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 대한민국이 선택한 역사 이야기
설민석 지음, 최준석 그림 / 세계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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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학창 시절에, 국사라는 과목으로 암기했던 역사적인 내용을, 씌여진 배경을, 이 책을 읽으며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재미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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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철학 들뢰즈의 창 2
질 들뢰즈 지음, 박기순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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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철학

전체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글이라면, [윤리학]의 주요 개념 색인은 개념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의했다기 보다 복잡하게 나누어진 그의 철학의 본질을 파헤쳐서 전반적으로 모듈화시킨 정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제1장 스피노자의 삶
스피노자가 살았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스피노자가 그의 책 [신학 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인민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기쁨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의 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
스피노자가 발견하는 세계는 야만의 극치이다. 삶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방식, 모든 부정적인 것은 그가 보기에는 두 원천을 갖고 있디. 하나는 외부로 하나는 내부로 향해 있는데, 원한과 양심의 가책, 증오와 죄의식이 그것들이다. <증오와 양심의 가책은 인류의 근본적인 두 적들이다.> 스피노자는, 이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그것들은 오직 새로운 의식과 함께,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삶의 욕구 속에서만 고갈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스피노자에게 삶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고 모든 속성들 속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영원한 양태이다.
제2장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
1 의식에 대한 평가절하(사유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이론적 논제중 하나인 평행론의 요체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실질적인 인과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평행론의 실천적 의미는, 의식에 의한 정념들의 지배 기획으로서의 도덕이 기초하고 있는 전통적인 원리의 전복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장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 신체와 정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것이여야 말로 놀라운 것이다. 살아 있는 부분들의 전체는 복잡한 법칙들에 따라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질서는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들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는 조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식을 갖는 조건들 때문에 우리는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즉 자신들의 고유한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인과 본성에 대해서 무지하여 사건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법칙들의 결과들을 겪어야 하는 그들은, 모든 것의 노예이며, 자신들의 불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불안 속에 있는 불행한 자들이다.
의식 자체도 원인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우리가 만나는 대상들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 순간 대상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변용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
2 모든 가치들, 특히 선악에 대한 가치절하(<좋음>과 <나쁨>에 대한 옹호): 비도덕론자 스피노자
자연 전체의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고유한 질서 속에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디.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과 나쁨이 있다.
좋음과 나쁨은 그 첫번째 의미, 즉 객관적이지만 관계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두번째 의미, 즉 인간 존재의 두 유형, 두 양태를 특징짓는 주관적이고 양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윤리학, 즉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은 언제나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을 대체한다. 가치들(선-악)에 대립하여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좋음과 나쁨)가 들어선다. 그러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
3 모든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절하(기쁨에 대한 옹호): 무신론자 스피노자
슬픈 정념은 욕망들의 무한성, 영혼의 동요, 탐욕, 미신 등을 통합시켜 놓은 복합체이다.
슬픈 정념들에 대한 비판은 변용 이론에 그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한 개인, 그것은 무엇보다도 단일한 본질, 즉 일정 정도의 능력이다. 이 본질에 고유한 관계가 상응한다. 이 능력의 정도에 특정 정도의 변용 능력이 상응한다. 인간의 행동학이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 종류의 변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본성에 의한,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능동과 다른 것에 의해 설명되고 외부로부터 유래하는 수동이 그것이다. 따라서 변용 능력은, 능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는 것으로 고려되는 한, 행위 능력으로 나타나고, 수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는 한, 수동 능력으로 나타난다.
우리를 변용시키는 정념은 기쁨에 속하며, 우리의 행위 능력은 증가되고 도움을 받는다.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 오직 기쁨만이 가치가 있으며, 오직 기쁨만이 능동과 능동의 지복에 가까이 있고 또 우리를 가까이 가게 만든다. [윤리학]이 제기하는 3중의 실천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 능동적인 감정들을 가능케하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것인가? 어떻게 자기 자신, 신, 그리고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할 것인가?
윤리적인 기쁨은 사변적 긍정의 상응 개념이다.
제3장 악에 관한 편지들(블레이은베르흐와의 서신)
스피노자는 인간 어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전적인 논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온갖 방식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서로 결합하는 관계들은, 해체될 수 있는, 즉 실행이 중지될 수 있는그러한 관계의 보존과 필연적으로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의)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게) 나쁜 것이 존재한다.
나의 관계와 결합되는 관계를 갖는 대상에서 신체의 행위는 나의 신체의 능력, 즉 나의 신체가 어떤 관계 아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행위는, 그것에 의해 관계가 해체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아니면 그것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관계와 결합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어떤 관념이 적합할 때, 그 관념은 언제나 적어도 두 신체를, 즉 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를, 그것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결합시키는 양상 아래서 파악한다(<공통 관념>). 반대로 나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는 신체에 대한 적합한 관념은, 그 신체가 적합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악,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나쁜 것은 부적합한 관념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슬픈 감정들(증오, 분노 등등)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제로 악은 자연 법칙에 따라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무엇도 아니라고 가정하면, 이 관계들 속에서 표현되는 본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가?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은 관계들의 질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질들의 질서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결코 어떤 상태 혹은 어떤 본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들의 비교 속에 있기 때문이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단지 상태나 변용일 뿐이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한 상태가 다른 상태들과의 어떤 가능한 비교도 없이 실재성 혹은 완전성의 절대적 양을 표현하는 한에서, 어떤 상태일 뿐이다.
본질은, 우리의 단일한 본질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본질의 영원성은, 지속 속에서의 존재 이후에 오는어떤 것이 아니라그것과 정확하게 동시적이며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지속 속에 있는 이 관계 아래서 우리에게 귀속되어 있는 외연적 부분들의 전체이다.
본성의 외연적 부분들에서만 <나쁨>이 존재한다. 나쁨은, 어떤 관계 아래서 우리의 본질에 속하는 외연적 부분들이 다른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외부로부터 결정될 때이다.
우리가 나쁜 것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필연적인 것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온 것일 뿐이다.
우리의 외연적 부분들과 외연적 변용들이, 우리의 관계들 중의 하나를 실행시키는 한, 우리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관계도 그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악과 나쁨을 배제하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내적인, 즉 면역적인 변용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 다른 사물들, 그리고 신을 나부로부터 영원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형식들(제3종의 인식, 직관)이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 이 자기 - 변용에 이르면 이를수록, 존재를 잃으면서, 즉 죽으면서 혹은 심지어는 고통을 겪으면서도보다 적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며, 악은 어떤 무엇도 아니며 나쁜 것은 그 어느 것도, 거의 어느 것도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다 잘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4장 [윤리학]의 주요 색인 개념
절대적인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절대적인 사유
추상
핵심은 추상 개념과 공통 개념 사이의 본성의 차이이다. 공통 개념은 서로 적합한 신체들, 다시 말해 법칙들에 따라 자신들의 각 관계들을 결합하고 이 내적인 적합 혹은 결합에 상응하여 서로를 변용시키는 둘 혹은 여러 신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추상 개념은 우리의 변용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는 대신에 상상할 때 나타난다. 우리가 본질적인 특징으로 내세우는 외적인 기호나 가변적인 감각적 성격만을 간직한다.
허구적 추상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 종차 혹은 유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가변적인 감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강, 종, 속. 존재들의 변용 능력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 각자가 만족해 하는 삶을 실행하고 충족시키는 방식에 의해 구별된다. 두번째는 수이다. 수는 추상 관념의 상관자이다. 수는 그 자체가, 존재 양태들에 적용되는 한, 즉 존재 양태들이 실체로부터 따라나오는 방식과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추상되는 > 한, 추상물이다. 세번째는 초월적인 개념들이다. 존재들 사이의 외적인 차이를 확립하는 요소로서의 특유하거나 유전적인 성격들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존재 혹은 존재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개념들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그것들에 초월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무와의 대비를 통해 그것들을 확립한다(존재-비존재, 통일성-다양성, 진리-허위, 선-악, 질서-무질서, 미-추, 완전성-불완전성 ---)
결론적으로, 사유의 자율적인 능력에 의존해서 귀결되는 참된 관념과 우리의 이해 능력을 인식해서 신의 관념에 이르는 발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들은 추상 개념보다는 공통 개념에 가깝다.
변용, 감정
1)변용들은 양태들 자체이다. 양태들은 실체 혹은 그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2)변용들은 양태에서 발생되는 것, 즉 양태의 변형들, 어떤 양태에 다른 양태들이 미친 결과들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 변용들은 무엇보다도 신체적 이미지들 혹은 흔적들이다.
3)그러나 이 변용 - 이미지 혹은 관념은 변용되는 신체와 정신의 어떤 상태, 즉 이전 상태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완전성을 함축하는 상태를 형성한다. 이 상태, 변용, 이미지 혹은 관념은 지속과 결부될 수 없는데, 이 지속은 그것들을 이전의 상태에 결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음 상태로 향하도록 만드는 지속이다. 이 지속 혹은 완전성의 지속적인 변이는 <감정>이라고 불린다.
변용은 변용되는 신체의 한 상태에 관련이 있고, 따라서 변용시키는 신체의 현존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 감정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그에 상응하는 변용시키는 신체의 변이에 대한 고려에 연관이 있다.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증가는 기쁨의 감정이라고 불린다.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감소는 슬픔의 감정이다. 이와 같은 행위 능력은, 외적 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용 능력은 동일하게 유지한 채 상이하게 변한다.
우리의 감정이 다른 존재 양태들과의 외적인 만남으로부터 유래하는 한, 그것은 변용하는 신체의 본성에 의해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부적합할 수밖에 없는 이 신체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혼동된 이미지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러한 감정들이 정념이다.
감정은 언제나 변용에대한 관념인 어떤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 관념이 혼동된 이미지가 아니라 적합한 관념이라면, 그것이 변용시키는 신체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우리의 상태에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관념이 내적인 변용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본질, 다른 본질들, 신의 본질의 적합성을 표시하는 자기 -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면, 그렇다면 그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감정들은 그 자체로 능동이 된다. 이 능동적인 기쁨들에 우리는 지복이라고 이름을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속성
지성이 실체에 대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 속성들은 지성의 인식 방식들이 아니다.
표현된 본질은 무제한적이고 무한한 질이다. 표현적 속성은 본질을 실체에 관계시키며,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 내재적 관계이다.
내재성은 무엇보다도 속성들의 일의성을 의미한다.
좋은 - 나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 양태들 사이의 만남들(<자연의 공통적 질서>,외적인 결정들 혹은 우연한 만남들)을 표현한다.
좋음과 나쁨을 선과 악으로 전환시킨다면, 그것은 선을 존재 이유와 행위 이유로 삼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린 모든 목적론적 환상들에 빠지게 되고, 신적인 생산의 필연성과 충만한 신의 능력에 참가하는 우리의 방식을 왜곡하게 된다. 그것들은 이성의 존재들 혹은 상상의 존재들로서, 사회적 기호들, 즉 보상과 처벌의 억압적 체제에 완전히 의존해 있는 것들이다.
원인
나는 자기 원인을,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달리 말해서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밖에는 생각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정의).
즉 원인은 작용적 인과성이든, 본래적이고 전체적인 인과성의 원형이든, 신이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속성들 속에서 생산한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자기 원인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나온다.
인식(인식의 종류)
제1종의 인식은 다의적이고 부적합적인 기호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제2종의 인식은 공통 개념들을 통해 정의된다.
제3종의 인식의 형상은, 우리 자신, 신,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한 적합한 관념들을 결집시키는 삼각형이다.
의식
이중화되고, 무한히 중복되는 관념의 성질
의식의 특징은 정신 속에서의 관념의 반성이고 의식은 자신이 대상이 되는 관념과 관련하여 항상 이차적이며, 의식이 자신의 대상인 관념과 맺는 관계는 그 관념이 자신의 인식 대상과 맺는 관계와 같다.
의식은 두가지의 근본적인 환상을 갖고 있다. 자유라는 심리학적 환상과 목적성이라는 신학적 환상이다.
의식은 수동적 감정들을 능동적 감정들을 통해서 이겨내는데, 후자는 공통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원인에 의해서만 따라서 이성의 구별에 의해서만 전자와 구별된다.
정의, 증명
지속
시작에서부터의 존재의 연속
지속은 영원성에 대립한다. 영원성은 시작이 없으며 불변적이고 온전한 행위 능력을 소유한 것에 대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무한정한 지속도, 지속 이후에 시작되는 어떤 것도 아니며, 본성이 다른 우리 자신의 두 부분들, 즉 신체의 존재를 포함하는 부분과 그것의 본질을 포함하는 부분이 공존하듯이, 영원성은 지속과 공존한다.
