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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걸."
-p.252
발자크, 바느질, 중국, 소녀. 어느 하나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단어들이 모인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제목부터 독자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중국 태생의 다이 시지에의 첫 장편소설인데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문학에 가깝다. 배경이 중국일 뿐 문체나 느낌, 주인공에게 영감을 주는 발자크, 플로베르 등 프랑스 문학이란 소재까지 프랑스를 닮았다. 마치 친절하고 유쾌하게 중국의 이야기를 프랑스의 화법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는 느낌이랄까? 실제 작가 역시 10대 시절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년간 쓰촨성에서 '재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데, 그걸 토대로 중국 현대사의 그늘을 개인적 경험으로 유쾌하게 승화시켰다.
읽어본 중국 소설은 위화의 <허삼관매혈기>가 유일했는데, (실제 한국에서 판매되는 BEST 1,2,3위 모두 위화의 작품이라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읽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란 명제를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기에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고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근래에 보기 힘든 착한 가격! 10,000원이 안 넘는 책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게다가 중국인을 겨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붉은 신이 단정하게 놓여있는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쉰 살 먹은 촌장이 방 한복판, 흙을 파내고 만든 화로에서 훨훨 타오르는 석탄불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의 바이올린을 검사하고 있었다. 뤄와 내가 마을 사람들의 눈앞에 내놓은 '도회지 청년'의 소지품 중에서 바이올린은 그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생소한 맛, 문명의 냄새를 풍기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 p.7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주인공과 뤄, 두 소년은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시골로 재교육을 떠난다. 그들이 강제로 '하늘긴꼬리닭'으로 불리는 산으로 떠밀려간 이유는 부모님이 의사란 이유뿐이었다. 특히, 뤼의 부모님은 마오 주석의 치과의사였고, 그의 치아를 고쳐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누명인지, 진실인지 모를 인민재판을 받았다. 마치 신성 모독을 했단 죄목으로 마녀 사냥을 당하듯이. 두 소년의 '재교육'을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낯선 세계에서 위험천만한 높은 곳에서 똥지게를 지고 가는 일,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각오하고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일이 그들의 유일한 임무였다.
고작 17, 18살인 두 소년이 열악한 산골에서 나갈 희망이라곤 3퍼밀(1,000명 중 3명)뿐이었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들에겐 '책', 그것도 매우 위험하면서 그렇기에 더욱 달콤한 금서가 곧 희망이었다. 친구인 '안경잡이'에게 겨우 빌린 책을 읽으며 주인공은 필사를 하고, 뤄는 사랑하는 '바느질 소녀' 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던중 책을 지닌 안경잡이는 운 좋게 다시 도시로 돌아갔고, 교화시키겠단 거창한 목표가 예상보다 빨리(?) 이뤄진 바느질 처녀는 테니스신발을 신고 훌쩍 떠나버렸다. 이 둘의 슬프고 비관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훈훈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해학이 주는 신기한 매력이었다.
어느 날 아침, 똥통을 지고 나르는 일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촌장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아홉 시가 다 되어가면서 수탉이 태연하게 모이를 쪼는 시늉을 내고 있을 때, 뤄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그는 새끼손가락으로 자명종 바늘을 반대방향을 한 시간 되돌려놓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계속 잠을 잤다. 촌장이 긴 대나무 담뱃대를 물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은 그만큼 더 꿀맛같고 유쾌했다. 그 대담하고 기막힌 발견 덕분에, 공산주의 체제하의 '가난한 농민'으로 전환해 우리의 재교육을 담당한 예전의 아편 농사꾼들에 대해 품었던 악감이 거의 가실 정도였다.
- p.24
'무지에서 오는 색다른 즐거움'은 이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명종 시계가 유일한 이 마을에서 두 소년은 늦잠을 자고 싶으면 적당히 시침을 돌려놓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바이올린 장면도 대표적이다. 서양 악기를 처음 보는 농촌 주민들은 설왕설래를 벌이다 결국 마을의 신이나 다름없는 촌장의 말에 따라 바이올린을 부수려 한다. 급하게 두 소년은 이건 악기라고 설명하고, 그러면 악기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고.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소나타가 뭔지 풀어내야한다. 결국 기지를 발휘해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는 소위 말하는 '구라'를 아주 맛깔나게 풀어낸다. (거짓말이라고 표현하기엔 그 맛이 살지 않는다.)
