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를 읽는다 철학의 정원 18
스티븐 내들러 지음, 이혁주 옮김 / 그린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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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를 읽는다

에티카는 ‘신에 대한 고찰 - 종교적인 신이 아닐 것이라 생각 해본다 - 과 이성에 바탕을 둔 윤리적인 정서‘ 단순히, 이렇게 읽힌다. 그런데 에티카에는 깊은 철학이 있다고 한다. ‘뭐?‘하는 의문만 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마치 안 풀리는 수학 문제에 고민하다가 참고서를 펼쳐보고 그 풀이를 보면서 꽉 막힌 답답함을 벗어나는 느낌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실존과 본성,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관계, 자유와 결정론, 진리, 목적론, 자연법, 정념, 덕과 행복, 정치적 의무의 기초, 선/좋음과 악/나쁨의 지위, 인격적 동일성, 영원성, 불멸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현대 서양철학으로 옮겨오면, 구조적ᆞ언어적인 분석이 앞서다 보니 제자 백가 등 동양사상에서 접하는 역사적인 사례들을 근거한 인생의 문제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물론 무엇을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도 깨우침은 갖게 된다.
나는 스무살이 막 넘어서면서 고전 문학과 동양 사상에 빠졌고 그 당시에 느꼈던 정서를 그리워 했나 보다.
그 즈음에 [에티카]를 읽었다.

1장 스피노자의 생애와 저작
렌즈 연마로 얻은 수익과 친구의 도움으로 검소한 삶을 산다.
명예와 부를 추구하기 보다 인식과 참된 행복에 대한 철학에 의미를 둔다.
네덜란드의 정치적 종교적 분쟁 속에서 ‘신학정치론‘, ‘에티카‘ 등 책을 집필한다.
2장 기하학적 방법
스피노자는 철학적 탐구의 ˝참된 방법˝은 ˝실재의 객관적 본질˝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 ˝도움이 되는 확실한 규칙˝에 따라˝진리 자체가 적절한 질서로 추구되어야 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기하학적 질서와 철학적 관념이 갖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에게 철학적 방법의 목표가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안에 있는 사물의 질서와 연관을 반영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고 과정에서 진리를 적절히 배열해야 하고, 특별히 어떤 진리가 다른 진리에 논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각 부를 일단의 정의와 공리, 정리로 시작한다. 정의는 스피노자 존재론, 즉 있는 것(예를 들어 신, 실체, 속성, 양태같은)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의 기본 요소를 제시한다. 공리는 실재에 대한 일반적 원리이며 이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진술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공통 진리를 표현한다. 정리는 증명이 수반되는 철학적 결론들이다.
3장 신에 관하여: 실체
스피노자의 목표는 신에 관한 인식에서 신은 유일하고, 무한하며, 필연적으로 실존하는(즉 자기 원인인)우주의 실체임을 규명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는 단 하나의 실체만 있다. 그것은 신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실체 관념은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는 무엇보다 스스로 존속하는 개별 실재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 오직 신만이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실체에 요구되는 절대적인 존재론적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그의 실존을 위해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속성과 양태를 정의한다.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한 것을 속성이라고 파악한다. 속성은 실재의 가장 일반적이고 기저에 놓여 있는 본성이다. 양태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실체의 양태 또는 변용은 어떤 실재의 특성 같은 것이다.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둘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은 있을 수 없다.
실체의 양태나 특성은 단지 속성이나 본성이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태를 제쳐둘 때 남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 속성, 수적이거나 질적 다양성이 결여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다. 따라서 최초의 가정과는 반대로,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 단지 그것의 양태에서만 다른 두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양태를 무시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두 실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영원하며 무한하다.