우월성
스피노자가 우월성 개념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학적인 혹은 신인 동형적인 성격들을 통해 신을 정의하면서 신의 특유성을 수호하겠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우월성, 그리고 그것과 함께 다의성과 유비는 공통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신과 창조물들의 공통적인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본질의 혼동), 공통의 형식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을 부정하는 이중의 오류를 갖는다(초월적 형식들의 환상).
지성(무한 지성, 신의 관념)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 속에 넣는 사람들은 신을 인간학적인 혹은 심지어는 신인 동형적인 술어들 아래서 신을 사유한다. 그렇게 자신들은 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신의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이해하며, 실체가 속성들 속에서 무한한 사물을 생산하듯이 무한한 관념들을 생산한다. 우리의 지성은 신의 지성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분으로서 설명된다. 실제로 무한 지성이 양태라는 사실은, 무한 지성에 대한 우리 지성의 적합성을 설명해 준다.
정신과 신체(평행론)
관념은 그것의 표상적 능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 대한 관념이 사유와 다른 관념들에 대해 맺는 관계는 우리 신체가 연장과 다른 신체들에 맺는 관계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난 것에 대한 관념, 즉 우리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이다.
신체의 계열과 정신의 계열은 동일한 질서뿐만 아니라, 동등한 원리 아래서 동일한 연쇄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존재의 동일성이 있다.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은 인식론적 평해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다. 첫번째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 속의 관념과 다른 속성 속에 있는 그 대상은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형성한다. 두번째 평행론에 따르면, 모든 속성들에 존재하는 양태들은 하나의 동일한 변형을 형성한다.
본질
모든 본질은 어떤 사물의 본질이며, 그 사물과 상호 교환된다.
속성들은 본질을 표현하면서 반드시 그 본질이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존재 또한 표현한다. 본질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행위 능력인 반면, 속성들은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을 만큼의 힘들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함축하고 있지 않고 본질들, 속성들 속에 내포 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양태들의 본질들은 단순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그 본질들은 속성과 더불어 서로간에 순전히 내적인 또 다른 유형의 구별을 갖는다. 본질들은 논리적 가능성들도 기하학적 구조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능력의 부분들, 즉 물리적 강도들이다.
영원성
존재가 본질에 의해 함축되어 있는 한에서, 존재는 영원하다.
지속은 양태의 존재가 본질에 의해서 함축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 영원성의 형식을 띤다.
영원성의 형식이라는 표현에서, 형식은 언제나 개념 혹은 인식에 근거한다. 어떤 신체의 본질 혹은 사물들의 진리를 영원성의 형식 아래서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관념이다.
정신이 신체의 단일한 본질을 영원성의 형식 아래서 사유하는 한, 또한 존재하는 사물들을 공통 개념들에 의해서, 즉 존재 속에서의 그것들의 결합과 해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관계들 아래서 사유하는 한, 정신은 영원하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존재
양태의 존재는, 속성 속에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 즉 외적인 양태의 지위를 소유하고 있고, 또 지속하는 한, 그의 본질 자체이다.
양태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스스로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그것의 원인(신)에 의해서 그리고 속성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서, 즉 양태의 내적인 지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명하다 - 함축하다(펼치다 - 감싸다)
설명하다는 사물에 외적인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에 내적인 사물의 작용을 의미한다.
함축<감쌈>은 설명<펼침>의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는<펼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함축하고<감싸고>, 전개하는 것은 포함된다.
관념
우리 안에 있는 참된 관념들, 이것은 신 안에 존재하며 무수한 다른 관념들로 변용하는 한에서, 신은 그것을 적합하게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관념들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것, 다른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결과, 즉 두 신체의 혼합물을 표상하는 관념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들은 필연적으로 부적합하다.
개체
어떤 속성 안에 있는 존재 양태의 복잡한 조직.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적 과정으로서의 개체화는 언제나 양적이다. 그러나 상이한 두 가지 개체화가 존재한다. 단순하고 불가분하며 영원한 내포적 부분으로서의 각이한 능력의 정도라는 단일성에 의해 정의되는 본질의 개체화가 그 하나이고, 양태의 본질을 표현하는 운동과 정지의 영원한 관계를 시간의 차원에서 실현시키는 외연적 부분들의 분리 가능한 전체에 의해서 정의되는 존대의 개체화가 다른 하나이다.
무한
1) 본성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존재의 특성을 구성한다.
2) 자신의 원인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속성들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직접적인 무한 양태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양태가 존재하는 한,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그 양태의 본질에 상응하는 관계 아래서 그 양태에 귀속된다.
따라서 무한정은 추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무한은 현실적이다.
자유
스피노자의 원리는, 자유는 결코 의지의 특성이 아니며,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지 작용들은 관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로서, 그것들은 관념자체에 수반하는 긍정 혹은 부정과 동일한 것이며, 이 작용들에는 어떤 우연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원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능태나 우연적인 것들을 상상하며, 신체에 대한 영원의 의지적 작용을 믿는 한, 자유는 의식의 근본적인 환상이다.
자유는 언제나 본질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의지나 그 의지를 규제하는 어떤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
참된 관념을 갖는 방법은 형식적인 반성적 측면과 물질적인 표현적 측면 그리고 둘을 통합한 점진적 종합성이다. 즉 우리의 인식 능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설명됨과 동시에, 물질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원인을 표현한다.
양태
양태들은 존재와 본질에서 실체와 다르지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동일하게 같은 속성들 안에서 생산된다.
직접적 무한 양태
사유의 경우, 무한 지성, 그리고 연장의 경우, 정지와 운동
매개적 무한 양태는, 연장의 경우, 우주 전체의 모습, 즉 존재 양태들에 대한 결정을 지배하는 운동과 정지의 모든 관계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물론 사유의 경우 그것은 관념들을 존재 양태들의 관념들로 결정하는 관념의 관계들이다.
자연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상호 내재성의 연관들 속에서 파악된다.
자연주의는 일의성의 세 가지 형식을 충족시키게 된다. 속성들의 일의성:본질, 원인의 일의성:신, 양상의 일의성:필연성
필연적인
필연성은 존재하는 것의 유일한 양상이다.
가능성과 우연성의 범주들은 환상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들은, 신의 의지의 작용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다.
부정
스피노자의 부정 이론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인 구별과 부정적인 결정 사이의 차이에 의지하고 있다.
1) 속성들은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정확히 말하면 대립에 의하지 않는 그것들의 구별에 의해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모든 속성들은, 그것들이 그 본질과 존재를 표현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통해 동시에 서로를 긍정한다.
2) 반면 유한자는 제한되고 결정된다. 제한되고 결정된 어떤 양태 아래서, 유한 존재 양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제한되고, 그 존재에 있어서 결정된다. 제한은 본질에 해당되고, 결정은 존재에 해당한다.
스피노자의 학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통 개념들
공통 개념들은 신체들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그것들이 표상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니며 일반적인 관념들이다. 그리고 외연에 따라, 즉 그것들이 모든 신체에 적용되는지 아니면 단지 일부의 신체들에만 적용되는지에 따라, 그것들은 보다 일반적이거나 덜 일반적이다.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결합의 통일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에 모두 들어 있으며 따라서 적합하지 않게 사유될 수 없다. 그것들은 존재 양태들 혹은 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관계들의 결합을 표상한다. 공통 개념들은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며, 자연 전체가 갖는 결합의 통일성과 이 통일성의 변이 양태들을 형성한다.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신의 관념을 부여한다.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는 공통 개념이 아니며, 스피노자가 그것을 공통 개념들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히 그것은, 신의 관념이 신의 본질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존재 양태들의 결합과 관련해서만 공통 개념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통 개념들은 관계들 사이의 결합을 표상한다. 그런데 이 관계들은, 신체들이 서로 적합한한, 즉 그것들이 전체를 형성하고, 각각이 다른 신체 안에 <이미지들> --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은 상상들이다 -- 을 남기면서 서로를 변용시키는 한, 신체들을 특징짓는다.
고유한(고유성)
본질 자체의 양상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세 가지 고유성을 구별한다. 신의 본성의 양상들이라는 첫번째 의미에서 (자기원인, 무한성, 영원성, 필연성, 전지성, 편재성). 두번째 의미로, 신을 그의 생산물과 관련해서 (모든 사물들의 원인). 세번째 의미로, 외적인 결정들을 지시할 뿐이다 (정의, 자비).
능력
신은 의지가 이니고 가능태들을 사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한 능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신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원인, 즉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의 원인이 된다.
변용 능력
변용 능력이 능력으로서의 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용될 수 있는 소질은 능력의 정도로서의 존재 양태의 본질에 상응한다.
존재 양태들은 외연적 부분들이 양태의 본질 혹은 능력의 정도에 상응하는 관계 아래서 그 양태에 귀속하는 한, 존재 양태는 언제나 다른 양태의 부분들을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끌 수 있다.
<어떤 단일한 사물도, 그것이 보다 많은 시간을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보다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지속은 그것들의 본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4부, 서문)
기호
사물의 현존재에 대해 지시적이며 혼합된 결과이다.
신이 자신에게 주는 정언명령적이며, 계시의 결과들이다.
외적인 확신을 위해 해석된 것들이며 미신의 결과들이다.
사회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각각의 능력을 결합하여 전체로서의 보다 우월한 능력을 형성하는 (시민) 상태를 말한다.
이성 상태에서 인간들의 결합은 공통 개념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능동적 감정들(특히 자유, 단호함, 관용, 제2종의 신앙심과 종교)에 의해 결정되는 내적 관계들의 결합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민 상태에서 인간들의 결합 혹은 전체의 형성은 희망과 공포라는 수동적 감정들에 의해 결정되는 외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실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는 데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동일한 속성을 갖는 실체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특징지어진 각 실체의 일의성, 자기 인과성, 무한성, 그리고 필연적인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
제5장 스피노자의 진전
([지성 개선론]의 미완성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신 - 실체의 동일성을 통해 속성들 혹은 속성들을 갖는 실체들은 실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게 되며, 이제 자기 원인이라는 특성을 누리게 된다.
지성 개선론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은, 마치 가설과도 유사한 불특정의 참된 관념은 기하학적 존재에 대한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 관념은 정확히 우리의 사유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마치 가설과도 같은 불특정의 속성 혹은 속성을 갖는 실체는 공통 개념 속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종합적인 충분한 근거에, 즉 모든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고 모든 사물들의 원천이 되는 유일 실체 혹은 신의 관념에 이르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특징적인 관계들을 갖는다. 이 관계들을 통해서 모든 사물은 존재 속에서 다른 사물들과 결합하거나 다른 사물들로 해체된다. 공통 개념, 이것은 정확히 여러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의 결합에 대한 관념이다.
공통 개념들은 기하학적이라기보다는 물리 - 화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이다. 그것들은 다양한 측면 아래서 자연이 갖는 결합의 통일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공통 개념들은, 철학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하학적 방법이 갖는 중요성의 범위라는 관점에서, [윤리학]의 실천적 기능이라는 관점 등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제6장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주의인 것은 빠름과 느림, 응결된 긴장과 가속화된 운동, 형식을 갖지 않는 요소들, 비주체화된 변용들에 따라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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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를 읽는다 철학의 정원 18
스티븐 내들러 지음, 이혁주 옮김 / 그린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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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를 읽는다

에티카는 ‘신에 대한 고찰 - 종교적인 신이 아닐 것이라 생각 해본다 - 과 이성에 바탕을 둔 윤리적인 정서‘ 단순히, 이렇게 읽힌다. 그런데 에티카에는 깊은 철학이 있다고 한다. ‘뭐?‘하는 의문만 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마치 안 풀리는 수학 문제에 고민하다가 참고서를 펼쳐보고 그 풀이를 보면서 꽉 막힌 답답함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실존과 본성,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관계, 자유와 결정론, 진리, 목적론, 자연법, 정념, 덕과 행복, 정치적 의무의 기초, 선/좋음과 악/나쁨의 지위, 인격적 동일성, 영원성, 불멸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현대 서양철학으로 옮겨오면, 구조적ᆞ언어적인 분석이 앞서다 보니 제자 백가 등 동양사상에서 접하는 역사적인 사례들을 근거한 인생의 문제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물론 무엇을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도 깨우침은 갖게 된다.
나는 스무살이 막 넘어서면서 고전 문학과 동양 사상에 빠졌고 그 당시에 느꼈던 정서를 그리워 했나 보다.
그 즈음에 [에티카]를 읽었다.

1장 스피노자의 생애와 저작
렌즈 연마로 얻은 수익과 친구의 도움으로 검소한 삶을 산다.
명예와 부를 추구하기 보다 인식과 참된 행복에 대한 철학에 의미를 둔다.
