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비홍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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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카
‘신은 완전하고 무한하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건강한 신체가 현존할 때 정신은 영원하다. 이렇게 설명해야 할까?
여기에 정신의 본성, 감정의 예속과 힘에 대한 정리를 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한 감정에서 생기는 욕망을 갖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을 밝힌 모럴리스트의 잠언에 비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애쓰는 노력에 의해서만 유덕할 수 있다는 이성의 의지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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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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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개념어를 알고, 문장을 이해하고, 단원을 파악하고, 전체를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하니 비교를 한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다.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는 그의 해석에 얼마나 많은 이견이 있는지 모른다. 조금 관심 있다 해서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자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르고 같은 지를 구분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것 외에 어떤 도움을 주는 지는 모른다. 더구나 도움이 된다 한들 친구들 앞에서 훈장질을 할 것도 아니고, 한다 한들 정리되지도 않는 생각을 내뱉은 말이 얼마나 허접할까 싶다.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가 사는데 조금 넓게 깔아놓은 바닥이라 치고 거기를 자유롭게 다녔으면 좋겠다.

서문
표상적 사유와 비표상적 사유
1. 표상이란 말의 어원론적 의미들과 근대적 주체성의 본성
첫번째 의미는 어원을 분석하듯, 표상이란 자기 앞에 세우는 활동이다. 표상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의식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어서만 존재하며 오로지 개별적인 것으로만 현존한다. 또한 그 본질에 있어선 보편적이다.
두번째 의미는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표상 활동을 통해 차이와 유사성은 오로지 동일적인 것에 종속된 것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번째 의미는 다시 현재화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지향성은 표상 활동을 숨기고 있으며, 그리하여 ‘타자‘를 현전으로, 현전에 귀속된 것으로 만든다.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란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다양한 함의를 지닌 표상 활동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성은 탄생하였다.
표상 개념의 이 모든 의미들이 알게 해주는 바는 주체와 맞서서 서 있는 것, 그리고 주체와 다른 자는 오로지 주체의 표상 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근대적 주체의 표상 활동을 비판적 표적으로 삼아 동일적인 것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 자체‘를 드러내려는 시도, 그리고 주체 혹은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현존을 밝혀내려는 시도로 요약된다. 이러한 시도를 우리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이라고 부른다.
제1부 사유의 새로운 지평
제1장 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와 발생의 문제 --- 재인식 대 기호 해독
1.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
1)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 기술
사유 안에 내재하는 그 사유의 ‘밑그림‘, ˝항상 미리 전제되어 있는 [사유의] 좌표들.
누구나 공유하는 것, 누구나 문제 삼지 않는 것.
2) 선의지
‘선의지‘, ‘사유의 선한 본성‘, ‘코기토의 보편적 본성‘ : 사유자가 참을 사랑하고 원하는 이 의지.
그러나 진리 인식에 대한 선의지의 공리 자체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이 공리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이 공리는 임의적인 것이며, 이 임의적인 공리에 공통적으로 기반해서 탄생한 인식도 진리도 아닌 임의적인 것, 한낱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 공통 감각
사유자가 지닌 이러한 선의지에 따라 진리 인식을 위해 사유자의 능력들(지성, 상상력, 감성 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공리를 가리켜 ‘공통 감각‘이라 부른다.
이처럼 인식은 ‘모두‘ 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협력이라는 주관적 원리, 즉 능력들의 조화로서 공통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 인식을 위해 필수적인 능력들의 일치를 근거 지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그야말로 그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독단적으로 전제된 공리라고 밖에는 여겨질 수가 없다.
2.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의 임의성
1) 칸트에게 능력들의 일치라는 문제는 있는가?
지성과 대상의 일치라는 인식론의 오랜 과제를 칸트는 모든 것을 이성의 능력으로 내재화시켜보자는 착안을 한다. 다시 말해 주관적 능력들, 즉 수용적 감성을 통해 다양은 주어지며 능동적 지성은 이에 입법하여 경험 대상을 만든다. 대상이란 그저 경험적인 대상이 아니라 감성을 통해 주어진 다양을 상상력의 종합 활동이 ˝하나의 표상 속에˝정립한 것을 말한다.
2) 발생의 관점에서
심성의 능력들 사이의 일치라는 문제에서 칸트는 대상에 입법하는 자로서 규정되어 있는 능력을 지성이라 했다. 우리는 사변적 관심에 따라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게끔 지성을 규정해주고 지성과 감성의 조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경험에 착안해서 추측할 뿐이다. 요컨대 초월 철학은 경험의 ‘발생‘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을 표준삼아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기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초월 철학이 경험의 발생 혹은 능력들 간의 일치의 발생을 기술하려들지 않고 조건만을 규정하려든다면, 능력들의 일치의 임의성과 ‘그 일치의 결과로서의 임의성‘에 대한 의심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발생의 관점이 요구되고 원천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발생‘의 관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3) 초월적 도식 작용론에 대한 비판
도식 작용론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첫째로 상상력이 지성과 감성을 일치(매개)시켜줄 수 없다는 점이고 둘째로 지성과 상상력의 일치를 근거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능력들의 일치는 임의적이다. 가능한 경험을 조건삼으니 발생의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따라서 능력들의 일치는 한낱 개연적인것 일뿐이다.
4) 고전주의 시대의 구성적 유한성과 인간의 탄생
인간 심성이 가진 능력들의 제약성(유한성)은 규정된(구성된) 것이다. 인간 속의 힘들이, 외부로부터 온 유한성의 힘들[임의적 규정들]과 관계를 맺을 때, 바로 그때에만 힘들의 집합은 인간으로서의 형태, 즉 최초의 인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간 개념 자체가 한낱 임의적일 뿐이다.
3.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와 기호
1) 숭고와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
이성은 상상력이 감성적 직관 속에서 전체성의 이념에 상응하는 전체를 추구하도록 부추기고, 이에따라 상상력은 한계에 이르도록 총괄을 행한다. 전체성이라는 이념과 비교하면서 이런 한계에 직면할 때 숭고가 체험된다. 이처럼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에서 체험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우선 일치보다는 오히려 ‘불일치‘, 즉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이다. 그런데 이 능력들의 불일치의 일치는 능력들이 규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이룬 일치이다. 즉 ‘발생한 일치‘이다.