스피노자는 존재론적 독립성을 실체의 특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실체의 실존에 대한 원인은 실체 그 자체의 본성이어야 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기 때문에 실체의 실존은 ‘영원한 진리‘, 곧 모든 시간이나 지속 바깥에 있는 진리로 ‘인식‘된다. 스피노자는 이 무한한 실체를 자연 그 자체와, 그리고 신과 동일시할 것이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있을 수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첫째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고 결론 내린다.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의 본성 내부든 외부든 신의 실존을 방해하는 원인이나 이유는 없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신과 실재들
피에르 벨은 신의 양태인 실재들은 분할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운동하기에 신 그 자신이 변화하고 분할하고 운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신학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상이한 대목에서 양립 가능하고 신의 모든 속성은 불변한다고 정리에서 말하며 오히려 스피노자의 주장은 각 속성의 실존 및 본성의 영속성에 관한 주장이다.
신 또는 자연
스피노자가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첫째 신은 자연 전체, 즉 그것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자연 전체와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신과 특수한 실재들 간의 관계를 좀더 외적인 것으로 보는, 신/실체는 단지 속성, 즉 보편적 본성 및 만물을 지배하는 인과적 원리와 동일시된다. 즉 스피노자에게 신은 문자 그대로 자연이다.
4장 신에 관하여: 필연성과 결정론
인과적 필연성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적 필연성에 의해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는,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라면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무한 양태
신과 그 속성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과 그것들로부터 단지 매개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의 차이는 스피노자 우주의 구조, 특히 무한한 실재의 지위 그리고 그것들을 지배하는 역동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필연적이고 무한한 실재들은, 속성 그 자체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 것이든 아니면 어떤 것에 의해 변양된 것이 한에 있어서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온 것이든, ‘무한 양태‘라고 알려져 있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 따라 나오는 무한 양태는 ‘직접적 무한 양태‘이다. 어떤 양태에 의해(즉 직접적 무한 양태에 의해) 이미 변양된 것인 한에서의 어떤 속성으로부터만 따라 나오는 무한 양태는 ‘매개적 무한 양태‘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든 다른 곳에서든 무한 양태에 대해 그다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 속성 아래 있는 직접적 무한 양태와 매개적 무한 양태의 내용이 무엇인지 표상하기는매우 어렵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지성은 실재들의 영원한 본질들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유로 구성된 관념들의 집합이다. 또한 실재의 본질에 대한 각각의 영원한 관념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본질이다. 연장 속성 아래에 있는 직접적 무한 양태는 자신이 ‘운동과 정지‘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스피노자는말한다. 또한 연장의 직접적 무한 양태가 운동 그 자체라고 말한다. 반면 데카르트는 아주 명확하게, 연장은 그것만으로 운동 가능하지만(즉 운동하는 상태가 될수 있지만) 현행적 운동이 단지 연장의 본성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운동을 물질에 주입하는 연장 바깥의 어떤 원인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게 이 초월적 원인은 신이거나 어떤 유한한 정신이다.
더 큰 불확실성이 있는 매개적 무한 양태는 운동과 정지(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든 물리적 실재의 본질을 포함하는 직접적 무한 양태)와 함께 고려된 연장(속성)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이 풍부한 다양성을 가진 물리적 자연 전체라는 것이다.
유한 양태
유한 양태는 특수한 실재들의 개별적인 영원한 본질(그것은 상이한 해석을 토대로 볼 때, 직접적 무한 양태에서 발견되는 것이다)과, 그러한 본질을 시간 속에서 예화하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특수한 실재들(이는 매개적 무한 양태에서 발견된다)을 포함한다.
스피노자는 아마도 연장 속성으로부터 운동(직접적 무한 양태, 그것은 연장을 통해 능산적 자연의 역량을 표현한다)과 함께 다수의 유한한 물체(본질)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정론과 필연론
‘규정된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의 의미는 이제 분명하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결정론자이다.
스피노자는 인과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실재의 본질과 법칙은 절대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자연의 필연적 결과일 뿐만 아니라, 실존하는 것들의 세계 또한 그러하다.
스피노자에게 현실 세계 외에 다른 기능세계들이란 없다. 만약 신은 실존하는데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유한 양태들의 특수한 무한 계열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신의 실존이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면, 이 세계는 유일한 가능세계일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스피노자는 세계 창조와 같은 것을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창조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무로부터 선행하는 무존재의 상태로부터 계획하에 세계를 만들기 전에 신이 실존했다는 의미이자, 신이 또한 세계를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는 의미라면 말이다.
