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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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알게 될 거야!” 2006. 8-29. 기영

 

나의 2006년 하루하루는 소중했다. 물론 희망이 가득한 24시간이 아니라, 허투루 소비하면 안 되는 수능 D-XX로 규정된 채 소중하기보다는 아까웠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대한민국 고3에게 수능은 인생의 나머지 전부를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었다. 9월 모의고사를 앞두고 맞이한 나의 생일은 재밌었지만, 결코 특별하지 않았다. 많은 친구에게 축하를 받고 평소처럼 축구를 신 나게 하고 돌아왔다. 케이크도 나눠 먹고 간식거리를 야자 시간에 몰래 까먹으며 잠시나마 초조함을 잠재웠다. 하지만 그때 조용하고 사려 깊은 친구 기영이가 선물해 준 ‘파이 이야기’는 미처 읽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코앞에 닥친 수능이 뭐가 그리 두려웠는지 소설책 ‘따위’를 읽은 여유가 없었고 차라리 그 시간에 언어영역 한 지문을 더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목 때문인지, 단조로운 표지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민망하게도 나는 <파이 이야기>가 시시한 자기 계발서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믿음’을 주제로 한 표류기는 진한 감동을 머금은 소설이자 복음서였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개봉 소식, 신기하게도 같은 대학교에 입학한 기영이의 근황을 듣고 책장 속에 썩혀 두었던 인도 소년과 호랑이의 생존기를 펼쳤다.

 

그렇게 기대하고 바라던 대학교에 들어왔다. 어느덧 학교에 다닌 날이 다닐 날보다 많아진 4학년이 되었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꿈꾸던 모습은 아니었다. 외국인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영어나 제2외국어로 대화를 하거나, 영어로 된 난해한 전공 책을 끼고 교수님과 격렬한 토론을 벌일 줄 알았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 꾸역꾸역 남들과 비슷하게 살 뿐이었다. 못 버틸 정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해치울 정도도 아닌 여러 고비를 앞두고 이상하게 ‘재미’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문득 6년 전 나의 생일이 떠올랐고, 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잠시나마 희망을 찾았다.

 

“내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입니다. 이름의 철자 밑에 두 줄을 그었다. 간단히 부르면 파이 파텔. 인심 쓰는 셈 치고, 이렇게 덧붙였다. π=3.14”

 

소변을 본다는 뜻의 피싱으로 놀림 받는 인도 소년 파텔. 그는 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잔혹하고 처절한, 하지만 해피엔딩인 표류기를 들려준다. 동물원의 둘째 아들인 파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믿는 종파를 초월한 신의 사랑을 바라는 작은 아이였다. 하지만 캐나다로 향하는 바다 위에서 작은 배에 홀로 살아남았고 그는 누구보다 거대한 생존력을 지닌 인간으로 거듭났다. 물론 인간으로 혼자였지 호랑이 리차드 파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을 탑승객으로 친다면 아담한 돛단배의 선장 정도는 되었다. 역설적으로 가장 힘이 없고 조그만 파텔은 광활한 태평양에서 바다거북, 고래, 상어, 쥐, 미어캣을 먹으며 결국 끝까지 버텼다. 227일이라는 기록적이고 기적적인 표류 중에 그는 야수를 길들이고,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식인 섬을 탐험하고, 폭풍우를 해치고 그는 결국 살아남아서 일본인에게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한다.

 

“여러 가지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바다는 비밀을 털어놓은 친구처럼 귀에 속삭였다. 바다는 호주머니에 든 동전처럼 쨍그랑댔다. 바다는 산사태가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사포로 나무를 문지르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사람이 토하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죽은 듯 고요했다.”

 

