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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철학 ㅣ 들뢰즈의 창 2
질 들뢰즈 지음, 박기순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스피노자의 철학
전체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글이라면, [윤리학]의 주요 개념 색인은 개념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의했다기 보다 복잡하게 나누어진 그의 철학의 본질을 파헤쳐서 전반적으로 모듈화시킨 정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제1장 스피노자의 삶
스피노자가 살았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스피노자가 그의 책 [신학 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인민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기쁨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의 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
스피노자가 발견하는 세계는 야만의 극치이다. 삶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방식, 모든 부정적인 것은 그가 보기에는 두 원천을 갖고 있디. 하나는 외부로 하나는 내부로 향해 있는데, 원한과 양심의 가책, 증오와 죄의식이 그것들이다. <증오와 양심의 가책은 인류의 근본적인 두 적들이다.> 스피노자는, 이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그것들은 오직 새로운 의식과 함께,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삶의 욕구 속에서만 고갈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스피노자에게 삶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고 모든 속성들 속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영원한 양태이다.
제2장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
1 의식에 대한 평가절하(사유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이론적 논제중 하나인 평행론의 요체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실질적인 인과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평행론의 실천적 의미는, 의식에 의한 정념들의 지배 기획으로서의 도덕이 기초하고 있는 전통적인 원리의 전복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장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 신체와 정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것이여야 말로 놀라운 것이다. 살아 있는 부분들의 전체는 복잡한 법칙들에 따라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질서는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들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는 조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식을 갖는 조건들 때문에 우리는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즉 자신들의 고유한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인과 본성에 대해서 무지하여 사건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법칙들의 결과들을 겪어야 하는 그들은, 모든 것의 노예이며, 자신들의 불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불안 속에 있는 불행한 자들이다.
의식 자체도 원인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우리가 만나는 대상들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 순간 대상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변용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
2 모든 가치들, 특히 선악에 대한 가치절하(<좋음>과 <나쁨>에 대한 옹호): 비도덕론자 스피노자
자연 전체의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고유한 질서 속에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디.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과 나쁨이 있다.
좋음과 나쁨은 그 첫번째 의미, 즉 객관적이지만 관계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두번째 의미, 즉 인간 존재의 두 유형, 두 양태를 특징짓는 주관적이고 양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윤리학, 즉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은 언제나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을 대체한다. 가치들(선-악)에 대립하여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좋음과 나쁨)가 들어선다. 그러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
3 모든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절하(기쁨에 대한 옹호): 무신론자 스피노자
슬픈 정념은 욕망들의 무한성, 영혼의 동요, 탐욕, 미신 등을 통합시켜 놓은 복합체이다.
슬픈 정념들에 대한 비판은 변용 이론에 그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한 개인, 그것은 무엇보다도 단일한 본질, 즉 일정 정도의 능력이다. 이 본질에 고유한 관계가 상응한다. 이 능력의 정도에 특정 정도의 변용 능력이 상응한다. 인간의 행동학이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 종류의 변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본성에 의한,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능동과 다른 것에 의해 설명되고 외부로부터 유래하는 수동이 그것이다. 따라서 변용 능력은, 능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는 것으로 고려되는 한, 행위 능력으로 나타나고, 수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는 한, 수동 능력으로 나타난다.
우리를 변용시키는 정념은 기쁨에 속하며, 우리의 행위 능력은 증가되고 도움을 받는다.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 오직 기쁨만이 가치가 있으며, 오직 기쁨만이 능동과 능동의 지복에 가까이 있고 또 우리를 가까이 가게 만든다. [윤리학]이 제기하는 3중의 실천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 능동적인 감정들을 가능케하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것인가? 어떻게 자기 자신, 신, 그리고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할 것인가?
윤리적인 기쁨은 사변적 긍정의 상응 개념이다.
제3장 악에 관한 편지들(블레이은베르흐와의 서신)
스피노자는 인간 어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전적인 논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온갖 방식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서로 결합하는 관계들은, 해체될 수 있는, 즉 실행이 중지될 수 있는그러한 관계의 보존과 필연적으로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의)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게) 나쁜 것이 존재한다.