네덜란드의 정치적 종교적 분쟁 속에서 ‘신학정치론‘, ‘에티카‘ 등 책을 집필한다.
2장 기하학적 방법
스피노자는 철학적 탐구의 ˝참된 방법˝은 ˝실재의 객관적 본질˝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 ˝도움이 되는 확실한 규칙˝에 따라˝진리 자체가 적절한 질서로 추구되어야 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기하학적 질서와 철학적 관념이 갖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에게 철학적 방법의 목표가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안에 있는 사물의 질서와 연관을 반영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고 과정에서 진리를 적절히 배열해야 하고, 특별히 어떤 진리가 다른 진리에 논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각 부를 일단의 정의와 공리, 정리로 시작한다. 정의는 스피노자 존재론, 즉 있는 것(예를 들어 신, 실체, 속성, 양태같은)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의 기본 요소를 제시한다. 공리는 실재에 대한 일반적 원리이며 이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진술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공통 진리를 표현한다. 정리는 증명이 수반되는 철학적 결론들이다.
3장 신에 관하여: 실체
스피노자의 목표는 신에 관한 인식에서 신은 유일하고, 무한하며, 필연적으로 실존하는(즉 자기 원인인)우주의 실체임을 규명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는 단 하나의 실체만 있다. 그것은 신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실체 관념은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는 무엇보다 스스로 존속하는 개별 실재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 오직 신만이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실체에 요구되는 절대적인 존재론적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그의 실존을 위해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속성과 양태를 정의한다.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한 것을 속성이라고 파악한다. 속성은 실재의 가장 일반적이고 기저에 놓여 있는 본성이다. 양태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실체의 양태 또는 변용은 어떤 실재의 특성 같은 것이다.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둘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은 있을 수 없다.
실체의 양태나 특성은 단지 속성이나 본성이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태를 제쳐둘 때 남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 속성, 수적이거나 질적 다양성이 결여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다. 따라서 최초의 가정과는 반대로,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단지 그것의 양태에서만 다른 두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양태를 무시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두 실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영원하며 무한하다.
스피노자는 존재론적 독립성을 실체의 특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실체의 실존에 대한 원인은 실체 그 자체의 본성이어야 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기 때문에 실체의 실존은 ‘영원한 진리‘, 곧 모든 시간이나 지속 바깥에 있는 진리로 ‘인식‘된다. 스피노자는 이 무한한 실체를 자연 그 자체와, 그리고 신과 동일시할 것이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있을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첫째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고 결론 내린다.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의 본성 내부든 외부든 신의 실존을 방해하는 원인이나 이유는 없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신과 실재들
피에르 벨은 신의 양태인 실재들은 분할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운동하기에 신 그 자신이 변화하고 분할하고 운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신학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상이한 대목에서 양립 가능하고 신의 모든 속성은 불변한다고 정리에서 말하며 오히려 스피노자의 주장은 각 속성의 실존 및 본성의 영속성에 관한 주장이다.
신 또는 자연
스피노자가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첫째 신은 자연 전체, 즉 그것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자연 전체와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신과 특수한 실재들 간의 관계를 좀더 외적인 것으로 보는, 신/실체는 단지 속성, 즉 보편적 본성 및 만물을 지배하는 인과적 원리와 동일시된다. 즉 스피노자에게 신은 문자 그대로 자연이다.
4장 신에 관하여: 필연성과 결정론
인과적 필연성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적 필연성에 의해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는,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라면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무한 양태
신과 그 속성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과 그것들로부터 단지 매개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의 차이는 스피노자 우주의 구조, 특히 무한한 실재의 지위 그리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역동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필연적이고 무한한 실재들은, 속성 그 자체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 것이든 아니면 어떤 것에 의해 변양된 것이 한에 있어서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온 것이든, ‘무한 양태‘라고 알려져 있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 따라 나오는 무한 양태는 ‘직접적 무한 양태‘이다. 어떤 양태에 의해(즉 직접적 무한 양태에 의해) 이미 변양된 것인 한에서의 어떤 속성으로부터만 따라 나오는 무한 양태는 ‘매개적 무한 양태‘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든 다른 곳에서든 무한 양태에 대해 그다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 속성 아래 있는 직접적 무한 양태와 매개적 무한 양태의 내용이 무엇인지 표상하기는매우 어렵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지성은 실재들의 영원한 본질들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유로 구성된 관념들의 집합이다. 또한 실재의 본질에 대한 각각의 영원한 관념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본질이다. 연장 속성 아래에 있는 직접적 무한 양태는 자신이 ‘운동과 정지‘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말한다. 또한 연장의 직접적 무한 양태가 운동 그 자체라고 말한다. 반면 데카르트는 아주 명확하게, 연장은 그것만으로 운동 가능하지만(즉 운동하는 상태가 될수 있지만) 현행적 운동이 단지 연장의 본성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운동을 물질에 주입하는 연장 바깥의 어떤 원인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게 이 초월적 원인은 신이거나 어떤 유한한 정신이다.
더 큰 불확실성이 있는 매개적 무한 양태는 운동과 정지(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든 물리적 실재의 본질을 포함하는 직접적 무한 양태)와 함께 고려된 연장(속성)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이 풍부한 다양성을 가진 물리적 자연 전체라는 것이다.
유한 양태
유한 양태는 특수한 실재들의 개별적인 영원한 본질(그것은 상이한 해석을 토대로 볼 때, 직접적 무한 양태에서 발견되는 것이다)과, 그러한 본질을 시간 속에서 예화하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특수한 실재들(이는 매개적 무한 양태에서 발견된다)을 포함한다.
스피노자는 아마도 연장 속성으로부터 운동(직접적 무한 양태, 그것은 연장을 통해 능산적 자연의 역량을 표현한다)과 함께 다수의 유한한 물체(본질)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정론과 필연론
‘규정된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의 의미는 이제 분명하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결정론자이다.
스피노자는 인과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실재의 본질과 법칙은 절대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자연의 필연적 결과일 뿐만 아니라, 실존하는 것들의 세계 또한 그러하다.
스피노자에게 현실 세계 외에 다른 기능세계들이란 없다. 만약 신은 실존하는데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유한 양태들의 특수한 무한 계열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신의 실존이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면, 이 세계는 유일한 가능세계일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스피노자는 세계 창조와 같은 것을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창조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무로부터 선행하는 무존재의 상태로부터 계획하에 세계를 만들기 전에 신이 실존했다는 의미이자, 신이 또한 세계를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는 의미라면 말이다.
신의 자유
데카르트에게서 신의 자유는 신의 의지나 선택이 절대적으로 비규정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신의 선택에 그를 규정하는 진리나 선함의 기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는 대조적으로 신의 자유가 신이 내린 이성적 결단에서 드러난다고 믿었다. 즉 라이프니츠의 신이 한 선택은 규정된다. 신은 객관적이자 보편적인 이성, 신의 의지에 독립적이고 신으로 하여금 저것이 아닌 이것을 선호하도록 이끄는 이성에 근거하여 행위한다. 신의 자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이 신의 전능함에 우선권을 준다면, 라이프니츠의 설명은 신의 합리성, 지혜, 그리고 은총에 우선권을 준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처럼 신이 자의적으로든 아니든 어떤 선택을 한다거나 그가 이미 한 것과 다르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오직 신만이 자유로운 원인이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행위한다 라고 말한다.
기적
자연에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위반하는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범신론자인가, 무신론자인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은 초월적 존재로, 그가 창조한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신은 앞서 본 것처럼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계 바깥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다. 신은 곧 자연이다.
신은 실재가 얼마나 잘 자신의 목적을 따르는가 하는 기준으로 실재들을 판단하는 어떤 목적 지향적 계획자가 아니다. 실재들은 단지 자연과 그 법칙 때문에만 발생한다. ‘자연은 그것 앞에 설정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ᆢ만물은 자연의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진행된다.‘ 이와 다르게 믿는 것은 기성 종교의 핵심에 놓여 있는 바로 그 미신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위한 열쇠는 철학과 과학이지 종교적 경외감이나 경건한 순종이 아니다. 후자는 단지 미신적 행동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종속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전자는 깨달음, 자유, 참된 지복(즉 마음의 평안)으로 이끈다.
저자는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보았고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자연을 신적인 것으로 높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전통적 신 개념이 일으키는 정념과 미신적 믿음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고, 신적인 것을 자연으로 격하시켰다. 즉 신을 자연화했다.
5장 인간
평행론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의 질서 및 연관과 동일한 것이다. 좀더 상술하자면, 연장된 물체들에 대한 관념인 사유에 속하는 양태들의 질서 및 연관은, 연장된 물체들인 연장에 속하는 양태들의 질서 및 연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물체a가 인과적으로 물체b에 관련되어 있고 물체b는 인과적으로 물체c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처럼, 물체a에 대한 관념은 인과적으로 그리고(우리는 지금 관념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물체b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고 물체b에 대한 관념은 인과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물체c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신 또는 자연 안에서, 실재들의 인과 질서는 관념들의 인과적/논리적 질서와 동일한 것이다.
무한한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 속성들 각각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 속성은 실재의 객관적 본질이나 범주를 나타내는 것이지, 실재를 그저 현상학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보는 방식이 아니다. 어떤 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간에는 인과 계열이 있지만, 한 속성과 다른 속성 사이에는 그리고 한 속성의 양태와 다른 속성의 양태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적 활동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정신과 신체
데카르트는 인간 정신과 인간 신체 각각을 의당 하나의 실체라고 믿었다. 또한 이 두 실체는 실체성을 갖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공통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데카르트를 실체 이원론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정신과 실체의 결합에 의해 구성된 일종의 복합 실체 그 자체이다.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특수한 신체의 관념 이라고 정의한다. 즉 정신은(알려지지 않은 속성의 양태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의 양태들이 아니라) 연장의 유한 양태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의 유한 양태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정신이 관념이나 사유-상관물이 되는 연장의 특수한 양태가 바로 인간 신체이다.
신 또는 자연 안에 있는 인간 정신인 생각이나 관념에는 물론 특별한 것이 있다. 연장된 물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모든 관념이나 ‘정신‘과는 달리, 인간 신체를 대상으로 하며 인간 정신인 관념은 실제로 실질적 사유와 의식을 갖는다. 인간 정신을 다른 모든 정신 내지 관념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인간 정신이 더 크고 복잡한 기능과 능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정신이라는 관념의 대상은 인간 신체이다. 그래서 정신의 복잡성과 탁월함은 인간 신체의 복잡성과 탁월함과 상관적이다.
무한하게 많은 관념들의 모음인 사유의 무한 양태가 신의 무한 지성이듯, 인간 정신은 관념들의 모음으로, 즉 그 대상이 인간 신체의 상이한 부분들인 관념들 전체로 이루어져 있다. 신체에 대한 관념인 인간 정신이 신의 무한 지성을 합성하는 무한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집합의 일원인 것처럼, 인간 정신도 바로 관념들의 집합이다.
우리들 자신은 사유와 연장의 양태이다. 우리 신체는 연장 속성의 양태이고, 우리 정신은 연장된 우리 신체에 대한(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이다.
일원론
인간 정신과 인간 신체는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두 개의 실재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상이한 두 표현 --- 분명 공약 불가능하고 독립적인 표현 ---이다. ˝정신과 신체는 하나이자 동일한 개체인데, 그것은 어떤 때에는 사유 속성 아래에서 어떤 때에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
이원론과 그것의 불만족스러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설명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게 최선일 수 있겠다. 이는 범주적 이원론 내지 속성적 이원론을 전제하는 것으로 자연을 실제로 두 개의 구별되고 환원 불가능한 존재 방식으로 나누지만, 나누어진 존재의 한 쪽 기능에 의해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다른 쪽 기능을 배재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인간 신체의 관념(정신)이 가진 탁월성이 인간 신체의 탁월성에 의한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 만약 그렇다면 이는 확실히 그 법칙[1부 공리5]의 정신뿐 아니라 그 조문 또한 범하는 일일 것이다 --- 오히려 오직 그 관념의 내용이 가진 탁월성과 상관적으로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답했을지도 모른다. 정신은 인간 신체의 관념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신과 인간 신체는 둘 다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를 단지 다른 속성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관념의 내용, 곧 그 관념 자체에 내생적인 어떤 것은 신체의 탁월성과 같은 탁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체의 탁월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관념의 탁월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관념 그 자체의 탁월성은 스스로 갖춘 것으로, 분명 신체의 탁월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6장 인식과 의지
무한 지성은 무한한 관념들 --- 그 각각이 이런저런 속성들의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며 그 전부는 모든 속성의 모든 대상에 대한 것인 --- 로 구성되므로 ˝자연 전체를 포착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 정신은 무한 지성을 구성하는 관념들의 부분집합, 즉 인간 신체를 그 직접적 대상으로 하는 관념들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정신은 사유 속성 아래에 있는 실체의 양태들로서 하나이자 동일한 사유 역량의 표현들이다.