이것이 파텔이 말하는 표류기며 여러 가지 바다를 경험한 그가 믿는 진실이다. 하지만 일본 운수성 해양부 소속 아츠로와 오카모토는 다른 진실을 원했다. 믿는 것을 보는 것일까, 보는 것을 믿는 것일까?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파이는 두 번째 식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친절하게도 일본인은 끔찍한 식인 이야기의 해석을 덧붙인다. 대만 선원은 얼룩말, 어머니는 오랑우탄, 요리사는 하이에나, 그리고 파텔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리처드 파커 이야기를 이미 접했었지만 충격적이었다. 수백 장의 환상적인 표류기를 잔혹하게도 10장으로 요약된 결말 부분에서 엄청난 반전의 묘미를 느꼈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무신론자 대 유신론자, 유일신 대 다신론자, 호랑이와 동행 대 식인 이야기. <파이 이야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반응은 책을 읽은 후에 얻을 수 있는 별책부록 같았다. 정해진 정답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믿을지는 자신의 몫이다. 나는 식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처드 파커 이야기를 믿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은 파텔, 아니 파이 역시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 그는 아마 피싱이라 놀림 받던 이름을 파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믿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파텔이 식인을 시작하며 자연의 위대함에 한없이 작아질 때 파이는 자신만의 ‘리처드 파커’를 떠올렸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삶을 위해 끊임없이 버텼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리처드 파커가 없다면, 난 오늘날 이렇게 살아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파이의 원동력은 ‘삶’이었다. 다만 그것을 향하는 매개체가 ‘신’이었을 뿐이다. 만약 그가 리차드 파커를 믿지 않았다면 고통과 상처, 절망감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는 비인간적이며 절망적인 사건 후에도 아름다운 부인, 수줍은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다만 리처드 파커를 조금은 그리워할 뿐이다. 이는 자신이 선택한 ‘믿음’의 힘이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비록 무교지만 상상력의 산물 ‘종교’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나는 ‘리처드 파커’를 그리워하는 파이가 이해가 되었다. 신이 실존하느냐 아니냐는 <파이이야기>의 결말이 어떤 것이 진실 인지처럼 중요치 않다. 다만 식인 섬의 미어캣 떼거리처럼 종교에 모든 것을 바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신도가 되지 않는다면 충분히 종교는 삶의 방향과 힘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토지>의 박경리가 다사다난한 평사리에서 전하려던 메시지는 ‘삶’이었다. 누군가는 삶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이념은 껍데기뿐인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했다. 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비록 신은 아니더라도 나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가족? 친구? 성공? 건강? 단번에 딱 떠오르지 않는다. 한두 단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무엇이 원동력이 아닌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내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지나친 불안으로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외면하는 모습으로는 거친 풍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리처드 파커를 피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면, 아니면 피 흘리는 고기에 침 흘리는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먹혔다면 파이 이야기는 없었다.. 결국은 적절한 타협과 공존으로 ‘삶’이란 무대에서 버티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이를 잊고 있었다. 인생의 전부일 줄 알았던 대학 입학이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여전히 나는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파이 이야기>를 읽고 기영이가 적어준 하루하루의 소중함은 조금씩 깨닫고 있다. 아마 나는 아직 태평양 바다 위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간직하고 있나 보다. 아니 그러려고 굳게 믿고 있나 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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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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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강렬한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 터키 이스탄불의 어두컴컴한 우물 앞에 서 있었다. 6·25 전쟁 참전에 빛나는 형제의 나라, 페네르바체·갈라타사라이로 유명한 광적인 축구 열기, 수원역 앞에서 항상 은은한 향신료 냄새를 풍기며 바라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케밥. 이제 터키를 기억할 때 축구선수 누리 사힌, 하칸 수크르뿐 아니라 <내 이름은 빨강>으로 노벨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도 떠올릴 것이다.

 

표지부터 알록달록한 <내 이름은 빨강>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느낌이 나면서도 독특했다.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이라는 이국적인 공간 탓도 있지만 책의 첫 장부터 황당하게도 시체가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작가는 술탄의 세밀화가 엘레강스가 살해당한 장면이 등장하고 역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런 방식은 매우 신선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많은 화자가 등장하며 이 중에 몇몇 인물이 용의 선상에 오른다. 심지어 동물, 사물 혹은 죽음까지도. (죽은 몸, 카라, , 살인자, 에니시테, 오르한, 카라, 에스테르, 세큐레, 한 그루 나무, 나비, 황새, 올리브, 금화, 죽음, 빨강, , 이야기꾼, 오스만, 악마, 여자, 두 명의 수도승,까지 화자로 등장한다.)

