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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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걸."

-p.252 

 

발자크, 바느질, 중국, 소녀. 어느 하나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단어들이 모인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제목부터 독자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중국 태생의 다이 시지에의 첫 장편소설인데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문학에 가깝다. 배경이 중국일 뿐 문체나 느낌, 주인공에게 영감을 주는 발자크, 플로베르 등 프랑스 문학이란 소재까지 프랑스를 닮았다. 마치 친절하고 유쾌하게 중국의 이야기를 프랑스의 화법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는 느낌이랄까? 실제 작가 역시 10대 시절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년간 쓰촨성에서 '재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데, 그걸 토대로 중국 현대사의 그늘을 개인적 경험으로 유쾌하게 승화시켰다.


읽어본 중국 소설은 위화의 <허삼관매혈기>가 유일했는데, (실제 한국에서 판매되는 BEST 1,2,3위 모두 위화의 작품이라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읽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란 명제를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기에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고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근래에 보기 힘든 착한 가격! 10,000원이 안 넘는 책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게다가 중국인을 겨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붉은 신이 단정하게 놓여있는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쉰 살 먹은 촌장이 방 한복판, 흙을 파내고 만든 화로에서 훨훨 타오르는 석탄불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의 바이올린을 검사하고 있었다. 뤄와 내가 마을 사람들의 눈앞에 내놓은 '도회지 청년'의 소지품 중에서 바이올린은 그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생소한 맛, 문명의 냄새를 풍기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 p.7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주인공과 뤄, 두 소년은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시골로 재교육을 떠난다. 그들이 강제로 '하늘긴꼬리닭'으로 불리는 산으로 떠밀려간 이유는 부모님이 의사란 이유뿐이었다. 특히, 뤼의 부모님은 마오 주석의 치과의사였고, 그의 치아를 고쳐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누명인지, 진실인지 모를 인민재판을 받았다. 마치 신성 모독을 했단 죄목으로 마녀 사냥을 당하듯이. 두 소년의 '재교육'을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낯선 세계에서 위험천만한 높은 곳에서 똥지게를 지고 가는 일,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각오하고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 그들의 유일한 임무였다.


고작 17, 18살인 두 소년이 열악한 산골에서 나갈 희망이라곤 3퍼밀(1,000명 중 3명)뿐이었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들에겐 '책', 그것도 매우 위험하면서 그렇기에 더욱 달콤한 금서가 곧 희망이었다. 친구인 '안경잡이'에게 겨우 빌린 책을 읽으며 주인공은 필사를 하고, 뤄는 사랑하는 '바느질 소녀' 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던중 책을 지닌 안경잡이는 운 좋게 다시 도시로 돌아갔고, 교화시키겠단 거창한 목표가 예상보다 빨리(?) 이뤄진 바느질 처녀는 테니스신발을 신고 훌쩍 떠나버렸다. 이 둘의 슬프고 비관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훈훈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해학이 주는 신기한 매력이었다.


어느 날 아침, 똥통을 지고 나르는 일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촌장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아홉 시가 다 되어가면서 수탉이 태연하게 모이를 쪼는 시늉을 내고 있을 때, 뤄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그는 새끼손가락으로 자명종 바늘을 반대방향을 한 시간 되돌려놓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계속 잠을 잤다. 촌장이 긴 대나무 담뱃대를 물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은 그만큼 더 꿀맛같고 유쾌했다. 그 대담하고 기막힌 발견 덕분에, 공산주의 체제하의 '가난한 농민'으로 전환해 우리의 재교육을 담당한 예전의 아편 농사꾼들에 대해 품었던 악감이 거의 가실 정도였다.

- p.24


'무지에서 오는 색다른 즐거움'은 이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명종 시계가 유일한 이 마을에서 두 소년은 늦잠을 자고 싶으면 적당히 시침을 돌려놓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바이올린 장면도 대표적이다. 서양 악기를 처음 보는 농촌 주민들은 설왕설래를 벌이다 결국 마을의 신이나 다름없는 촌장의 말에 따라 바이올린을 부수려 한다. 급하게 두 소년은 이건 악기라고 설명하고, 그러면 악기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고.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소나타가 뭔지 풀어내야한다. 결국 기지를 발휘해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는 소위 말하는 '구라'를 아주 맛깔나게 풀어낸다. (거짓말이라고 표현하기엔 그 맛이 살지 않는다.)