신의 자유
데카르트에게서 신의 자유는 신의 의지나 선택이 절대적으로 비규정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신의 선택에 그를 규정하는 진리나 선함의 기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는 대조적으로 신의 자유가 신이 내린 이성적 결단에서 드러난다고 믿었다. 즉 라이프니츠의 신이 한 선택은 규정된다. 신은 객관적이자 보편적인 이성, 신의 의지에 독립적이고 신으로 하여금 저것이 아닌 이것을 선호하도록 이끄는 이성에 근거하여 행위한다. 신의 자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이 신의 전능함에 우선권을 준다면, 라이프니츠의 설명은 신의 합리성, 지혜, 그리고 은총에 우선권을 준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처럼 신이 자의적으로든 아니든 어떤 선택을 한다거나 그가 이미 한 것과 다르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오직 신만이 자유로운 원인이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행위한다 라고 말한다.
기적
자연에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을 위반하는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범신론자인가, 무신론자인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은 초월적 존재로, 그가 창조한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신은 앞서 본 것처럼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계 바깥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다. 신은 곧 자연이다.
신은 실재가 얼마나 잘 자신의 목적을 따르는가 하는 기준으로 실재들을 판단하는 어떤 목적 지향적 계획자가 아니다. 실재들은 단지 자연과 그 법칙 때문에만 발생한다. ‘자연은 그것 앞에 설정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ᆢ만물은 자연의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진행된다.‘ 이와 다르게 믿는 것은 기성 종교의 핵심에 놓여 있는 바로 그 미신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위한 열쇠는 철학과 과학이지 종교적 경외감이나 경건한 순종이 아니다. 후자는 단지 미신적 행동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종속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전자는 깨달음, 자유, 참된 지복(즉 마음의 평안)으로 이끈다.
저자는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보았고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자연을 신적인 것으로 높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전통적 신 개념이 일으키는 정념과 미신적 믿음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고, 신적인 것을 자연으로 격하시켰다. 즉 신을 자연화했다.
5장 인간
평행론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의 질서 및 연관과 동일한 것이다. 좀더 상술하자면, 연장된 물체들에 대한 관념인 사유에 속하는 양태들의 질서 및 연관은, 연장된 물체들인 연장에 속하는 양태들의 질서 및 연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물체a가 인과적으로 물체b에 관련되어 있고 물체b는 인과적으로 물체c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처럼, 물체a에 대한 관념은 인과적으로 그리고(우리는 지금 관념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물체b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고 물체b에 대한 관념은 인과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물체c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신 또는 자연 안에서, 실재들의 인과 질서는 관념들의 인과적/논리적 질서와 동일한 것이다.
무한한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그 속성들 각각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 속성은 실재의 객관적 본질이나 범주를 나타내는 것이지, 실재를 그저 현상학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보는 방식이 아니다. 어떤 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간에는 인과 계열이 있지만, 한 속성과 다른 속성 사이에는 그리고 한 속성의 양태와 다른 속성의 양태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적 활동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정신과 신체
데카르트는 인간 정신과 인간 신체 각각을 의당 하나의 실체라고 믿었다. 또한 이 두 실체는 실체성을 갖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공통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데카르트를 실체 이원론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정신과 실체의 결합에 의해 구성된 일종의 복합 실체 그 자체이다.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특수한 신체의 관념 이라고 정의한다. 즉 정신은(알려지지 않은 속성의 양태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의 양태들이 아니라) 연장의 유한 양태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의 유한 양태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정신이 관념이나 사유-상관물이 되는 연장의 특수한 양태가 바로 인간 신체이다.
신 또는 자연 안에 있는 인간 정신인 생각이나 관념에는 물론 특별한 것이 있다. 연장된 물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모든 관념이나 ‘정신‘과는 달리, 인간 신체를 대상으로 하며 인간 정신인 관념은 실제로 실질적 사유와 의식을 갖는다. 인간 정신을 다른 모든 정신 내지 관념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인간 정신이 더 크고 복잡한 기능과 능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정신이라는 관념의 대상은 인간 신체이다. 그래서 정신의 복잡성과 탁월함은 인간 신체의 복잡성과 탁월함과 상관적이다.