2)기호의 성질들 : 우연성, 강제성, 수동성, 필연성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나타남에 있어서 우연성, 사유에 있어서 강제성(혹은 사유 주체의 수동성), 진리에 있어서 필연성 - 이 세가지가 기호를 정의한다.
3) 기호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에 대한 니체적 인식 - ‘주사위 던지기‘의 의미
들뢰즈는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을 통해 긍정된다˝ 라고 니체의 우연과 필연 개념을 정리한다.
우연 자체를 세계의 원리로 놓고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어떤 숫자가 나오든 그 숫자는 세계의 원리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우연을 원리로 삼는 영원한 순환일 뿐이다.
‘우연 자체가 세계의 필연적 원리라면, 오로지 기호가 우연히 출연할 때만 그 기호의 출현은 필연적이며, 그 출연한 기호에 대응하는 사유 또한 필연적이다.
4) 표현과 기호 :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프루스트
우선 기호 개념에 이해를 돕는 표현 개념을 이해해 본다. 표현은 상반되는 두 측면, 펼침과 감쌈이라는 상반된 방향의 운동을 모순 없이 동시적으로 포괄하는 종합의 원리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기호 개념을 바로 이런 표현주의적 사고 방식의 틀 안에서이해하고 있다.
프루스트에게서 기호 개념이란 감쌈(내용물이 용기 속에 담겨 있음)과 펼침(해석의 활동을 통해 그 내용물을 끄집어냄)이라는 표현의 이념과 동일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프루스트의 기호들은 ‘불명확함(다의적임)‘을 본질로 하며, 바로 그 불명확함 때문에 기호는 사유자가 그것을 해독하게끔 사유를 자극하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와 반대로 스피노자에게선 불명확한 것, 즉 기호는 표현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스피노자에게 기호란 ‘ 상상력으로부터 나오는 본질적으로 불분명한 언어를 형성한다는 점이며, 이는 일의적인 표현으로부터 나온 철학의 자연 언어와 대립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설명은 지성 내재적인 사물의 작용이고, 지성이란 자연의 양태일 뿐이고 지성의 소산인 인식 자체도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의 소산일 뿐이다. 따라서 표현 개념은 존재론적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는 오로지 ‘적합 관념들‘만이 표현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기호란 한낱 부적합 관념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프루스트에게선 불명확한 기호가 곧 표현이며 기호 해석이 바로 우리 정신의 ‘펼치는 활동‘이다.
라이프니츠는 ‘표현은 모든 영역에서 일자와 다자 사이의 관계를 확립한다. 그러나 일자를 현시하는 다자, 즉 [일자의] 표현에는 항상 불분명한 혼란스러운 지대가 끼여든다. 라이프니츠의 체계에서 불분명한 다자, 즉 모나드들은 나름대로 전체(일자)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각각의 반영은 전체에 대한 완벽한 반영이 아니나, 각각의 모나드들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한계지어진 반영, 곧 불분명한 표현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나드들 모두는 무한, 즉 전체에 대한 혼란된 표상을 지니고 있다‘ 라고 말한다
5) 기호 해독과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발적인 선의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어떤 폭력 앞에 노출될 때 진리 탐구를 위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폭력을 야기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이처럼 기호들과 맞닥뜨릴 때 사유는 더 이상 임의적인 공리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호의 자극을 통해 능력들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유의 이미지 곧 사유의 형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섕이다‘.
6) 꿈, 주체의 사라짐
전제된 공리 없이 발생한 사유는 정말로 아무런 전제 없는 사유인가, 순수한 발생의 산물인가?
들뢰즈는 이 ‘순수 사유‘ 의 이미지의 모델을 프루스트가 기술하는 ‘꿈‘에서 발견한다. 하나의 순수 ‘해석‘, 순수 선택이라는 활동이 정말로 존재한다. 꿈이라는 사유 활동이 시작되면 그제야 사유 주체와 사유 대상이 선택되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로 주체는 그의 사유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제 기호 해독이라는 들뢰즈의 사유 모델과 더불어 주체는 사유로부터 제거되어 버린다. 모든 임의적인 요소가 제거된 순수 사유란 ‘비인격성‘ 과 ‘익명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4. 맺음말: 니체적 문화론의 탄생 - 사유에 가해지는 폭력과 문화의 훈련
어떤 폭력이 사유로서의 사유에 행사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해서 사유하도록 어떤 힘이 강요해야만‘ 한다. [ --- ] 이런 압박, 훈련을 가리켜 니체는 ‘문화‘라고 부른다. [ --- ] 문화는 사유가 겪는 폭력, 사유의 수련[형성]이다. 문화 개념과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는 공통적으로 ‘사유에 해당하는 폭력에 응하는 사유의 수련‘이라는 동일한 함의를 담고 있다. 사유의 훈련을 통한 새로운 법칙들과 가치들의 지속적인 창조 과정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제2장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 프로이트, 들뢰즈, 프루스트, 바르트, 메를로 퐁티
1. 철학과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
주체는 사유가 심성에 주어진 자극에 의해서 ‘비자발적‘ 으로 시작된다. 즉 타자가 주는 ‘상처줌‘을 통해 비로서 주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상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참된 사유는 대상을 객관화하거나 마음에 표상하는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도 표상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상처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2. 트라우마와 문학 비평
※들뢰즈의 트라우마론인 기호 해독 모델은 어떤 식으로 프루스트에게서 발견되는가?
[트라우마의 자극을 통해 비로서 발생하는 사유 활동 <감성을 통해 상처를 입은 주체가, 그 상처를 준 기호가 숨기고 있는 진리를 지성을 통해 해석해내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론의 ‘사후적‘ 성격을 프루스트는 알고 있었는가?