나 자신이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를 생각한다>를 비롯한 여러 곳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는데다 그 작품이 발자크의 번역가인 푸 레이의 번역이어 나는 장난 삼아 연애한다는 기분으로 그 책을 대강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친 그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대개 재치가 넘치고, 때로는 재미있는 사상으로 구성되거나 깜짝 놀랄 정도로 기발해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단편집들이었다.

-p.152~153


조약돌을 물에 담가서 국으로 먹는 노인, 병에 걸린 뤄를 고쳐준다며 실컷 두드려 패는 장정들. 두 소년을 둘러싼 환경에서 비롯된 고초가 독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재미 요소로 다가온다. 한편 타고난 이야기꾼인 두 사람은 촌장의 지시로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고 돌아와 그걸 그대로 주민들에게 들려주는 중책도 맡는다. 혈기왕성한 두 소년에게 시내를 나가는 일은 그 자체로 기분전환이자 기쁨이었다. 영화를 100% 똑같이 재현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이 둘은 관객과 소통하며 오히려 더욱 재밌게 이야기를 각색한다. 이들의 유쾌한 만담이 가능한 원동력은 역시나 '독서'다.


'바-엘-짜-케'. 중국어로 번역된 프랑스 작가의 이름이 네 개의 표의문자로 하나의 낱말을 이루었다. 번역의 경이로움인가! 갑자기, 앞의 두 음절이 주는 무거움, 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호전적이고 도전적인 울림이 사라졌다. 각각이 약간의 의미를 내포한 아주 멋스러운 네 글자가 한데 모여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아내면서 몇백 년 동안 지하실에 보존된 술에서 나는 향기처럼 이국적이고 감각적이고 그윽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 p.80


주인공, 뤄, 바느질 소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해피엔딩, 새드엔딩이라 말할 수 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뤄에겐 연애 소설, 바느질 소녀에겐 계몽 소설일 것이다. 책을 매개로 뤄는 사랑에 빠져 용기를 얻고, 바느질 소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더 큰 세상으로 나간다. 이미 독서를 통해 여성을 계몽시켜 조금씩 키우겠다는 오만한 뤄의 마인드에서부터 어쩌면 이 사랑의 종말이 예견되지 않았을까? 타인에게 새로운 문명을 전해주는 것만으로 엄청난 특권이자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위험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세 사람 사이에서 묵묵히 책과 사랑에 빠진 바보 주인공은 '독서'를 찬미하고 또 찬미한다. 힘든 시기를 이겨낼 힘을 사랑과 탐헝, 그리고 자유가 넘치는 책 속에서 찾은 것이다.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가방 안에 가득한 책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서양의 위대한 작가들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맨 위에는 우리의 오랜 친구 발자크의 소설 대여섯 권이 놓여 있고, 다음으로 빅토르 위고, 스탕달, 뒤마, 플로베르, 보들레르, 로맹 롤랑, 루소, 톨스토이,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그런가 하면 디킨스, 키플링, 에밀리 브론테 같은 영국 작가들의 책도 있었다.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나는 환희의 안개 속에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방에서 소설책을 한 권 한 권 꺼내서 들쳐보고, 작가의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뤄에게 책을 넘겨주었다. 창백해진 내 손끝은 흡사 살아 있는 인간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 p.138~139