나의 관계와 결합되는 관계를 갖는 대상에서 신체의 행위는 나의 신체의 능력, 즉 나의 신체가 어떤 관계 아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행위는, 그것에 의해 관계가 해체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아니면 그것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관계와 결합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어떤 관념이 적합할 때, 그 관념은 언제나 적어도 두 신체를, 즉 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를, 그것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결합시키는 양상 아래서 파악한다(<공통 관념>). 반대로 나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는 신체에 대한 적합한 관념은, 그 신체가 적합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악,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나쁜 것은 부적합한 관념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슬픈 감정들(증오, 분노 등등)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제로 악은 자연 법칙에 따라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무엇도 아니라고 가정하면, 이 관계들 속에서 표현되는 본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가?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은 관계들의 질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질들의 질서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결코 어떤 상태 혹은 어떤 본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들의 비교 속에 있기 때문이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단지 상태나 변용일 뿐이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한 상태가 다른 상태들과의 어떤 가능한 비교도 없이 실재성 혹은 완전성의 절대적 양을 표현하는 한에서, 어떤 상태일 뿐이다.
본질은, 우리의 단일한 본질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본질의 영원성은, 지속 속에서의 존재 이후에 오는어떤 것이 아니라그것과 정확하게 동시적이며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지속 속에 있는 이 관계 아래서 우리에게 귀속되어 있는 외연적 부분들의 전체이다.
본성의 외연적 부분들에서만 <나쁨>이 존재한다. 나쁨은, 어떤 관계 아래서 우리의 본질에 속하는 외연적 부분들이 다른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외부로부터 결정될 때이다.
우리가 나쁜 것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필연적인 것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온 것일 뿐이다.
우리의 외연적 부분들과 외연적 변용들이, 우리의 관계들 중의 하나를 실행시키는 한, 우리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관계도 그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악과 나쁨을 배제하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내적인, 즉 면역적인 변용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 다른 사물들, 그리고 신을 나부로부터 영원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형식들(제3종의 인식, 직관)이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 이 자기 - 변용에 이르면 이를수록, 존재를 잃으면서, 즉 죽으면서 혹은 심지어는 고통을 겪으면서도보다 적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며, 악은 어떤 무엇도 아니며 나쁜 것은 그 어느 것도, 거의 어느 것도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다 잘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4장 [윤리학]의 주요 색인 개념
절대적인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절대적인 사유
추상
핵심은 추상 개념과 공통 개념 사이의 본성의 차이이다. 공통 개념은 서로 적합한 신체들, 다시 말해 법칙들에 따라 자신들의 각 관계들을 결합하고 이 내적인 적합 혹은 결합에 상응하여 서로를 변용시키는 둘 혹은 여러 신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추상 개념은 우리의 변용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는 대신에 상상할 때 나타난다. 우리가 본질적인 특징으로 내세우는 외적인 기호나 가변적인 감각적 성격만을 간직한다.
허구적 추상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 종차 혹은 유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가변적인 감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강, 종, 속. 존재들의 변용 능력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 각자가 만족해 하는 삶을 실행하고 충족시키는 방식에 의해 구별된다. 두번째는 수이다. 수는 추상 관념의 상관자이다. 수는 그 자체가, 존재 양태들에 적용되는 한, 즉 존재 양태들이 실체로부터 따라나오는 방식과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추상되는 > 한, 추상물이다. 세번째는 초월적인 개념들이다. 존재들 사이의 외적인 차이를 확립하는 요소로서의 특유하거나 유전적인 성격들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존재 혹은 존재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개념들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그것들에 초월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무와의 대비를 통해 그것들을 확립한다(존재-비존재, 통일성-다양성, 진리-허위, 선-악, 질서-무질서, 미-추, 완전성-불완전성 ---)
결론적으로, 사유의 자율적인 능력에 의존해서 귀결되는 참된 관념과 우리의 이해 능력을 인식해서 신의 관념에 이르는 발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들은 추상 개념보다는 공통 개념에 가깝다.