 

살인자가 직접 참혹한 현장의 생생함을 표현하고, 다시 유력한 용의자 나비, 황새, 올리브 중 하나의 입을 빌려 자신의 알리바이와 정당성을 차근차근 언급한다. 세 명 모두 궁정화가로 각자 스타일과 서명, 시간의 중요성, 눈멂에 대한 토로하는데 동료 엘레강스의 죽음에 얽히고설켜 있다. 굳이 하나의 주인공을 뽑자면 바로 이름도 예쁜 카라.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되어버린 카라는 오르한과 셰브켓의 엄마 세큐레와 함께 기이한 살인 사건의 비밀에 차근차근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화원장 오스만과 함께 축제의 서를 분석하던 카라는 베일에 가려진 범인의 정체를 찾아낸다.

 

사실 세밀화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어서 책을 읽으며 오로지 상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 등장하는 휘스레브와 쉬린을 검색해보니 조금은 감이 왔다. 터키의 세밀화는 을 중심으로 하찮은 인간의 개성을 무시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인정받은 장인의 그림을 똑같이 묘사하는 특징을 지닌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원근법도 술탄의 영향력에 있는 이스탄불에서는 금기시되는 기법이었기에 문명의 갈등과 충돌의 실마리도 여기에 있다. 베네치와와 페르시아의 화풍이 묘하게 결합하는 과정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있는 터키의 역사와 닮았다. 이는 급격한 서구 문명이 고매한 동양 문화와 뒤섞이며 혼란스러워하는 우리나라 이야기 같아서 무척 흥미로웠다. 터키의 세밀화가가 눈이 머는 것을 찬양하듯이, 우리나라도 독 가마 속에서 불타오른 송 영감의 장인정신이 떠오르지 않는가?

 

한편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타고난 이야기꾼 오르한 파묵은 터키에 가본 적도 없는 머나먼 이방인에게 손수 그림을 그려주었다. (실제 오르한 파묵은 22세까지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빨강을 표현한 그의 문장에서 오감은 쉬지 않고 활자에 반응했다. 우리는 단순한 시각으로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촉각, 후각, 미각 등 오감을 활용하여 빨강이라는 하나의 추상성을 적나라하게 마주한다. 과연 빨강이라는 강렬한 색깔 하나로 동서양의 문화 충돌, 인간의 애증을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범인이 집어든 빨간색을 담는 물감 병은 단순히 살해도구가 아니다. 아마 글을 쓸 때만 행복하다는 오르한 파묵이 너무나 서구화되어 이슬람 특유의 문화마저 잃어가는 터키에 대한 아쉬움 섞인 경고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 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안에 피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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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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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서가에 <백년의 고독>을 꽂아두고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을 극찬했다. 1982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세르반테스로 불리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그는 마콘도라는 환상적인 공간에 부엔디아 가문을 뿌리내렸다. 두 권에 걸친 책에는 부엔디아 가문을 따라다니는 지독한 운명의 굴레로 가득하다. 하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운명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나에게도 스멀스멀 다가왔다.

 

사실 꾸역꾸역책장을 넘겼다. 멀고도 생소한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간, 세군도·애칭· 부칭 등 이질적인 스페인식 이름, 집시·원주민·이주 등 신선한 소재 때문에 처음에는 이야기의 갈피 자체가 잡히지 않았다. 특별한 주인공도 없고, 사건의 개연성이나 현실성조차 모호한 소설이 어색하고 답답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호세 아르카디오, 아르카디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아마란타, 아마란타 우르슬라, 아우렐리아노. 시작과 끝이 근친상간으로 요약되는 소설의 내용이나 캐릭터 자체를 1/3 정도 읽을 때까지 완벽하게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었고 마르케스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정확히 절반이 넘어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소설의 전면부에 등장하자 굉장한 몰입을 경험했다.

 

막장 중의 막장 이야기 <백년의 고독>은 자극적인 만큼 재밌었고, 나는 환상적인 사건의 연속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본부인과 정부인이 수없이 겹치고, 총살, 자살 등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고독한 운명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메르케디스의 양피지 문서에 적힌 대로 무섭도록 죽음과 탄생은 실현되고, 마지막에도 결국 근친상간의 산물 아우렐리아노가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난다. 아우렐리아노, 아르카디오로 대표되는 이름에 따라 성격과 사건, 유사한 운명이 지긋지긋하게 가문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재미와 더불어 묘한 연민이 시나브로 차올랐다. 바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모습이 라틴 아메리카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밝은 햇살 속의 거리와 흰개미가 나는 공기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 위태위태한 구경꾼만이 남아있을 때 대령은 다시 비참한 고독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서커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대령은 밤나무 밑으로 갔다. 그리고 오줌을 누면서 역시 서커스를 생각하고자 했으나 이미 그 기억은 흔적조차 없었다. 병아리처럼 고개를 숙이고 밤나무 줄기에 기댄 채 대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년간 32회의 반란을 일으키고, 18명의 아들을 낳으며 마콘도를 지켜내고자 방랑한 영웅이었다. 자유파와 보수파의 이념 대립 속에서 상징적 인물로 거듭났고, 혁명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골방에서 금세공하는 어떤 늙은이의 초라하고 고독한 죽음이었다. 영웅적인 총살이나 극적인 자살도 아닌 기력을 다해 서서히 소멸하는 비루한 모습이 라틴아메리카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스페인, 포르투갈 양국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 찬란한 문명, 서구 외국인, 백인 부유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탄압받는 현대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작가가 말하고 싶어했던 고독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다.