"책을 읽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다."
"10대 시절 읽은 책이 나머지 70년을 결정한다."
청소년에게 독서를 권하는 명언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독서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활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10대 후반 지나친 학업에 대한 부담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걸림돌이 오히려 즐거운 독서를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로 변질시켰다. 주인공과 뤄는 괴로운 상황에서도 책에서 희망을 찾았다. (물론, 금기를 어기는 일에서 오는 묘한 쾌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책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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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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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 바꿀 수 있는 기억이 있다면 지울 수 있을까? 내가 작곡한 불멸의 명곡이 다른 누군가도 함께 만들었다면? 생명을 갉아먹지만, 천재적인 작품을 쏟아낼 수 있다면? 어느덧 내 육체는 사라지고 관념만이 잼통안에 담겨 있다면? 독특한 상상력을 자신만의 세계에 담아낸 김성중 작가의 <국경시장>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국경'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몽환적인 느낌으로 담아낸 그녀만의 이야기판이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욕망'이란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누군가를 부러워했고, 얻지 못한 것을 경멸하며 동시에 동경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날려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시기와 질투에 빠져 상대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나아가 자신의 육체마저 사라지고 관념만이 덩그러니 남아버린다. 소설이란 장르에서만 가능한 유쾌하며 재기발랄한 상상력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 단편마다 선호도의 편차가 조금 있었다. <국경시장>과 <쿠문>의 강렬한 무대와 흥미로운 문제의식에 사로잡혀 초반부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면, <나무 힘줄 피아노>나 <필멸>을 보면서는 약간 지루한 감도 있었다. 킹코브라의 삶을 그린 <동족>은 머릿속에 하나의 다큐멘터리 속 숨은 이야기가 그려졌지만, <에바와 아그네스>는 통 집중하기 어려웠다. 물론 자전적인 <한 방울의 죄>에서 이야기꾼이란 숙명을 타고난 작가의 인생을 엿볼 수 있어서 개운하게 마무리했지만 말이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국경시장>읜 책의 제목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물고기 비늘이 화폐이고, 기억을 팔 수 있는 시장이라니! 비록 마지막이 예상대로 비극적으로 끝나버렸지만, 그 환상적인 공간을 사실적으로 꾸며낸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일 것 같았다.


책을 덮고 나는 <쿠문>에 기꺼이 짧은 삶을 던질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천재적 재능을 얻는 대신 짦은 인생을 고통스럽게 마감해야만 하는 운명이라. 항상 글을 쓰든 운동을 하든 나는 천재형이라기 보단 노력형에 가까웠다. 남들보다 빠르게 뭔가를 배우고 따라했지만, 어느 경지 이상에서는 정체하곤 했다. 즉 빨리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만 그 벽을 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 현실에 안주하거나, (이정도면 충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깐.) 또 다시 새롭게 배움의 재미를 느끼는 것으로 갈아타곤 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재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이들을 보면 샘이 나곤 했다. 같은 노력을, 아니 적어도 나보다 덜 노력했는데도 더욱 훌륭한 성과물을 토해내는 게 처음엔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수준이 지나면 동경의 단계에 접어들고, 그 샘을 원동력 삼아 나도 열심히 노력하는 게 맞다고 깨달았다. (블로그 아이디인 샘바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지었다.) 가늘고 길게 살자가 모토지만, 가끔은 한번 사는 인생.. 천재처럼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멋지게 퇴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도 든다. 분명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문앞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 같다.

 

 

이 종이를 읽을 때쯤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 기억을 모두 팔아 이 가게를 샀거든.

첫 줄을 읽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로나는 마지막 환전을 하기 전에 이글을 써두었던 것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 처음에는 6개월, 다음에는 27개월, 그 다음엔 5년이 걸렸어. 떠날 때마다 내 여행은 점점 더 길어져. 비행기를 타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어. 수많은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봤으니 진정한 고향을 발견하면 그곳에 머물러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여기가 네 고향이라고?"
이미 대답할 수 없게 된 로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해야 할 사람은 나라는 듯이, 나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다음 만월에 날 만나러 와줘.

