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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김중혁의 작가의 첫번째 연애 소설. 야심찬 홍보 문구만큼이나 말랑말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8편이 실려있었다. 언제나 이야기를 쫄깃하게 끌고 가는 재담꾼 김중혁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는 다양한 사람, 사랑이 등장한다. 포르노 제작자, 지진 피해자, 보험사기단, 독립시계제작자, 알콜중독자. 쉽게 접할 수 없는 직업군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빠지다 보니 '연애 소설'이란 부연 설명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정체모를 비행물체에 이끌려 종말로 빠져든 <보트가 가는 곳>은 SF영화의 한 장면이 그려졌고,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읽다보면 옆자리 테이블의 만취한 남녀의 고성이 생생하게 울려퍼졌다. 연애라는 허울보다 김중혁 작가의 장점인 유쾌한 만담이 진한 재미를 선물했다. 그저 사랑을 시작하는 혹은 사랑이 끝난 또는 사랑이 일방적인,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를 나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효석문학상을 받은 <요요>는 확실히 연애소설이었다. 시계를 만드는 직업처럼 '시간'에 대해 항상 생각하는 차선재,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다가와 첫만남만큼이나 홀연히 떠나간 장수영.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까워지는지, 아니면 멀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시간은 직선적으로 느릿느릿하거나 쏜쌀같이 흘러가간다. 하지만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시간'은 그리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읽지 못한 편지를 소중히 아끼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지만 마냥 멀어지는 건 아니었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뒷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에는 시간은 멈춰있었다. 예전 풋풋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시간은 쌓여갔다. 아니면 멀어지는듯 가까워지는 시계 속 시침과 분침과 초침처럼 계속 반복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확실한 건 사랑을 시작하면 '시간'이란 절대적이지 않는 존재란 걸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끝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게 분명하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고, 지나간 시간을 곱씹어보고,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함께 있는 시간 붙잡기 위해 두손을 맞잡는 건 모두 의미있는 일이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반복된다면 방향따위야 어디가 되어도 좋지 않겠는가.
편지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기에 얼마나 불완전한 형식인지 새삼 깨달았다. 똑같은 글인데도 어떤 날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읽혔고, 어떤 날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읽혔고, 어떤 날은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처럼 읽혔다. 그건 어쩌면 편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편지를 쓴 장수영의 마음이 그렇게 어지러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대할 때쯤이면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장수영이 한국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고, 자신이 장수영을 만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때가 오면 차선재는 그 편지를 장수영의 눈앞에 내민 다음 한 구절 한 구절, 그 정확한 뜻을 듣고 싶었다.
- <요요> 中
기민지는 살려달라는 쪽지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려볼까 생각했고, 묵직한 물체에다 매달아 떨어뜨릴까 생각했다. 그러는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일이 잘못됐을 때, 편지 속의 다정한 문장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타인들의 두려움을 더욱 불쾌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기민지는 일단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 <픽포켓> 中
규호는 정윤이 가고 난 의자를 계속 보았다. 정윤이 누르고 있던 의자 등받이의 천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다 부었다. 의자 등받이의 천은 아직도 복구되는 중이었다. 규호는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정윤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거기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규호는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中
정민철과 김우재는 가끔 테니스 시합을 했다. 류영선은 당연히 김우재를 응우너했다. 정민철은 티내지 않고 웃으면서 죽을힘을 다해 테니스를 쳤다. 무조건 게임을 이기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민철은 테니스공이 자신의 코트로 떨어질 때마다 좌절감을 느꼈다. 세상에는 열심히 쫓아다녀도 절대 치지 못할 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손을 힘껏 뻗고 라켓을 한껏 내밀어도 닿지 못하는 공이 있었다. 정민철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지 않으면 패배하는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었다.
- <뱀들이 있어> 中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4년 일기 어플리케이션 역시 사랑하려는 사람들, 꿈 꾸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어플리케이션의 ‘편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녀를 만난 다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 <보트가 가는 곳> 中
자동차가 움직이는 순간 보행자 신호로 바뀌었다. 현수는 파란불을 보면서 발을 내디뎠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며 현수 가까이로 왔다. 빨리 유턴을 해야 한다는 운전자의 마음은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현수가 서 있는 위치는 운전자의 심리적 사각지대였고, 운전자가 무방비 상태로 들어설 지옥문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움직였다. 여자는 현수를 보지 못하고 마지막 유턴 과정에서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현수는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을 미리 읽고 있었다. 자동차의 크기와 유턴 시작 시점을 알면 어디쯤에서 자신과 만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 <힘과 가속도의 법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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