 

빗속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죽은 자의 슬픈 얼굴, 이승의 인간을 몹시 그리워하는 듯한 몸짓, 아프리카 억새풀을 적시기 위해 물을 찾아 집안을 헤매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로 유명하다. 그가 난해하고 모호한 현실을 마음대로 묘사한 목적은 역설적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알맞은 기법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라틴아메리카는 급속한 인구 증가, 낙후된 사회 기반 시설, 농지 개혁 실패, 산업화 실패 등으로 위기를 겪었고, 이 와중에 미국은 제국주의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원주민과 흑인, 외부인의 혼란 속에서 라틴아메리카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노력이 바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신화, 민담, 무의식, 상징이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기후, 지역성, 지리와 결합하였고 작품 전체에 환상이 녹아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성이 느껴졌다.

 

한편 마지막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이야기로 책장을 덮는 순간 힘겹게 읽었던 한국 소설들이 떠올랐다. 대한제국 시절 멕시코 이주를 다룬 김영하의 <검은 꽃>, 평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망자의 유령이 등장하는 황석영의 <손님>이 이제야 같은 종류의 소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줄거리의 흐름이 뒤죽박죽인데다가, 비현실적인 사건이 이어져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백년의 고독>을 읽고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특유의 재미를 느낀다. 과연 지금 다시 두 책을 펼친다면 환상적인 소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아마 한국 현실에 새롭게 적용된 마술적 리얼리즘의 정점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두껍지만 가벼웠던 한 권의 책이 나의 독서 습관에 새로운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보니 가계도까지 뽑아놓고 읽었던 책인 만큼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콜롬비아의 마르케스가 나에게 남미라는 미지의 공간을 탐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죽기 전에 언제 낯선 남미라는 공간에서 걸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 마콘도를 휘감는 지독한 고독의 운명, 어떤 역경에도 끝까지 살아남는 생명력을 떠올릴 것이다. 문득 소설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거친 풍파와 거듭되는 파멸에도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우르슬라의 끈질긴 생명력이 가슴 속에 다가온다. 그 어떤 위대한 이념도 생명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



"거대한 사람의 물결이 공지와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와 건기의 높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과 우르술라 이구아랑이 동물 모양의 엿 가공품을 팔며 걸어다니던 지겨운 세계, 이 모두를 한입에 삼켜버리고 말았다.



동생은 그의 눈을 본 것만으로도 그가 증조부와 같은 운명을 걸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3,000명 이상이었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단지 이 말밖에 하지 않았다.