변용, 감정
1)변용들은 양태들 자체이다. 양태들은 실체 혹은 그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2)변용들은 양태에서 발생되는 것, 즉 양태의 변형들, 어떤 양태에 다른 양태들이 미친 결과들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 변용들은 무엇보다도 신체적 이미지들 혹은 흔적들이다.
3)그러나 이 변용 - 이미지 혹은 관념은 변용되는 신체와 정신의 어떤 상태, 즉 이전 상태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완전성을 함축하는 상태를 형성한다. 이 상태, 변용, 이미지 혹은 관념은 지속과 결부될 수 없는데, 이 지속은 그것들을 이전의 상태에 결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음 상태로 향하도록 만드는 지속이다. 이 지속 혹은 완전성의 지속적인 변이는 <감정>이라고 불린다.
변용은 변용되는 신체의 한 상태에 관련이 있고, 따라서 변용시키는 신체의 현존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 감정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그에 상응하는 변용시키는 신체의 변이에 대한 고려에 연관이 있다.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증가는 기쁨의 감정이라고 불린다.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감소는 슬픔의 감정이다. 이와 같은 행위 능력은, 외적 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용 능력은 동일하게 유지한 채 상이하게 변한다.
우리의 감정이 다른 존재 양태들과의 외적인 만남으로부터 유래하는 한, 그것은 변용하는 신체의 본성에 의해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부적합할 수밖에 없는 이 신체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혼동된 이미지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러한 감정들이 정념이다.
감정은 언제나 변용에대한 관념인 어떤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 관념이 혼동된 이미지가 아니라 적합한 관념이라면, 그것이 변용시키는 신체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우리의 상태에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관념이 내적인 변용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본질, 다른 본질들, 신의 본질의 적합성을 표시하는 자기 -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면, 그렇다면 그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감정들은 그 자체로 능동이 된다. 이 능동적인 기쁨들에 우리는 지복이라고 이름을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속성
지성이 실체에 대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 속성들은 지성의 인식 방식들이 아니다.
표현된 본질은 무제한적이고 무한한 질이다. 표현적 속성은 본질을 실체에 관계시키며,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 내재적 관계이다.
내재성은 무엇보다도 속성들의 일의성을 의미한다.
좋은 - 나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 양태들 사이의 만남들(<자연의 공통적 질서>,외적인 결정들 혹은 우연한 만남들)을 표현한다.
좋음과 나쁨을 선과 악으로 전환시킨다면, 그것은 선을 존재 이유와 행위 이유로 삼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린 모든 목적론적 환상들에 빠지게 되고, 신적인 생산의 필연성과 충만한 신의 능력에 참가하는 우리의 방식을 왜곡하게 된다. 그것들은 이성의 존재들 혹은 상상의 존재들로서, 사회적 기호들, 즉 보상과 처벌의 억압적 체제에 완전히 의존해 있는 것들이다.
원인
나는 자기 원인을,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달리 말해서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밖에는 생각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정의).
즉 원인은 작용적 인과성이든, 본래적이고 전체적인 인과성의 원형이든, 신이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속성들 속에서 생산한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자기 원인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나온다.
인식(인식의 종류)
제1종의 인식은 다의적이고 부적합적인 기호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제2종의 인식은 공통 개념들을 통해 정의된다.
제3종의 인식의 형상은, 우리 자신, 신,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한 적합한 관념들을 결집시키는 삼각형이다.
의식
이중화되고, 무한히 중복되는 관념의 성질
의식의 특징은 정신 속에서의 관념의 반성이고 의식은 자신이 대상이 되는 관념과 관련하여 항상 이차적이며, 의식이 자신의 대상인 관념과 맺는 관계는 그 관념이 자신의 인식 대상과 맺는 관계와 같다.
의식은 두가지의 근본적인 환상을 갖고 있다. 자유라는 심리학적 환상과 목적성이라는 신학적 환상이다.
