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글.사진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목적 없는 여행이 무의미한 사진만 남는다면 무언가를 찾아 떠난 여행은 진한 향기를 남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서 타인에게 익숙한 공간을 철저하게 낯설게 만난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은 추억을 남기거나 혹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걸었던 길은 아마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영화'라는 키워드를 찾아 떠난 순교자의 길이었을 것이다. '연인들의 약속, 기억의 흔적, 시간의 자취'라는 세 갈래 묶음에는 영화의 명장면이 고르게 나누어져 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오스트레일리아 울룰루, <원스>의 아일래드 더블린,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대만 단수이, <맘마 미아>의 그리스 스키아토스 섬. 이동진이 조근조근 눌러 쓴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3D 입체 영상이 펼쳐진다.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과 어둠 속에서 그걸 지켜보는 나, 그리고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음악. 여행을 떠나 문득 마주치는 순간 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덧입혀가는 그의 걸음은 지켜보며 내 가슴은 뛰었다. 떠나고 싶다. 그리고 내 추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그 공간, 시간을 다시 느끼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평범한 소년은 공부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수능특강> 대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읽고 있었다.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닭장같은 교실이 아닌 홀로 호주 울룰루를 향해 이미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가볍고 공허하고 읽고 난 뒤 텅 빈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책은 끝까지 읽고야 말았다. 첫사랑이란 한 번의 홍역을 치르고 난 뒤 읽는 연애 소설은 확실히 달랐다. 열일곱 소년소녀 아키, 사쿠의 흔해빠진 불치병 이야기마저 가슴 깊이 다가왔다. 백혈병을 앓는 아키를 사랑하는 사쿠는 이미 모의고사를 앞둔 한국 학생으로 변해있었다. 마지막을 알고 달리는 여행마저 아름다워 보였다. 사랑이란 그 나이 그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법이다.

 

"눈을 감으면 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라. 너와의 추억이 내 인생을 빛나게 해줬어. 곁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너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을 잊지 않을게." 십 수년 세월의 바다를 건너, 남겨진 사람의 마음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은 울룰루에서 오차 없이 고스란히 겹친다.

 

책을 덮고 야자를 튀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조만간 상영관에서 사라질 것이란 소식을 들었다. 두통이 심해 병원을 다녀온다는 핑계로 두정거장을 뛰어 메가박스로 몰래 잠입했다. 책을 읽고 슬픔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라고 합리화시키기엔 나는 책에, 그리고 영화에 푹 빠졌다. 책의 감동을 그대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 머리 속 주인공은 더욱 연약하면서 아름다웠고, (혹은 내가 사랑하는 여학생의 새하얀 얼굴을 닮았을 거다.) 상상으로만 다녀온 일본의 여름은 더 푸른 빛깔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라이 켄의 <눈을 감고>가 흘러나오는 울룰루는 달랐다. 차가운 돌산이 아닌 흙빛을 머금은 평평한 꼭대기. 감성의 꼭대기에서 결국 울컥한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8년이 흐른 지금 솔직히 영화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어떤 문학 작품보다 감동적이던 이야기마저. 하지만 여전히 가만히 눈을 감고 영화를 떠올리면 <눈을 감고>가 내 귓가에서 맴돈다. 추억에 발목 잡혀 과거에 얽매여 산다고 말해도 좋다. 그때 그 시절 보잘없는 내 사랑은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 속에서 나는 아파하며 성장했으니....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를 보고 싶다. 천방지축 예비 신부가 방방곡곡 뛰어다니며 헤엄쳤던 그리스에 가고 싶다. 예배당에 오붓하게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사랑을 외치고 싶다. 아마 그 때는 그곳이 내 사랑, 아니 내 인생의 중심이겠지? 여행과 책, 음악, 그리고 영화. 추억을 먹고 사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물론 이 모든 기억의 조합 과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 사람, 우리 사랑이 꼭 필요하다. 떠나고 새기자.

여행자들은 세상의 구석구석을 떠돌며 기어이 흔적을 남겼다. 어떤 연인은 바위에 하트 문양을 새기고, 어떤 연인은 철망에 자물쇠를 채운다. 어떤 이는 모래밭에 돌탑을 쌓고, 또 어떤 이는 나무에 동전을 박아 넣는다.

여행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허망하다. 가져온 사진 몇 장의 희미한 평면 추억과, 두고 온 잡다한 물건들의 잊혀져가는 잔영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잠시 머물렀던 누군가의 순간은 영겁 속에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그리고 무너진 돌탑과 희미해진 낙서, 녹슨 자물쇠와 닳아버린 동전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운 여행자의 눈동자를 텅 빈 세월의 이명 속에서 무심하게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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