[프루스트 또한 엠마의 트라우마를 통해 사후적 성격을 소설의 주요 라이트모티프로 사용하고 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트라우마론을 계열론으로 이해하며 여기서 계열의 최초의 항, 즉 기원의 신화를 제거하고자 하는데, 들뢰즈가 프로이트의 계열론과 프루스트의 계열론 사이엔 모종의 유비 관계가 있는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은 기원(최초의 항)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두 개의 항 사이의 소급적 인과율을 통한 의미 생산의 구조 자체를 발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엠마의 경우 사건 2는 엠마의 신경증을 설명하기 위한 최초의 사건, 근원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낱 계열의 한 중간 항에 불과하게 되어 버린다.]
※레비나스의, 트라우마론으로서의 윤리학이 프루스트를 통해서도 발견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주체가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그 자신과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이야기로 이해한다.]
3. 트라우마, 사진론, 회화론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즉 트라우마론은 사진론과 회화론에서도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스투디움은 문화적 코드를 전제로만 존립할 수 있다. 반면 퐁트툼은 비표상성, 고통스러운 자극 등 트라우마 일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메르로 퐁티는, 회화의 목적은 바로 근대 과학과 철학이 정립한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 이면에 은폐된 세계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객 이전의 사물 세계를 ‘존재의 조직‘이라고도 부른다.눈은 세계의 어떤 충격에 의해 움직인다. 사물이 화가의 눈에 ‘충격‘ 을 주었을 때 눈은 비로서 비가시적이던 존재의 조직에 다다르며, 그 다음에 손이 그 비가시적인 것을 화폭 위에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 놓는다. 이 주체의 탈중심화가 트라우마론의 특성이다.
4. 맺음말: 계시의 시대, 그리고 우리 문학
트라우마란 우연히 맞닥뜨린 자극으로서 기존의 주체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주체의 발생(들뢰즈의 경우는 익명적 사유 활동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표상을 갖추지 않은 일종의 암호 문자이고 계시의 이념을 숨기고 있다. 이렇게 주체의 영역은 자율성에서 비자발성으로, 경험의 객관성 및 일반성은 특정성으로, 필연성은 우연성으로, 지성의 노동하는 능력은 감성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우리 문학 역시 상처를 통해 자기 세계의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트라우마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제2부 주체와 타자
제3장 주체의 근본 구조와 타자 ---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이론
1. 레비나스 철학의 문제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타자의 환원 불능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타자를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 아래서 관심은 나라는 동일자로 결코 흡수되지 않는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이는 것이다.
2. 레비나스의 타자이론: 주체의 탄생과 타자
레비나스의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 의 가능성을 숙고한다. 여기서 초월이란 바로 고통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대적 타자, 규정 불능의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와의 관계, 즉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 내가 주체로서 선다는 것,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건에 붙여진 여러 다른 이름들인 것이다.
3. 들뢰즈의 타자 이론: 공간적 지각과 시간 의식의 탄생
어떻게 타자가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지 ‘공간성‘과 ‘시간성‘이라는 측면을 살펴본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자신에게 지각되지 않는 부분을 종합해서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주체의 공간적 지각이다.
타자는 나의 의식이 [과거 양태인] ‘나였음‘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또한 [지금 있는] 대상과 동시적이지 않은 과거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타자의 출현만이 나에게 기억이, 그러므로 시간이 생기게 해준다.
이렇듯 타자를 통해 공간적ᆞ시간적으로 질서지어진 이 세계의 상관자로서의 우리 주체성이 정립되는 것이다.
4. 무엇이 새로운가? --- 공통점과 차이점
들뢰즈나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외적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들뢰즈에게 타자란 ‘가능 세계의 표현‘이며, 레비나스에게선 ‘무한자가 현시하는 지평‘이다. 두 사람에게 주체성의 탄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은, 레비나스의 타자가 ‘외재적인‘ 무한자임에 반해, 들뢰즈의 타자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세계(지각장) ‘내재적인‘ 선험적 구조이다.
5. 타자의 부재와 주체의 종말
들뢰즈에게 있어서 타자를 통해 발생한 주체의 위상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 관점에서: 현존은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부재는 주체가 한낱 유명론적인 것일 뿐이고 실재적 차원에 있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사건들‘이다.
우주론적 관점에서: 현존은 주체의 상관자로서 대상의 출현이다. 부재는 이 대상들도 명목상의 것들이며 실재적 차원에선 분절되지 않고 형상을 지니지 않은 ‘요소들‘로 환원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현존은 성적 욕망의 대상을 분별해준다. 부재는 성적 분화되기 이전인 욕망으로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힘이다.
제4장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 --- 레비나스와의 비교
1. 왜 지금 사르트르인가?
2. 이제까지의 타자 이론들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
1) 타자와의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
외적 관계는 ˝타자와 나를 하나의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분리한다˝.
내적 관계란, 나를 타자에 의해 규정함을 통해서만,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인식의 측면, 외적 관계의 측면에서 타자 존재의 확실성을 설명하려는 기존의 이론들이 실패했는지를 살펴본다.
2) 실재론과 관념론 비판
나의 의식에 대하여 시공간 내의 사물이 현전한다는 점에 실재론이 그 확실성을 둔다면 실재론은 타자의 영혼의 실재성에 관해서는 동일한 명증성을 요구할 수 없을것이다. 실재론자들은 오로지 감정이입, 공감 등을 통해 타자 존재에 대한 ‘개연적 인식‘ 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표상들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나의 주관밖에 없다. 이 점은 타자의 표상들을 조직짓는 통일체는 그 본성상 타자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점과 모순을 이룬다.