그때부터 그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작곡, 그림, 저작, 무용 등 온갖 창조적인 작업에 매달릴 것이다. 자기표현을 향한 의지야말로 쿠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발진이 연달아 터지고 강렬한 감정으로 으르렁대는 시기에 놀라운 작품들이 탄생하기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가족들도 적지 않다. 환자는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그를 호출한 환상에 매달릴 것이고, 그렇게 남긴 작품이 유가족에게 뜻하지 않은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쿠문으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는 약 3~5년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재능이 자신의 삶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을 방관한다. 그러나 쿠문 사망자들은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어 그들이 만족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쿠문은 인류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만약 당신에게 쿠문에 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짧고 고통스러운 천재의 삶과 이전의 삶 중에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가벼운 행복, 그렇다. 꽉 찬 환희는 아니지만 기분좋을 정도의 게으름과 활력이 그에게 존재했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자기 자신조차 제자리에 있었다. 완벽한 화음의 일부에 자신도 들어 있는 것이다. 평생 흰건반으로만 살아오다가 검은건반으로, 그러니까 플랫 하나 정도 올라온 감각이랄까. 모든 것이 신선한 사물들이 베풀어준 호의 덕분이었다.

죽음처럼 편안한 세 개의 장화음. 포르테, 포르티시모! 앙투안은 섬망 속에서 마지막 지휘를 하는 중이었다. 자기가 흘린 피에 서서히 가라앉는 최후는 고통스럽기보다 황홀했다. 좋은 음악은 언제나 육체를 벗어나는 감각을 선사하는데, 이번에야말로 감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 앙투안의 심장도 박동을 멈추었고, <불멸>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오후가 되어서야 풍경이 새삼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행지가 가장 좋아지는 순간은 그곳을 떠나기 직전이다. 이별이 가시화된 순간에야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처럼.

희정이는 내가 만난 최초의 이야기꾼이었다. 그애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환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없는 잠옷과 없는 어머니, 그밖에 부재하는 모든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채워넣기 위해, 공란이 그렇게도 많은 어린 삶을 방어하기 위해 숱한 거짓말을 발명한 것이다.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왜 아저씨를 무시했을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람을 차별하는 감각. 그런 건 누가 구태여 말해주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 말하자면 공기중에 섞여 있는 매연 같은 것으로 나는 입과 코의 땀구멍을 통해 전부터 이 비열한 공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이 공기는 오래전에 내 속에 들어와 아저씨를 무시하던 순간에 날숨으로 훅 새어나간 것뿐이다.

환전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남자는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른 손톱만한 크기의 노르스름하고 반투명한 조각이었다. 자세히 살펴봐도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강 상류에서 잡히는 물고기 비늘입니다. 열다섯 살 미만의 소년에게만 잡히는 진귀한 물고기들이지요. 산 채로 튀겨내면 비늘 하나하나가 곤두서서 떼어내기 좋은 상태로 변합니다. 듣자니 비늘만 쓰고 몸통은 버린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허무맹랑한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주코는 호기심을 보이며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요?"
"이 물고기들은 세상의 어떤 화폐로도 환전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그 사람의 기억과 맞바꿀 수 있을 뿐이죠...자,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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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사생활 - 관계, 기억, 그리고 나를 만드는 시간
데이비드 랜들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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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야만 하는 순간에는 꼭 잠이 오질 않는다. 잠을 자지 말아야 하는 순간에는 꼭 잠이 온다. 이렇게 역설적이고 신비한 영역을 <잠의 사생활>은 흥미롭게 분석한다. 잠이란 것만큼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상생활의 활동이 있을까? 학창 시절에는 귀가 아프도록 삼당사락(三當四落)을 외치며 잠을 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키가 크기 위해서는 적어도 밤 9시에는 잠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른한 오후에 선물과도 같은 귀중한 시에스타가 있는 나라도 있다. 혹자는 이를 보고 경제 위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게으른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여전히 숙면과 관련된 시장은 불티나게 팔린다. 메모리폼 베개, 음이온 매트를 시작으로 클래식 모음 CD의 부제 중 십중팔구는 '잠이 잘 오는'이다. 반대로 잠을 깨기 위한 노력도 여전히 뜨겁다. 더 강한, 더 자극적인 각성제는 역동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며 타우린 용량을 크게 크게 광고한다. 우리가 가장 알고 싶지만, 가장 모르고 있는 '잠'의 영역. <잠의 사생활>을 이에 대한 호기심의 크기를 키워주는 훌륭한 자양분이다.


