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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무뚝뚝하고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다아시. 활발하고 매력적이며 모두에게 인기 있는 빙리. 차도남 대 엄친아. 지고지순한 순정파에 차분하고 가정적인 제인. 당차며 자기 생각을 똑 부러지게 쏘아붙이는 왈가닥 엘리자베스. 청순녀 대 알파걸. 당신이 남자라면, 여자라면 과연 어떤 이에게 사랑을 고백할 것인가? 어려운 선택의 순간은 18세기 영국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18세기 여성들의 사랑과 삶을 전면에 다룬 제인 오스틴은 여섯 편의 소설은 물론 영화화된 <비커밍 제인>, <브릿지존스의 일기> 등으로 21세기에 환생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로맨스 소설의 대중화를 이끈 그녀는 여전히 영국을 넘어 전 세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그녀는 뻔하고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닌 신분, 결혼 제도, 남녀 간 심리와 사랑을 <오만과 편견>이라는 걸작에 녹여냈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빠질 때 각각 성별의 차이인지 몰라도 너무나 쉽게 오만과 편견에 빠진다. 남자는 여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오만’에 빠져 무례한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여자도 남자의 첫인상에 쉽게 좌지우지되며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편견’에 사로잡혀 남자를 바라보는 허점을 내보이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도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모두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핑크빛 사랑에 멀고 먼 길을 돌아서 도착한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부인, 위컴의 방해에 점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불신에 사로잡혀 미워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도착하는 것은 결국 두 사람의 소통과 용기다.
신분 상승에 목매는 베넷 부인의 영양가 없는 넋두리도, 허풍쟁이 사기꾼 위컴의 무의미한 정보도 둘 사이를 가깝게 하지 못했다. 다아시는 첫 번째 청혼에 실패한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곁에 머무르려 애썼다. 여우 같은 엘리자베스의 능수능란한 밀당에 흔들리며 다아시는 결국 다시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다. 이런 남녀의 미묘한 심리를 들여다보는 재미는 마치 몰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여자 대부분은 차도남,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다아시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만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남자라면 대부분 사교적인 빙리를 선호하겠지만 결국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만남과 결합, 화합이 중요한 결혼 생활에서 과묵하고 소나무처럼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가 이상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문득 ‘친구가 많은 남편은, 그리고 그중에 술을 좋아하는 친구가 많은 남편은 똥차 중의 똥차다.’라는 현실 생활의 교훈이 떠올랐다. 말을 줄이고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사려 깊게 말해야 사랑받겠구나 새삼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과연 다아시가 권위 있는 가문에 돈 많은 아들이라면 맹랑한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스가 뻥 차버린 콜린스를 붙잡은 샬롯의 사랑은 단순히 허영이며 그릇된 사랑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 <오만과 편견>이 18세기 영국 소설이지만 고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2012년 대한민국에서도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아 보였다. 특히 결혼 제도에서 집안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은 베넷 부인과 다를 게 없지 않았다. 최근 듀오나 결혼정보업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학벌, 재산, 지역 등 수십 가지 항목으로 등급을 매기는 일을 보면 영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신데렐라 같은 결합을 막기 위한 과학적인 벽이 생겼을 뿐이다. 물론 샬롯의 선택은 상당히 계산적이고 수단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도 많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며 동생들의 사교게 진출을 가로막는 집안의 천덕꾸리기 신세다. 과연 그녀의 선택이 단순히 돈만 따진 선택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돈’이 최우선이 되는 사회적 풍조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배제된 선택만이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저 ‘재력’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 외모, 키, 성격, 가족 관계, 취미처럼 고려 사항이 될 수 있는 하나의 항목일 뿐이다. 나는 샬롯을 비난하는 엘리자베스 자신도 다아시가 궁핍하고 나이 많은 과부였다면 맨 처음 태도처럼 상종도 못 할 인간이라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이 사랑만으로 살 수 없듯이 결혼은 현실이다. 개인마다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무게추가 달라지고 중요시하는 비율이 달라질 뿐 재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외적, 내적, 사회적 요소가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한 샬롯을 무작정 비난하지는 못하겠다.
소설을 덮을 때 사실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침 드라마 시월드의 끝판 왕보다 무서운 샬롯 부인의 거센 반대가 어영부영 뭉개지고, 둘 사이를 갈라놓던 수많은 장애물이 너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기분이랄까? 마치 Part 2.가 남아있는데 치트키를 써서 엔딩을 봐버린 느낌이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 너머에 그들의 둘러싼 사회적 장애물을 하나씩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내야 할 부분이 쏙 빠졌다. 이것은 ‘결혼’이 해피엔딩이자 사랑의 최고점이라는 18~19세기 독자들의 인습적인 기대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결혼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에 익숙한 21세기 인간인 나에게는 조금 허무하고 심심한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끼리끼리 만난다.’라는 불변의 진리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바로 고집불통 망나니 리디아와 교활하고 찌질한 위컴의 결혼을 보면 알 수 있다. 리디아가 등장하는 부분은 어김없이 한숨과 짜증이 밀려왔다. 실제 여동생이었다면 내가 먼저 속 터져 죽을 것 같은 캐릭터였는데 마지막 축하 편지도 압권이다.
“우리는 남의 도움 없이 살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할 거예요. 일 년에 3,4백 파운드 정도면 어떤 자리라도 괜찮겠지만, 형부한테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 정도면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치가 없고 무례한데 리디아가 뜬금없이 위컴과 결혼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개념 커플덕분에 주인공의 사랑이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효과도 있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I love you, ardently."를 멋지게 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두꺼운 <오만과 편견>의 가족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사실 이상형 남자를 꿈꾸는 꿈 많은 소녀가 아닌 촐싹거리는 25살 남정네라 다시 이 두꺼운 책을 펼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연애에 대한 설렘과 떨림이 여성의 몫이라는 나의 오만한 편견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예절이라든가, 경의라든가, 괜스러운 친절 같은 것이 지긋지긋했던 거에요. 언제나 당신의 인정만 받으려고 말을 건네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이 나 있어요. 제가 그런 여자들하고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흥미가 생겼던 것이죠. 당신이 진정으로 상냥한 분이 아니었다면, 그 때문에 절 미워했을 거예요. 스스로를 감추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당신의 감정은 늘 고귀하고 정당했어요. 마음속으로는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철저히 경멸했던 거지요. 자 어때요, 설명하는 수고를 제가 덜어주었지요. 정말이지 이모저모 따져보아도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히 당신은 저한테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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