3) 후설과 하이데거 비판
후설에게 있어서 타자는 신체적 유사성에 의하여 타자 존재를 체험한다. 그러나 신체적 표현 간의 유사성에 근거한 감정 이입은 기껏해야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인 개연적인 타자만을 알려줄 뿐이라는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들 하나하나는 각자의 내면성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내면과 타자의 내면은, 나에 대해서 결코 동일한 정도의 명석판명성을 가지지도 않고 동일한 정도로 부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인식적 소유물인 표상이 아니며, 타자를 표상으로 세울 경우 타자성은 그 표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3.타자의 비표상성과 직접성
1)눈과 시선
타자성을 상실하지 않은 타자의 모습은 비대상적 방식으로 나타나며, 비인식적으로, 직접 현시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선은 눈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타자의 눈을 지각한다 함은 타자의 타자성을 없애고 그를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시선은, 내가 시선을 의식할 때 내 지각의 대상으로서의 눈은 사라진다. 곧 ‘내가 타자의 시선에 나의 주의를 돌리면 그와 동시에 나의 지각은 해체되어 버린다.‘
2) 이타성과 분리
레비나스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는 유적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근본적인 분리가 있다고 본다. 즉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란 명백히, 한 사람을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 외부에 위치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다른 어떤 개념 체계의 도움 없이 오로지 타자는 나와 다른 그의 이타성 때문에 나와 분리된다.
3) 얼굴
시선을 의미한다.
4. 대상화의 의미: 비반성적 층위에서 주체의 출현
1) 비인격적 순수 의식과 자아
의식은 대상에 대한 모든 정립적인 의식과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이다. 그러므로 정립적인 지향적 의식과 비정립적인 자기 의식은 한데 얽혀 지향적 활동의 필요 충분 조건을 이룬다. 이 두 가지는 지향적 활동을 가능케 하는 ‘분할, 분해 불가능한 하나의 존재‘이다.
반성되지 않는 의식의 영역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절대적으로 자발적이며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즉 비인격적인)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자아의 출연을 허락하는 것은 그 근본적인 자기성에 있어서의 의식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는 오로지 반성 활동의 경우에만 나타난다. [ ---] 반성적 활동이 대상으로 삼는 외재적 대상, 그것이 나이다‘.
사르트르는 ‘자아란 결코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의 원천이 아니며, 오히려 자아란 비인격적인 초월적 의식이 반성 활동을 통해 산출해낸 의식 외재적인 대상이다‘ 라고 주장한다.
2) 타자는 수치를 통해 나의 코기토를 가능케 한다: 유아론 극복1
타자의 시선을 받았을 때 의식의 상태는 비반성적이라는 점이다. 이 비반성적인 의식은 ‘수치‘이다. 수치는 그 의식 자신에게 정립적인 지향성의 화살을 돌리지 않으면서 수치에 대해 외재적인 대상을 정립적으로 지향한다.
비반성적 지평에서의 나의 대상화란 반성적 지평 위에서의 나의 대상화와 더불어 사르트르의 자아론을 양분한다.
자아를 대상으로서 정립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반성 활동과 비반성적 의식인 수치가 동일하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선 앞에서의 ‘자아의 대상화‘란, 곧 자아라는 인격적 주체의 발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 생겨난 ‘나‘는, 의식에 대한 ‘인격적 표상이 아니라‘ 의식이 떠맡아야 하나의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적 코기토이다. 즉 나는 보여지고 있다 고로 존재한다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가 던지는 시선이 다른 주체의 탄생에 개입하는 것(내적 관계)이다.
사르트르는 이와 같이 ‘존재의 측면‘에서, 즉 코기토의 필수불가결한 ‘내적 요소‘로서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유아론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3. 주체의 탄생에 있어서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라캉과의 비교, 자유에 대한 수치
주체란 모두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소 발생한다.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주체의 성격을 살펴보자. 사르트르에게 근원적인 자유란 자유 의지보다는, 비인격적인 지향적 의식의 절대적 자발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이 인격적 자아에 자리할 때 의식의 무조건적인 자발성은 자아의 구체적인 관심, 습관 등등을 통해 조건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절대성과 무조건성은 변질된다. 그런 뜻에서 자아의 출현을 의식의 하락 혹은 하락된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타자로 인하여 자아가 될 때, 의식의 절대적 자발성은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나의 자유의 한계이다‘. 결국 타자의 출현은 제한된 자유를 지닌 주체의 발생을 의미한다.
5. 타자의 여러 성격
1) 부재와 타자 존재의 필요성: 유아론 극복2
타자는 나의 경험의 장안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의 장 안의 대상(예컨대 타자의 눈, 신체)과는 인식적 관계를 맺지만, 타자와는 존재적 관계를 맺는다.
또한 타자 존재에 대한 회의론의 위협은, 우리가 경험의 장 안의 대상과 경험의 장 밖의 존재, 즉 외재적인 타자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부재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부재란 인간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현전을 통해 규정한 장소나 위치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한 존재 양식으로서 정의된다. 부재란 하나의 위치와의 관계의 무는 아니다‘. 즉 부재와 현전은 내 경험 안에서 타자가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일 뿐이다.
남편이 부재하는 것, 그녀가 착각한 것[시선을 받아서 수치를 느꼈으나 나타나지 않는 것], 그녀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피에르의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피에르의 경험적 사실성일 뿐이다. ‘착각으로 밝혀지는 것[즉 부재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타자의 사실성이다. 그러므로 부재가 일정한 장소에서의 타자의 사실성에 대립하지만 타자 존재의 실재성과 대립하지는 않는다. 결국 타자의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는 실재성과 경험적 사실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범주를 구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오류이다.
2) 타자의 초월성과 신의 관념
타자의 신체(눈, 발자국 소리 등), 거리, 근접성 등은 세계 내부의 것임에 반해 타자 자체는 세계 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초월적이며, 세계 저편의 존재이다.
여기서 타자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신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현전의 특정성을 무시하고, 타자의 현전 일반을 하나의 무한한 주관의 현전으로 간주함으로써 도달한 것이 신의 관념이라는 점에서, 신은 기만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신의 개념(무한자)을 탐구할 뿐이지, 신의 개념에 합당한 전지전능한 존재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사르트르가 부정적인 입장에서 신의 이념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파생한 일종의 기만적인 관념으로 간주한 데 반해, 레비나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신의 이념이 적합하고 이해되고 실현될 수 있는 문맥으로 본다.