<잠의 사생활>에선 잠을 잘 잘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잠과 관련된 온갖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을 늘어놓는다. 한 장씩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것만은 확실하다. 잠들기 전에 이 책을 손에 잡으면 그날 푹 자기는 글렀다는 거다. 기자 출신인 저자의 스타일처럼 잠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와 분석들이 병렬적으로 실려있다. 남녀 수면 패턴의 차이, 침대와 숙면의 상관관계, 조명의 영향, 잠과 스포츠, 역사적인 수면 비법, 잠을 깨기 위한 수많은 각성제, 수면 섹스, 수면 박탈. 온갖 흥미로운 잠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알차게 담겨 있지만 역시 가장 흥미로운 건 '몽유병'이었다. 그 중에도 '잠결에 저지른 살인'의 주인공 켄 파크스의 사례가 특히 눈에 띈다. 그는 어느 날 밤 침대에서 일어나 고속도로를 지나 장인과 장모의 죽이려 달려들었다. 그리곤 양손에 큰 상처를 입은 채 경찰서에 찾아가 외친다. 


"방금 내가 두 사람을 죽였어요. 맙소사! 내가 방금 두 사람을 죽였다고요."


여기까지가 켄 파크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부분이다.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그는 몽유병 상태였고, 이는 '사건 수면'으로 분류되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자는 동안 잠을 자면서 말하고, 먹고, 운전하고, 자위하고, 심지어 섹스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라니! 무겁고 잔혹한 주제였지만 그만큼 자극적이고 인간이란 존재의 무궁무진함에 놀랐다. 잠을 빼앗으면 정신적, 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볼 수 있다. 쥐가 아닌 사람 역시 똑같이, 아니 더 심각한 수준의 아픔을 겪을 게 분명하다. 앞서 나온 '사건 수면'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 할지라도 코골이, 불면증은 누구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병이다. 우리가 병으로 인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 겪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일 것이다. 정상적으로 푹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새삼 느꼈다.


한 주민은 기자에게 왜 자신이 파크스를 찍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몽유병은 어쩌면 (용서받을 수도 있겠죠) 의학적인 문제이지만, 횡령은 문제가 다르죠."

파크스는 인생에는 결코 만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전체 후보 중 꼴찌를 차지했다.


문득 내 경험이 떠올랐다. 정말 피곤하게 운동을 하고 난 밤이면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있다. 눈이 떠지고 정신은 깨었는데 돌덩이처럼 무거운 몸은 움직이질 않는 아찔한 경험이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감에 시달릴 때면 나도 모르게 새벽에 깨서 닥치는 대로 뭔가를 먹는다. 무의식의 영역이지만 아침에 깨어나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걸 지켜보는 가족의 놀라움은 둘째치고. 오늘은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아니, 이런 걱정을 하는 것 자체가 완벽한 수면을 방해하는 첫 단계이니, 그만 생각해야겠다. 하지만 쉽지 않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코끼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민델은 수면 훈련이 옳으냐 함께 자기가 옳으냐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관성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녀는 내게 "아이들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예측할 수 있을 때, 잠자리에 드는 시간의 의식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요."라고 말했다. 홍콩의 그 환자는 일관성을 유지하기만 했더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건 충분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의 잠에 관한 한, 수면의 질을 예측하기에 더 나은 지표는 함께 자기에 대해 부모가 내리는 선택보다는 규칙적인 습관이다. 밤마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일관성 있게 따라야 아이를 재우는 시간이 작은 전투로 변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침실 문화에 대한 문화적 접근도 흥미로웠다. 아이와 함께 자는 것이 정서적 유대감에 도움이 된다며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나라, 아이와 따로 자는 게 자립심과 독립적인 마음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나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보다는 일관적인 습관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는 침대의 딱딱함, 푹신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최첨단 기술이 총집약된 수백만 원 짜리 최신형 침대라 할 지라도 지금 당장 내가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침대보다 못하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심지어 아스팔트 바닥과 별 차이가 없다니!) 그만큼 우리 인간의 정서적인 안정감과 본인이 지닌 믿음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 엿볼 수 있었다.