의식은 수동적 감정들을 능동적 감정들을 통해서 이겨내는데, 후자는 공통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원인에 의해서만 따라서 이성의 구별에 의해서만 전자와 구별된다.
정의, 증명
지속
시작에서부터의 존재의 연속
지속은 영원성에 대립한다. 영원성은 시작이 없으며 불변적이고 온전한 행위 능력을 소유한 것에 대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무한정한 지속도, 지속 이후에 시작되는 어떤 것도 아니며, 본성이 다른 우리 자신의 두 부분들, 즉 신체의 존재를 포함하는 부분과 그것의 본질을 포함하는 부분이 공존하듯이, 영원성은 지속과 공존한다.
우월성
스피노자가 우월성 개념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학적인 혹은 신인 동형적인 성격들을 통해 신을 정의하면서 신의 특유성을 수호하겠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우월성, 그리고 그것과 함께 다의성과 유비는 공통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신과 창조물들의 공통적인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본질의 혼동), 공통의 형식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을 부정하는 이중의 오류를 갖는다(초월적 형식들의 환상).
지성(무한 지성, 신의 관념)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 속에 넣는 사람들은 신을 인간학적인 혹은 심지어는 신인 동형적인 술어들 아래서 신을 사유한다. 그렇게 자신들은 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신의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이해하며, 실체가 속성들 속에서 무한한 사물을 생산하듯이 무한한 관념들을 생산한다. 우리의 지성은 신의 지성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분으로서 설명된다. 실제로 무한 지성이 양태라는 사실은, 무한 지성에 대한 우리 지성의 적합성을 설명해 준다.
정신과 신체(평행론)
관념은 그것의 표상적 능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 대한 관념이 사유와 다른 관념들에 대해 맺는 관계는 우리 신체가 연장과 다른 신체들에 맺는 관계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난 것에 대한 관념, 즉 우리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이다.
신체의 계열과 정신의 계열은 동일한 질서뿐만 아니라, 동등한 원리 아래서 동일한 연쇄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존재의 동일성이 있다.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은 인식론적 평해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다. 첫번째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 속의 관념과 다른 속성 속에 있는 그 대상은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형성한다. 두번째 평행론에 따르면, 모든 속성들에 존재하는 양태들은 하나의 동일한 변형을 형성한다.
본질
모든 본질은 어떤 사물의 본질이며, 그 사물과 상호 교환된다.
속성들은 본질을 표현하면서 반드시 그 본질이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존재 또한 표현한다. 본질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행위 능력인 반면, 속성들은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을 만큼의 힘들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함축하고 있지 않고 본질들, 속성들 속에 내포 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양태들의 본질들은 단순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그 본질들은 속성과 더불어 서로간에 순전히 내적인 또 다른 유형의 구별을 갖는다. 본질들은 논리적 가능성들도 기하학적 구조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능력의 부분들, 즉 물리적 강도들이다.
영원성
존재가 본질에 의해 함축되어 있는 한에서, 존재는 영원하다.
지속은 양태의 존재가 본질에 의해서 함축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 영원성의 형식을 띤다.
영원성의 형식이라는 표현에서, 형식은 언제나 개념 혹은 인식에 근거한다. 어떤 신체의 본질 혹은 사물들의 진리를 영원성의 형식 아래서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관념이다.
정신이 신체의 단일한 본질을 영원성의 형식 아래서 사유하는 한, 또한 존재하는 사물들을 공통 개념들에 의해서, 즉 존재 속에서의 그것들의 결합과 해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관계들 아래서 사유하는 한, 정신은 영원하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존재
양태의 존재는, 속성 속에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 즉 외적인 양태의 지위를 소유하고 있고, 또 지속하는 한, 그의 본질 자체이다.
양태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스스로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그것의 원인(신)에 의해서 그리고 속성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서, 즉 양태의 내적인 지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명하다 - 함축하다(펼치다 - 감싸다)
설명하다는 사물에 외적인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에 내적인 사물의 작용을 의미한다.