관념
관념과 그 관념이 대상으로 하는 신체 상태는 궁극적으르 동일하다. 그것들은 두 개의 다른 속성을 통해 표현하는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이다.
관념은 정신이 포착한 심상 같은 것(대상)인가 아니면 포착함이라는 심적 활동인가? 관념은 (표상적 관념을 통해 간접적이고 매개적으로만 지각되는 외부 대상을 가진) 직접적이고 비매개적으로 지각된 실재(대상)인가 아니면 실재에 대한 지각(활동)인가?
참인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실재를 완벽하게, 즉 가장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일 따름이다.
스피노자가 이러한 입장을 갖게 된 이유 중에는 모든 관념이 본질적으로 심적 활동을 수반한다는 그의 견해가 들어 있다. ‘관념‘을 처음 정의할 때, 그는 관념을 ˝정신이 사고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이라고 파악한다˝라고 말한다(2부 정의3). 그 정의에 대한 해명에서, 그는 ˝나는 지각이라기보다는 개념이라고 말하는데, 지각이라는 말은 정신이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작용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은 정신의 활동/능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진리와 적합성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인간의 인식과 이해 수준에 달려 있다. 특히 그것은 인간 정신이 참이자 적합한 관념을 얼마나 늘려 나가는지, 그래서 실재들에 대한 신(자연)의 무한하고 영원한 적합한 관념들의 모음인 무한 지성과 보다 유사한 지성으로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지에 좌우된다.
인간 정신이 가진 모든 관념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관념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특징이 스피노자가 ‘부적합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참인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또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관념이 실제로 참이고 정신 바깥의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과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이성 능력의 본유적이고 체계적인 확실성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조적으로 스피노자는 참인 관념이 일으키는 확신을 유효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보증에 호소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가 밝힌 모든 견해는 진리의 투명성, 곧 우리가 참인 관념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참인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는 것에 관한 주장이다.
부적합한 관념은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따라서 부적합함은 무지 혹은 ˝인식의 결핍˝ 문제이다.
신 관념의 필연적 적합성은 무한 지성이 모든 관념을 포함한다는 사실과 상관적이다. 따라서 무한 지성 안에 있는 어떤 관념이든 필연적으로 무한 지성 안에 있는 다른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와야 한다. 이 경우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은 정신 그 자체에서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 실재에 대한 관념과 신체에 대한 관념(정신)이 결합함으로써 초래된다.
모두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적 지식은 지성이 아닌 경험을 통한 것이고, 그 결과 외부 물체, 우리 자신의 신체,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의 정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대부분 부적합하다.
인간 신체가 아주 본질적으로 다른 물체들 자체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부적합하게만 그러한 다른 물체들을 알 수 있을 뿐이라면, 인간 신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적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인간 정신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적합하지 않다. 인간 정신이 인간 신체와 결합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러한 인간 정신에 대한 관념은 인간 정신과 결합된다.
인간 신체는 아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 많은 인식을 가진 정신과 관련된 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식의 방식
우리가 감각과 상상을 통해획득하는 관념들은 관념들이 무한 지성 안에 있을 때처럼 실재에 대한 신 또는 자연의 절대적 인식에 따라 연결되는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대상에 의해 우연히 변용되는 무작위적이고 상대적인 방식에 따라 연결된다. 우리가 외부 물체, 우리 자신의 신체, 우리 정신에 대해 갖는 관념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지속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질서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의 공통 질서로부터˝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연의 공통 질서로부터 실재를 지각하는 한,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 그리고 외부 물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내적으로‘ 규정된 관념들은 사유의 논리적 원리가 있는데, 이 사유의 원리는 연장의 절대적인 물리적ᆞ인과적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관념은 지성에 의해 확립된 연관을 통해 추론적으로 다른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실재를 , 곧 ‘영원한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공통 통념은 모든 인간 정신이 인식하는 요소이며, 단순히 정신이 지금 존재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즉 신체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에 적합하게 인식하는 요소이다.
인간 신체 및 인간 정신이 적합하게 인식할 외부 물체의 어떤 일반적 특징이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특징에 대한 관념은 ˝신이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 또는 신이 인간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갖는 한에서, 신 안에서 필연적으로 적합할 것이다. 또한 사유 속성 아래 있는 공통 통념도 있는데, 정신이 단지 사유의 양태이기 때문에 사유 그 자체의 본성과 그것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포함하여 모든 정신에 공통적인 특징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 방법을 위계적으로 정리한 세 가지 분류, 곧 감각기관을 통한 부적합한 관념의 습득과, 공통 통념과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이성을 통한 적합한 관념의 발견,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한 실재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 포착 간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분류를 제시한다.
자유와 의지
스피노자는 ‘참된 자유‘의 특징이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 일체의 원인 없이 스스로 발생하는 것처럼 --- 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2부 정리 48 정신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없으며, 정신은 어떤 원인에 의해 이것이나 저것을 의지하도록 규정된다. 그리고 그 원인 또한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며, 이것은 다시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고, 그런 식으로 무한하게 나아간다.
7장 정념
스피노자가 정념에 대해 말한 많은 부분은 우리가 실재들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어떤 명백하고 직관적인 진리를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심리학
데카르트는 의지가 자연법칙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 의지작용에 있어서는 인과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정신은 감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스피노자가 인간 정신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자연의 일부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자연의 모든 것이 생기는 법칙적 결정론에 종속된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우리가 느끼는 것들은 모두 우리 신체 및 우리를 둘러싼 물체들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원인을갖는 자연적 사건이다.
실로 이 모든 것들은 정신의 결단과 욕구 및 신체의 규정이 본성상 함께 실존한다는 것을,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자가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이며, 사유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고 설명될 때는 결단이라 불리고, 연장 속성 아래 고려되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될 때는 규정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 결과가 결정론적 심리학 --- 기하학적 방법에 의한 심리학 --- 이다.
능동과 수동
정신은 그 자신의 본성과 법칙을 따를 때, 정신의 상태가 그 자신의 인식 자원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능동적이다. 반면 정신의 상태가 정신 안의 적합한 관념이 아니라 현재 인간 신체에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어떤 외적 실재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과 함께 인간 신체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그 정신의 상태는 정신 자신의 자원으로부터 따라니오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수동이다.
‘코나투스‘
모든 유한 양태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으로 하나이자 동일한 신/자연/실체의 무한한 역량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신의 경우에는 사유 속성을 통해, 물체의 경우에는 연장 속성을 통해 자신을 현시한다. 따라서 모든 특수한 정신은 사유함을 통해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을 유한하게 표현하는 실재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특수한 물체는 질료와 운동으로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을 유한하게 표현하는 실재이다. 각각의 실재 자체라고 간주되는 이러한 역량의 유한한 양이 바로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각 실재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 안에 존속하고자 노력한다.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합성체로 고려할 때, 인간의 코나투스는 욕구에 근거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의 노력을 동시에 의식할 때, 그가 어떤 욕구를 자각하고 있을 때, 그것은 욕망이 된다. 정신과 정신-신체의 합성물 두 경우 모두에서, 코나투스는 인간의 모든 추구 근저에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다.
정서
모든 개체의 본질인 역량 내지 노력은 한사람의 생애를 통해 항상 ‘계속되고‘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바뀌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된다. 개체가 가진 행위 역량의 그러한 모든 변화가 바로 스피노자가 ‘정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서(예컨대 감정)는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함 그 자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정서를 경험하거나 겪는다. 스피노자는 이를 ‘이행‘이라 한다.
정신이나 신체가 ˝행위 역량에 있어 ‘증대‘[또는 축소]˝를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스피노자가 가리키는 것은 단지 자기를 보존하고 외부 힘들에 저항하는 정신이나 신체의 코나투스 내지 능력의 강도를 포함하는, 정신이나 신체 상태의 쇠퇴나 증진일 따름이다.
코나투스 학설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개체의 의지는 자신의 능력을 통해 오직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자신의 역량을 증진시키리라고 믿는 것만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성적 존재가 적합한 인식에 의해 추동되는 한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일 때, 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의해 지배되며, 따라서 그의 상태는 개선된다.
정념
스피노자는 대부분 정념에, 그리고 인간의 상태 --- 주로 정신적인 상태. 하지만 또한 상관적으로 물리적이기도 한 상태 --- 가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와의 인과적 상호작용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에 관심을 쏟는다.
스피노자는 세 개의 주요 정서가 있으며, 그 주요 정서는 기쁨, 슬픔, 그리고 욕망이다.
정념은 한 개인을 변용시키는 독특한 실재들에 대한 그의 반응을 나타낼 뿐만아니라, 타인과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정념의 차이에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들 신체 구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물론 이 차이는 각 정신의 차이, 곧 그 양태가 그 신체의 변용을 반영하는 그러한 정신의 차이와 평행할 것이다.
이기주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행위자이다.
스피노자는 정념 이론과 정념의 동기 부여적 역할에 대한 이론으로, 이성적 행위자의 가치판단과 욕망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법한 것을 뒤집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거나 욕망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에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이 우리를 적절한 방식으로 변용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이유로 가치판단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이게 된다. 가치판단은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의 변양으로부터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능동
정신의 능동성이 스피노자 도덕철학의 모퉁잇돌이자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열쇠라는 것은 명확하다.
어떤 것은 그 상태가 그것의 본유적 역량이 외부 실재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본유적 역량이나 코나투스, 곧 존재를 존속하기 위한 그것의 내생적 노력으로부터 따라 나올 경우 능동이다.
욕망이 적합한 관념에 의해 인도될 때, 그 결과가 갖게 된 욕망과 판단은 진정으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을 향해 있다.
[에티카]의 궁극적 목표는, 실재가 우리를 변용시키는 방식에 따라 --- 즉 정념에 따라 --- 실재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에 기초해서 실재를 판단하는 것으로 우리를 돌려 세우는 것이다.
8장 덕과 ‘자유로운 인간‘
정념을 통제하기 위한 싸움은 삶에서 더 큰 합리성과 자율성을 달성하고 운명의 부침으로부터 더 큰 독립성을 달성하기 위한 시도이다.
선/좋음과 악/나쁨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냥 존재할 뿐이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어느 정도는 완전하다.
‘선/좋음‘과 ‘악/나쁨(그리고 ‘완전‘과 ‘불완전‘)이 객관적이고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세계의 특징이 아니라면, 규범적 의미에서 그러한 말들은 단지 실재가 어떤 약정적 준거나 모범에 상응하는지 그 정도를 가늠하는 평가 척도와 관련될 뿐이다.
우리가 신, 즉 자연이라고 부르는 그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는 필연성에 따라 실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성에 따라 행위한다.
우리는 실재가 의당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완전과 불완전이 --- 단지 사유의 양태일 뿐이라는, 즉 우리가 같은 종이나 유에 속하는 개체를 서로 비교하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데 익숙한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따라서 자연의 실재에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명칭을 붙이는 우리의 통상적 접근 방식은 ˝그러한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보다는 편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스피노자는 명확한 이상, 곧 인간에게 정말로 ‘선한/좋은 것‘인지 실재들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선‘은 더 이상 단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성의 보다 완전한 표본인 것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데 유용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성의 보다 왼전한 표본이 근거하는 것은 곧 보게 될 것처럼 존속함의 최대 역량, 최대한의 능동성을 가진 사람이다.
˝선과 악에 대한 참된 인식˝은 보다 완전하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나를 온전한 개체로서 진정으로 보다 강한 상태에 있게 하는, 나에게 유익한 것에 대한 이성적 파악 --- 그저 무질서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단지 어떤 것이 내 신체를 변용하는 실정적 방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해에 근거한 --- 이다.
정서 대 정서
실존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자연 안에 더 힘 있고 강한 다른 것이 없는 독특한 실재는 없다. 어떤 것이든 하나가 주어지면 그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더 힘 있고 강한 다른 것이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그 자신이 적합한 원인인 변화만 겪을 수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 내린다.

스피노자는 정념에 사로잡힌 삶의 애처로운 상 너머로 이동하며, 모범적인 인간의 삶, 즉 인간 본성의 완전함과 그 존속 역량의 최대화를 나타내는 모범에 대한 소묘를 시작한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며 인식과 지성에 기초한 삶으로, 이러한 삶에서 개인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만을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완전함을 추구하도록 돕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삶‘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삶‘ 을 동일시한다.
