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지? 웅진 세계그림책 144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홍연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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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애가 있으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엄청 많으면 어떡하지?"

"내가 싫어하는 음식들만 있으면 어떡하지?"


누구나 '처음'은 두렵고 어렵다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때론 설렘을 주지만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내가 가진 경험의 폭으로 쉽게 상상할 수 없기에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낯선 사람들의 시선은 평소같지 않아 보인다사소한 말투평범한 걸음똑같은 표정에도 혹시나 그들이 나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한다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남들은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나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다그리고 막상 겪고 나면 생각보다 훨씬 더 즐겁고 아름다운 결과물이 나올 확률이 더 높다아이들은 특히 더 낯선 환경에 움츠러든다행여나 실패한다 하더라도그들의 실패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른채결국 부딪혀보고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부모의 몫은 그저 아이들이 원하지만두려움에 고민하고 있을 때 든든하게 응원해주고 믿어주는 게 전부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이란 <포레스트 검프>의 명대사를 보라어떤 초콜릿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박스 처럼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하지만 그렇다고 박스를 뜯지 않으면그 달콤함을 누릴 수도 없는 게 현실이고멋지게 생일 파티를 즐기고 난 톰이 해맑게 웃으며 "꼭 파티를 할거에요"라고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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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결혼식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76
가스 윌리엄즈 글, 그림 | 강무환 옮김 / 시공주니어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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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사탕처럼 보드라운 털초롱초롱한 눈톡 튀어나온 귀여운 앞니토끼는 항상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토끼가 등장하는 동화책이 제법 많은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토끼의 결혼식역시 차분하고 보드라운 파스텔톤 분위기가 가득한 예쁜 책이다까만 아기 토끼하얀 아기 토끼는 하루 종일 함께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그러던 중 까만 아기 토끼는 몹시 슬픈 표정으로 고민하고이를 바라보는 하얀 토끼는 걱정되는 마음으로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하지만 까만 아기 토끼의 고민은 오로지 하나였다.


"네가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면 좋겠어."


이보다 더 낭만적이고가장 행복한 고백이 있을까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쉽지 않지만 반드시 이루고픈 소원은 아마 없으리라결혼은 현실이다사랑만으로는 힘들다하는 말이 판치는 요즘그래도 제일 중요한 요소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먼훗날 나의 아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 동화처럼 진솔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전하라고 가르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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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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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작가의 첫번째 연애 소설. 야심찬 홍보 문구만큼이나 말랑말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8편이 실려있었다. 언제나 이야기를 쫄깃하게 끌고 가는 재담꾼 김중혁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는 다양한 사람, 사랑이 등장한다. 포르노 제작자, 지진 피해자, 보험사기단, 독립시계제작자, 알콜중독자. 쉽게 접할 수 없는 직업군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빠지다 보니 '연애 소설'이란 부연 설명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정체모를 비행물체에 이끌려 종말로 빠져든 <보트가 가는 곳>은 SF영화의 한 장면이 그려졌고,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읽다보면 옆자리 테이블의 만취한 남녀의 고성이 생생하게 울려퍼졌다. 연애라는 허울보다 김중혁 작가의 장점인 유쾌한 만담이 진한 재미를 선물했다. 그저 사랑을 시작하는 혹은 사랑이 끝난 또는 사랑이 일방적인,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를 나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효석문학상을 받은 <요요>는 확실히 연애소설이었다. 시계를 만드는 직업처럼 '시간'에 대해 항상 생각하는 차선재,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다가와 첫만남만큼이나 홀연히 떠나간 장수영.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까워지는지, 아니면 멀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시간은 직선적으로 느릿느릿하거나 쏜쌀같이 흘러가간다. 하지만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시간'은 그리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읽지 못한 편지를 소중히 아끼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지만 마냥 멀어지는 건 아니었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뒷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에는 시간은 멈춰있었다. 예전 풋풋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시간은 쌓여갔다. 아니면 멀어지는듯 가까워지는 시계 속 시침과 분침과 초침처럼 계속 반복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확실한 건 사랑을 시작하면 '시간'이란 절대적이지 않는 존재란 걸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게 분명하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고, 지나간 시간을 곱씹어보고,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함께 있는 시간 붙잡기 위해 두손을 맞잡는 건 모두 의미있는 일이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반복된다면 방향따위야 어디가 되어도 좋지 않겠는가.