함축<감쌈>은 설명<펼침>의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는<펼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함축하고<감싸고>, 전개하는 것은 포함된다.
관념
우리 안에 있는 참된 관념들, 이것은 신 안에 존재하며 무수한 다른 관념들로 변용하는 한에서, 신은 그것을 적합하게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관념들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것, 다른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결과, 즉 두 신체의 혼합물을 표상하는 관념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들은 필연적으로 부적합하다.
개체
어떤 속성 안에 있는 존재 양태의 복잡한 조직.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적 과정으로서의 개체화는 언제나 양적이다. 그러나 상이한 두 가지 개체화가 존재한다. 단순하고 불가분하며 영원한 내포적 부분으로서의 각이한 능력의 정도라는 단일성에 의해 정의되는 본질의 개체화가 그 하나이고, 양태의 본질을 표현하는 운동과 정지의 영원한 관계를 시간의 차원에서 실현시키는 외연적 부분들의 분리 가능한 전체에 의해서 정의되는 존대의 개체화가 다른 하나이다.
무한
1) 본성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존재의 특성을 구성한다.
2) 자신의 원인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속성들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직접적인 무한 양태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양태가 존재하는 한,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그 양태의 본질에 상응하는 관계 아래서 그 양태에 귀속된다.
따라서 무한정은 추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무한은 현실적이다.
자유
스피노자의 원리는, 자유는 결코 의지의 특성이 아니며,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지 작용들은 관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로서, 그것들은 관념자체에 수반하는 긍정 혹은 부정과 동일한 것이며, 이 작용들에는 어떤 우연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원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능태나 우연적인 것들을 상상하며, 신체에 대한 영원의 의지적 작용을 믿는 한, 자유는 의식의 근본적인 환상이다.
자유는 언제나 본질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의지나 그 의지를 규제하는 어떤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
참된 관념을 갖는 방법은 형식적인 반성적 측면과 물질적인 표현적 측면 그리고 둘을 통합한 점진적 종합성이다. 즉 우리의 인식 능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설명됨과 동시에, 물질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원인을 표현한다.
양태
양태들은 존재와 본질에서 실체와 다르지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동일하게 같은 속성들 안에서 생산된다.
직접적 무한 양태
사유의 경우, 무한 지성, 그리고 연장의 경우, 정지와 운동
매개적 무한 양태는, 연장의 경우, 우주 전체의 모습, 즉 존재 양태들에 대한 결정을 지배하는 운동과 정지의 모든 관계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물론 사유의 경우 그것은 관념들을 존재 양태들의 관념들로 결정하는 관념의 관계들이다.
자연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상호 내재성의 연관들 속에서 파악된다.
자연주의는 일의성의 세 가지 형식을 충족시키게 된다. 속성들의 일의성:본질, 원인의 일의성:신, 양상의 일의성:필연성
필연적인
필연성은 존재하는 것의 유일한 양상이다.
가능성과 우연성의 범주들은 환상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들은, 신의 의지의 작용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다.
부정
스피노자의 부정 이론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인 구별과 부정적인 결정 사이의 차이에 의지하고 있다.
1) 속성들은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정확히 말하면 대립에 의하지 않는 그것들의 구별에 의해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모든 속성들은, 그것들이 그 본질과 존재를 표현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통해 동시에 서로를 긍정한다.
2) 반면 유한자는 제한되고 결정된다. 제한되고 결정된 어떤 양태 아래서, 유한 존재 양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제한되고, 그 존재에 있어서 결정된다. 제한은 본질에 해당되고, 결정은 존재에 해당한다.
