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니아 나라 이야기 세트 - 전7권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스토리 북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구매하고 싶었어요. 표지가.... 너무..... 아. 정말 나니아 연대기 표지는 왜 다 이럴까요.제발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 개정판
데이비드 콰먼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재미와 유익함을 모두 주는 책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토파노와 흑사병 - 갈릴레오 시대, 공중위생의 역사에 관한 연구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김정하 옮김 / 정한책방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저자는 미시사 연구 방법을 통해 피렌체 대공국 (현재 이탈리아) 의 작은 자치도시 프라토의 흑사병 발생과 이를 막기 위한 보건행정 당국자의 노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아무 의미없는 고문서, 그 중에서도 행정 문서들을 파헤쳐 당시 전염병을 대처하는 사회상을 이렇게 알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2. 한국의 경우라면, 아마 승정원 일기나 조선왕조실록 등 국가기록문서를 통해 생활사 등을 살펴보는 연구가 이와 유사할 것 같다. 당시 작은 자치도시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한국의 메르스 감염 때, 감염이 의심되거나 접촉한 사람들이 보건 당국의 격리 협조나 자진신고 권유를 듣지 않음으로써 감염이 확산되었던 사태와 유사한 일들이 중세 사회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격리 권고나 실효가 없는 행정명령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당시 사회 상류층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감염병에 대한 보건행정정책을 무시하고 거부하여, 결국 감염이 확산되는 데 일조한다. 


3.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가장 취약한 계층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환자들 뿐만 아니라 시신 매장인 역시 저임금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이들 역시 흑사병으로 쓰러졌다. 감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그게 감염병 뿐이겠는가. 만성 근골격 질환 역시 일을 쉬어야 낫지만 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발생하고 잘 낫지도 않는다. '감염과 불평등' 이 있다면 '비감염성 질환과 불평등' 역시 있을 것이다. 


4. 당시 보건당국은 병원체와 매개동물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격리조치를 하는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도, 행정력을 통해 감염병을 어느 정도는 통제(물론 성공적인 통제라고는 볼 수 없지만) 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다. 병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서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또한 병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기 전의 경험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5. 우리나라의 메르스 상황과 비교하며 읽는다면 더욱 공감이 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의 도시
스카이 제서니 지음, 이대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하나님의 도시’를 읽고

                                                                            나승연

 
 영화 ‘킹스맨’ 에는 미국의 한 우익 교회가 나온다. 이 영화를 통틀어 제일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인데 예배시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극단적이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인지 불필요한 인간들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악당 발렌타인이 주도하는 살인극의 샘플이 된다. 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한 마디로 ‘악의 축’이다.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기독교나 기독교인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이다. 저자가 표현한대로 “위선자”라는 표식은 빠르게 붙고 우리 세대는 신앙에 점점 마음을 닫는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교회를 점점 신뢰하지 않고 제도권 교회가 내세운 소명에 대해 이 세대가 반응하지 않는 것이 스타일이나 미성숙함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석한다. 교회가 소명의 신학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모든 소명에 주신 가치를 재발견하고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과 속의 구분 없이 그리스도가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게 하는 것을 말한다.

  ‘미래도시’를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미래도시’를 향해 가는 길에도 각자가 맡은 소명을 자기 자리에서 실현해 나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윗세대에 질려버린 세대들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도 창조적으로 아름답게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미래도시를 풍성하게 하는 것임을 설파한다. 결국 어떠한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으로 ‘미래 도시’를 짐작하고 꿈꾸게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미래 도시의 공의를 일구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고 이제 드러날 영광스럽고 공의로운 미래를 세상에게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 정의와 전도를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모두 미래도시의 특성을 드러내는 표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둘은 모두 만물의 번성을 위해 세계에 바른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두 가지 일에 어떻게 참여하느냐의 문제는 우선순위나 죄의식의 문제가 아닌 부르심의 문제다.” 이 문단이야 말로 저자가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주의를 일종의 태도로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인류의] 지혜와 인간성이 들어 있다고 보지요. 사회주의는 제게 불평등과 불의, 억압, 차별, 모욕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부정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적 태도'를 갖는 다는 것은 저 모든 잔인무도함에 반대하고, 그에 맞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그문트 바우만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중에서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만큼 오물을 뒤집어쓰고 오해받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사회주의자란 노 철학자가 지적한 대로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꿈 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본인이 사회주의자임을 당당히(?) 주장하며 조곤조곤 맞는 말만 하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요즘 인기 있는 비정상 회담의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 청년들의 원조가 있다면 바로 박노자 교수다. 기존 저작들에서도 느낀 부분이지만 한국 문화를 비롯한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고 우리 역사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잘 안다. 2 외국어를 이용해서 저런 깊이의 글을 내가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냥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랍다

 

  지금은 옳고 그름의 시대가 아니라 기호의 시대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해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니 진실이나 진리 같은 이야기를 하면 우스워진다.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고 요샛말로 하자면 찌질 하게 진지 빠는일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부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다른 대안을 꿈꾸는 시도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몽상가 수준의 한심한 짓이다.

 

  나 자신의 경쟁력을 높여야 살 수 있는 개인 자본가는 언제나 불안하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한없이 우울하다. 실은 자본가도 아니고 오로지 일할 몸뚱이 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개인인데도 철저히 자본가의 입장에서 사고한다. 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때는 원하는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일 때, 그 때 잠깐 뿐이다. 만성적인 우울과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보다는 값싼 위로를 받고자 한다.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할 시간과 여건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전에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고 하더라도 지기만 하는 싸움에 지쳐서 일수도 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고 먹고 살기는 바쁘다. 매번 지기만 하고 대다수가 눈감고 귀 닫고 있는 현실에 점점 냉소적으로 변한다. 그래서인지 비굴의 시대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다 맞는 말이고 정확한 지적이고 비판인데 어딘가 심하게 얹힌 듯 아프다.

 

  몰락하기 전후의 모국 사회주의 러시아와 90년대 한국 그리고 상위권 복지국가 노르웨이 세 나라에 살아 본 경험을 통해 더욱더 다채롭고 깊이 있는 성찰이 나온다. 그의 관점은 더 예리하고 더 풍부해졌다. 중언부언하며 시류에 영합하려는 지식인들만 넘쳐나는 요즘 박노자 교수의 성찰이 담긴 이 글들이 그래서 더욱 귀하고 고맙다.

 

  살아남기 위해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지금 그는 역사 속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고 글을 쓴다. 우리 모두 후손들이 그 때 당신은 무얼 했습니까?” 의 질문에 대답해내야 한다. 이 비굴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 잃을 것이라고는 내 아이까지 물려줘야 하는 비정규직의 사슬과 마이너스 통장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