편지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기에 얼마나 불완전한 형식인지 새삼 깨달았다. 똑같은 글인데도 어떤 날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읽혔고, 어떤 날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읽혔고, 어떤 날은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처럼 읽혔다. 그건 어쩌면 편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편지를 쓴 장수영의 마음이 그렇게 어지러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대할 때쯤이면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장수영이 한국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고, 자신이 장수영을 만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때가 오면 차선재는 그 편지를 장수영의 눈앞에 내민 다음 한 구절 한 구절, 그 정확한 뜻을 듣고 싶었다.

- <요요> 中




기민지는 살려달라는 쪽지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려볼까 생각했고, 묵직한 물체에다 매달아 떨어뜨릴까 생각했다. 그러는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일이 잘못됐을 때, 편지 속의 다정한 문장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타인들의 두려움을 더욱 불쾌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기민지는 일단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 <픽포켓> 中

규호는 정윤이 가고 난 의자를 계속 보았다. 정윤이 누르고 있던 의자 등받이의 천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다 부었다. 의자 등받이의 천은 아직도 복구되는 중이었다. 규호는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정윤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거기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규호는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中

정민철과 김우재는 가끔 테니스 시합을 했다. 류영선은 당연히 김우재를 응우너했다. 정민철은 티내지 않고 웃으면서 죽을힘을 다해 테니스를 쳤다. 무조건 게임을 이기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민철은 테니스공이 자신의 코트로 떨어질 때마다 좌절감을 느꼈다. 세상에는 열심히 쫓아다녀도 절대 치지 못할 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손을 힘껏 뻗고 라켓을 한껏 내밀어도 닿지 못하는 공이 있었다. 정민철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지 않으면 패배하는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었다.

- <뱀들이 있어> 中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4년 일기 어플리케이션 역시 사랑하려는 사람들, 꿈 꾸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어플리케이션의 ‘편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녀를 만난 다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 <보트가 가는 곳> 中