무한하게 많은 관념들의 모음인 사유의 무한 양태가 신의 무한 지성이듯, 인간 정신은 관념들의 모음으로, 즉 그 대상이 인간 신체의 상이한 부분들인 관념들 전체로 이루어져 있다. 신체에 대한 관념인 인간 정신이 신의 무한 지성을 합성하는 무한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집합의 일원인 것처럼, 인간 정신도 바로 관념들의 집합이다.
우리들 자신은 사유와 연장의 양태이다. 우리 신체는 연장 속성의 양태이고, 우리 정신은 연장된 우리 신체에 대한(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이다.
일원론
인간 정신과 인간 신체는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두 개의 실재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상이한 두 표현 --- 분명 공약 불가능하고 독립적인 표현 ---이다. ˝정신과 신체는 하나이자 동일한 개체인데, 그것은 어떤 때에는 사유 속성 아래에서 어떤 때에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
이원론과 그것의 불만족스러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설명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게 최선일 수 있겠다. 이는 범주적 이원론 내지 속성적 이원론을 전제하는 것으로 자연을 실제로 두 개의 구별되고 환원 불가능한 존재 방식으로 나누지만, 나누어진 존재의 한 쪽 기능에 의해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다른 쪽 기능을 배재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인간 신체의 관념(정신)이 가진 탁월성이 인간 신체의 탁월성에 의한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 만약 그렇다면 이는 확실히 그 법칙[1부 공리5]의 정신뿐 아니라 그 조문 또한 범하는 일일 것이다 --- 오히려 오직 그 관념의 내용이 가진 탁월성과 상관적으로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답했을지도 모른다. 정신은 인간 신체의 관념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신과 인간 신체는 둘 다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를 단지 다른 속성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관념의 내용, 곧 그 관념 자체에 내생적인 어떤 것은 신체의 탁월성과 같은 탁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체의 탁월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관념의 탁월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관념 그 자체의 탁월성은 스스로 갖춘 것으로, 분명 신체의 탁월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6장 인식과 의지
무한 지성은 무한한 관념들 --- 그 각각이 이런저런 속성들의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며 그 전부는 모든 속성의 모든 대상에 대한 것인 --- 로 구성되므로 ˝자연 전체를 포착한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 정신은 무한 지성을 구성하는 관념들의 부분집합, 즉 인간 신체를 그 직접적 대상으로 하는 관념들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정신은 사유 속성 아래에 있는 실체의 양태들로서 하나이자 동일한 사유 역량의 표현들이다.
관념
관념과 그 관념이 대상으로 하는 신체 상태는 궁극적으르 동일하다. 그것들은 두 개의 다른 속성을 통해 표현하는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이다.
관념은 정신이 포착한 심상 같은 것(대상)인가 아니면 포착함이라는 심적 활동인가? 관념은 (표상적 관념을 통해 간접적이고 매개적으로만 지각되는 외부 대상을 가진) 직접적이고 비매개적으로 지각된 실재(대상)인가 아니면 실재에 대한 지각(활동)인가?
참인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실재를 완벽하게, 즉 가장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일 따름이다.
스피노자가 이러한 입장을 갖게 된 이유 중에는 모든 관념이 본질적으로 심적 활동을 수반한다는 그의 견해가 들어 있다. ‘관념‘을 처음 정의할 때, 그는 관념을 ˝정신이 사고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이라고 파악한다˝라고 말한다(2부 정의3). 그 정의에 대한 해명에서, 그는 ˝나는 지각이라기보다는 개념이라고 말하는데, 지각이라는 말은 정신이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작용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은 정신의 활동/능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진리와 적합성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인간의 인식과 이해 수준에 달려 있다. 특히 그것은 인간 정신이 참이자 적합한 관념을 얼마나 늘려 나가는지, 그래서 실재들에 대한 신(자연)의 무한하고 영원한 적합한 관념들의 모음인 무한 지성과 보다 유사한 지성으로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지에 좌우된다.