3) 타자 출현의 우연성,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모든 인간이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존재자를 전체로서 붙들어, 이 존재자의 존재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동일자에게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세계 외재적인 타자와의 만남은 존재 구조 해명을 통해서는 결코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하나의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이라는 우연성이 세계 저편으로부터 와서 나의 나됨, 곧 주체성의 성립에 개입하는 이상 인간 현존의 모습은 존재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통해 밝혀진다.
결론적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6. 맺음말: 부빌의 초상화들과 타자의 시선, 역전 가능성
사르트르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자.
사르트르에게서 의식은 그 근본젘인 지향성 때문에 상대방을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투ㅅ쟁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즉 타자의 시선이 나를 공겨해옴은 바로 의식의 근본적인 지향성에서 기인한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는 타자는 그의 헐벗음을 통해 윤리적 호소로서 나를 공격해오지, 결코 지향적 광선으로서 공격해오지는 않는다. 또한 나의 지향적 의식은 결코 타자의 헐벗은 얼굴을 나의 지평 위의 대상으로 복속시키지 못한다.
사르트르에게서 타자의 체험은 나의 지향성이 좌절하고 내가 타자의 지향성에 포착되는 전적인 실패를 의미하지만,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체험은 세계 저편으로 초월하는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제5장 들뢰즈의 주체 개념 --- 눈대 기관 없는 신체
1. 1960년대 풍경: 주체, 타자, 시선
1960년대 이루어진 이 모든 철학적 업적들은, 대상 세계의 최후 근거로서의 초월적 주체에서 눈길을 돌려,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서 발생하는 주체를 그리고자 했다.
2. 들뢰즈에서 주체의 발생
타자는 나의 시각적 기관, 눈의 상관자로 현현하는 자이다. 이 타자의 출현을 통해 주체성은 발생한다.
보충적 논의: 들뢰즈와 비트겐슈타인
우리가 어떤 사람이 고통에 이름을 준다고 이야기할 때, 여기서 준비되어 있는 것은 ‘고통‘이란 낱말의 문법의 현존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일러주듯 ‘고통‘이란 단어의 습득은 ‘찌푸린 얼굴을 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가 주체로서 설 수 있는 자리인 문법이라는 구조(비트겐슈타인)와 지각장이라는 구조(들뢰즈)의 대응, 이 두 가지 모두는 타자의 현존을 통해 구성된다.
3. 기관 없는 신체, 비인칭, 고백체와의 대결
들뢰즈가 시각의 상관자로서의 타자의 개입을 통한 주체의 발생을 기술했을 때, 주체란 한낱 유명론적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 ‘나‘라고 말하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주체란 존재론적 지위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문법상의 주체(주어)의 지위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현상학자들이 열광했던 시각적인 것의 근원성을 허물고자 했다. ‘시각적인 지각‘에 대한 ‘언표 체계‘의 우위성이다. 즉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은 각각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 다만 가시적인 것의 고유한 형태는 언표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언표 체계에 의해 규정된다. 언표만이 규정자이며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시적인 것은 언표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론의 대상이다.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용어를 통해 시각적인 것을 비판한다. 눈을 기관으로서의 주체성의 발생 이전의 상태로 돌려 ‘잠재적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결정되지 않은 기관‘으로 본다. 여기서 기관 없는 신체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기관들이 없다기 보다, 이 기관들이 ‘미리‘ 유기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주체‘는 결국 어떤 자아도 아니다. 이 소설의 주체는 ‘내용물이 없는 텅 빈 우리‘이다. 들뢰즈는 주체를 대체하는 것은 결국 우리, 아니 우리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익명의 중얼거림일 뿐이라고 본다.
보충적 논의: 익명적 중얼거림 대 고백체
익명적 중얼거림으로서의 언표는 철학 텍스트와 문학 작품에 있어서 고백체와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고백의 형식을 통해서 자기의 내면에서 끌어내려는 노력, ‘자기 의식의 본질적 확실성‘ 을 밝혀내려는 철학상의 노력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가 발견해낸 ‘익명적 중얼거림‘의 위상과 의의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고백의 강요가 출현시킨 ‘자아‘, 그리고 이 자아를 담구하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일인칭 화자와 고백체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이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란 한낱 유명론적인 이름, ‘나‘라고 말하는 습관일 뿐이요, 언표의 주체란 그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익명의 우리, 누군가, 혹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4. 주체 이후엔 누가 오는가?
들뢰즈는 전통적인 주체 개념인 주체의 보편성과 개별적 인격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개념은 개별적 특정성과 비인격적 개별성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는, 주체의 기능을 대신하는 특정성과 비인격적 개별성이라는 이 새로운 기능들과 함께 ˝우리는, 나와 당신 사이의 공허한 교류에서 보다 더 잘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맺음말: 비밀리에 보고 있는 시선의 종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표상되지 않으며 어떻게든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숙명적으로 나의 시각과 관련을 맺고 있고, 나의 시각적 욕망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눈이란 기관을 신체로부터 도려내 우리를 기관 없는 신체로 만들어버린다.
제3부 법과 사회: 억압에 대응하는 싸움
제6장 들뢰즈의 법 개념
1. 법과 선의 관계
법과 선의 고전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 법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법은 부차적인 것, 선의 대리자에 불과하다. 즉 법은 선이라는 최상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 결과 [---] 법에 복종하는 것이 ‘최선‘이며, 최선은 선의 이미지이다.
칸트는 거꾸로 주체의 심성 안에 있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법에 근거하여 선을 설명한다.
그렇기에 근대 세계에 들어 칸트를 통해 이 관계는 전도 된다. ˝법은 더 이상 이미 존재해 있는 선에 의존하지 않는다. [---] 법은 순수 형식이며 [오히려] 선이 이 형식에 의존한다.˝ ˝법으로부터 선이 도출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2. 카프카와 우울증적 법 의식
칸트의 정언명법에서나 카프카의 형벌 기계에서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 이 법들을 실행하게 만듦으로써만 법을 체험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복종하는 그만킘 정의로운 자가 되거나 정의로움을 느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 미리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히며, 또 법에 엄격히 복종할수록 죄의식은 더욱 커진다. 스스로 내면에서 도덕적 의식이명령하는 법의 준수에 대한 강박관념과 그에 따른 죄의식의 증대를 가리켜 들뢰즈는 ˝법에 대한 우울증적 의식˝ 혹은 ˝ 법의 우울증적이고 광적인 면모˝ 라고 이름 붙인다. 결국 칸트를 통한 선과 법의 관계의 전도, 내용이 없는, 따라서 인식할 것이 없는 텅 빈 형식으로서의 법의 정립은 카프카라는 렌즈를 통해 보자면, 법의 준수에 대한 도덕적 의식의 강요와 그에 따른 죄의식의 비례 관계라는 우울증적인 형태로 근대 사법 제도 안에 등장한다.