스피노자의 학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통 개념들
공통 개념들은 신체들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그것들이 표상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니며 일반적인 관념들이다. 그리고 외연에 따라, 즉 그것들이 모든 신체에 적용되는지 아니면 단지 일부의 신체들에만 적용되는지에 따라, 그것들은 보다 일반적이거나 덜 일반적이다.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결합의 통일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에 모두 들어 있으며 따라서 적합하지 않게 사유될 수 없다. 그것들은 존재 양태들 혹은 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관계들의 결합을 표상한다. 공통 개념들은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며, 자연 전체가 갖는 결합의 통일성과 이 통일성의 변이 양태들을 형성한다.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신의 관념을 부여한다.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는 공통 개념이 아니며, 스피노자가 그것을 공통 개념들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히 그것은, 신의 관념이 신의 본질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존재 양태들의 결합과 관련해서만 공통 개념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통 개념들은 관계들 사이의 결합을 표상한다. 그런데 이 관계들은, 신체들이 서로 적합한한, 즉 그것들이 전체를 형성하고, 각각이 다른 신체 안에 <이미지들> --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은 상상들이다 -- 을 남기면서 서로를 변용시키는 한, 신체들을 특징짓는다.
고유한(고유성)
본질 자체의 양상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세 가지 고유성을 구별한다. 신의 본성의 양상들이라는 첫번째 의미에서 (자기원인, 무한성, 영원성, 필연성, 전지성, 편재성). 두번째 의미로, 신을 그의 생산물과 관련해서 (모든 사물들의 원인). 세번째 의미로, 외적인 결정들을 지시할 뿐이다 (정의, 자비).
능력
신은 의지가 이니고 가능태들을 사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한 능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신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원인, 즉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의 원인이 된다.
변용 능력
변용 능력이 능력으로서의 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용될 수 있는 소질은 능력의 정도로서의 존재 양태의 본질에 상응한다.
존재 양태들은 외연적 부분들이 양태의 본질 혹은 능력의 정도에 상응하는 관계 아래서 그 양태에 귀속하는 한, 존재 양태는 언제나 다른 양태의 부분들을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끌 수 있다.
<어떤 단일한 사물도, 그것이 보다 많은 시간을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보다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지속은 그것들의 본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4부, 서문)
기호
사물의 현존재에 대해 지시적이며 혼합된 결과이다.
신이 자신에게 주는 정언명령적이며, 계시의 결과들이다.
외적인 확신을 위해 해석된 것들이며 미신의 결과들이다.
사회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각각의 능력을 결합하여 전체로서의 보다 우월한 능력을 형성하는 (시민) 상태를 말한다.
이성 상태에서 인간들의 결합은 공통 개념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능동적 감정들(특히 자유, 단호함, 관용, 제2종의 신앙심과 종교)에 의해 결정되는 내적 관계들의 결합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민 상태에서 인간들의 결합 혹은 전체의 형성은 희망과 공포라는 수동적 감정들에 의해 결정되는 외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실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는 데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동일한 속성을 갖는 실체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특징지어진 각 실체의 일의성, 자기 인과성, 무한성, 그리고 필연적인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
제5장 스피노자의 진전
([지성 개선론]의 미완성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신 - 실체의 동일성을 통해 속성들 혹은 속성들을 갖는 실체들은 실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게 되며, 이제 자기 원인이라는 특성을 누리게 된다.
지성 개선론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은, 마치 가설과도 유사한 불특정의 참된 관념은 기하학적 존재에 대한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 관념은 정확히 우리의 사유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마치 가설과도 같은 불특정의 속성 혹은 속성을 갖는 실체는 공통 개념 속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종합적인 충분한 근거에, 즉 모든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고 모든 사물들의 원천이 되는 유일 실체 혹은 신의 관념에 이르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특징적인 관계들을 갖는다. 이 관계들을 통해서 모든 사물은 존재 속에서 다른 사물들과 결합하거나 다른 사물들로 해체된다. 공통 개념, 이것은 정확히 여러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의 결합에 대한 관념이다.
공통 개념들은 기하학적이라기보다는 물리 - 화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이다. 그것들은 다양한 측면 아래서 자연이 갖는 결합의 통일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공통 개념들은, 철학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하학적 방법이 갖는 중요성의 범위라는 관점에서, [윤리학]의 실천적 기능이라는 관점 등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제6장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주의인 것은 빠름과 느림, 응결된 긴장과 가속화된 운동, 형식을 갖지 않는 요소들, 비주체화된 변용들에 따라 사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