자동차가 움직이는 순간 보행자 신호로 바뀌었다. 현수는 파란불을 보면서 발을 내디뎠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며 현수 가까이로 왔다. 빨리 유턴을 해야 한다는 운전자의 마음은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현수가 서 있는 위치는 운전자의 심리적 사각지대였고, 운전자가 무방비 상태로 들어설 지옥문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움직였다. 여자는 현수를 보지 못하고 마지막 유턴 과정에서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현수는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을 미리 읽고 있었다. 자동차의 크기와 유턴 시작 시점을 알면 어디쯤에서 자신과 만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 <힘과 가속도의 법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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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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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장편 소설 <스토너>는 한 남자의 일대기다. 거창한 모험이랄 것도 없는 게, 미주리 대학에서 크게 벗어난 적도 없다. 열정적인 사랑에 흠뻑 빠지지도 않았고, 그저 진정한 사랑을 뒤늦게 만나 고민에 빠졌다가 조용히 흘러갔다. 정치판이나 다름 없는 대학 교수 사회에서도 조용 조용 자기가 할 일을 묵묵히 하며 끝까지 버텨 정년을 맞이했다. 미주리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존 윌리엄스가 분명 허구의 장소, 허구의 인물을 담아냈다고 말했지만, 너무나도 거울을 보는듯한 소설이었다. 실제 잊혀진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 뒤늦게 재조명을 받는 <스토너> 작품마저도 그를 닮았다. 번역의 문제인지, 나는 영미 소설을 읽을 때며 항상 잘 와닿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 문법이나 번역체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에 밟히면 흐름이 끊기곤 해서 좋아하지 않는데 <스토너>는 달랐다. 농촌, 아니 깡촌에서 태어나 대학교에 처음 들어와 자신이 평생 함께할 학문을 맞이하는 신비로운 경험은 그저 놀라웠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려온 대학 캠퍼스의 분주함과 적막이 흐르며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교실은 딱 그랬다. 칠판에 적힌 공식을 빼곡히 받아 쓰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몸으로라도 외우곤 했던 정답들이 고등학교의 전부였다면, 대학은 달랐다. 괴짜 교수는 질문을 던져놓고 학생들은 자유롭지만 치열하게 자신의 생각을 주고 받는 그런 지성의 무대가 대학교였다. 물론 실제 대학교의 여러 모습은 그저 고등학교의 확장판이나 다름 없었지만, '철학과'라는 다소 마이너한 전공을 택했기에 이런 로맨스는 종종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슬론의 시선이 윌리엄 스토너에게 되돌아왔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스토너를 괴롭힌다고 봐도 무방한 아내 이디스와의 삐거덕거림에도 그는 꾸준히 책을 읽었다. 딸 그레이스와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 추억이 담긴 곳도 서재다. 사실 스토너는 그리 유쾌하거나 주목받을 캐릭터는 아니다. 심지어 다들 분위기에 휩싸여 참전하던 세계대전 시기에도 그저 자기가 할 일, 가장 하고 싶은 공부를 이어가니 말이다. 친구도 학장인 핀치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로맥스 교수가 죽도록 미워하며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스토너를 괴롭힐 때도 스토너는 그저 힘들어하며 불편한 강의를 이어 간다. 사실 요즘 한국 대학 사회를 보면 정교수 자리에 올라 정년까지 저술 활동도 한 그는 성공한 삶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은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면 화려한 성공을 위해 도전하거나 핏대를 높일 법도 한데. 속시원하게 화를 내기는 커녕 그저 자리를 쓰윽 피하는 게 전부인 스토너는 애초에 싸움닭이 아닌 곰 같은 사람이었다. 버티는 삶, 어찌 보면 요즘 세상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갖춘 스토너의 삶을 함부로 성공이다, 실패다 재단하긴 이르다.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자신만의 길을 걸은 그가 행복했을지, 아니면 불행했을지는 오롯이 자신의 영역이니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제 넘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넘어 연민의 감정으로 다가가면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라고 느껴지더라도 그 길을 택한 건 결국 본인이고, 그가 주인공이니 말이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딸 그레이스와의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어주고, 도란도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귀여운 딸 아이는 엄마의 강압에 이끌려 자신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극단적인 임신, 결혼이란 도피를 통해 벗어날 때까지, 그리고 술에 잔뜩 중독되어 몸을 못 가눌 때도 스토너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식탁 머리에서의 예의를 강조하며, 아이를 자신의 인형으로 길러내려던 아내에는 당당히 맞섰어야 한다. 그레이스가 원했던 것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 그것만이 그녀가 원했던, 그리고 흔들리는 그녀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결코 그 어떤 가치관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보다 중요하지 않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일이 얼마나 화려해도, 가족이란 근원적 힘이 없다면 허망한 알맹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스토너의 묵묵히 버티는 삶에 많은 공감을 하는 차분한 성격의 나지만, 이것 만큼은 결코 따라할 마음이 1%도 없다. 내 인생이 중요한 만큼,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가족의 영역도 소중하니 말이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스토너가 말했다. "뭐, 걱정 마라. 다 잘될 거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네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든, 다 잘될 거야."

"네." 그레이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랑 저, 이제는 이야기를 할 수 있네요."



<인상 깊은 글귀>


그는 1918년 봄에 박사학위 필수과정을 모두 마치고 그해 6월에 학위를 받았다. 그보다 한 달 전, 장교 훈련학교를 거쳐 뉴욕시 바로 외곽의 훈련소에 배치된 고든 핀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가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그 역시 박사학위 필수과정을 그럭저럭 마치고, 여름에 그곳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편지에는 또한 데이브 매스터스가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입대한 지 거의 1년 만에 미국의 첫 작전에 참가했다가 샤토 티에리에서 전사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딸에게 그는 아버지라기보다 거의 어머니였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빠는 사람도 그였고, 아기 옷을 골라 입혀주고 찢어진 곳을 꿰매는 사람도 그였다. 그는 아기를 먹이고, 목욕시키고, 울면 품에 안고 달래주었다. 가끔 이디스가 투덜거리면서 아기를 부르면 윌리엄은 아기를 그녀에게 데려다주었다. 이디스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불편한 자세로 잠시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몸이 피곤해지면 한숨을 내쉬며 아기를 다시 윌리엄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조금 울고는 눈가의 눈물을 찍어내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래서 그레이스 스토너가 태어난 뒤 처음 1년 동안 접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손길,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의 사랑뿐이었다.


