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울렁거린다.
작가의 역량에 매료되고, 한편으로 그의 한계가 보이지 않아 무섭다. <종이 동물원>는 한명의 작가가 쓴 단편집이다. 헌데, 각각의 단편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쓴 것 마냥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종국에는 한 가지에 도달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환상문학, SF, 스팀펑크, 대체역사, 하드보일드까지. 팔색조라는 표현이
딱이다.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주는 재미도 감동도 다르다. 독자는 켄 리우가 쓴 단편집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감정을 토해낸다. 괴물의 등장인가, 마법사의 등장인가? 켄 리우는 단편이라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장편 못지않은 놀라운
서사로 각각의 장르에서 유려하게 변주한다.
‘고개를 숙인
채로, 나는 여성에게 엄마의 편지글 밑에 ’아이(愛)‘ 라고
읽는 한자를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의 글씨와
내 글씨가 포개지도록.’
- 모든
독자의 입맛을 사로잡을 다채로운 장르의 융합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쓰이지 않은 명단편집의 탄생
여기, 14개 서로다른
장르의 단편 중 가장 인상 깊은 몇 개의 단편을 소개한다.
[종이
동물원] 어릴 적, 엄마는 잭이 울면, 종이접기를 했다. 엄마는 종이 덩어리에 입을 대고 숨을 불어 넣었고, 종이
동물들은 엄마의 숨을 으로 생명을 받아 움직였다. 어린 잭에게 종이 동물들은 장난감이자 친구였다. 10살이 되던 해, 잭의 가족은 새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곳에서 잭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잭의 미국인 아빠가 돈을 주고, 카탈로그에서 중국인 엄마를 샀다는 소문이
떠돌고, 잭은 엄마를 경멸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받는 멸시와 냉대를 고스란히 엄마의 탓으로 돌리면서. 잭은 더 이상 종이 동물들과 놀지 않았다.
그것들을 전부 잡아 납작하게 누른 다음 다락에 처박았다. 훗날 잭은 어른이 됬다. 엄마는 오랫동안 통증에 시달리면서 참다 결국 구급차에 실려
갔다. 암이 퍼져 수술도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엄마는 청명절에 상자를 꺼내보라는 유언을 남긴다. 상자 속에 간직한 엄마의 ‘비밀’은
무엇일까? 다시 되살아 나는 동물들이 전하는 가슴 시린 이야기.
[천생연분] 먼 미래, 사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틸리’라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이용한다. 틸리는 민간기업 만든 인공지능으로 매순간 함께한다. 틸리는 행동, 생각. 대인관계를 모두 기록해, 사이에게 최적화된 선택을
제안한다. 윤택하고 쾌적한 생활을 위해. 사이는 이런 틸리를 신봉한다. 하지만 사이의 이웃인 제니는 ‘틸리는 단순히 알고 싶은 것만 가르쳐 주지 않아요! 뭘 생각해야 할지까지 가르쳐 준단
말이에요.’라고 경고한다. 퇴근 후 사이는 틸리의 소개로 한 여성과 데이트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흠잡을 때 없이
매끄럽지만, 서로 알아야 할 것을 모조리 다 아는 기분이 든다. 감탄도 긴장감도 없다. 데이트 순간순간 틸리는 이것저것을 권한다. 사이는 문득
제니의 경고를 떠올린다. 그리고 틸리를 꺼놓고 제니의 집을 찾아간다. 제니는 드디어 당신도 진실을 알 때가 된 것 같다며, 틸리의 숨겨진 이면을
고발하는데...감시와 도청의 한가운데, 사이는 틸리를 피해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즐거운 사냥을
하길] 아들 량은 아버지와 함께 사냥에 나선다. 그들은 요괴를 잡는 사냥꾼이다. 어느날, 부자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노부부의 아들이 후리징(여우요괴)에게 홀려 날로 쇠약해져간다고. 아버지는 연마검을 휘두르고, 량은 요괴에게 개 오줌을 뿌려서 여우로 변해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기로 한다. 밤이 오고, 드디어 나풀거리는 흰색 비단에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아름다운 귀부인이 나타난다. 량은
떨리는 손으로 개 오줌을 뿌리고, 귀부인은 울부짓는 소리를 토하며 반인요괴로 변한다. 아버지와 량은 도망가는 요괴를 추적하고, 승당에 다다른다.
절 안, 아버지는 요괴를 죽이고 혹시 모를 요괴의 새끼를 찾는다. 량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새끼 여우요괴를 숨겨준다.
그 후 명절이 되면 량은 새끼 여우요괴인 염을 찾아간다. 그렇게 인간 소년과 요괴 소녀는 친구가 된다. 세월이 지나 만주족 황제가 전쟁에서
지자, 홍콩은 강국에 넘어가고 철도가 놓이게 된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사냥꾼을 찾지 않자, 아버지는 비관해 대들보에 목을 맨다.
그런 량에게 염은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야 해’ 라는 말을
남긴다. 5년후 량과 염은 서로 달라진 모습으로 재회를 하게 되는데...
이 밖에,
731부대의 잔학성을 다큐 형식으로 그려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패망하지 않은 일본이 강제징용을 통해 미국과 해저터널을 잇는다는
대체역사물인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대만 2.28 사건처럼 아픈 역사를 다룬 [파자 점술사], 몰래카메라와 관련된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을
그린 하드보일드 [레귤러], 특수한 기계로 가상 외도를 하던 아버지를 목격한 딸의 이야기를 그린 [시뮬라크럼] 등 다양한 장르가 대거 수록되어
있다.
- 14가지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기승전결 촘촘하고 방대한 장편 못지않은 단편들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켄 리우의 방대한
세계관
40년만의 일이다. <종이 동물원>은 휴고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 수상한다. 이 단편집은 판타지, SF, 하드보일드, 대체역사, 전기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든다.
10년의 무명작가 켄 리우가 10년에 걸쳐 쓴 단편집중 그의 색깔이 가장 뚜렷한 작품을 엮은 것이다. 그러니 모든 단편이 독특한 작풍을
구축하며, 보편성을 가진 명작일 수 밖에.
다른
장르이기에 다른 감흥에 취한다. 울컥하다, 서늘하다, 기묘하다, 분노하다 등 격한 감정이 그의 이야기를 타고 쏟아진다.
보통 단편은 압축해 놓은 이야기로 클라이맥스를 집약한 인상을 준다. 때문에 기승전결이 무너지기 쉽고, 독자의 감정 또한 매마를
때가 많다. 하지만 <종이 동물원>은 다채로운 장르에 놀랍도록 서로 다른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 각각의 중단편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배경위에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소재로 촘촘하나 방대하게 서술되어 있다. 마치 포장지를 풀러놓으면 살아 움직이는 종이
동물처럼. 꽁꽁 싸맨 이야기가 독자를 통해 읽어졌을 때 과감하고 장대한 켄 리우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장편 못지않은 단편을
읽어보자. 일상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 몽환적인 중국과 비극적인 중국, 상상력이 충만한 미래와 생생한 아픔을 간직한 과거, 섞이지 않을 것들이
이질감 없이 녹아드는 이야기. 전통적인 동양 문화와 현대적인 서양문화 사이에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종이
동물원>은 장르적 재미는 물론 켄 리우만의 철학과 사유가 풍요롭다. 순문학 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성을 가진 오락적 단편을 찾는다면, 바로 이
책이다.
+@ 다양한 연령, 성별, 취향을 아우를 수
있다. 한 작가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기 때문이다.
재미, 감동, 작품성 3가지를 모두 갖춘 장편
못지 않은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