3. 법에 대한 대항의 두 형태: 사드와 마조호
사드가 법을 규정하는 최고 원리(악)를 지향함으로써 법을 전복하려고 했던 반면, 마조흐는 하위 요소인 법 자체에 철저히 집착함으로써 법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부조리한 법의 철저한 준수, 즉 법이 야기할 수 있는 가장 자질구레한 결과까지 철저히 추구함으로써 그 법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마조흐는 법의 엄숙성과 권위를 와해시켜 버린다.
들뢰즈는 보다 본질적 층위로 탐구의 시야를 돌린다. 그의 시선은 법의 본서 자체를 다시 사유하는 데 가 닿는다.
4. 유대주의 대 스피노자주의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법이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자연의 영원한 진리를 형성하는 것인데, 인간의 유한한 지성이 그에 대한 기호 해독을 잘못함으로써, 즉 결과와의 관련 아래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법은 도덕적 명령이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은 자연의 법칙을 ‘당위‘로 오인받고 그로부터 명령의 형식을 꾸며냈다.
제7장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1. 하나의 개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에 진입하는가?
하나의 낱말이 어떻게 필연적인 개념으로 채용되는가? 그들만의 특정한 문제를 작문하기 위한 표현 기술로서 ‘기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2.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관해서 말한다. 여기서 욕망의 문제는 의미가 아니고 사용의 문제만을 제기한다.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 이다. 어떤 것(이를테면 욕망)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칸트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 철학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성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이 문제를 제기한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해, 인식에 대해 내적인 기준을 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결국 들뢰즈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내재적 규준을 마련코자 한 칸트의 기획을 정신분석학의 영역에도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를 마치 형이상학에서의 가상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서 비판한 후 ˝어떤 해석과도 독립된 욕망의 상태를 그려 보이고자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3. 대상a, 라캉의 기계 개념
라캉은 ‘˝대상a‘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대상a로서 분석되는 것은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대성인 ‘시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인 타인의 눈을 지각할 수 있는 반면, 대상a인 시선을 시각적 충동은 결코 볼 수 없다. 시각적 충동은 타자의 시선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 해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를 탄생시킨다. 원래 주객의 구별이 없던 자아는 대상이 결핍되어 있는, 대상과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 나누어진 것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대상a‘를 추구하는 ‘충동‘과 상징적 질서, 주체-대상의 관계 속에서 ‘대상‘을 ‘욕구‘하는 자아라는 ‘절단되고 나누어진‘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상a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누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인 것이다.( 충동 자체가 이미 각각의 대상a에 의해 ‘나누어진‘통일성 없는 부분적 충동이다. 가타리는 이로부터 ‘절단‘이라는 기계 개념을 발전시킨다)
라캉은 이러한 늘 실패하는 충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어서 대상a들은 결코 표상적인 차원에서 주체에게 소유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충동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욕구하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진 것‘ 이며, 우리의 이면에는 결핍되어 있는 항상적인 에너지로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여기서 라캉의 기계 개념이 나온다. 그는 표층적인 욕구와 심층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조가 기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로써 우리는 라캉의 기계 개념의 두 가지 함의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의식적ᆞ표층적 욕구와 무의식적ᆞ심층적 충동의 이중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둘째, 라캉은 무의식은 의식 세계를 이끄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4.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
라캉에게 있어서 대상a는 마치 폭탄처럼 충동들을, 그러므로 주체를 절단해버린다.
1) 구조와 기계
가타리는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통시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다. 가타리는 동태적이며 혁명적인 기계와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구조는 인간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다.
2) 형이상학과 기계
2)-1 플라톤적 상기와 모사물, 개념적 차이
플라톤은 각각의 사물들이 전체에 도달 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결합의 방법과 분할의 방법이다. 즉 유적 형상 아래에 모이게 하고 거기에 종차를 주어 분할한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분할된 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유개념을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전체 아래,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 종속시킨다는 말 결국 존재자들을 ‘유종의 체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상기(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를 통해 정신은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되는 유로서의 이데아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분할은 개별자들을 이데아의 모사물로서 이데아에 귀속시키는 작업, 즉 개별자들이 이데아와 맺고 있는 ‘내적 유사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다. 여기에 이데아와 유사성을 지닌 모사물이 있고 유사성을 지니지 못한 시뮬라크르가 있다. 그러므로 모사물과 시뮬라크르 사이엔 ‘본성‘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2)-2 프루스트적 상기와 시뮬라크르, 차이 자체
이데아를 미리 모방하지 않는 능력으로서의 ‘상기‘, 존재들의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 프루스트적 상기가 바로 ‘공명을 일으키는 기계‘이다. 공명은 두 개의 대상이 상위의 동일적인 대상으로 환원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상위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두 대상 간의 환원 불능의 ‘차이‘만이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낼 수 있다. 이러한 전체화하지 읺는 조각들, 이데아라는 동일적인 유를 전제하지 않는 조각들이 시뮬라크르들이다.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상위의 동일자(유개념)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기에,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이다.
프루스트의 상기는 세계를 결코 유기체를 이루지 않는 시뮬라크르들로 조각내는 ‘절단 기계‘이다.
2)-3 반복이란 무엇인가?
전체성과 양립할 수 없는 차이는 반복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존재자들을 긍정하는 원리가 반복이다. 동일성을 향해 전진하지 않는 차이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성을 부여하는 원리라는 뜻에서의 반복이다.