절대적으로 덕에 의해 행위한다는것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이라는 토대로부터 이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고 살고 우리 존재를 보존하는 것일 뿐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 존속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 그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것이 인식 내지 이해 그 자체일 뿐이라는 사실의 귀결이다. 이성적인 사람, 곧 덕 있는 사람은 인식보다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안다. 따라서 인식은 최고선/가장 좋은 것인데, 그것이 우리를 인간의 완전한 상태 --- 그것은 이해 상태 그 자체이다 --- 로 더 가까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 있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지성, 즉 이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 지성을 완성하는 것은 단지 신과 신의 속성, 그리고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신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의 궁극적 목적, 즉 그로 하여금 다른 욕망들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도록 만드는 최고의 욕망은 자기 자신과 그의 지성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적합하게 인식하도록 그를 인도하는 일이다.
‘자유로운 인간‘
덕 있는 사람은 또한 더 큰 자유를 획득한 개인이다. 그렇기에 외부 실재에 대한 자율성과 인과적 독립성의 정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또한 강한 자기만족이 있을 터인데, 이는 자신의 행위 역량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정직하고 적합한 평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다른 것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고, 이성에 따라 살며, 또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해야 하는가? 물론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자기 이익에 속하고, 그래서 본성은 나에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라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윤리학
덕 있는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좋은 이성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존속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돕는 방식으로 행위한다.
덕을 사랑하고 인식을 욕망하는 다른 이들을 보는 일은 나로 하여금 더욱더 덕과 인식을 사랑하고 욕망하도록 만들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덕을 사랑하고 인식을 욕망하게 만드는 일은 나에게 그리고 내 이익과 관련해서 유익할 것이다.
결론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수준의 이성적 완성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와 국가
인간 본성은 [참된 이성에 의해 규정된 것만을 욕망하도록] 구성되지 않았다.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결코 건전한 이성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가는 화합과 상호 조력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오직 자기 이익의 원인이 되어, 그리고 특히 자연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우세한 정서인 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 움직이는 개인들을 무제약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다른 이들과 협약을 맺는다.
9장 영원성과 지복
정념 완화
보다 이성적인 존재, 정념에 덜 영향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치료법의 첫번째 단계는 정념에 원인에 관한 믿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정념의 힘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강한 정념에 대한 치료법은 그러한 정서를 적합하게 인식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본성과 상반된 정서들에 의해 갈등을 겪지 않는 한, 우리는 지성의 질서에 따라 신체의 변용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연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신체의 변용에 올바른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연관시킬 수 있는 이러한 능력에 의해, 우리는 우리를 나쁜 정서에 쉽게 변용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신에 대한 사랑
스피노자는 덕의 보상이 덕 그 자체라고, 즉 덕은 ‘지복 자체‘이며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덕과 인식은 정념의 혼란을 완화시켜 줄 뿐만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적 선인 것이다. 정신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덕은 3종의 인식에 따라 실재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성 안에 있는 관념이 적절한 질서를 갖게 될 때, 신 관념은 다른 모든 관념의 궁극적
토대, 즉 우리의 인식 그 자체의 원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으로 이끄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은 신에 대한 사랑을 일으킨다.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 정념은 현재 덧없는 것들을 향한 아주 많은 감정이 그런 것처럼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의 영원성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평행론이 ‘신체와 무관한 정신의 지속‘을 원리상 배제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신체가 사라지면, 정신도 사라진다. 아니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둘째로, 그리고 보다 일반적인 문제로, 영혼 불멸성처럼 신의 보상과 형벌이 있다고 암시하는 종교적 혐의를 지닌 학설은, 신을 도덕적이고 섭리를 가진 존재로 신인동형화하는 위험에 대해 스피노자가 말했던 모든 것에 위배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에티카]의 마지막 스무 개 정리에서 ‘정신의 영원성‘에 대해 말할 때, 스피노자는 도대체 무엇에 대해 논의하는 것인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모든 인간 신체는, 시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변용시키고 규정하는 다른 유한 실재들의 인과적 결합 내에서, 지속하는 방식으로 존속한다. 모든 인간 신체 --- 사실 어떤 유형이든 모든 실존하는 물체 --- 에는 또한 ‘영원의 관점 아래‘에 있는 어떤 측면이 있다. 연장 영역 내에는 그 연장적 존재 안에 있는 그 물체/신체의 본질, 곧 그것의 시간적 지속으로부터 추상된 연장적 본성이 있다.
신체의 지속을 갖는 실존이 끝나자마자, 신체의 본질이 그저 연장에 속하는 가능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물질적 실재라면, 정신의 영원한 부분도 단지 그러한 실존하지 않는 물질적 실재에 대한 관념일 뿐이다. 연장에 속하는 정신의 상관물처럼, 정신의 이러한 측면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인간 사후에 남아 있는 정신의 일부이다.
우리가 지성에 따라 우리 관념을 재정리하고 실재를 ‘영원의 관점에서‘ 지각할 때, 우리가 포착한 것은 영속적으로 남는다. 그러한 종류의 인식은 무시간적이고 근본적으로 신의 인식(이는 무한 지성안에 있는 관념에 해당 된다)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그러나 ˝정신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라고 했다.
지복
최고의 인식 획득인 덕은 바로 역량, 능동성, 자유, 인간의 완전성이다.
지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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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비홍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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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카
‘신은 완전하고 무한하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건강한 신체가 현존할 때 정신은 영원하다. 이렇게 설명해야 할까?
여기에 정신의 본성, 감정의 예속과 힘에 대한 정리를 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한 감정에서 생기는 욕망을 갖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을 밝힌 모럴리스트의 잠언에 비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애쓰는 노력에 의해서만 유덕할 수 있다는 이성의 의지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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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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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개념어를 알고, 문장을 이해하고, 단원을 파악하고, 전체를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하니 비교를 한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다.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는 그의 해석에 얼마나 많은 이견이 있는지 모른다. 조금 관심 있다 해서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자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르고 같은 지를 구분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것 외에 어떤 도움을 주는 지는 모른다. 더구나 도움이 된다 한들 친구들 앞에서 훈장질을 할 것도 아니고, 한다 한들 정리되지도 않는 생각을 내뱉은 말이 얼마나 허접할까 싶다.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가 사는데 조금 넓게 깔아놓은 바닥이라 치고 거기를 자유롭게 다녔으면 좋겠다.

서문
표상적 사유와 비표상적 사유
1. 표상이란 말의 어원론적 의미들과 근대적 주체성의 본성
첫번째 의미는 어원을 분석하듯, 표상이란 자기 앞에 세우는 활동이다. 표상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의식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어서만 존재하며 오로지 개별적인 것으로만 현존한다. 또한 그 본질에 있어선 보편적이다.
두번째 의미는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표상 활동을 통해 차이와 유사성은 오로지 동일적인 것에 종속된 것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번째 의미는 다시 현재화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지향성은 표상 활동을 숨기고 있으며, 그리하여 ‘타자‘를 현전으로, 현전에 귀속된 것으로 만든다.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란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다양한 함의를 지닌 표상 활동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성은 탄생하였다.
표상 개념의 이 모든 의미들이 알게 해주는 바는 주체와 맞서서 서 있는 것, 그리고 주체와 다른 자는 오로지 주체의 표상 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근대적 주체의 표상 활동을 비판적 표적으로 삼아 동일적인 것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 자체‘를 드러내려는 시도, 그리고 주체 혹은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현존을 밝혀내려는 시도로 요약된다. 이러한 시도를 우리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이라고 부른다.
제1부 사유의 새로운 지평
제1장 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와 발생의 문제 --- 재인식 대 기호 해독
1.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
1)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 기술
사유 안에 내재하는 그 사유의 ‘밑그림‘, ˝항상 미리 전제되어 있는 [사유의] 좌표들.
누구나 공유하는 것, 누구나 문제 삼지 않는 것.
2) 선의지
‘선의지‘, ‘사유의 선한 본성‘, ‘코기토의 보편적 본성‘ : 사유자가 참을 사랑하고 원하는 이 의지.
그러나 진리 인식에 대한 선의지의 공리 자체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이 공리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이 공리는 임의적인 것이며, 이 임의적인 공리에 공통적으로 기반해서 탄생한 인식도 진리도 아닌 임의적인 것, 한낱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 공통 감각
사유자가 지닌 이러한 선의지에 따라 진리 인식을 위해 사유자의 능력들(지성, 상상력, 감성 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공리를 가리켜 ‘공통 감각‘이라 부른다.
이처럼 인식은 ‘모두‘ 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협력이라는 주관적 원리, 즉 능력들의 조화로서 공통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 인식을 위해 필수적인 능력들의 일치를 근거 지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그야말로 그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독단적으로 전제된 공리라고 밖에는 여겨질 수가 없다.
2.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의 임의성
1) 칸트에게 능력들의 일치라는 문제는 있는가?
지성과 대상의 일치라는 인식론의 오랜 과제를 칸트는 모든 것을 이성의 능력으로 내재화시켜보자는 착안을 한다. 다시 말해 주관적 능력들, 즉 수용적 감성을 통해 다양은 주어지며 능동적 지성은 이에 입법하여 경험 대상을 만든다. 대상이란 그저 경험적인 대상이 아니라 감성을 통해 주어진 다양을 상상력의 종합 활동이 ˝하나의 표상 속에˝정립한 것을 말한다.
2) 발생의 관점에서
심성의 능력들 사이의 일치라는 문제에서 칸트는 대상에 입법하는 자로서 규정되어 있는 능력을 지성이라 했다. 우리는 사변적 관심에 따라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게끔 지성을 규정해주고 지성과 감성의 조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경험에 착안해서 추측할 뿐이다. 요컨대 초월 철학은 경험의 ‘발생‘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을 표준삼아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기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초월 철학이 경험의 발생 혹은 능력들 간의 일치의 발생을 기술하려들지 않고 조건만을 규정하려든다면, 능력들의 일치의 임의성과 ‘그 일치의 결과로서의 임의성‘에 대한 의심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발생의 관점이 요구되고 원천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발생‘의 관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3) 초월적 도식 작용론에 대한 비판
도식 작용론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첫째로 상상력이 지성과 감성을 일치(매개)시켜줄 수 없다는 점이고 둘째로 지성과 상상력의 일치를 근거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능력들의 일치는 임의적이다. 가능한 경험을 조건삼으니 발생의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따라서 능력들의 일치는 한낱 개연적인것 일뿐이다.
4) 고전주의 시대의 구성적 유한성과 인간의 탄생
인간 심성이 가진 능력들의 제약성(유한성)은 규정된(구성된) 것이다. 인간 속의 힘들이, 외부로부터 온 유한성의 힘들[임의적 규정들]과 관계를 맺을 때, 바로 그때에만 힘들의 집합은 인간으로서의 형태, 즉 최초의 인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간 개념 자체가 한낱 임의적일 뿐이다.
3.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와 기호
1) 숭고와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
이성은 상상력이 감성적 직관 속에서 전체성의 이념에 상응하는 전체를 추구하도록 부추기고, 이에따라 상상력은 한계에 이르도록 총괄을 행한다. 전체성이라는 이념과 비교하면서 이런 한계에 직면할 때 숭고가 체험된다. 이처럼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에서 체험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우선 일치보다는 오히려 ‘불일치‘, 즉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이다. 그런데 이 능력들의 불일치의 일치는 능력들이 규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이룬 일치이다. 즉 ‘발생한 일치‘이다.
2)기호의 성질들 : 우연성, 강제성, 수동성, 필연성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나타남에 있어서 우연성, 사유에 있어서 강제성(혹은 사유 주체의 수동성), 진리에 있어서 필연성 - 이 세가지가 기호를 정의한다.
3) 기호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에 대한 니체적 인식 - ‘주사위 던지기‘의 의미
들뢰즈는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을 통해 긍정된다˝ 라고 니체의 우연과 필연 개념을 정리한다.
우연 자체를 세계의 원리로 놓고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어떤 숫자가 나오든 그 숫자는 세계의 원리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우연을 원리로 삼는 영원한 순환일 뿐이다.
‘우연 자체가 세계의 필연적 원리라면, 오로지 기호가 우연히 출연할 때만 그 기호의 출현은 필연적이며, 그 출연한 기호에 대응하는 사유 또한 필연적이다.
4) 표현과 기호 :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프루스트
우선 기호 개념에 이해를 돕는 표현 개념을 이해해 본다. 표현은 상반되는 두 측면, 펼침과 감쌈이라는 상반된 방향의 운동을 모순 없이 동시적으로 포괄하는 종합의 원리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기호 개념을 바로 이런 표현주의적 사고 방식의 틀 안에서이해하고 있다.