인간 정신이 가진 모든 관념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관념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특징이 스피노자가 ‘부적합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참인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또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관념이 실제로 참이고 정신 바깥의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과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이성 능력의 본유적이고 체계적인 확실성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조적으로 스피노자는 참인 관념이 일으키는 확신을 유효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보증에 호소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가 밝힌 모든 견해는 진리의 투명성, 곧 우리가 참인 관념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참인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는 것에 관한 주장이다.
부적합한 관념은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따라서 부적합함은 무지 혹은 ˝인식의 결핍˝ 문제이다.
신 관념의 필연적 적합성은 무한 지성이 모든 관념을 포함한다는 사실과 상관적이다. 따라서 무한 지성 안에 있는 어떤 관념이든 필연적으로 무한 지성 안에 있는 다른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와야 한다. 이 경우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은 정신 그 자체에서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 실재에 대한 관념과 신체에 대한 관념(정신)이 결합함으로써 초래된다.
모두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적 지식은 지성이 아닌 경험을 통한 것이고, 그 결과 외부 물체, 우리 자신의 신체,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의 정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대부분 부적합하다.
인간 신체가 아주 본질적으로 다른 물체들 자체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부적합하게만 그러한 다른 물체들을 알 수 있을 뿐이라면, 인간 신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적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인간 정신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적합하지 않다. 인간 정신이 인간 신체와 결합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러한 인간 정신에 대한 관념은 인간 정신과 결합된다.
인간 신체는 아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 많은 인식을 가진 정신과 관련된 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식의 방식
우리가 감각과 상상을 통해획득하는 관념들은 관념들이 무한 지성 안에 있을 때처럼 실재에 대한 신 또는 자연의 절대적 인식에 따라 연결되는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대상에 의해 우연히 변용되는 무작위적이고 상대적인 방식에 따라 연결된다. 우리가 외부 물체, 우리 자신의 신체, 우리 정신에 대해 갖는 관념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지속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질서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의 공통 질서로부터˝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연의 공통 질서로부터 실재를 지각하는 한,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 그리고 외부 물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내적으로‘ 규정된 관념들은 사유의 논리적 원리가 있는데, 이 사유의 원리는 연장의 절대적인 물리적ᆞ인과적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관념은 지성에 의해 확립된 연관을 통해 추론적으로 다른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실재를 , 곧 ‘영원한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공통 통념은 모든 인간 정신이 인식하는 요소이며, 단순히 정신이 지금 존재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즉 신체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에 적합하게 인식하는 요소이다.
인간 신체 및 인간 정신이 적합하게 인식할 외부 물체의 어떤 일반적 특징이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특징에 대한 관념은 ˝신이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 또는 신이 인간 정신 안에 있는 관념을 갖는 한에서, 신 안에서 필연적으로 적합할 것이다. 또한 사유 속성 아래 있는 공통 통념도 있는데, 정신이 단지 사유의 양태이기 때문에 사유 그 자체의 본성과 그것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포함하여 모든 정신에 공통적인 특징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 방법을 위계적으로 정리한 세 가지 분류, 곧 감각기관을 통한 부적합한 관념의 습득과, 공통 통념과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이성을 통한 적합한 관념의 발견,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한 실재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 포착 간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분류를 제시한다.
자유와 의지
스피노자는 ‘참된 자유‘의 특징이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 일체의 원인 없이 스스로 발생하는 것처럼 --- 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2부 정리 48 정신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없으며, 정신은 어떤 원인에 의해 이것이나 저것을 의지하도록 규정된다. 그리고 그 원인 또한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며, 이것은 다시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고, 그런 식으로 무한하게 나아간다.
7장 정념
스피노자가 정념에 대해 말한 많은 부분은 우리가 실재들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어떤 명백하고 직관적인 진리를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심리학
데카르트는 의지가 자연법칙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 의지작용에 있어서는 인과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정신은 감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스피노자가 인간 정신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자연의 일부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자연의 모든 것이 생기는 법칙적 결정론에 종속된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우리가 느끼는 것들은 모두 우리 신체 및 우리를 둘러싼 물체들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원인을갖는 자연적 사건이다.