나 자신이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를 생각한다>를 비롯한 여러 곳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는데다 그 작품이 발자크의 번역가인 푸 레이의 번역이어 나는 장난 삼아 연애한다는 기분으로 그 책을 대강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친 그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대개 재치가 넘치고, 때로는 재미있는 사상으로 구성되거나 깜짝 놀랄 정도로 기발해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단편집들이었다.
-p.152~153
조약돌을 물에 담가서 국으로 먹는 노인, 병에 걸린 뤄를 고쳐준다며 실컷 두드려 패는 장정들. 두 소년을 둘러싼 환경에서 비롯된 고초가 독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재미 요소로 다가온다. 한편 타고난 이야기꾼인 두 사람은 촌장의 지시로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고 돌아와 그걸 그대로 주민들에게 들려주는 중책도 맡는다. 혈기왕성한 두 소년에게 시내를 나가는 일은 그 자체로 기분전환이자 기쁨이었다. 영화를 100% 똑같이 재현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이 둘은 관객과 소통하며 오히려 더욱 재밌게 이야기를 각색한다. 이들의 유쾌한 만담이 가능한 원동력은 역시나 '독서'다.
'바-엘-짜-케'. 중국어로 번역된 프랑스 작가의 이름이 네 개의 표의문자로 하나의 낱말을 이루었다. 번역의 경이로움인가! 갑자기, 앞의 두 음절이 주는 무거움, 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호전적이고 도전적인 울림이 사라졌다. 각각이 약간의 의미를 내포한 아주 멋스러운 네 글자가 한데 모여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아내면서 몇백 년 동안 지하실에 보존된 술에서 나는 향기처럼 이국적이고 감각적이고 그윽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 p.80
주인공, 뤄, 바느질 소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해피엔딩, 새드엔딩이라 말할 수 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뤄에겐 연애 소설, 바느질 소녀에겐 계몽 소설일 것이다. 책을 매개로 뤄는 사랑에 빠져 용기를 얻고, 바느질 소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더 큰 세상으로 나간다. 이미 독서를 통해 여성을 계몽시켜 조금씩 키우겠다는 오만한 뤄의 마인드에서부터 어쩌면 이 사랑의 종말이 예견되지 않았을까? 타인에게 새로운 문명을 전해주는 것만으로 엄청난 특권이자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위험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세 사람 사이에서 묵묵히 책과 사랑에 빠진 바보 주인공은 '독서'를 찬미하고 또 찬미한다. 힘든 시기를 이겨낼 힘을 사랑과 탐헝, 그리고 자유가 넘치는 책 속에서 찾은 것이다.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가방 안에 가득한 책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서양의 위대한 작가들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맨 위에는 우리의 오랜 친구 발자크의 소설 대여섯 권이 놓여 있고, 다음으로 빅토르 위고, 스탕달, 뒤마, 플로베르, 보들레르, 로맹 롤랑, 루소, 톨스토이,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그런가 하면 디킨스, 키플링, 에밀리 브론테 같은 영국 작가들의 책도 있었다.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나는 환희의 안개 속에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방에서 소설책을 한 권 한 권 꺼내서 들쳐보고, 작가의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뤄에게 책을 넘겨주었다. 창백해진 내 손끝은 흡사 살아 있는 인간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 p.138~139
"책을 읽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다."
"10대 시절 읽은 책이 나머지 70년을 결정한다."
청소년에게 독서를 권하는 명언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독서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활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10대 후반 지나친 학업에 대한 부담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걸림돌이 오히려 즐거운 독서를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로 변질시켰다. 주인공과 뤄는 괴로운 상황에서도 책에서 희망을 찾았다. (물론, 금기를 어기는 일에서 오는 묘한 쾌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책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책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