2008년, 의학 학술지 <스파인>에 실린 연구 결과는 딱딱한 침대 문제에 최종 결론을 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연구 결과는 딱딱한 매트리스에서 자는 사람이나 푹신한 매트리스에서 자는 사람이나 허리 통증을 느끼는 정도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딱딱한  침대를 좋아하느냐 푹신한 침대를 좋아하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일 뿐, 의학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여러분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침대는 여러분이 이미 누워 자고 있는 침대일 가능성이 높다.


가만히 책을 읽다 보면 남자는 참으로 철딱서니 없고 걱정 따윈 없는 미련한 인간으로 비춰진다. 남자는 코를 고는 비율도 훨씬 높고, 잠버릇이 나쁠 확률도 높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가장 심각한(아니, 절대적인) 문제인 아이가 도중에 깨는 일에도 여자에 비해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잠들어 버린다. (사건 수면 역시 주로 남성에게 나타나는 특성이라고 알려졌다.) 진화론적인 이유인지, 혹은 사회문화적인 이유인지 몰라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육아에 있어서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비율이 훨씬 높은 대한민국에서, 육아까지 잠을 핑계로 미룬다는 건 참 이기적인 일이 아닌가. 재밌게도 부부가 한 침대를 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은 혼자 잘 때보다 배우자와 함께 잘 때 잠을 훨씬 잘 자는 경향이 있다. 짖궂게도 여성은 잠도 훨씬 곱게 자며 남편보다 아내가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남성은 혼자 잘 때보다 배우자와 함께 잘 때 잠을 훨씬 잘 자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배우자의 코 고는 소리를 듣는 불편이 없이 사랑하는 사람 여 ㅍ에서 잔다는 사실이 주는 정서적 이득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여성은 코를 골 확률이 남성보다 훨씬 낮을 뿐만 아니라, 잠도 훨씬 곱게 잔다. 그 결과는 밤의 소극으로 나타나는데, 남편보다 아내가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훨씬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갈수록 잠이 건강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것은 결혼 생활을 더 건강하게-그리고 더 행복하게- 만드는 부수 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나도 내 나름대로 잠을 잘 자기 위해서 노력하고 관심이 많은 편이다. 잠들기 전에 꼭 스트레칭을 가볍게라도 하고, 무릎 밑에는 쿠션 하나를 더 놓아둔다. 목에는 메모리폼 베개를 살짝 놔두고 최대한 정면으로 잠들기 위해서 바르게 눕는다. 정말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틀어두고 10분 알람을 맞춰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알람을 무의식적으로 끄고 5분 후에 일어나서 비몽사몽 머리를 감고 대충 면도를 한다. 셔틀 버스에 타자마자 눈을 감고 뜨면 회사다. 회사 1층 화장실 오른쪽 칸에 들어가 다시 알람을 맞추고 잠시 목을 대고 쪽잠을 잔다. 최근에는 점심 시간에도 10분 정도는 엎드려서 눈을 붙인다. 확실히 건강하고 권장하는 수면 패턴은 아니다. 나는 분명히 잠을 더 자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는 시간도 벌써 12시가 넘었다. 자기 전에는 일찍 잠드는 게 아쉽고, 일어난 후에는 늦게 잠들었던 게 후회된다. 아이러니한 인생이여. 잠이 인생의 3분의 1을 차지하니 인생 역시 아이러니할 수밖에!


불면증이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불면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미국의 성인 5명 중 2명은 매일 밤 지속 수면 장애와 상관없는 문제로 잠이 잘 오지 않아 고통을 겪는다. 잠자리에 눕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불면증의 역설에 빠져든다. 즉, 잠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불면증을 연구한 뉴욕 대학의 교수 에밀리 마틴은 "잠의 조건은 아주 모순적이다. 잠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다른 좋은 것들하고는 아주 다르다. 그것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지겠다는 강박 관념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잠의 기묘한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얼핏 보기에는 잠은 인생의 단순한 일부처럼 보이지만, 매일 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나는 시간을 내어 제대로 연구한다면 이 흥미롭고도 보편적인 인생의 진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내기위해 군사 기지와 기업 본부, 대학 연구소, 컨벤션 센터를 두루 방문했다.

잠은 삶에서 단절된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전체 퍼즐에서 빠져 있는 3분의 1이다.