프루스트에게서 기호 개념이란 감쌈(내용물이 용기 속에 담겨 있음)과 펼침(해석의 활동을 통해 그 내용물을 끄집어냄)이라는 표현의 이념과 동일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프루스트의 기호들은 ‘불명확함(다의적임)‘을 본질로 하며, 바로 그 불명확함 때문에 기호는 사유자가 그것을 해독하게끔 사유를 자극하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와 반대로 스피노자에게선 불명확한 것, 즉 기호는 표현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스피노자에게 기호란 ‘ 상상력으로부터 나오는 본질적으로 불분명한 언어를 형성한다는 점이며, 이는 일의적인 표현으로부터 나온 철학의 자연 언어와 대립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설명은 지성 내재적인 사물의 작용이고, 지성이란 자연의 양태일 뿐이고 지성의 소산인 인식 자체도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의 소산일 뿐이다. 따라서 표현 개념은 존재론적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는 오로지 ‘적합 관념들‘만이 표현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기호란 한낱 부적합 관념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프루스트에게선 불명확한 기호가 곧 표현이며 기호 해석이 바로 우리 정신의 ‘펼치는 활동‘이다.
라이프니츠는 ‘표현은 모든 영역에서 일자와 다자 사이의 관계를 확립한다. 그러나 일자를 현시하는 다자, 즉 [일자의] 표현에는 항상 불분명한 혼란스러운 지대가 끼여든다. 라이프니츠의 체계에서 불분명한 다자, 즉 모나드들은 나름대로 전체(일자)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각각의 반영은 전체에 대한 완벽한 반영이 아니나, 각각의 모나드들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한계지어진 반영, 곧 불분명한 표현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나드들 모두는 무한, 즉 전체에 대한 혼란된 표상을 지니고 있다‘ 라고 말한다
5) 기호 해독과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발적인 선의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어떤 폭력 앞에 노출될 때 진리 탐구를 위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폭력을 야기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이처럼 기호들과 맞닥뜨릴 때 사유는 더 이상 임의적인 공리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호의 자극을 통해 능력들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유의 이미지 곧 사유의 형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섕이다‘.
6) 꿈, 주체의 사라짐
전제된 공리 없이 발생한 사유는 정말로 아무런 전제 없는 사유인가, 순수한 발생의 산물인가?
들뢰즈는 이 ‘순수 사유‘ 의 이미지의 모델을 프루스트가 기술하는 ‘꿈‘에서 발견한다. 하나의 순수 ‘해석‘, 순수 선택이라는 활동이 정말로 존재한다. 꿈이라는 사유 활동이 시작되면 그제야 사유 주체와 사유 대상이 선택되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로 주체는 그의 사유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제 기호 해독이라는 들뢰즈의 사유 모델과 더불어 주체는 사유로부터 제거되어 버린다. 모든 임의적인 요소가 제거된 순수 사유란 ‘비인격성‘ 과 ‘익명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4. 맺음말: 니체적 문화론의 탄생 - 사유에 가해지는 폭력과 문화의 훈련
어떤 폭력이 사유로서의 사유에 행사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해서 사유하도록 어떤 힘이 강요해야만‘ 한다. [ --- ] 이런 압박, 훈련을 가리켜 니체는 ‘문화‘라고 부른다. [ --- ] 문화는 사유가 겪는 폭력, 사유의 수련[형성]이다. 문화 개념과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는 공통적으로 ‘사유에 해당하는 폭력에 응하는 사유의 수련‘이라는 동일한 함의를 담고 있다. 사유의 훈련을 통한 새로운 법칙들과 가치들의 지속적인 창조 과정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제2장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 프로이트, 들뢰즈, 프루스트, 바르트, 메를로 퐁티
1. 철학과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
주체는 사유가 심성에 주어진 자극에 의해서 ‘비자발적‘ 으로 시작된다. 즉 타자가 주는 ‘상처줌‘을 통해 비로서 주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상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참된 사유는 대상을 객관화하거나 마음에 표상하는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도 표상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상처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2. 트라우마와 문학 비평
※들뢰즈의 트라우마론인 기호 해독 모델은 어떤 식으로 프루스트에게서 발견되는가?
[트라우마의 자극을 통해 비로서 발생하는 사유 활동 <감성을 통해 상처를 입은 주체가, 그 상처를 준 기호가 숨기고 있는 진리를 지성을 통해 해석해내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론의 ‘사후적‘ 성격을 프루스트는 알고 있었는가?
[프루스트 또한 엠마의 트라우마를 통해 사후적 성격을 소설의 주요 라이트모티프로 사용하고 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트라우마론을 계열론으로 이해하며 여기서 계열의 최초의 항, 즉 기원의 신화를 제거하고자 하는데, 들뢰즈가 프로이트의 계열론과 프루스트의 계열론 사이엔 모종의 유비 관계가 있는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은 기원(최초의 항)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두 개의 항 사이의 소급적 인과율을 통한 의미 생산의 구조 자체를 발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엠마의 경우 사건 2는 엠마의 신경증을 설명하기 위한 최초의 사건, 근원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낱 계열의 한 중간 항에 불과하게 되어 버린다.]
※레비나스의, 트라우마론으로서의 윤리학이 프루스트를 통해서도 발견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주체가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그 자신과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이야기로 이해한다.]
3. 트라우마, 사진론, 회화론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즉 트라우마론은 사진론과 회화론에서도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스투디움은 문화적 코드를 전제로만 존립할 수 있다. 반면 퐁트툼은 비표상성, 고통스러운 자극 등 트라우마 일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메르로 퐁티는, 회화의 목적은 바로 근대 과학과 철학이 정립한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 이면에 은폐된 세계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객 이전의 사물 세계를 ‘존재의 조직‘이라고도 부른다.눈은 세계의 어떤 충격에 의해 움직인다. 사물이 화가의 눈에 ‘충격‘ 을 주었을 때 눈은 비로서 비가시적이던 존재의 조직에 다다르며, 그 다음에 손이 그 비가시적인 것을 화폭 위에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 놓는다. 이 주체의 탈중심화가 트라우마론의 특성이다.
4. 맺음말: 계시의 시대, 그리고 우리 문학
트라우마란 우연히 맞닥뜨린 자극으로서 기존의 주체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주체의 발생(들뢰즈의 경우는 익명적 사유 활동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표상을 갖추지 않은 일종의 암호 문자이고 계시의 이념을 숨기고 있다. 이렇게 주체의 영역은 자율성에서 비자발성으로, 경험의 객관성 및 일반성은 특정성으로, 필연성은 우연성으로, 지성의 노동하는 능력은 감성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우리 문학 역시 상처를 통해 자기 세계의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트라우마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제2부 주체와 타자
제3장 주체의 근본 구조와 타자 ---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이론
1. 레비나스 철학의 문제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타자의 환원 불능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타자를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 아래서 관심은 나라는 동일자로 결코 흡수되지 않는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이는 것이다.
2. 레비나스의 타자이론: 주체의 탄생과 타자
레비나스의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 의 가능성을 숙고한다. 여기서 초월이란 바로 고통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대적 타자, 규정 불능의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와의 관계, 즉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 내가 주체로서 선다는 것,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건에 붙여진 여러 다른 이름들인 것이다.
3. 들뢰즈의 타자 이론: 공간적 지각과 시간 의식의 탄생
어떻게 타자가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지 ‘공간성‘과 ‘시간성‘이라는 측면을 살펴본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자신에게 지각되지 않는 부분을 종합해서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주체의 공간적 지각이다.
타자는 나의 의식이 [과거 양태인] ‘나였음‘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또한 [지금 있는] 대상과 동시적이지 않은 과거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타자의 출현만이 나에게 기억이, 그러므로 시간이 생기게 해준다.
이렇듯 타자를 통해 공간적ᆞ시간적으로 질서지어진 이 세계의 상관자로서의 우리 주체성이 정립되는 것이다.
4. 무엇이 새로운가? --- 공통점과 차이점
들뢰즈나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외적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들뢰즈에게 타자란 ‘가능 세계의 표현‘이며, 레비나스에게선 ‘무한자가 현시하는 지평‘이다. 두 사람에게 주체성의 탄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은, 레비나스의 타자가 ‘외재적인‘ 무한자임에 반해, 들뢰즈의 타자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세계(지각장) ‘내재적인‘ 선험적 구조이다.
5. 타자의 부재와 주체의 종말
들뢰즈에게 있어서 타자를 통해 발생한 주체의 위상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 관점에서: 현존은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부재는 주체가 한낱 유명론적인 것일 뿐이고 실재적 차원에 있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사건들‘이다.
우주론적 관점에서: 현존은 주체의 상관자로서 대상의 출현이다. 부재는 이 대상들도 명목상의 것들이며 실재적 차원에선 분절되지 않고 형상을 지니지 않은 ‘요소들‘로 환원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현존은 성적 욕망의 대상을 분별해준다. 부재는 성적 분화되기 이전인 욕망으로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힘이다.
제4장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 --- 레비나스와의 비교
1. 왜 지금 사르트르인가?
2. 이제까지의 타자 이론들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
1) 타자와의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
외적 관계는 ˝타자와 나를 하나의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분리한다˝.
내적 관계란, 나를 타자에 의해 규정함을 통해서만,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인식의 측면, 외적 관계의 측면에서 타자 존재의 확실성을 설명하려는 기존의 이론들이 실패했는지를 살펴본다.
2) 실재론과 관념론 비판
나의 의식에 대하여 시공간 내의 사물이 현전한다는 점에 실재론이 그 확실성을 둔다면 실재론은 타자의 영혼의 실재성에 관해서는 동일한 명증성을 요구할 수 없을것이다. 실재론자들은 오로지 감정이입, 공감 등을 통해 타자 존재에 대한 ‘개연적 인식‘ 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표상들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나의 주관밖에 없다. 이 점은 타자의 표상들을 조직짓는 통일체는 그 본성상 타자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점과 모순을 이룬다.
3) 후설과 하이데거 비판
후설에게 있어서 타자는 신체적 유사성에 의하여 타자 존재를 체험한다. 그러나 신체적 표현 간의 유사성에 근거한 감정 이입은 기껏해야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인 개연적인 타자만을 알려줄 뿐이라는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들 하나하나는 각자의 내면성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내면과 타자의 내면은, 나에 대해서 결코 동일한 정도의 명석판명성을 가지지도 않고 동일한 정도로 부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인식적 소유물인 표상이 아니며, 타자를 표상으로 세울 경우 타자성은 그 표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3.타자의 비표상성과 직접성
1)눈과 시선
타자성을 상실하지 않은 타자의 모습은 비대상적 방식으로 나타나며, 비인식적으로, 직접 현시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선은 눈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타자의 눈을 지각한다 함은 타자의 타자성을 없애고 그를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시선은, 내가 시선을 의식할 때 내 지각의 대상으로서의 눈은 사라진다. 곧 ‘내가 타자의 시선에 나의 주의를 돌리면 그와 동시에 나의 지각은 해체되어 버린다.‘
2) 이타성과 분리
레비나스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는 유적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근본적인 분리가 있다고 본다. 즉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란 명백히, 한 사람을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 외부에 위치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다른 어떤 개념 체계의 도움 없이 오로지 타자는 나와 다른 그의 이타성 때문에 나와 분리된다.
3) 얼굴
시선을 의미한다.
4. 대상화의 의미: 비반성적 층위에서 주체의 출현
1) 비인격적 순수 의식과 자아
의식은 대상에 대한 모든 정립적인 의식과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이다. 그러므로 정립적인 지향적 의식과 비정립적인 자기 의식은 한데 얽혀 지향적 활동의 필요 충분 조건을 이룬다. 이 두 가지는 지향적 활동을 가능케 하는 ‘분할, 분해 불가능한 하나의 존재‘이다.
반성되지 않는 의식의 영역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절대적으로 자발적이며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즉 비인격적인)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자아의 출연을 허락하는 것은 그 근본적인 자기성에 있어서의 의식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는 오로지 반성 활동의 경우에만 나타난다. [ ---] 반성적 활동이 대상으로 삼는 외재적 대상, 그것이 나이다‘.
사르트르는 ‘자아란 결코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의 원천이 아니며, 오히려 자아란 비인격적인 초월적 의식이 반성 활동을 통해 산출해낸 의식 외재적인 대상이다‘ 라고 주장한다.
2) 타자는 수치를 통해 나의 코기토를 가능케 한다: 유아론 극복1
타자의 시선을 받았을 때 의식의 상태는 비반성적이라는 점이다. 이 비반성적인 의식은 ‘수치‘이다. 수치는 그 의식 자신에게 정립적인 지향성의 화살을 돌리지 않으면서 수치에 대해 외재적인 대상을 정립적으로 지향한다.
비반성적 지평에서의 나의 대상화란 반성적 지평 위에서의 나의 대상화와 더불어 사르트르의 자아론을 양분한다.
