, 특히 단편에는 누구나 공감 가능 한 소재가 절절하게 녹아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묘한 매력을 느끼며 이 조그마한 글 뭉치에 끌리나보다. 간결한 활자 안에 사람들의 추억과 연민이 스며들어있어 있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비록 그것이 조소일지라도 '아버지'와 '자취방'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되는 <달려라 아비>는 끊임없이 달렸다. 9편의 단편을 묶은 이 책은 신기하게도 닮았다. 숨기고 싶은 아픔과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작가는 당당하게 맞선다. "그래서 어쩌라고?" 세상에 태어나 겪는 감정들에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은 제 나름대로 방식을 찾아 나선다. 벽면에 정직하게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덧붙여 나가거나, 수족관 안에서 끊임없이 잠수를 하거나, 잠 못 드는 수만 가지 이유를 떠올리거나, 아니면 스카이 콩콩을 타거나!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 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백십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깜깜한 어둼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야광 바지가 언제나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뛴다. 물론 아무도 박수 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려라 아비> 中

 

김애란 소설 속 아버지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쁘면서 불행한 사람이기도 하고, 직장이 아니라 공원에 나가 있기도 한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무런 목적 없이 앉아계시기도 하고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썰을 풀어내시기도 한다. 물론 '넌 인마, 문장이 안돼!'라는 독설을 함께 날리시며 말이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항상 외롭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홀로 짊어지고 '남자'라는 하나의 굴레에 얽매여 끙끙 앓는 것마저 독고다이다. 그 무거움에 질려 누군가는 도망가고 다른 누군가는 도망가지 못해 버틴다. 가족이라는 하나의 신념을 가슴에 품고. 물론 그것도 아닌 비겁한 남자들도 많은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문득 아버지와 단둘이 술을 마신 적이 언제인가 기억이 나지 않는 내 모습도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소주 한 잔을 하고 싶어 외식하러 가는 길엔 항상 걸어가신다. 물론 혹시나 몸에 좋지 않은 술을 아들에게 권하기 미안하신지, 아니면 부끄러우신지 당당하게 권하지도 못하신다.

"한잔할래?", "몸 생각해서 술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

 그렇게도 밖에선 술을 마시며 원샷을 외쳐대는 나도 뭐가 부끄러운지 아버지, 아니 아빠 앞에서는 홀짝홀짝 잔에 입만 대곤 말았다. 왜 나는 아버지의 수줍은 대화 신청을 더 수줍게 거부하고 도망쳤던 것일까? 아버지는 내게 '사내 대 사내'로 소통하고 싶어하셨다. 비록 사내답지 못한 방식이긴 하지만.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피해 달리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애써 자위하면서 나는 부지런히도 달리다. 멀어진다. 아니 사실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싶어 나는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허연 매리어스가 더 늘어나기 전에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 잔 꼭 마셔야겠다. 너무 TV 속 이상적인 모습일까? 차라리 안방에서 나란히 쥐포와 오징어를 구워서 질겅질겅 씹으며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항상 소나무처럼 커 보였던 아버지가 더 이상 작아지시기 전에. TV 드라마를 보며 엄마보다 더 울컥해서 애써 담배를 핑계로 자리를 뜨는 아버지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中

 