"틀림없어. 역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몰살당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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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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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철학수업의 초반부가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철학과 전공 수업을 처음으로 듣는 내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사실 위버맨쉬’, ‘디오니소스적’, ‘영원회귀’, ‘신의 죽음과 같이 어디선가 들어본 니체를 대표한다는 개념들만이 내 머리 속에 흐릿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확실히 텍스트를 정독해 나가며 오역을 고치고 (철학 전공자 박찬국씨의 번역에도 실수가 있었다는 점에 놀랐다. 확실히 니체가 진정 하고픈 말을 좀 더 생생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원문을 읽기 위한 외국어 공부가 필수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의 자세한 내용과 상호 연관성을 해석해 나가며 책을 읽어 나가니 좀 더 많은 부분을 고민해보고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어 좋았다. 또한 다양한 관련 텍스트, 논문등을 읽으며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어서 즐거운 마음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동안 내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니체, 그 중에서도 비극의 탄생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로 개념적인 정의에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말할 수 있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란 신의 개념을 가져오며 비극의 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 대립적인 신을 중심으로 이해를 했다. 하지만 이중성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개념과 설명 속에서 디오니소스, 아폴론은 자신의 논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차용된 개념적인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이중적 존재로서 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운명’, 즉 삶과 죽을을 둘러싼 고통의 삶을 사는 특별한 상황에 있는 것처럼 존재 자체로 벌써 이중성을 띠고 아폴론적인 것과도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폴론 역시 리라와 활을 동시에 들고 있으며 통일된 조화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신이다. 니체가 비판한 학문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인 특성 역시 소크라테스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영향으로 생겨난 로고스적인 특성, 비극 예술의 죽음을 유발한 그의 특징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했다면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가 기독교나 전지전능한 존재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질되고 잘못 이용되는 의 개념을 비판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술을 찬양한 니체 역시 예술을 위한 예술은 비판하며 절대적으로 옳다는 가치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둘째로 나는 대립이 아닌 공존의 개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개념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던 지난날에는 단순히 디오니소스 대 아폴론비극의 탄생유일한 대립쌍이며 양 극단에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중성으로 대표되는 니체의 사상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 역시 이분법적 대립이 아닌 대립과 동시에 공존하는 이중적인 개념이다. 아폴론적인 것의 근원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며, 디오니소스 적인 것을 통해 다시 비추어 가상된다.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것이 없는 곳에 합리적이고 문명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문명과 문화는 야만과 무질서로부터 이전되고 발전된 것이다. 삶의 실존과 개체의 현존의 외형적 조화와 아름다움의 근원 토대는 고통과 무질서요 이 두 대립자는 자신의 반대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란과 무질서와 황홀한 도취는 아폴론적인 것에 대한 단순한 대립이나 모순이 아니라 그것에 비탄과 탄식을 인식케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오히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충돌 속에 생겨나는 비극의 힘이 학문으로 대표되어 논리, 이성의 소크라테스적인 것과 대립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도식화이다. 이 밖에도 큰 이성(몸 이성)과 작은 이성, 질서와 혼돈(카오스), 기독교 정신과 그리스 정신, 의미차원과 형식차원, 중심과 바깥, 이성과 감정, 합리와 비합리등 완전히 절대적으로 대립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간의 대립 속에서 공존하며 영향을 끼치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포월, 즉 포함하며 넘어간다는 단어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양가적인 단적인 예로 음악하는 소크라테스’, ‘미적인 학문과 같은 니체의 표현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많은 것을 느꼈던 니체 철학의 현실성과 관련된 부분의 오해다. 나는 그동안 니체 철학이 인간 생활에서 동떨어진 궤변적인 것이나 오히려 나치즘에 일조한 논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편견은 오해였다. (실제로 니체의 여동생의 조작으로 나치즘에 상당 부분 초인 사상과 같은 개념들이 이용되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지닌 양면성과 파악하기 힘든 성격이 삶의 해석을 위해 알맞은 메타포 였으며 상당 부분 니체 철학이 삶에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잘 쓰이지는 않지만) ‘실천학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비극적 예술 속에 결정화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의 근저에 내재하는, 삶의 진실이며 또한 그 비극적 실상이다. 니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깊이로 향하게 하였으며 또 그것을 응시하게끔 경종을 울린 사람이란 평가도 있다. 그렇다고 진선미 중에서 ’, 예술적인 것만을 추구한 것 또한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 삶을 향하지 않는 껍데기 예술은 비판한 점도 주목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 입장을 달리하지만 초기에) 니체를 감명시킨 거의 유일한 음악가인 바그너에 대한 평가 속에도 철학과 예술을 삶 속에서 합일시키고자 하는 니체에게 음악은 삶으로서의 사유와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통 형이상학을 거부하며 의지와 예술에 주목한 쇼펜하우어와의 다른 점 역시 삶에 대한 태도에 있다. 소극적 허무주의자로 삶의 부정으로 끝나는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니체는 적극적 허무주의로, 인과논리를 거부하며 삶의 긍정으로 귀결된다. 당시 니체는 전쟁과 폭력 그리고 노예제도와 같은 잔인한 제도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러한 세계를 살 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세계로 변용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내가 알던 니힐리즘의 개념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이라 놀랐다. '비극의 탄생의 경우 특히 낯설고 까다로워 보일 수 있겠지만 니체의 후기작업은 염두에 두고 읽으면 아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텍스트다.'란 평가도 있으니 조금 더 많은 니체의 저작을 읽고, 후기 니체의 행적까지 배워 나간뒤 꼭 한번 다시 읽어 숨겨진 뜻을 알아 나가는 재미도 얻고 싶다.

