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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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서가에 <백년의 고독>을 꽂아두고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을 극찬했다. 1982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세르반테스로 불리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그는 마콘도라는 환상적인 공간에 부엔디아 가문을 뿌리내렸다. 두 권에 걸친 책에는 부엔디아 가문을 따라다니는 지독한 운명의 굴레로 가득하다. 하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운명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나에게도 스멀스멀 다가왔다.

 

사실 꾸역꾸역책장을 넘겼다. 멀고도 생소한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간, 세군도·애칭· 부칭 등 이질적인 스페인식 이름, 집시·원주민·이주 등 신선한 소재 때문에 처음에는 이야기의 갈피 자체가 잡히지 않았다. 특별한 주인공도 없고, 사건의 개연성이나 현실성조차 모호한 소설이 어색하고 답답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호세 아르카디오, 아르카디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아마란타, 아마란타 우르슬라, 아우렐리아노. 시작과 끝이 근친상간으로 요약되는 소설의 내용이나 캐릭터 자체를 1/3 정도 읽을 때까지 완벽하게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었고 마르케스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정확히 절반이 넘어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소설의 전면부에 등장하자 굉장한 몰입을 경험했다.

 

막장 중의 막장 이야기 <백년의 고독>은 자극적인 만큼 재밌었고, 나는 환상적인 사건의 연속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본부인과 정부인이 수없이 겹치고, 총살, 자살 등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고독한 운명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메르케디스의 양피지 문서에 적힌 대로 무섭도록 죽음과 탄생은 실현되고, 마지막에도 결국 근친상간의 산물 아우렐리아노가 돼지 꼬리를 달고 태어난다. 아우렐리아노, 아르카디오로 대표되는 이름에 따라 성격과 사건, 유사한 운명이 지긋지긋하게 가문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재미와 더불어 묘한 연민이 시나브로 차올랐다. 바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모습이 라틴 아메리카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밝은 햇살 속의 거리와 흰개미가 나는 공기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 위태위태한 구경꾼만이 남아있을 때 대령은 다시 비참한 고독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서커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대령은 밤나무 밑으로 갔다. 그리고 오줌을 누면서 역시 서커스를 생각하고자 했으나 이미 그 기억은 흔적조차 없었다. 병아리처럼 고개를 숙이고 밤나무 줄기에 기댄 채 대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년간 32회의 반란을 일으키고, 18명의 아들을 낳으며 마콘도를 지켜내고자 방랑한 영웅이었다. 자유파와 보수파의 이념 대립 속에서 상징적 인물로 거듭났고, 혁명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골방에서 금세공하는 어떤 늙은이의 초라하고 고독한 죽음이었다. 영웅적인 총살이나 극적인 자살도 아닌 기력을 다해 서서히 소멸하는 비루한 모습이 라틴아메리카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스페인, 포르투갈 양국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 찬란한 문명, 서구 외국인, 백인 부유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탄압받는 현대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작가가 말하고 싶어했던 고독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다.

 

빗속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죽은 자의 슬픈 얼굴, 이승의 인간을 몹시 그리워하는 듯한 몸짓, 아프리카 억새풀을 적시기 위해 물을 찾아 집안을 헤매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로 유명하다. 그가 난해하고 모호한 현실을 마음대로 묘사한 목적은 역설적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알맞은 기법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라틴아메리카는 급속한 인구 증가, 낙후된 사회 기반 시설, 농지 개혁 실패, 산업화 실패 등으로 위기를 겪었고, 이 와중에 미국은 제국주의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원주민과 흑인, 외부인의 혼란 속에서 라틴아메리카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노력이 바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신화, 민담, 무의식, 상징이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기후, 지역성, 지리와 결합하였고 작품 전체에 환상이 녹아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성이 느껴졌다.

 

한편 마지막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이야기로 책장을 덮는 순간 힘겹게 읽었던 한국 소설들이 떠올랐다. 대한제국 시절 멕시코 이주를 다룬 김영하의 <검은 꽃>, 평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망자의 유령이 등장하는 황석영의 <손님>이 이제야 같은 종류의 소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줄거리의 흐름이 뒤죽박죽인데다가, 비현실적인 사건이 이어져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백년의 고독>을 읽고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특유의 재미를 느낀다. 과연 지금 다시 두 책을 펼친다면 환상적인 소설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아마 한국 현실에 새롭게 적용된 마술적 리얼리즘의 정점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두껍지만 가벼웠던 한 권의 책이 나의 독서 습관에 새로운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보니 가계도까지 뽑아놓고 읽었던 책인 만큼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콜롬비아의 마르케스가 나에게 남미라는 미지의 공간을 탐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죽기 전에 언제 낯선 남미라는 공간에서 걸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 마콘도를 휘감는 지독한 고독의 운명, 어떤 역경에도 끝까지 살아남는 생명력을 떠올릴 것이다. 문득 소설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거친 풍파와 거듭되는 파멸에도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우르슬라의 끈질긴 생명력이 가슴 속에 다가온다. 그 어떤 위대한 이념도 생명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



"거대한 사람의 물결이 공지와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와 건기의 높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과 우르술라 이구아랑이 동물 모양의 엿 가공품을 팔며 걸어다니던 지겨운 세계, 이 모두를 한입에 삼켜버리고 말았다.



동생은 그의 눈을 본 것만으로도 그가 증조부와 같은 운명을 걸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3,000명 이상이었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단지 이 말밖에 하지 않았다.

"틀림없어. 역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몰살당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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