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면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알게 될 거야!” 2006. 8-29. 기영

 

나의 2006년 하루하루는 소중했다. 물론 희망이 가득한 24시간이 아니라, 허투루 소비하면 안 되는 수능 D-XX로 규정된 채 소중하기보다는 아까웠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대한민국 고3에게 수능은 인생의 나머지 전부를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었다. 9월 모의고사를 앞두고 맞이한 나의 생일은 재밌었지만, 결코 특별하지 않았다. 많은 친구에게 축하를 받고 평소처럼 축구를 신 나게 하고 돌아왔다. 케이크도 나눠 먹고 간식거리를 야자 시간에 몰래 까먹으며 잠시나마 초조함을 잠재웠다. 하지만 그때 조용하고 사려 깊은 친구 기영이가 선물해 준 ‘파이 이야기’는 미처 읽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코앞에 닥친 수능이 뭐가 그리 두려웠는지 소설책 ‘따위’를 읽은 여유가 없었고 차라리 그 시간에 언어영역 한 지문을 더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목 때문인지, 단조로운 표지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민망하게도 나는 <파이 이야기>가 시시한 자기 계발서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믿음’을 주제로 한 표류기는 진한 감동을 머금은 소설이자 복음서였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개봉 소식, 신기하게도 같은 대학교에 입학한 기영이의 근황을 듣고 책장 속에 썩혀 두었던 인도 소년과 호랑이의 생존기를 펼쳤다.

 

그렇게 기대하고 바라던 대학교에 들어왔다. 어느덧 학교에 다닌 날이 다닐 날보다 많아진 4학년이 되었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꿈꾸던 모습은 아니었다. 외국인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영어나 제2외국어로 대화를 하거나, 영어로 된 난해한 전공 책을 끼고 교수님과 격렬한 토론을 벌일 줄 알았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 꾸역꾸역 남들과 비슷하게 살 뿐이었다. 못 버틸 정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해치울 정도도 아닌 여러 고비를 앞두고 이상하게 ‘재미’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문득 6년 전 나의 생일이 떠올랐고, 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잠시나마 희망을 찾았다.

 

“내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입니다. 이름의 철자 밑에 두 줄을 그었다. 간단히 부르면 파이 파텔. 인심 쓰는 셈 치고, 이렇게 덧붙였다. π=3.14”

 

소변을 본다는 뜻의 피싱으로 놀림 받는 인도 소년 파텔. 그는 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잔혹하고 처절한, 하지만 해피엔딩인 표류기를 들려준다. 동물원의 둘째 아들인 파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믿는 종파를 초월한 신의 사랑을 바라는 작은 아이였다. 하지만 캐나다로 향하는 바다 위에서 작은 배에 홀로 살아남았고 그는 누구보다 거대한 생존력을 지닌 인간으로 거듭났다. 물론 인간으로 혼자였지 호랑이 리차드 파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을 탑승객으로 친다면 아담한 돛단배의 선장 정도는 되었다. 역설적으로 가장 힘이 없고 조그만 파텔은 광활한 태평양에서 바다거북, 고래, 상어, 쥐, 미어캣을 먹으며 결국 끝까지 버텼다. 227일이라는 기록적이고 기적적인 표류 중에 그는 야수를 길들이고,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식인 섬을 탐험하고, 폭풍우를 해치고 그는 결국 살아남아서 일본인에게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한다.

 

“여러 가지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바다는 비밀을 털어놓은 친구처럼 귀에 속삭였다. 바다는 호주머니에 든 동전처럼 쨍그랑댔다. 바다는 산사태가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사포로 나무를 문지르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사람이 토하는 소리를 냈다. 바다는 죽은 듯 고요했다.”

 

이것이 파텔이 말하는 표류기며 여러 가지 바다를 경험한 그가 믿는 진실이다. 하지만 일본 운수성 해양부 소속 아츠로와 오카모토는 다른 진실을 원했다. 믿는 것을 보는 것일까, 보는 것을 믿는 것일까?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파이는 두 번째 식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친절하게도 일본인은 끔찍한 식인 이야기의 해석을 덧붙인다. 대만 선원은 얼룩말, 어머니는 오랑우탄, 요리사는 하이에나, 그리고 파텔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리처드 파커 이야기를 이미 접했었지만 충격적이었다. 수백 장의 환상적인 표류기를 잔혹하게도 10장으로 요약된 결말 부분에서 엄청난 반전의 묘미를 느꼈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무신론자 대 유신론자, 유일신 대 다신론자, 호랑이와 동행 대 식인 이야기. <파이 이야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반응은 책을 읽은 후에 얻을 수 있는 별책부록 같았다. 정해진 정답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믿을지는 자신의 몫이다. 나는 식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처드 파커 이야기를 믿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은 파텔, 아니 파이 역시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 그는 아마 피싱이라 놀림 받던 이름을 파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믿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파텔이 식인을 시작하며 자연의 위대함에 한없이 작아질 때 파이는 자신만의 ‘리처드 파커’를 떠올렸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삶을 위해 끊임없이 버텼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리처드 파커가 없다면, 난 오늘날 이렇게 살아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파이의 원동력은 ‘삶’이었다. 다만 그것을 향하는 매개체가 ‘신’이었을 뿐이다. 만약 그가 리차드 파커를 믿지 않았다면 고통과 상처, 절망감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는 비인간적이며 절망적인 사건 후에도 아름다운 부인, 수줍은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다만 리처드 파커를 조금은 그리워할 뿐이다. 이는 자신이 선택한 ‘믿음’의 힘이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비록 무교지만 상상력의 산물 ‘종교’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나는 ‘리처드 파커’를 그리워하는 파이가 이해가 되었다. 신이 실존하느냐 아니냐는 <파이이야기>의 결말이 어떤 것이 진실 인지처럼 중요치 않다. 다만 식인 섬의 미어캣 떼거리처럼 종교에 모든 것을 바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신도가 되지 않는다면 충분히 종교는 삶의 방향과 힘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토지>의 박경리가 다사다난한 평사리에서 전하려던 메시지는 ‘삶’이었다. 누군가는 삶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이념은 껍데기뿐인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했다. 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비록 신은 아니더라도 나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가족? 친구? 성공? 건강? 단번에 딱 떠오르지 않는다. 한두 단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무엇이 원동력이 아닌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내 삶의 중심이 아니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지나친 불안으로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외면하는 모습으로는 거친 풍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리처드 파커를 피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면, 아니면 피 흘리는 고기에 침 흘리는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먹혔다면 파이 이야기는 없었다.. 결국은 적절한 타협과 공존으로 ‘삶’이란 무대에서 버티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이를 잊고 있었다. 인생의 전부일 줄 알았던 대학 입학이라는 큰 산을 넘었지만, 여전히 나는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파이 이야기>를 읽고 기영이가 적어준 하루하루의 소중함은 조금씩 깨닫고 있다. 아마 나는 아직 태평양 바다 위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간직하고 있나 보다. 아니 그러려고 굳게 믿고 있나 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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