긴 인공 조명 시간과 짧은 수면 시간은 오늘날 지구촌 경제의 대세로 자리잡았으며, 오랫동안 낮잠을 즐겨운 문화들은 에디슨이 환영할 노동 중시 세계에 순응하도록 강요한다. 낮잠은 흔히 에스파냐를 비롯한 라틴 문화권의 관습으로 간주되지만, 한때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오늘날에도 중국에서는 국영 기업의 경우, 직원에게 점심 시간을 두 시간씩 주는데, 한 시간은 식사를 위한 것이고, 또 한 시간은 낮잠을 위한 것이다.




늘어난 수면의 효과는 단지 몸을 편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술 발전은 미군에게 전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제공했지만, 인간의 몸은 본질적으로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 우리 뇌는 기술과 같은 속도로 발전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핵잠수함의 컴퓨터는 수렵 채집 생활에 맞춰 설계된 마음을 가진 병사에게서 지시를 받는다. 우리의 조상 인류에게 수면이 부족할 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사냥 동물을 놓치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온 세계를 파괴할 수 잇는 무기가 한 군인의 손가락 끝에 달려 있는 지금은 그 위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하지만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은 군인이라도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군은 잠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능력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숙면의 비법은 단순히 마음이 스스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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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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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부르면


마음을 다해 부르면

내 마음속 생채기가 아물 수 있을까

차마 보내지 못한 조그만 핏덩이들을

검은 바다에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야

억겁의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고

굳게 응어리진 돌덩이를 깨부수고 즈려밟아서라도

천천히 따라가고싶다


제발

가지 마라

아직

우리는 차마

못 하겠다


네가 아직 마음 속에 퐁당퐁당 조약돌을 던지고 있는데

그 잔잔한 물결이 폭풍우마냥 숨통을 쥐어짜는데

내가 어찌 너를 보낼 수 있겠느냐


차라리 크게 울어라

부디

웃으라고 손을 잡을 용기조차 없다

그렇게라도 어렴풋이 떨림을 느끼고 싶다


잊지 않겠다는 말은 입가를 맴돌지조차 않는다

내안의 온전히 완벽한 세상을 선물해준

너를

잊는다는 건


꿈에서라도 그려지지 않는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자꾸 흐려지는 게 나의 잘못인 것 같구나


 

지난 한 달간 많은 걸 보고 들었다. 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다 속에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中 


삶은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몇 겹의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검은 바위를 철썩거리는 파도처럼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밖에 말 못해서 미안하고, 가만히 있어서 미안하고, 미안하다고밖에 말 못 해서 미안해지는, 어쩔 줄 모르겠는 밤입니다.

- 김행숙, <질문들> 中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사전적 해석을 빌리자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한다. 반면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많나 뜻밖의 일을 의미하는데 거기엔 또 다음과 같은 해석이 뒤따른다. 주로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며 범죄라든지 역사적인 일 등이 이에 속한다. 그렇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교통사고를 교통사건이라 부르지 않으며, 살인사건을 살인사고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 사고와 세월호 사건은 실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나는 후자의 비중이 이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中


마치 이 배를 닮은 한 척의 배가 침몰했다. 기울어가는 그 배에서 심지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했다. 내 구명조끼 입어...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기울어진 배에서...그랬다. 나는 그 말이 숨져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경제의 문제도 아니다. 한 배에 오른 우리 모두의 역사적 문제이자 진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 에밀레종의 실제 타종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 그 소리는 매우 슬펐으나 어떤 슬픔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나긴 여운을 간직한 것이었다. 우리가 탄 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월호라는 배를 망각의 고철덩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밝혀낸 진실을 통해 커다란 종으로 만들고 내가 들었던 소리보다 적어도 삼백 배는 더 큰, 기나긴 여운의 종소리를 우리의 후손에게 들려줘야 한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낸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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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소설가 김영하는 단순히 글만 쓰지 않는다. 북 콘서트,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SBS <힐링캠프>. 잡지, 인터뷰. 번역. 글쟁이라 하기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 중이다. 그리고 그런 원천은 결국 호기심이란 걸 <보다>를 읽으며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소설가의 눈에 비친 인간이라는 작은 지옥' 이라는 소개처럼 김영하는 담담하게 영화, 패션, 명절, 택시, 드라마 등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저 관성처럼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하나하나에도 김영하는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 왜? 무엇 때문에? 혹시? 만약에? 다양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현상의 이면에 감춰진 것들은 들춰본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쓰고 또 쓴다. 소설가란 직업의 특수성 탓만은 아니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보고 들은 걸 쓰고, 말하고, 그리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려 발버둥 치는 것이다. 본 것을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보는 순환적인 행위는 적어도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일지라도 어느 방향으로라도 사고의 범위를 넓혀 준다.


