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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평점 :
“사회주의를 일종의 태도로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인류의] 지혜와 인간성이 들어 있다고 보지요. 사회주의는 제게 불평등과 불의, 억압, 차별, 모욕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부정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적 태도'를 갖는 다는 것은 저 모든 잔인무도함에 반대하고, 그에 맞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그문트 바우만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중에서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만큼 오물을 뒤집어쓰고 오해받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사회주의자란 노 철학자가 지적한 대로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꿈 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본인이 사회주의자임을 당당히(?) 주장하며 조곤조곤 맞는 말만 하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요즘 인기 있는 ‘비정상 회담’의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 청년들의 원조가 있다면 바로 박노자 교수다. 기존 저작들에서도 느낀 부분이지만 한국 문화를 비롯한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고 우리 역사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잘 안다. 제2 외국어를 이용해서 저런 깊이의 글을 내가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냥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랍다.
지금은 옳고 그름의 시대가 아니라 기호의 시대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해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니 진실이나 진리 같은 이야기를 하면 우스워진다.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고 요샛말로 하자면 “찌질 하게 진지 빠는” 일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부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다른 대안을 꿈꾸는 시도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몽상가 수준의 한심한 짓이다.
나 자신의 경쟁력을 높여야 살 수 있는 ‘개인 자본가’는 언제나 불안하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한없이 우울하다. 실은 자본가도 아니고 오로지 일할 몸뚱이 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개인인데도 철저히 자본가의 입장에서 사고한다. 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때는 원하는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일 때, 그 때 잠깐 뿐이다. 만성적인 우울과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보다는 값싼 위로를 받고자 한다.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할 시간과 여건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전에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고 하더라도 지기만 하는 싸움에 지쳐서 일수도 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고 먹고 살기는 바쁘다. 매번 지기만 하고 대다수가 눈감고 귀 닫고 있는 현실에 점점 냉소적으로 변한다. 그래서인지 ‘비굴의 시대’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다 맞는 말이고 정확한 지적이고 비판인데 어딘가 심하게 얹힌 듯 아프다.
몰락하기 전후의 모국 사회주의 러시아와 90년대 한국 그리고 상위권 복지국가 노르웨이 세 나라에 살아 본 경험을 통해 더욱더 다채롭고 깊이 있는 성찰이 나온다. 그의 관점은 더 예리하고 더 풍부해졌다. 중언부언하며 시류에 영합하려는 지식인들만 넘쳐나는 요즘 박노자 교수의 성찰이 담긴 이 글들이 그래서 더욱 귀하고 고맙다.
살아남기 위해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지금 그는 역사 속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고 글을 쓴다. 우리 모두 후손들이 “그 때 당신은 무얼 했습니까?” 의 질문에 대답해내야 한다. 이 비굴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 잃을 것이라고는 내 아이까지 물려줘야 하는 비정규직의 사슬과 마이너스 통장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