 

참고 문헌

· 국내 단행본

니체, 비극의 탄생(박찬국 역), 아카넷, 2007.

리스핑크스, 가치의 입법자 프리드리히 니체(윤동구 역), 앨피, 2009.

 

· 국내 논문, 잡지

민주식, 니체의 예술철학 - ‘비극의 탄생에서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인문연구, 1997.

윤병태, 초기 니체의 예술론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1872) §1~§7에 대한 비판적 분석, 한국헤겔학회 헤겔 연구, 2006.

홍사현, 신화와 종교의 낭만주의적 결합 - 셸링과 훨덜린의 디오니소스 수용-, 인문논총 제60, 2008.

홍사현, 니체의 음악적 사유와 현대성 - 바그너, 한슬릭, 쇤베르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니체학회 니체연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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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론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6
라이프니츠 지음, 배선복 옮김 / 책세상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Monadology> - G.W. Leibniz

 

◎ 원문 인용구는 기울임 처리를 했습니다.

 

모나드

"모나드는 복합적인 것 안에 있는 단순실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1)"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 스피노자가 생각한 세계관을 거부하면서 일부 수용했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성 두 가지 독립된 실체를 상정하였고, 스피노자는 세계를 사유와 연장성이 표출되는 여러 가지 양태로 바라보았다. 스피노자는 신은 곧 만물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했지만 라이프니츠는 사물들이 단순실체로 구성되어있다고 주장하며 그 단순실체를 모나드란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모나드는 공간적 점유를 하지 않으며 이는 물질성, 연장성을 제거한 것이다. 모나드는 공간에 없지만, 공간은 모나드 안에 있다. 즉 모나드는 부분이 없는 공간의 논리적 기초이자, 물리적 가상 세계에서는 존재론적 실재의 기초이다. 한편 신체는 연장성을 지닌 복합체이며 모나드로 구성되고, 영혼도 신체보다 더 투명한 모나드로 구성된다.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영혼은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죽음은 몸 안에 있는 영혼이 활동하지 않는 기간이라고 본다.

 

“모나드는 자연의 참된 원자다. 한마디로 만물의 원소다.(3)”합리주의자이지만 데카르트, 스피노자보다 경험주의에 가까운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의 내적인 프로그램이 외적으로 표현될 때 복합체로 나타난다고 본다. 단자는 자연의 참된 의미이자 사물을 구성하는 원천적 재료다. 그리고 “모나드는 오직 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고 파멸을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다.(6)”신이 개입하지 않는 한 자연적 방식으로 폐기 불가능한 것으로 같은 의미로 자연적 방식으로 생겨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부분이 없기 때문에 해체되거나 생성될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모나드는 무지개나 디지털와 유사하다. 무색의 물방울 입자지만 색을 갖는 무지개, 단순한 코드이지만 다양한 표상이 가능한 디지털처럼 모나드는 표상에 의해서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모나드는 신이 만든 것이고 신에게 의존적이다. 신적인 모나드, 피조된 모나드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양적인 측면이 없으므로 모나드의 세계는 시공간적 세계, 현상 세계 밖에 존재한다. 그리고“모나드는 만물이 들락날락거릴 창이 없다.(7)”는 라이프니츠 모나드론을 한 마디로 축약하는 문장이다. 모나드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물질적인 원자와는 다르지만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각각 서로 독립적이며 구별될 뿐만 아니라“모든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와 모두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에는 서로 완전히 같은 두 가지 본질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9)”여러 모나드는 지각 판명성 여부에 따라 모호한 모나드, 명석 판명한 모나드로 구분된다. 지각의 변화로 단순실체의 작용은 나타나는데 지각은 물리적, 기계적 변화가 아니다. 작용, 반작용하는 것만 기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지각은 기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은 단순한 존재의 내적인 사고이며 지각의 존재는 외부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각 대상, 지각 주체 모두 모나드 안에서 발생한다.