대학교 신입생 시절 나는 공을 차고 술을 마셨다. 문득 내가 돌아가야 할 수원은 신촌에서 원주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어렵사리 데이트하러 간 친구에게 부탁해 고시원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설렜다. 편안하지만 익숙함에 질린 집이 아닌 공간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술기운이었나 보다. 발도 편하게 못 뻗고 누워야 하는 (아쉽게도 내 친구의 경험이다. 나는 쭉 뻗을 수 있었다.) 좁디좁은 방 안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어지럽혀진 내 방이 그리웠다. 공동 샤워실 사용은 박태환의 수영 경기 스타트보다 눈치 싸움이 치열했고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조용했지만 조용하지 않았다. 적막 속에도 건너편 방의 사생활은 여과 없이 벽면을 타고 흘러 넘어왔고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어느덧 대학교 3학년. 군대를 다녀오고 전공 수업을 핑계로 가까운 거리에 자취방을 구했다. 할머니가 살다가 돌아가신(돌아가신 그곳이 고향인지, 하늘나라인지 옆집 할머니의 수다로 얼마 전에 알았지만.) 15평짜리 원룸이었다. 대구 기온을 뛰어넘는 섭씨 38도의 찜질방 수준의 바닥, 곰팡이가 하얗고 까맣게 알록달록 피어나는 천장, 악 소리가 나게 뜨겁거나 혹은 헉 소리가 나게 차가운 물만 나오는 샤워기. 시간이 흐를수록 단점들은 보였지만 나는 꿋꿋이 버티고 적응해나갔다. 신선이 된 기분이랄까? 요리에 취미가 없는 20대 중반 남성에게 식사는 생존이었다. 자연스레 3분 요리에 내 건강한 몸을 맡기고 나는 아직 돌도 씹어먹을 나이라며 합리화를 시켰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여자친구도 있고 친구들과 바쁘게 살아갔지만 조용한 방에서 눈을 감고 뜨는 순간 나는 혼자였다. 문득 고시원의 시끄러움, 번잡함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편의점은 내게 일상적인, 아니 필수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GS25 문을 열고 들어가 삼각김밥 코너를 지나간다. 몸에 좋지 않은 불량 쌀덩어리란 뉴스를 스마트폰에서 본 지 얼마 안 돼서 내려놓는다. 1+1 초코 우유를 집어들었다가 145Kcal라는 글자가 '접근금지'로 느껴져 손을 뗀다. 깔깔거리며 라면에 밥을 말아 먹는 고등학생 무리를 보며 컵라면도 유심히 살펴본다. 수많은 종류 탓에 우유부단한 나는 결국 고르지 못한다. '수입 맥주 특별전!' 광고에 눈이 번쩍 뜨이지만 혼자 궁상맞게 무슨 술이냐는 생각과 함께 아직 냉장고에 따지도 않은 막걸리도 생각났다. 자연스레 나는 다시 빙빙 돈다. 같은 공간을 멍하게. 쓰지도 않을 애물단지 콘돔, 집에 하나 있지만 꼭 사두어야 할 것 같은 칫솔, 달지 않고 딱딱해만 보이는 초록색 바나나 덩어리도 지나간다.

 

연금복권을 고르며 일확천금을 1초간 꿈꿔보지만, 현금결제만 되는 한계로 꿈마저 거기서 그친다. 결국, 맥반석 계란 두 알과 옥수수 수염차를 계산한다.

"천팔백 원입니다. 포인트카드 있으세요?"

얼마 전 여자친구에게 받은 포인트카드에 쥐꼬리만 한 1,2점을 축적하고 나는 기분 좋게 돌아선다. 나는 목 막히는 계란과 그걸 뚫어줄 물을 산 게 아니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 나왔듯이 '물건이 아니라 일상을 구매하게 된다는 마음'에 안도감이 든다. 대신동인지 봉원동인지 아직도 정확히 주소를 모르는 15평 공간에 사는 칙칙한 남학생이 아니라 평범한 소비자이자 서울시민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말이다. 편의점에 필요한 것이 있어서 가는 걸까? 편의점에 가니 필요한 것이 생기는 것일까? 내가 산 것은 외로움을 달래줄, 아니 잠시나마 잊게 해줄 마취제였다. 문득 엄마, 아빠와 함께 홈플러스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자연스레 먹었던 빨강 어묵 꼬치들이 떠올랐다. 마취가 이제는 더 이상 소용없나 보다.