실로 이 모든 것들은 정신의 결단과 욕구 및 신체의 규정이 본성상 함께 실존한다는 것을,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자가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이며, 사유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고 설명될 때는 결단이라 불리고, 연장 속성 아래 고려되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될 때는 규정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 결과가 결정론적 심리학 --- 기하학적 방법에 의한 심리학 --- 이다.
능동과 수동
정신은 그 자신의 본성과 법칙을 따를 때, 정신의 상태가 그 자신의 인식 자원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능동적이다. 반면 정신의 상태가 정신 안의 적합한 관념이 아니라 현재 인간 신체에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어떤 외적 실재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과 함께 인간 신체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그 정신의 상태는 정신 자신의 자원으로부터 따라니오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수동이다.
‘코나투스‘
모든 유한 양태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으로 하나이자 동일한 신/자연/실체의 무한한 역량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신의 경우에는 사유 속성을 통해, 물체의 경우에는 연장 속성을 통해 자신을 현시한다. 따라서 모든 특수한 정신은 사유함을 통해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을 유한하게 표현하는 실재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특수한 물체는 질료와 운동으로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역량을 유한하게 표현하는 실재이다. 각각의 실재 자체라고 간주되는 이러한 역량의 유한한 양이 바로 스피노자가 코나투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각 실재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 안에 존속하고자 노력한다.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합성체로 고려할 때, 인간의 코나투스는 욕구에 근거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의 노력을 동시에 의식할 때, 그가 어떤 욕구를 자각하고 있을 때, 그것은 욕망이 된다. 정신과 정신-신체의 합성물 두 경우 모두에서, 코나투스는 인간의 모든 추구 근저에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다.
정서
모든 개체의 본질인 역량 내지 노력은 한사람의 생애를 통해 항상 ‘계속되고‘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바뀌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된다. 개체가 가진 행위 역량의 그러한 모든 변화가 바로 스피노자가 ‘정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서(예컨대 감정)는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함 그 자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정서를 경험하거나 겪는다. 스피노자는 이를 ‘이행‘이라 한다.
정신이나 신체가 ˝행위 역량에 있어 ‘증대‘[또는 축소]˝를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스피노자가 가리키는 것은 단지 자기를 보존하고 외부 힘들에 저항하는 정신이나 신체의 코나투스 내지 능력의 강도를 포함하는, 정신이나 신체 상태의 쇠퇴나 증진일 따름이다.
코나투스 학설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개체의 의지는 자신의 능력을 통해 오직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자신의 역량을 증진시키리라고 믿는 것만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성적 존재가 적합한 인식에 의해 추동되는 한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일 때, 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의해 지배되며, 따라서 그의 상태는 개선된다.
정념
스피노자는 대부분 정념에, 그리고 인간의 상태 --- 주로 정신적인 상태. 하지만 또한 상관적으로 물리적이기도 한 상태 --- 가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와의 인과적 상호작용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에 관심을 쏟는다.
스피노자는 세 개의 주요 정서가 있으며, 그 주요 정서는 기쁨, 슬픔, 그리고 욕망이다.
정념은 한 개인을 변용시키는 독특한 실재들에 대한 그의 반응을 나타낼 뿐만아니라, 타인과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정념의 차이에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들 신체 구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물론 이 차이는 각 정신의 차이, 곧 그 양태가 그 신체의 변용을 반영하는 그러한 정신의 차이와 평행할 것이다.
이기주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행위자이다.
스피노자는 정념 이론과 정념의 동기 부여적 역할에 대한 이론으로, 이성적 행위자의 가치판단과 욕망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법한 것을 뒤집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거나 욕망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에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이 우리를 적절한 방식으로 변용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이유로 가치판단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이게 된다. 가치판단은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의 변양으로부터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능동
정신의 능동성이 스피노자 도덕철학의 모퉁잇돌이자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열쇠라는 것은 명확하다.
어떤 것은 그 상태가 그것의 본유적 역량이 외부 실재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본유적 역량이나 코나투스, 곧 존재를 존속하기 위한 그것의 내생적 노력으로부터 따라 나올 경우 능동이다.
욕망이 적합한 관념에 의해 인도될 때, 그 결과가 갖게 된 욕망과 판단은 진정으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을 향해 있다.