자아를 대상으로서 정립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반성 활동과 비반성적 의식인 수치가 동일하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선 앞에서의 ‘자아의 대상화‘란, 곧 자아라는 인격적 주체의 발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 생겨난 ‘나‘는, 의식에 대한 ‘인격적 표상이 아니라‘ 의식이 떠맡아야 하나의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적 코기토이다. 즉 나는 보여지고 있다 고로 존재한다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가 던지는 시선이 다른 주체의 탄생에 개입하는 것(내적 관계)이다.
사르트르는 이와 같이 ‘존재의 측면‘에서, 즉 코기토의 필수불가결한 ‘내적 요소‘로서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유아론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3. 주체의 탄생에 있어서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라캉과의 비교, 자유에 대한 수치
주체란 모두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소 발생한다.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주체의 성격을 살펴보자. 사르트르에게 근원적인 자유란 자유 의지보다는, 비인격적인 지향적 의식의 절대적 자발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이 인격적 자아에 자리할 때 의식의 무조건적인 자발성은 자아의 구체적인 관심, 습관 등등을 통해 조건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절대성과 무조건성은 변질된다. 그런 뜻에서 자아의 출현을 의식의 하락 혹은 하락된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타자로 인하여 자아가 될 때, 의식의 절대적 자발성은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나의 자유의 한계이다‘. 결국 타자의 출현은 제한된 자유를 지닌 주체의 발생을 의미한다.
5. 타자의 여러 성격
1) 부재와 타자 존재의 필요성: 유아론 극복2
타자는 나의 경험의 장안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의 장 안의 대상(예컨대 타자의 눈, 신체)과는 인식적 관계를 맺지만, 타자와는 존재적 관계를 맺는다.
또한 타자 존재에 대한 회의론의 위협은, 우리가 경험의 장 안의 대상과 경험의 장 밖의 존재, 즉 외재적인 타자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부재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부재란 인간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현전을 통해 규정한 장소나 위치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한 존재 양식으로서 정의된다. 부재란 하나의 위치와의 관계의 무는 아니다‘. 즉 부재와 현전은 내 경험 안에서 타자가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일 뿐이다.
남편이 부재하는 것, 그녀가 착각한 것[시선을 받아서 수치를 느꼈으나 나타나지 않는 것], 그녀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피에르의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피에르의 경험적 사실성일 뿐이다. ‘착각으로 밝혀지는 것[즉 부재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타자의 사실성이다. 그러므로 부재가 일정한 장소에서의 타자의 사실성에 대립하지만 타자 존재의 실재성과 대립하지는 않는다. 결국 타자의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는 실재성과 경험적 사실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범주를 구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오류이다.
2) 타자의 초월성과 신의 관념
타자의 신체(눈, 발자국 소리 등), 거리, 근접성 등은 세계 내부의 것임에 반해 타자 자체는 세계 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초월적이며, 세계 저편의 존재이다.
여기서 타자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신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현전의 특정성을 무시하고, 타자의 현전 일반을 하나의 무한한 주관의 현전으로 간주함으로써 도달한 것이 신의 관념이라는 점에서, 신은 기만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신의 개념(무한자)을 탐구할 뿐이지, 신의 개념에 합당한 전지전능한 존재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사르트르가 부정적인 입장에서 신의 이념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파생한 일종의 기만적인 관념으로 간주한 데 반해, 레비나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신의 이념이 적합하고 이해되고 실현될 수 있는 문맥으로 본다.
3) 타자 출현의 우연성,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모든 인간이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존재자를 전체로서 붙들어, 이 존재자의 존재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동일자에게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세계 외재적인 타자와의 만남은 존재 구조 해명을 통해서는 결코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하나의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이라는 우연성이 세계 저편으로부터 와서 나의 나됨, 곧 주체성의 성립에 개입하는 이상 인간 현존의 모습은 존재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통해 밝혀진다.
결론적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6. 맺음말: 부빌의 초상화들과 타자의 시선, 역전 가능성
사르트르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자.
사르트르에게서 의식은 그 근본젘인 지향성 때문에 상대방을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투ㅅ쟁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즉 타자의 시선이 나를 공겨해옴은 바로 의식의 근본적인 지향성에서 기인한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는 타자는 그의 헐벗음을 통해 윤리적 호소로서 나를 공격해오지, 결코 지향적 광선으로서 공격해오지는 않는다. 또한 나의 지향적 의식은 결코 타자의 헐벗은 얼굴을 나의 지평 위의 대상으로 복속시키지 못한다.
사르트르에게서 타자의 체험은 나의 지향성이 좌절하고 내가 타자의 지향성에 포착되는 전적인 실패를 의미하지만,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체험은 세계 저편으로 초월하는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제5장 들뢰즈의 주체 개념 --- 눈대 기관 없는 신체
1. 1960년대 풍경: 주체, 타자, 시선
1960년대 이루어진 이 모든 철학적 업적들은, 대상 세계의 최후 근거로서의 초월적 주체에서 눈길을 돌려,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서 발생하는 주체를 그리고자 했다.
2. 들뢰즈에서 주체의 발생
타자는 나의 시각적 기관, 눈의 상관자로 현현하는 자이다. 이 타자의 출현을 통해 주체성은 발생한다.
보충적 논의: 들뢰즈와 비트겐슈타인
우리가 어떤 사람이 고통에 이름을 준다고 이야기할 때, 여기서 준비되어 있는 것은 ‘고통‘이란 낱말의 문법의 현존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일러주듯 ‘고통‘이란 단어의 습득은 ‘찌푸린 얼굴을 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가 주체로서 설 수 있는 자리인 문법이라는 구조(비트겐슈타인)와 지각장이라는 구조(들뢰즈)의 대응, 이 두 가지 모두는 타자의 현존을 통해 구성된다.
3. 기관 없는 신체, 비인칭, 고백체와의 대결
들뢰즈가 시각의 상관자로서의 타자의 개입을 통한 주체의 발생을 기술했을 때, 주체란 한낱 유명론적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 ‘나‘라고 말하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주체란 존재론적 지위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문법상의 주체(주어)의 지위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현상학자들이 열광했던 시각적인 것의 근원성을 허물고자 했다. ‘시각적인 지각‘에 대한 ‘언표 체계‘의 우위성이다. 즉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은 각각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 다만 가시적인 것의 고유한 형태는 언표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언표 체계에 의해 규정된다. 언표만이 규정자이며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시적인 것은 언표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론의 대상이다.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용어를 통해 시각적인 것을 비판한다. 눈을 기관으로서의 주체성의 발생 이전의 상태로 돌려 ‘잠재적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결정되지 않은 기관‘으로 본다. 여기서 기관 없는 신체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기관들이 없다기 보다, 이 기관들이 ‘미리‘ 유기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주체‘는 결국 어떤 자아도 아니다. 이 소설의 주체는 ‘내용물이 없는 텅 빈 우리‘이다. 들뢰즈는 주체를 대체하는 것은 결국 우리, 아니 우리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익명의 중얼거림일 뿐이라고 본다.
보충적 논의: 익명적 중얼거림 대 고백체
익명적 중얼거림으로서의 언표는 철학 텍스트와 문학 작품에 있어서 고백체와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고백의 형식을 통해서 자기의 내면에서 끌어내려는 노력, ‘자기 의식의 본질적 확실성‘ 을 밝혀내려는 철학상의 노력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가 발견해낸 ‘익명적 중얼거림‘의 위상과 의의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고백의 강요가 출현시킨 ‘자아‘, 그리고 이 자아를 담구하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일인칭 화자와 고백체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이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란 한낱 유명론적인 이름, ‘나‘라고 말하는 습관일 뿐이요, 언표의 주체란 그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익명의 우리, 누군가, 혹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4. 주체 이후엔 누가 오는가?
들뢰즈는 전통적인 주체 개념인 주체의 보편성과 개별적 인격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개념은 개별적 특정성과 비인격적 개별성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는, 주체의 기능을 대신하는 특정성과 비인격적 개별성이라는 이 새로운 기능들과 함께 ˝우리는, 나와 당신 사이의 공허한 교류에서 보다 더 잘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맺음말: 비밀리에 보고 있는 시선의 종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표상되지 않으며 어떻게든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숙명적으로 나의 시각과 관련을 맺고 있고, 나의 시각적 욕망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눈이란 기관을 신체로부터 도려내 우리를 기관 없는 신체로 만들어버린다.
제3부 법과 사회: 억압에 대응하는 싸움
제6장 들뢰즈의 법 개념
1. 법과 선의 관계
법과 선의 고전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 법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법은 부차적인 것, 선의 대리자에 불과하다. 즉 법은 선이라는 최상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 결과 [---] 법에 복종하는 것이 ‘최선‘이며, 최선은 선의 이미지이다.
칸트는 거꾸로 주체의 심성 안에 있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법에 근거하여 선을 설명한다.
그렇기에 근대 세계에 들어 칸트를 통해 이 관계는 전도 된다. ˝법은 더 이상 이미 존재해 있는 선에 의존하지 않는다. [---] 법은 순수 형식이며 [오히려] 선이 이 형식에 의존한다.˝ ˝법으로부터 선이 도출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2. 카프카와 우울증적 법 의식
칸트의 정언명법에서나 카프카의 형벌 기계에서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 이 법들을 실행하게 만듦으로써만 법을 체험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복종하는 그만킘 정의로운 자가 되거나 정의로움을 느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 미리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히며, 또 법에 엄격히 복종할수록 죄의식은 더욱 커진다. 스스로 내면에서 도덕적 의식이명령하는 법의 준수에 대한 강박관념과 그에 따른 죄의식의 증대를 가리켜 들뢰즈는 ˝법에 대한 우울증적 의식˝ 혹은 ˝ 법의 우울증적이고 광적인 면모˝ 라고 이름 붙인다. 결국 칸트를 통한 선과 법의 관계의 전도, 내용이 없는, 따라서 인식할 것이 없는 텅 빈 형식으로서의 법의 정립은 카프카라는 렌즈를 통해 보자면, 법의 준수에 대한 도덕적 의식의 강요와 그에 따른 죄의식의 비례 관계라는 우울증적인 형태로 근대 사법 제도 안에 등장한다.
3. 법에 대한 대항의 두 형태: 사드와 마조호
사드가 법을 규정하는 최고 원리(악)를 지향함으로써 법을 전복하려고 했던 반면, 마조흐는 하위 요소인 법 자체에 철저히 집착함으로써 법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부조리한 법의 철저한 준수, 즉 법이 야기할 수 있는 가장 자질구레한 결과까지 철저히 추구함으로써 그 법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마조흐는 법의 엄숙성과 권위를 와해시켜 버린다.
들뢰즈는 보다 본질적 층위로 탐구의 시야를 돌린다. 그의 시선은 법의 본서 자체를 다시 사유하는 데 가 닿는다.
4. 유대주의 대 스피노자주의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법이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자연의 영원한 진리를 형성하는 것인데, 인간의 유한한 지성이 그에 대한 기호 해독을 잘못함으로써, 즉 결과와의 관련 아래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법은 도덕적 명령이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은 자연의 법칙을 ‘당위‘로 오인받고 그로부터 명령의 형식을 꾸며냈다.
제7장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1. 하나의 개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에 진입하는가?
하나의 낱말이 어떻게 필연적인 개념으로 채용되는가? 그들만의 특정한 문제를 작문하기 위한 표현 기술로서 ‘기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2.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관해서 말한다. 여기서 욕망의 문제는 의미가 아니고 사용의 문제만을 제기한다.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 이다. 어떤 것(이를테면 욕망)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칸트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 철학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성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이 문제를 제기한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해, 인식에 대해 내적인 기준을 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결국 들뢰즈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내재적 규준을 마련코자 한 칸트의 기획을 정신분석학의 영역에도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를 마치 형이상학에서의 가상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서 비판한 후 ˝어떤 해석과도 독립된 욕망의 상태를 그려 보이고자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3. 대상a, 라캉의 기계 개념
라캉은 ‘˝대상a‘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대상a로서 분석되는 것은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대성인 ‘시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인 타인의 눈을 지각할 수 있는 반면, 대상a인 시선을 시각적 충동은 결코 볼 수 없다. 시각적 충동은 타자의 시선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 해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를 탄생시킨다. 원래 주객의 구별이 없던 자아는 대상이 결핍되어 있는, 대상과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 나누어진 것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대상a‘를 추구하는 ‘충동‘과 상징적 질서, 주체-대상의 관계 속에서 ‘대상‘을 ‘욕구‘하는 자아라는 ‘절단되고 나누어진‘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상a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누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인 것이다.( 충동 자체가 이미 각각의 대상a에 의해 ‘나누어진‘통일성 없는 부분적 충동이다. 가타리는 이로부터 ‘절단‘이라는 기계 개념을 발전시킨다)
라캉은 이러한 늘 실패하는 충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어서 대상a들은 결코 표상적인 차원에서 주체에게 소유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충동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욕구하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진 것‘ 이며, 우리의 이면에는 결핍되어 있는 항상적인 에너지로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여기서 라캉의 기계 개념이 나온다. 그는 표층적인 욕구와 심층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조가 기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로써 우리는 라캉의 기계 개념의 두 가지 함의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의식적ᆞ표층적 욕구와 무의식적ᆞ심층적 충동의 이중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둘째, 라캉은 무의식은 의식 세계를 이끄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4.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
라캉에게 있어서 대상a는 마치 폭탄처럼 충동들을, 그러므로 주체를 절단해버린다.