<그래비티>, <설국열차>, <신세계> 등 내가 재밌게 봤던 영화들에 대한 소회도 인상적이었다. 반드시 내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가 아니다. 같은 사물을 두고 다르게 생각하는 타인과 만나 그 생각을 공유하며, 사고를 확장하는 즐거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따스한 햇볕에 누워서 편하게 읽기 좋았다. 분량도 짧았고, 소재가 워낙 전방위적으로 넓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적인 글은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할 용기"였다. 김영하는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인용하며 귀족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들고나온다. 번거롭고 위험한 여행을하기 보다는 당당하게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떠나지 않는 것도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기막힐 정도로 신통하다.


"새삼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못하면 촌스러운 게 아니다. 어느덧 유럽 배낭 여행이 "도전정신이 뛰어나고 열정적이며, 활발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뽐내는 글로벌한 인재"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어버렸다. 마치 남들이 다 가니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해외 여행을 떠나는 추세다. 마치 자소서에 올릴 스펙처럼, 여행마저도 스토리텔링의 준비 단계로 전락한 느낌이다. 여행은 분명 선택의 문제이며, 각자 여건에 맞게 고를 사항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가 추천한 대로 여행지만 콕콕 짚어서 사진만 남기고 오란 말이 아니다. (환상적인 여행 사진은 차라리 인터넷에 더 많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걸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해 떠나란 것이다. 누군가에겐 길거리 야시장의 음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관중이 가득 찬 축구 경기장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여행을 떠나기 직전 공항에서 느끼는 설렘과 떨림이 필요할 수도 있다. 뭐든지 상관없다. 여행은 떠나기 전, 돌아온 후에도 삶의 활력소가 되어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일상의 권태로움을 날릴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때의 추억을 벗 삼아 지치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말들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학생 때는 여행 갈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고, 직장인이 되면 돈은 많은데 여행 갈 시간은 없다고. 공감하고 또 공감한다. 짧게나마 대만을 다녀온 지금에 더욱 크게 생각난다. 여행은 익숙한 곳을 떠나 조금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힘들고 지치고 피곤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고. 더 늙기 전에 더 많이 보고 배우고 느껴야겠다. 세상의 불평등한 시간이 더 이상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기 전에.



더 읽을 거리.


부자들은 이제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선택의 여지 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남자5, 꼬리칸 승객, 시인 : 시를 써서 뭐하냐고요? 그럼 달리 뭘 하죠? 몸은 갇혀 있는데... 언어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가둘 수 없잖아요?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예정설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 암시가 꼭 점쟁이나 관상쟁이에게서 나올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책값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과당경쟁과 적은 이윤율로 출판계가 공멸하고 사람들은 책이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고(음반이 사실상 사라진 세상에 우리는 이미 적응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이 더이상 필수품이 아니게 된다면 말이다. 그때는 선택받은 부유한 소수만이 책을 사고 읽을 것이다. 소설은 '리미티드 에디션'같은 라벨이 붙어서 한정된 독자에게만 비싼 값으로 팔릴 것이다. 필요한 사람이 없으니 비싸다는 항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런 시대를 원하는가, 답은 물론, 아니오다. 나는 지루하고 쾌적한 천국보다는 흥미로운 지옥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책이라는 상품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한동안 나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고정적으로 여러 매체에 동시에 기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해진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연하게 써내도록 스스로를 강제하게 된다.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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