반복은 존재자를 ‘환원 불능의 차이를 지닌 존재자‘로 드러내 보이는 ‘존재‘이다.
3) 보충적 논의: 전쟁 기계와 국가 기구에 관한 노트
전쟁 기계는 국가 기구에 대해 반드시 ‘외재적‘이다.
국가 기구는 늘 ‘전체적 일치‘, ‘보편화‘를 추구하는 반면, 전쟁 기계는 보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정성‘을 추구한다.
5. 맺음말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적 조화와 통일의 파괴자로서 기능한다.
제4부 세속의 삶, 초월, 그리고 예술
제8장 아이와 초월 --- 레비나스, 투르니에, 쿤데라
나는 아이를 통해 미래를 뻗어나가는 무한한 시간을 여행한다.
1. 레비나스: 나이며 타자인 아이
아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존재의 ‘고독‘과 ‘존재의 일반 경계‘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고독은 어디서 오는가? 레비나스는 고독이란, 존재의 존재함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전체 속에 혼융되지 않는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함 때문에 고독하다. 이 고독한 존재는 일상성 안에서 자기의 고독을 벗어나려고, 즉 자기와 다른 것, 타자를 만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향유, 인식, 노동, 거주 등 이 고독한 존재가 일상성 안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통틀어 레비나스는 ‘존재의 일반 경계‘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향유를 통해 만나는 타자는 곧 나에게로 동화되어 버리지, 그 타자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다시 존재는 깊은 고독 속에 빠져 버린다. 세계 안에서는, 혹은 존재의 일반 경계를 통해서는 어떻게도 고독으로부터 달아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존재는 실로 위협적인 타자를 만나는데,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타자인 죽음과 맞닥뜨린 인간은 비로소 존재의 고독으로부터 탈출하게 되는 것인가? 죽음은 나를 세계로부터 초월할 수 있게끔 해주는가? 레비나스는 초월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넘어감[조월]이란 존재와 다르게 됨, 존재의 ‘타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존재함‘이 아니라 존재와 다르게 됨이다. 이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여기서 넘어감은 죽음이 아니다˝ 초월은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를 세계로부터 떠나게(초월하게) 하는 동시에 나의 자기 동일성 또한 깨끗이 소멸시켜 버린다. 그런데 내가 없다면 초월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통한 초월이 가지는 모순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초월의 가능성은 아예 막혔는가? 초월이 가능하려면, 나는 나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나 혹은 내가 정립한 내게 귀속된 세계와도 ‘다르게‘ 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초월은,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닐 수 있음, ‘여전히 나이되 다른 이로 변화함‘을 조건으로 한다. 논리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무리한 초월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이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이이다. 아이와의 관계, 혹은 타인과의 관계는 권력이 아니라 출산이며, 이는 절대적인 미래 혹은 무한한 시간과의 관계를 세운다. 이 나의 아이는 타자이면서, 이미 말했듯 여전히 모종의 방식으로 나이다. 아이는 나이며 타자이기에, 나는 가의 가능성이 지배하는 유한한 시간 저편의 미래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이며, 미래는 나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타인의 시간이면서도 여전히 나의 모험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출산은 무한한 미래로의 여행을 가능케 해주는 ˝부성의 진정한 모험˝인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어함, 그것은 초월하고 싶어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2. 투르니에: 고아, 헐벗은 어린이
신과 마찬가지로 아이 또한 내가 한정할 수 없는 나의 세계 저편의 무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무한자는 나의 아이에게서 찾아질 뿐 아니라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와 고아˝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난다. 트루니에에게 무한하게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실체의 부활에 집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나의 자식이 아닌 다른 아이의 미래 속에서 나는 나의 영원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헐벗음‘이라는 비표상성, 무한자의 모습, 신의 모습을 고아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고아란 모든 사람의 자식‘이라는 사상이 형이상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고아는 무한한 미래로의 유한한 나의 존재의 모험, 바로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 모험의 길을 열어주는 까닭이다.
3. 쿤데라: 죽은 아이
쿤데라에게서 아이의 출현은 세계로부터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세계 내 존재일 수 있게끔‘ 해준다. 그러나 세계 내 존재로서만 머물고서는 어떤 초월도 바랄 수 없다. 세계 저편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 보이지 않는 무한한 시간에 대한 욕망은 세계 안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체는 존재의 내재적 삶을 구성하는 데 필연적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계와 단절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다. 쿤데라는 아이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아이의 죽음이 비로소 세계와의 단절을 가능케 하고 공동체의 참여를 그만두게 한다. 공동체 속의 익명의 다수로부터 나의 환원 불능의 개별성을 되찾는 것, 그것은 바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쿤데라에게 있어서 아이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세계로부터의 초월이란 무엇인가?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세계 내 존재의 일반 경계에 몰입해 있던 그녀에게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태도를 가능하게 해준다.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은 세계 내 존재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모든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쿤데라가 희망하는 초월인가? 쿤데라에게서도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충분한 초월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쿤데라에게서도 초월의 욕망은 죽음이 아니라 역시 타자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하루하루 죽어가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고개를 들어, 그 손님이 가져다 줄 무한한 시간, 가없는 시간을 향한 모험의 길로 들어선다
제9장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경우
1. 백수들, 야곱의 시간과 에사오의 시간
일요일의 ‘존재론적 의미‘ 에 대해 묻고자 한다.
일요일은 세계 안의 가치와 질서를 쫓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일요일을 ‘살‘ 뿐이다. 요컨대 세계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백수들만이 요일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할 수 있다.
2. 레비나스: 수고, 봉급, 여가 --- 경제적 시간으로서 일요일
시간의 관점에서 표현해보면 경제적 삶 속에는 수고와 여가를 반복하는 순간의 따분한 나열 외엔 다른 어떤 시간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 주체에게는 시간이, 더 정확한 의미에서는 미래가 찾아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주체와 다른것, 수고와 봉급의 질서 속에 결코 편입될 수 없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만이, 우열이 없는 서로 교환 가능한 순간들의 나열을 깨뜨리고 시간을 불러 올 수 있을것이다. 무엇인가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맞닥뜨릴 수 없다면, 어느 날 죽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망가뜨려놓을 때까지 주체는 수고와 일요일이라는 따분한 순간들 사이를 천편일률적으로 점멸해야 할 것이다.