1) 구조와 기계
가타리는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통시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다. 가타리는 동태적이며 혁명적인 기계와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구조는 인간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다.
2) 형이상학과 기계
2)-1 플라톤적 상기와 모사물, 개념적 차이
플라톤은 각각의 사물들이 전체에 도달 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결합의 방법과 분할의 방법이다. 즉 유적 형상 아래에 모이게 하고 거기에 종차를 주어 분할한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분할된 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유개념을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전체 아래,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 종속시킨다는 말 결국 존재자들을 ‘유종의 체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상기(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를 통해 정신은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되는 유로서의 이데아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분할은 개별자들을 이데아의 모사물로서 이데아에 귀속시키는 작업, 즉 개별자들이 이데아와 맺고 있는 ‘내적 유사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다. 여기에 이데아와 유사성을 지닌 모사물이 있고 유사성을 지니지 못한 시뮬라크르가 있다. 그러므로 모사물과 시뮬라크르 사이엔 ‘본성‘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2)-2 프루스트적 상기와 시뮬라크르, 차이 자체
이데아를 미리 모방하지 않는 능력으로서의 ‘상기‘, 존재들의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 프루스트적 상기가 바로 ‘공명을 일으키는 기계‘이다. 공명은 두 개의 대상이 상위의 동일적인 대상으로 환원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상위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두 대상 간의 환원 불능의 ‘차이‘만이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낼 수 있다. 이러한 전체화하지 읺는 조각들, 이데아라는 동일적인 유를 전제하지 않는 조각들이 시뮬라크르들이다.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상위의 동일자(유개념)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기에,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이다.
프루스트의 상기는 세계를 결코 유기체를 이루지 않는 시뮬라크르들로 조각내는 ‘절단 기계‘이다.
2)-3 반복이란 무엇인가?
전체성과 양립할 수 없는 차이는 반복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존재자들을 긍정하는 원리가 반복이다. 동일성을 향해 전진하지 않는 차이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성을 부여하는 원리라는 뜻에서의 반복이다.
반복은 존재자를 ‘환원 불능의 차이를 지닌 존재자‘로 드러내 보이는 ‘존재‘이다.
3) 보충적 논의: 전쟁 기계와 국가 기구에 관한 노트
전쟁 기계는 국가 기구에 대해 반드시 ‘외재적‘이다.
국가 기구는 늘 ‘전체적 일치‘, ‘보편화‘를 추구하는 반면, 전쟁 기계는 보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정성‘을 추구한다.
5. 맺음말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적 조화와 통일의 파괴자로서 기능한다.
제4부 세속의 삶, 초월, 그리고 예술
제8장 아이와 초월 --- 레비나스, 투르니에, 쿤데라
나는 아이를 통해 미래를 뻗어나가는 무한한 시간을 여행한다.
1. 레비나스: 나이며 타자인 아이
아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존재의 ‘고독‘과 ‘존재의 일반 경계‘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고독은 어디서 오는가? 레비나스는 고독이란, 존재의 존재함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전체 속에 혼융되지 않는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함 때문에 고독하다. 이 고독한 존재는 일상성 안에서 자기의 고독을 벗어나려고, 즉 자기와 다른 것, 타자를 만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향유, 인식, 노동, 거주 등 이 고독한 존재가 일상성 안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통틀어 레비나스는 ‘존재의 일반 경계‘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향유를 통해 만나는 타자는 곧 나에게로 동화되어 버리지, 그 타자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다시 존재는 깊은 고독 속에 빠져 버린다. 세계 안에서는, 혹은 존재의 일반 경계를 통해서는 어떻게도 고독으로부터 달아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존재는 실로 위협적인 타자를 만나는데,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타자인 죽음과 맞닥뜨린 인간은 비로소 존재의 고독으로부터 탈출하게 되는 것인가? 죽음은 나를 세계로부터 초월할 수 있게끔 해주는가? 레비나스는 초월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넘어감[조월]이란 존재와 다르게 됨, 존재의 ‘타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존재함‘이 아니라 존재와 다르게 됨이다. 이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여기서 넘어감은 죽음이 아니다˝ 초월은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를 세계로부터 떠나게(초월하게) 하는 동시에 나의 자기 동일성 또한 깨끗이 소멸시켜 버린다. 그런데 내가 없다면 초월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통한 초월이 가지는 모순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초월의 가능성은 아예 막혔는가? 초월이 가능하려면, 나는 나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나 혹은 내가 정립한 내게 귀속된 세계와도 ‘다르게‘ 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초월은,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닐 수 있음, ‘여전히 나이되 다른 이로 변화함‘을 조건으로 한다. 논리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무리한 초월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이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이이다. 아이와의 관계, 혹은 타인과의 관계는 권력이 아니라 출산이며, 이는 절대적인 미래 혹은 무한한 시간과의 관계를 세운다. 이 나의 아이는 타자이면서, 이미 말했듯 여전히 모종의 방식으로 나이다. 아이는 나이며 타자이기에, 나는 가의 가능성이 지배하는 유한한 시간 저편의 미래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이며, 미래는 나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타인의 시간이면서도 여전히 나의 모험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출산은 무한한 미래로의 여행을 가능케 해주는 ˝부성의 진정한 모험˝인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어함, 그것은 초월하고 싶어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2. 투르니에: 고아, 헐벗은 어린이
신과 마찬가지로 아이 또한 내가 한정할 수 없는 나의 세계 저편의 무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무한자는 나의 아이에게서 찾아질 뿐 아니라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와 고아˝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난다. 트루니에에게 무한하게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실체의 부활에 집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나의 자식이 아닌 다른 아이의 미래 속에서 나는 나의 영원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헐벗음‘이라는 비표상성, 무한자의 모습, 신의 모습을 고아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고아란 모든 사람의 자식‘이라는 사상이 형이상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고아는 무한한 미래로의 유한한 나의 존재의 모험, 바로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 모험의 길을 열어주는 까닭이다.
3. 쿤데라: 죽은 아이
쿤데라에게서 아이의 출현은 세계로부터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세계 내 존재일 수 있게끔‘ 해준다. 그러나 세계 내 존재로서만 머물고서는 어떤 초월도 바랄 수 없다. 세계 저편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 보이지 않는 무한한 시간에 대한 욕망은 세계 안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체는 존재의 내재적 삶을 구성하는 데 필연적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계와 단절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다. 쿤데라는 아이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아이의 죽음이 비로소 세계와의 단절을 가능케 하고 공동체의 참여를 그만두게 한다. 공동체 속의 익명의 다수로부터 나의 환원 불능의 개별성을 되찾는 것, 그것은 바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쿤데라에게 있어서 아이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세계로부터의 초월이란 무엇인가?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세계 내 존재의 일반 경계에 몰입해 있던 그녀에게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태도를 가능하게 해준다.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은 세계 내 존재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모든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쿤데라가 희망하는 초월인가? 쿤데라에게서도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충분한 초월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쿤데라에게서도 초월의 욕망은 죽음이 아니라 역시 타자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하루하루 죽어가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고개를 들어, 그 손님이 가져다 줄 무한한 시간, 가없는 시간을 향한 모험의 길로 들어선다
제9장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경우
1. 백수들, 야곱의 시간과 에사오의 시간
일요일의 ‘존재론적 의미‘ 에 대해 묻고자 한다.
일요일은 세계 안의 가치와 질서를 쫓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일요일을 ‘살‘ 뿐이다. 요컨대 세계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백수들만이 요일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할 수 있다.
2. 레비나스: 수고, 봉급, 여가 --- 경제적 시간으로서 일요일
시간의 관점에서 표현해보면 경제적 삶 속에는 수고와 여가를 반복하는 순간의 따분한 나열 외엔 다른 어떤 시간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 주체에게는 시간이, 더 정확한 의미에서는 미래가 찾아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주체와 다른것, 수고와 봉급의 질서 속에 결코 편입될 수 없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만이, 우열이 없는 서로 교환 가능한 순간들의 나열을 깨뜨리고 시간을 불러 올 수 있을것이다. 무엇인가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맞닥뜨릴 수 없다면, 어느 날 죽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망가뜨려놓을 때까지 주체는 수고와 일요일이라는 따분한 순간들 사이를 천편일률적으로 점멸해야 할 것이다.
3. 사르트르: 사교, 식사, 놀이 --- 부빌의 일요일
주체가 그의 이기적 구조 속에서 향유하는, 교양으로 넘치는 사교와 푸짐한 식사와 즐거운 놀이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기성은 주체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지만, 이 때 주체는 진정한 미래를 알지 못하는 홀로 있는 자일 뿐이다.
4. 구원의 시간, 타자의 시간 --- 존재론적 모험과 모험의 느낌
미래는 오로지 ‘타자가 누릴 삶으로서만‘ 나에게 찾아온다. 미래는 아무런 규정도 되어 있지 않은 무한히 열린 미래, 내가 나의 수고를 거기에 던지지만, 아무런 대답(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전적으로 나의 힘을 벗어나 있는 시간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다.˝ 타인이 살아갈 삶, 즉 나의 ‘존재 경제‘ 에 대해 외적인 것을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될 ‘나의 미래로 삼는 것은, 나의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이며, 나를 나되게 하는 것, 즉 나의 ‘본질 저편‘ 가는 길, 곧 ‘나‘가 비로소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존재론적 모험˝, 세계 너머로의 초월을 의미한다.
제10장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 ---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예술 철학
1. 주체성이 부재하는 카오스
예술은 모든 객관적인 규정, 즉 시공간적 규정에 따라 구성된 대상 세계의 분절, 분류 등에서 주체를 해방시키고, 인간이 부재하는 카오스, 익명적 ‘있음‘을 체험하게 해준다.
2. 비인격적 익명성의 양태들 --- 사례 분석
1)비연속성: 조화롭게 질서잡히고 체계화된 통일된 유기체적 전체에 대항하여 이질성, 비연속성, 파편적 개별성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2)비인격성: 유기체적 세계를 비연속적인 파편들로 되돌려놓는 이러한 예술의 면모를 밝히는 작업은, 세계를 동물의 신체처럼 조화롭고 합리적인 유기체적 우주로 본 형이상학적 가정에 대한 반박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고기‘로의 인간 형태의 이러한 변형으로 유기체적 형태의 해체라는 인격성의 문제를 공격하고 있다.
3. 예술적 형식의 문제: ‘외관‘과 ‘집‘ --- 예술 작품의 건축적 본성
‘카오스 자체‘와 ‘예술 작품을 통해 현시된 카오스‘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예술의 어떤 요소가 카오스에게 예술적 영속성을 부여하는가? 즉 무엇이 무형의 카오스를 부동의 한 순간으로 고착시키는가?
예술 작품은 카오스를 예술적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질료의 짝 개념으로서의 형상을 일컬어 ‘외관‘이라 부른다. ˝사물에다 외관 같은 것을 부여해주는 것은 예술이다. 레비나스가 사용한 건축적 개념인 ‘외관‘ ‘건물‘ 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게, 들뢰즈는 이 요소를 가리켜‘집‘이라 부른다. 들뢰즈에게서 집 개념은 레비나스의 ‘외관‘ 개념과 정확하게 동일한 기능을 하는데, 그 기능이란 바로 카오스, 익명적 ‘있음‘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틀을 부여하는 것이다.
4. 혁명과 우상 숭배 --- 레비나스와 들릐즈는 어떻게 다른가?
들뢰즈의 예술 작품은 미지의 ‘비전‘을 도입함으로써 지배 계급의 가치에 따라 질서지어진 세계를 ‘재편성‘ 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혁명적 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문명의 최고 가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주체를 모든 책임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즐거움의 원천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심지어 주체는 예술 속에서 타자뿐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예술은 주체를 비인격적 익명적 ‘있음‘의 상태, 즉 책임질 수 있는 인격이 없는 상태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예술의 가치라는 문제에 있어서 들뢰즈의 내재성 철학과 레비나스의 초월의 철학은 화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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