한편 아이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이디스의 태도가 조금 느슨해졌기 때문에 아이도 이제 가끔 미소를 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그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 그러니까 그가 비교적 잘 아는 학생들조차 그를 만나면 어색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심지어 은근히 그의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부러 여봐란듯이 친하게 굴면서 그에게 말을 걸거나, 복도에서 그와 함께 걷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는 예전처럼 학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와 함께 있는 데에도, 함께 있지 않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친구와 절 모두 자신의 존재를 난처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났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이디스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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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발데스, 중압감을 극복하라
빅토르 발데스 지음, 윤승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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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냉담한 태도'는 노력하지 않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기거나 질 수 있다는 생각, 성공이 결과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묻어 있는 부담을 없애자는 것이다. 그래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기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기고 싶은 바람은 제자리에 그대로 두되 부담을 없애서 중압감을 낮추자는 이야기다.

- 결정적인 순간에 냉담해져라


중압감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중압감과 두려움은 하나의 현상이 가진 두 개의 다른 얼굴이다.


모든 새로운 도전은 어느 정도의 중압감을 동반한다. 사람마다 성격과 경험에 따라 중압감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다. 나는 매번 새로운 도전 앞에서 중압감을 느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건강한 습관은 대내외적 삶을 정리하는 행동으로부터 습득된다. 습관에 관한 한 매우 엄격하고 진지해져야 한다. 특히 충분한 수면 시간과 건강한 식습관, 질서 있는 생활 등이 중요하다.

FC바르셀로나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전성기를 보낸 빅토르 발데스. 그의 자서전 <빅토르 발데스, 중압감을 극복하라>는 자신이 들어 올린 트레블, 수많은 트로피에 대한 추억팔이가 아니다. 대부분의 축구 선수라면 자신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조명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자신만의 꾸준한 노력과 고마운 이들을 언급하기 마련이다. 언론에 비친 모습이 아닌 스타의 반전 있는 뒷이야기나 명장면, 명승부의 숨은 스토리를 찾아보는 게 자서전의 매력이다. 하지만 분명 이 열정적인 골키퍼의 자서전은 그런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도 출판계를 장악하고 있는 자기계발서와 비슷하다. 마치 간절히 꿈을 꾸면 이뤄진다는 공식처럼 '메소드V'를 제안한다.

1단계 목표를 단계적으로 설계하라
2단계 겸허한 마음으로 인생을 단순화하라
3단계 건강한 습관을 가져라
4단계 훈련, 훈련, 또 훈련하라
5단계 당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채워라
6단계 결정적인 순간에 시각화하라
7단계 결정적인 순간에 냉담해져라
8단계 성공을 관리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라

그는 한 번도 골키퍼가 되고 싶은 적이 없다. 축구를 좋아해서 어린 시절부터 공을 차고 놀았지만, 그것이 남은 인생을 좌우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바르셀로나 유스 시스템 라 마시아에서도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리고 훈련은 즐거웠지만 경기에 나서면 지독한 불안함과 중압감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FC바르셀로나의 주전 골키퍼로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을 생각하며 버텼다. 골키퍼란 원래 특수한 자리다. 11명 중 유일하게 다른 유니폼을 입고, 홀로 손을 사용할 수 있다. 골문 앞에 선 고독한 파수꾼으로 본인의 실수는 곧 실점이다. 백번 못해도 한 번만 골을 넣으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스트라이커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자리다. 수많은 빛나는 세이브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두 산산조각나고 엄청난 비난과 야유를 듣는 자리기 때문이다.

비록 카시야스, 데 헤아, 레이나 등 골키퍼 강국 스페인이 자랑하는 스타들에 밀려 국가대표는 달지 못했지만, 발데스의 클럽 커리어는 화려하다. 2008~2010년 2년 연속 최소실점으로 사모라 상을 수상했고, 챔피언스리그 빅이어를 드는 경험도 했다. (실제 '메소드V'를 적용한 사례로 아스날과의 결승전이 자주 등장한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이겨내는 방법을 그는 스스로 체득했다. 반복된 연습과 꾸준한 노력으로 얻은 경험적인 결과물이었다. 이는 중요한 시험을 앞둔 학생, 발표에 앞서 긴장하는 회사원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노하우다. 실패를 가정하고, 오히려 최악을 상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우를 나 역시 느낀 적이 있다. 너무 잘하려고 필승의 의지를 다잡고, 반드시 성공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쫓기면 오히려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할 확률이 높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본인이 차근차근 쌓아온 노력의 결과물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도 없고, 오히려 성과가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게 발데스의 조언이다. 비록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선택한 맨유행이 최악의 결과로 흘러가지만, 발데스는 새롭게 '메소드V'를 다시 시작할 게 분명하다. 최고의 자리에서 떨어져 본 자만이 다시 노력해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따봉 SNS는 민망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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