 

한편 엔텔레케이아(Entelcheia)라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개념인데 이는 앞으로 실현할 역량 전체를 포함한 완전성의 의미다. 자족적으로 변화의 힘을 지니기 때문에 엔텔리케이아라는 이름을 붙인다. 모나드는 소멸할 수 없는데 이는 모나드는 어떤 상태에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생물학적 죽음만 인정할 뿐 모나드의 형이상학적 죽음은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모나드가 더 이상 복합체를 구성하지 않는 과정을 말한다. 모나드는 물리적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창조되었다. 여기서 벌거벗은 모나드(naked monad) 개념도 등장하는데 이는 역량이 수동적이고 무기세계를 구성하는 지속적인 기절 상태라고 본다. 동물에게도 효과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모나드가 있고 이는 죽은 모나드보다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모나드다. 인간은 필연적 지식을 얻는 영혼의 모나드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 자신에 비추어 신을 생각한다. 이는 데카르트의 개념과 유사한데 반성행위를 통해 이상적 추론이 가능한 특징을 갖는다. 추론 대상은 나 자신, 물질, 빗물질, 단순 복잡한 것, 신을 모두 포함하는데 모나드는 철저히 개체적이다. 그리고 모나드는 자기충족적이다. 모나드라는 실체 개념에 모나드에 귀속되는 모든 술어를 포함하는 술어포함 개념 원리를 따르는데 모든 것의 흔적이 포함되고 미래에 발생한 모든 것의 여지가 포함되는 것이다.

 

한편 신도 실체이므로 신은 최고의 모나드이며 창조적 모나드(created monad)이다. 피조된 모나드 사이에는 관계가 없지만 생성, 소멸에서 피조된 모나드는 신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 모든 모나드는 다른 존재자에 대해서는 독립적이지만 신에 의존적인 성질을 가진다. 이와 관련된 예정조화설은 최초의 원인자인 신 관념과 연결되어 세상을 설명하려는 라이프니츠의 의도가 담긴 이론이다. 창이 없기 때문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모나드는 질서 정연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데 이러한 근거는 바로 ‘신’이란 것이다.

 

신, 예정 조화설

신은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긍정적 실재의 총체이다. 즉“경계가 없는 곳, 말하자면 신 안에서의 완전성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41)”신은 시공간과는 상관없는 개념으로 신도 이성의 진리에 존재하며 의지보다 지성이 먼저라고 라이프니츠는 생각한다. 모나드는 각각의 창조된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데 질서 정연한 우주의 부분이다. 대규모의 조화를 이루는 근거는 다름 아닌 신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만이 근원적인 통일이거나 본래적인 단순 실체다.(47)”라이프니츠의 논리대로라면 선행 원인을 되짚어보면 무한 소급이 가능하다. 연쇄적으로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최종적으로 원인인 ‘신’으로 귀결된다. 신은 본질적으로 존재를 내포하며 이것은 필연적이며 복잡한 우주 자체를 지배한다. 신이 없다면 어떤 것도 현존할 수 없고, 가능성이나 현실성도 없으므로 신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그 자체 안에서 가지므로 필연적 존재자다. 신만이 원초적 단순 실체이며 “신 안에서 이러한 속성들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거나 완전하다.(48)”

 

이러한 신이 목적에 맞게 질서 정연한 행위가 가능한 우주를 창조한 것이 바로 예정조화설이다. “그들은 서로가 동일한 우주 전체를 표상하기 때문에, 모든 실체 사이의 예정조화에 힘입어 서로서로 합치된다.(78)”세계는 모나드의 우연한 배열이나 변화가 아니라 내재적으로 신의 활동이 발현되는 상태일 뿐이다. 각각 독립적인 모나드가 조화롭게 존재하는 이유는 힘, 지식, 의지가 있는 신의 개입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을 근거로 세계를 설명한다. 즉 “지금 신의 관념에는 무한하게 많은 가능세계가 있지만 그들 중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보다 이 세계를 결정하도록 이끄는 신의 선택에도 하나의 충족이유가 있어야 한다.(53)신은 매 순간 단자의 지각이 매우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했고 신의 예지가 실현된 현실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누군가는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신이 왜 악을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있는 세계가 존재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이며, 즉 지금 이 세계의 악이 가능한 세계들 중 가장 적은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적합성 완전성의 등급에 따라 나뉘는 가능세계들 중 현실 세계는 “이 지혜를 드러내고 선을 택하고 능력을 만들게 하는 최상의 존재 근거이다.(55)”다시 말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나드 하나하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최선의 세계에 봉사하도록 신이 그렇게 구성한 것이고 이 모습과 다른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이성적 진리-사실적 진리, 능동성-수동성