[에티카]의 궁극적 목표는, 실재가 우리를 변용시키는 방식에 따라 --- 즉 정념에 따라 --- 실재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에 기초해서 실재를 판단하는 것으로 우리를 돌려 세우는 것이다.
8장 덕과 ‘자유로운 인간‘
정념을 통제하기 위한 싸움은 삶에서 더 큰 합리성과 자율성을 달성하고 운명의 부침으로부터 더 큰 독립성을 달성하기 위한 시도이다.
선/좋음과 악/나쁨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냥 존재할 뿐이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어느 정도는 완전하다.
‘선/좋음‘과 ‘악/나쁨(그리고 ‘완전‘과 ‘불완전‘)이 객관적이고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세계의 특징이 아니라면, 규범적 의미에서 그러한 말들은 단지 실재가 어떤 약정적 준거나 모범에 상응하는지 그 정도를 가늠하는 평가 척도와 관련될 뿐이다.
우리가 신, 즉 자연이라고 부르는 그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는 필연성에 따라 실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성에 따라 행위한다.
우리는 실재가 의당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완전과 불완전이 --- 단지 사유의 양태일 뿐이라는, 즉 우리가 같은 종이나 유에 속하는 개체를 서로 비교하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데 익숙한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따라서 자연의 실재에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명칭을 붙이는 우리의 통상적 접근 방식은 ˝그러한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보다는 편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스피노자는 명확한 이상, 곧 인간에게 정말로 ‘선한/좋은 것‘인지 실재들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선‘은 더 이상 단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성의 보다 완전한 표본인 것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데 유용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성의 보다 왼전한 표본이 근거하는 것은 곧 보게 될 것처럼 존속함의 최대 역량, 최대한의 능동성을 가진 사람이다.
˝선과 악에 대한 참된 인식˝은 보다 완전하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나를 온전한 개체로서 진정으로 보다 강한 상태에 있게 하는, 나에게 유익한 것에 대한 이성적 파악 --- 그저 무질서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단지 어떤 것이 내 신체를 변용하는 실정적 방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해에 근거한 --- 이다.
정서 대 정서
실존은 끊임없는 투쟁이다. 자연 안에 더 힘 있고 강한 다른 것이 없는 독특한 실재는 없다. 어떤 것이든 하나가 주어지면 그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더 힘 있고 강한 다른 것이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그 자신이 적합한 원인인 변화만 겪을 수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 내린다.

스피노자는 정념에 사로잡힌 삶의 애처로운 상 너머로 이동하며, 모범적인 인간의 삶, 즉 인간 본성의 완전함과 그 존속 역량의 최대화를 나타내는 모범에 대한 소묘를 시작한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며 인식과 지성에 기초한 삶으로, 이러한 삶에서 개인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만을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완전함을 추구하도록 돕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삶‘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삶‘ 을 동일시한다.
절대적으로 덕에 의해 행위한다는것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이라는 토대로부터 이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고 살고 우리 존재를 보존하는 것일 뿐 우리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 존속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 그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것이 인식 내지 이해 그 자체일 뿐이라는 사실의 귀결이다. 이성적인 사람, 곧 덕 있는 사람은 인식보다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안다. 따라서 인식은 최고선/가장 좋은 것인데, 그것이 우리를 인간의 완전한 상태 --- 그것은 이해 상태 그 자체이다 --- 로 더 가까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 있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지성, 즉 이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 지성을 완성하는 것은 단지 신과 신의 속성, 그리고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신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의 궁극적 목적, 즉 그로 하여금 다른 욕망들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도록 만드는 최고의 욕망은 자기 자신과 그의 지성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적합하게 인식하도록 그를 인도하는 일이다.
‘자유로운 인간‘
덕 있는 사람은 또한 더 큰 자유를 획득한 개인이다. 그렇기에 외부 실재에 대한 자율성과 인과적 독립성의 정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또한 강한 자기만족이 있을 터인데, 이는 자신의 행위 역량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정직하고 적합한 평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다른 것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고, 이성에 따라 살며, 또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해야 하는가? 물론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자기 이익에 속하고, 그래서 본성은 나에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라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윤리학
덕 있는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좋은 이성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존속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돕는 방식으로 행위한다.