나는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물안경을 벗어던졌다. 말도, 울음도 아닌 숨소리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휘파람을 처음 배워보는 아이처럼, 온전한 음(音)이 되지 못한 서툰 쇳소리가 목구멍 위로 쏟아졌다. 나의 몸은 삐걱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수조 안에 얼굴을 박았다. 내 얼굴은 물에 뜬 가면처럼 뒤집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물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수조 안의 물고기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아빠, 아빠, 아빠, 아빠‘하고 있었다. 물고기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빠‘들이 수천개의 공깃방울이 되어 보글보글 올라왔다. 나는 허둥대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얼굴 아래로,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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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 - 미치도록 인생을 바꾸고 싶은
임승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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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5살이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부러운 나이,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한없이 부끄러운 나이로 청춘의 꼭짓점에 서 있다. 마스코트 호돌이를 벗 삼아 올림픽 때 태어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경험한 세대다.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추억을 공유한 우리는 과연 2012년 어떤 모습일까? 무기력한 88만 원 세대, 눈은 높고 나약한 의지를 지닌 마마보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20대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한없이 어둡고 안쓰럽다. 물론 사회 구조가 인간 개개인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세상에서 높은 실업률 문제, 스펙 쌓기 열풍의 책임을 우리 온전히 ‘청춘’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정해진 길을 따라 ‘빠르게’ 달리기만 했던 우리도 이러한 성공 불감증에 자유로울 순 없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속도에만 목메는 질주는 너무나 불안하다. 빠르게 도착한 길이 나의 길이 아니라면? 남을 짓밟고 모두가 갈망하고 부러워하는 위치에 올라서도 내가 허무하고 불행하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는 사회 각층에서 타인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청춘들을 소개하는 행복 전도서다. 물론 행복의 정의나 기준, 도달하는 법이 아닌 자기 가슴 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는 정도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욱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인터뷰, 내용은 가볍지만 깊이는 절대 가볍지 않은 짧은 글이 더욱 와 닿았다. 나는 사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고 따뜻한 문체 속에 담긴 저자의 위로에 놀라긴 했지만 공감하진 못했다. 김난도 교수 열풍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잘 포장된 자기 계발서정도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지금 겪는 아픔은 누구나 당연히 경험한 일이며 기성세대가 이겨낸 것처럼 인내하고 노력한다면 해결될 문제’라는 식의 조언으로 저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인생 선배, 아니 삐딱하게 바라보면 고리타분한 꼰대의 따끔한 충고가 그저 잔소리로 들리는 반항적 시기라 그럴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청춘은 절대 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춘’이 들어간 책은 당장 접고 도서관 밖 세계로 나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는 ‘청춘’이 아닌 ‘딴짓’에 파란색으로 강조되어있으니 조금은 예외일까? 방황하고 흔들리는 청춘을 보내는 다양한 사람의 인터뷰는 내 인생의 좌표 위에 희망이란 한 줄기 윤활유로 작용했다. 공학박사 겸 가수 루시드 폴, 가출 정학소녀 겸 작가 김혜나, 유학준비생 겸 고대녀 김지윤 등 11명의 용기 있는 이들은 객관적인 ‘성공’과는 조금은 거리가 멀지만, 주관적인 ‘성공’에는 한 걸음 다가갔다.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길에서 과감하게 ‘딴짓’을 하며 하지만 진짜 원하는 행복에 조금 더 가까이 갔기에 후회나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들이 부러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금 내 삶을 돌이켜보았다. 나는 과감히 교문 밖을 뛰어나갈 용기도, 타인의 시선과 잣대에서 벗어날 자신도 없는 ‘기업 맞춤형 휴머노이드’일 뿐이었다. 항상 생존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공부했고 그렇기에 즐거움보다는 버거움의 몫이 컸다. 거울 앞에 선 나는 여행, 운동이란 일시적인 마취제를 주사하며 다시 쳇바퀴를 부지런히 굴리는 햄스터의 모습이었다. 책장을 덮고 20년 후 모습을 상상해보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렇게 ‘살아내기’보다 ‘살아지는’ 삶을 산다면 성공이란 봉우리 최정상에 올라도 희열이나 기쁨보다는 허무함에 사로잡혀 괴로워할 내가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책의 부제처럼 ‘미치도록 인생을 바꾸고’ 싶다. 그러려면 역설적으로 미치도록 매달리기보단 조금 힘을 빼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담보삼아 현재 눈앞에 다가온 행복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조금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의 좌표를 찾아가야겠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말고 내가 진정 바라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잊지 않겠다. 그것이 여행이든 독서든, 아니면 진짜 말 그대로 뒹굴 거려도 한 박자 쉬면서 내 가슴속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겠다. 내가 좋아서 하는 취미마저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스펙의 일부분으로 써먹기 위해 머리 굴리지 말고 가슴이 이끄는 대로 말이다.

 

그렇지만 책 하나 읽고 25년간 몸에 각인된 여유로움에 대한 막연한 초조함, 뒤처짐에 대한 만성적인 불안감이 없어지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생각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고 나아가 청춘, 그리고 삶을 움직인다면 당당하게 ‘내 인생의 바꾼 책 100권’ 리스트에 저자 임승수 씨의 책을 올려놓겠다. 어렵고 불편하겠지만 죽어라 달리지 말고 잠시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성공이란 하나의 막연한 목표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변명하며 외면했던 ‘더불어’ 삶이란 가치에도 관심을 둬야겠다. 그런 점에서 다시 한 번 인상적이었던 인생의 조언, 누군가가 보기에는 한없이 미련하고 무기력하지만 내게는 충격적인 한마디를 옮겨 적어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뭔가를 한다는 것은 항상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 실패를 감수할 대 보통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우리에게는 이보 전진이나 일보 후퇴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보 전진을 위한 반보 후퇴’라는 말을 씁니다. 어쨌든 반보씩은 전진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 붕가붕가레코드 고건혁

 