“이 조화는 자연 자체의 길에 있는 사물을 은총으로 이끌도록 영향을 준다.(88)”예정조화설로 이루어진 라이프니츠의 논의에서 그는 진리를 이성적 진리사실적 진리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물과 다르다. 이성 인식에 있어 각각 모순율과 충족 이유율로 설명 가능한 것인데 차이가 존재한다. “하나는 모순율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모순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거짓된 것의 반정립인 것 혹은 모순적인 것을 모두 참이라고 판단한다.(31)”모순을 포함하는 것은 거짓이고 포함하지 않으면 참인 것으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므로 근본적, 이성적 진리로 이해했다. 순수하게 논리에 의해 인식되고 필연적 진리이므로 이를 부정하면 모순에 빠지므로 불가능하며 증명이 불가능하거나 증명이 필요하지 않는 이성의 진리에 토대가 되는 것이다. p와 not p를 동시에 주장하면 모순을 범하는 수학적 명제가 대표적인 예로 선천적(a priori)이다. 반대로 충족이유율은 사실적 진리이며 후천적(a posteriori)이다.“우리는 종종 이러한 근거가 알려져 있을 수 없다고 해도, 왜 이것이 이래야 하고 다를 수는 없는지에 대한 충족이유가 없다면, 어떤 사실도 진짜이거나 실재일 수 없고 어떤 명제도 참으로 입증될 수 없다고 간주한다.(32)”다시 말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충족이유가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술어포함 개념 원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개념이다. 사실적 진리는 우리의 감각에 직접 다가오는 것에 대한 내적 체험으로 획득되는 성격이다. 목적인과 작용인중 오히려 목적인에 가중치를 둔 라이프니츠는 사실적 진리는 경험으로 인식되며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우연적 사물의 궁극적인 존재이유는 하나의 필연적 실체, 신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다른 존재에 대한 최종 근거인 신은 모나드 전반, 우주 전체에 작용한다. 물론 변화 원칙의 원천이 신에 있음을 라이프니츠는 인정하지만 피조 모나드에서 변화의 충족 이유는 모나드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은 피조물에 완전성을 부여하지만 그럼에도 피조물이 불완전한 이유는 그것이 피조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한편 모나드 간의 층위를 구분한 것으로 보이는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의 능동성, 수동성을 나눈다. “모나드는 판명한 지각을 갖는 한 활동성을, 혼동된 지각을 갖는 한 수동성을 지닌다.(49)”다른 모나드의 사건을 설명한 요소를 발견하면 이는 더 완전한 모나드로 볼 수 있고 투명하게 세상을 반영하면 그 모나드가 더 완전하고 적극적, 능동적이라고 칭한다. 반대로 내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다른 것에서 일어난 사건에 의해 이유를 제공받으면 수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논증, 모순율, 충족이유율을 통해 나의 완전성은 결국 신의 계획이라는 것으로 다시 증명된다. 모호한 것은 매우 기계적인 부분이고 정신의 측면에서 지각하면 신의 은총이 내린 세계인 정신의 측면인데 이는 공존한다고 보고 있다. 당시 기계론적 세계관에 라이프니츠가 자유 의지, 우연을 바랐기 때문에 모나드에 영혼의 측면을 부여했다.

 

<모나드론>은 초반 모나드 개념을 소개하며, 존재론적 출발이 막판에 갈수록 윤리학적 늬앙스로 중심추가 이동했다. 기적적인 신 개입이 아니라 자연적인 방식으로 보상, 처벌을 하려 했던 합리주의자 라이프니츠는 끊임없이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목적으로 했다. 필연적 기계와 자유의지의 인간을 조화롭게 설명하려 했는데 일부 보수론자, 통치자들에게는 입맛에 딱 맞는 이론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라이프니츠는 전체로 봐도, 개개인으로 봐도 우리가 헌신하는 한 우주는 존재하는 것 중 최선의 것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본유적이며 나에게서 나온 것이라 주장한다. 모호하건, 명석하건 그것은 모두 밖이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으로 데카르트의 합리론, cogito를 일반화, 극대화한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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