덕을 사랑하고 인식을 욕망하는 다른 이들을 보는 일은 나로 하여금 더욱더 덕과 인식을 사랑하고 욕망하도록 만들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덕을 사랑하고 인식을 욕망하게 만드는 일은 나에게 그리고 내 이익과 관련해서 유익할 것이다.
결론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수준의 이성적 완성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와 국가
인간 본성은 [참된 이성에 의해 규정된 것만을 욕망하도록] 구성되지 않았다.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결코 건전한 이성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가는 화합과 상호 조력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오직 자기 이익의 원인이 되어, 그리고 특히 자연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우세한 정서인 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 움직이는 개인들을 무제약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다른 이들과 협약을 맺는다.
9장 영원성과 지복
정념 완화
보다 이성적인 존재, 정념에 덜 영향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치료법의 첫번째 단계는 정념에 원인에 관한 믿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정념의 힘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강한 정념에 대한 치료법은 그러한 정서를 적합하게 인식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본성과 상반된 정서들에 의해 갈등을 겪지 않는 한, 우리는 지성의 질서에 따라 신체의 변용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연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신체의 변용에 올바른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연관시킬 수 있는 이러한 능력에 의해, 우리는 우리를 나쁜 정서에 쉽게 변용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
신에 대한 사랑
스피노자는 덕의 보상이 덕 그 자체라고, 즉 덕은 ‘지복 자체‘이며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덕과 인식은 정념의 혼란을 완화시켜 줄 뿐만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적 선인 것이다. 정신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덕은 3종의 인식에 따라 실재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성 안에 있는 관념이 적절한 질서를 갖게 될 때, 신 관념은 다른 모든 관념의 궁극적
토대, 즉 우리의 인식 그 자체의 원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으로 이끄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은 신에 대한 사랑을 일으킨다.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 정념은 현재 덧없는 것들을 향한 아주 많은 감정이 그런 것처럼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의 영원성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평행론이 ‘신체와 무관한 정신의 지속‘을 원리상 배제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신체가 사라지면, 정신도 사라진다. 아니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둘째로, 그리고 보다 일반적인 문제로, 영혼 불멸성처럼 신의 보상과 형벌이 있다고 암시하는 종교적 혐의를 지닌 학설은, 신을 도덕적이고 섭리를 가진 존재로 신인동형화하는 위험에 대해 스피노자가 말했던 모든 것에 위배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에티카]의 마지막 스무 개 정리에서 ‘정신의 영원성‘에 대해 말할 때, 스피노자는 도대체 무엇에 대해 논의하는 것인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모든 인간 신체는, 시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변용시키고 규정하는 다른 유한 실재들의 인과적 결합 내에서, 지속하는 방식으로 존속한다. 모든 인간 신체 --- 사실 어떤 유형이든 모든 실존하는 물체 --- 에는 또한 ‘영원의 관점 아래‘에 있는 어떤 측면이 있다. 연장 영역 내에는 그 연장적 존재 안에 있는 그 물체/신체의 본질, 곧 그것의 시간적 지속으로부터 추상된 연장적 본성이 있다.
신체의 지속을 갖는 실존이 끝나자마자, 신체의 본질이 그저 연장에 속하는 가능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물질적 실재라면, 정신의 영원한 부분도 단지 그러한 실존하지 않는 물질적 실재에 대한 관념일 뿐이다. 연장에 속하는 정신의 상관물처럼, 정신의 이러한 측면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인간 사후에 남아 있는 정신의 일부이다.
우리가 지성에 따라 우리 관념을 재정리하고 실재를 ‘영원의 관점에서‘ 지각할 때, 우리가 포착한 것은 영속적으로 남는다. 그러한 종류의 인식은 무시간적이고 근본적으로 신의 인식(이는 무한 지성안에 있는 관념에 해당 된다)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그러나 ˝정신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라고 했다.
지복
최고의 인식 획득인 덕은 바로 역량, 능동성, 자유, 인간의 완전성이다.
지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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