그래. 뭐라도 되겠지. 아니 실패하고 쓰러져도 안 굶어 죽으니까 쫀쫀하게 살지 말자. 청춘의 유일한 특권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고, 흔들리고 아파도 용서받을 수 있는 시기란 것이다. 조금 더 흔들리고 조금 더 아파하자. 지금의 불안함이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이것도 진정한 나의 행복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란 것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인생의 멘토로서 ‘딴짓’을 권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딴짓’을 저질러 보겠다. 성공할 자신은 없지만, 분명히 재미는 있겠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뭔가를 한다는 것은 항상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 실패를 감수할 대 보통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우리에게는 이보 전진이나 일보 후퇴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보 전진을 위한 반보 후퇴’라는 말을 씁니다. 어쨌든 반보씩은 전진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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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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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 씁쓸한 수치다. 세계 최강국, 자본주의의 화려한 나라, 자유의 상징 성조기가 휘날리는 미국보다 높다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다. 바로 '사회 정의 인식'에서 10명 중 7명이 한국 사회는 불공정, 부조리하다고 느꼈다는 객관적인 지표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개인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시샘 어린 눈초리와 배가 먼저 아픈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차분하게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속도'에만 몰두한 나머지 '방향성'은 상실한 2012년 대한민국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 사회에 폭발적인 담론을 형성한 마이클 샌델이 신간과 함께 동양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한국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소규모 강연, TV 토론, 심지어 프로 야구 시구까지 하며 (그것도 인피니트 자동차를 후원받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롤즈의 제자! 샌델,산델,샌들...이름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던 초기와는 달리 엄청난 인기와 유명세를 누리는 그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신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전작과 비슷하게 사례 위주와 논증 단계로 이어진다. 2012년 하버드 봄 학기 <MARKETS & MORALS> 강의의 내용을 다룬 책인데 시장에서 도덕의 역할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토론의 장을 펼친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에서 새치기, 인센티브, 명명권처럼 차가운 경제학 이론이 과연 따뜻한 도덕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근본적 회의와 물음이 주된 내용이다. 책에서는 미국의 경우를 대부분 다루고 있지만, 이는 한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와 일정 부분 공통분모를 가진다. 우리는 흔히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불쾌함을 느끼며 이를 금기시하는데 최근 시장경제의 주된 관심거리는 이와 다르다. 진료 예약권을 사고팔고, 놀이공원부터 의회 공청회까지 줄서기 도우미는 성행한다. 나아가 생명을 담보로 말기 환금이라는 독특한 유형의 보험도 등장했으며 진심이 담긴 사과나 축사도 대행업체가 존재하는 현실이다. 바로 효율적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면서 말이다.

 

불평등과 부패. 두 가지 근본이념이 이제는 '돈'이라는 하나의 재화로 천편일률적으로 서서히 이해 가능한 가치로 변질되고 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가치마저 자본에 의해 가치의 우위가 정해지고, 이를 당연한 지불 대가로 생각하는 흐름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는 샌델의 논리에 동감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무뎌지고 쉽게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10년 전만 해도 야구 중계를 보면서 수많은 광고가 쉴 새 없이 브라운관을 뛰어다니리라 생각한 적이 있는가? 최근에는 단순히 스트라이크, 볼, 아웃만 표시하던 점수판만 있다면 오히려 어색하게 느낄 지경이다. 이러한 불평등, 부패에 대한 복종, 무감각은 스포츠를 넘어 인간 자체의 본질에까지 침투한다면 그저 웃어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인간의 죽음을 담보로 한 상품까지 나온 마당에 서서히 인간 의식에 침투하는 '도덕, 윤리의 현금화'는 상상 속의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지나치게 경제 인센티브에 대해 비약적으로 비판의 의식을 가한 면도 있어 보인다. 어차피 자아를 지니고 다양한 욕구를 가진 인간은 사회 속에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은 감성적 끌림과 이성적 판단의 조화를 통해 개인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존재기 마련이다. 한정된 재화, 욕구의 유사성, 인간 자체의 선호도라는 불가피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보면 '돈'을 통한 지불은 가장 공정하고 (물론 기득권층이 아닌 입장에서는 가장 불공정하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의사선택으로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또 이러한 교환 가치를 지니는 돈이 적법하고 공정한 절차를 밟아 획득한 것이라면 이를 비난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개인의 노력과 정당한 가치 지불에 대한 시샘과 질투는 무의미하며 오히려 불평등한 것이다.

 

하지만 샌델의 말처럼 최소한의 마지노선, 인간 사회의 유지를 위한 저지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의료, 교육과 같은 영역은 보호가 필요하다. 단순히 빈부 격차로 서비스에 우위를 가르고 차별적인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적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회의 평등을 위해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이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 장까지 샌델은 항상 교묘하게 자신의 주장을 토론 속에 숨기고 있다. 물론 이를 간파하고 깊이 있게 받아들이는 현명한 독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그는 바랄 것이다. 공화정에 적합한 열린 토론을 즐기는 시민을 배양하는 그의 노력은 2012년 한국에서도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시민에게 공동체적 생활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배경,사회적 위치, 태도,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매일 생활하며 서로 마주하고 부딪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고 이를 놓고 협상하고 공공선에 관심을 쏟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도덕적, 시민적 재화는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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