3. 사르트르: 사교, 식사, 놀이 --- 부빌의 일요일
주체가 그의 이기적 구조 속에서 향유하는, 교양으로 넘치는 사교와 푸짐한 식사와 즐거운 놀이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기성은 주체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지만, 이 때 주체는 진정한 미래를 알지 못하는 홀로 있는 자일 뿐이다.
4. 구원의 시간, 타자의 시간 --- 존재론적 모험과 모험의 느낌
미래는 오로지 ‘타자가 누릴 삶으로서만‘ 나에게 찾아온다. 미래는 아무런 규정도 되어 있지 않은 무한히 열린 미래, 내가 나의 수고를 거기에 던지지만, 아무런 대답(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전적으로 나의 힘을 벗어나 있는 시간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다.˝ 타인이 살아갈 삶, 즉 나의 ‘존재 경제‘ 에 대해 외적인 것을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될 ‘나의 미래로 삼는 것은, 나의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이며, 나를 나되게 하는 것, 즉 나의 ‘본질 저편‘ 가는 길, 곧 ‘나‘가 비로소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존재론적 모험˝, 세계 너머로의 초월을 의미한다.
제10장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 ---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예술 철학
1. 주체성이 부재하는 카오스
예술은 모든 객관적인 규정, 즉 시공간적 규정에 따라 구성된 대상 세계의 분절, 분류 등에서 주체를 해방시키고, 인간이 부재하는 카오스, 익명적 ‘있음‘을 체험하게 해준다.
2. 비인격적 익명성의 양태들 --- 사례 분석
1)비연속성: 조화롭게 질서잡히고 체계화된 통일된 유기체적 전체에 대항하여 이질성, 비연속성, 파편적 개별성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2)비인격성: 유기체적 세계를 비연속적인 파편들로 되돌려놓는 이러한 예술의 면모를 밝히는 작업은, 세계를 동물의 신체처럼 조화롭고 합리적인 유기체적 우주로 본 형이상학적 가정에 대한 반박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고기‘로의 인간 형태의 이러한 변형으로 유기체적 형태의 해체라는 인격성의 문제를 공격하고 있다.
3. 예술적 형식의 문제: ‘외관‘과 ‘집‘ --- 예술 작품의 건축적 본성
‘카오스 자체‘와 ‘예술 작품을 통해 현시된 카오스‘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예술의 어떤 요소가 카오스에게 예술적 영속성을 부여하는가? 즉 무엇이 무형의 카오스를 부동의 한 순간으로 고착시키는가?
예술 작품은 카오스를 예술적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질료의 짝 개념으로서의 형상을 일컬어 ‘외관‘이라 부른다. ˝사물에다 외관 같은 것을 부여해주는 것은 예술이다. 레비나스가 사용한 건축적 개념인 ‘외관‘ ‘건물‘ 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게, 들뢰즈는 이 요소를 가리켜‘집‘이라 부른다. 들뢰즈에게서 집 개념은 레비나스의 ‘외관‘ 개념과 정확하게 동일한 기능을 하는데, 그 기능이란 바로 카오스, 익명적 ‘있음‘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틀을 부여하는 것이다.
4. 혁명과 우상 숭배 --- 레비나스와 들릐즈는 어떻게 다른가?
들뢰즈의 예술 작품은 미지의 ‘비전‘을 도입함으로써 지배 계급의 가치에 따라 질서지어진 세계를 ‘재편성‘ 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혁명적 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문명의 최고 가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주체를 모든 책임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즐거움의 원천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심지어 주체는 예술 속에서 타자뿐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예술은 주체를 비인격적 익명적 ‘있음‘의 상태, 즉 책임질 수 있는 인격이 없는 상태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예술의 가치라는 문제에 있어서 들뢰즈의 내재성 철학과 레비나스의 초월의 철학은 화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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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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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어도 끊임없이 이런 종류의 책들을 놓지 않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갈증이었다. 이해하지 못해서 치워야 하는 삶이 아니고 계속 부딪치면서 겪게 되는 피할 수없는 일상.
책을 읽다보면 조금씩 가시기도 하지만 더해지는 또 다른 갈증은 한 철학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왠지 시원했다. 거의 필사하다시피 내용을 요약했지만 쓰는게 즐거웠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이 저자의 <차이와 타자>로 메꿔볼까 한다.
또한 책의 끝 자락에 있는 다음의 글이 앞으로 내가 책을 대하는 좋은 지침이 되겠다.
<무심한 별들이 그렇듯, 기억될 만한 사상이란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진리를 기르는 자들의 옆에서 늘 성가시게 마련이다>.

1 감성에서의 내적 차이와 강도 이론 : 대칭적
대칭적 대상들의 역설과 지각의 예취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부르는 초월적 경험론에서 감성의 내적 차이는 감각이 가르쳐주는 그 차이이다.
칸트에서 감성의 비개념적 내적 차이는 실재 사물의 초월적 근거를 이루며, 이런 뜻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초월적 경험론의 선구적 면모를 칸트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칸트가 지각의 예취라 불리는 장에서 말하는 강도 이론은 비개념적 차이가 경험 가운데 실재가 발생하기 위한 충족 이유로 표현하고 있다.
들뢰즈는 < 대상이란 그 자체 외관이 아니라, 힘의 출현이다> 라고 말한다. 그 힘은 강도적 크기의 측면에서 고려할 때에만 가능하다. 힘의 다양한 강도는 각각 고유성을 지니는 사물들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2 <초월적 경험론> 이라는 말의 의미
초월적 경험론의 의미를 해명하면 의식 상관적인 실재 대상의 선험적 근거는 변별적인 것들이다. 여기서 선험적 근거란 의식되지 않는 지각일 뿐이며 그렇기에 <변별적인 무의식적인 것> 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초월적 경험론에서 경험의 근거는 선험적 개념에 있지 않고 순수 지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초월적 경험론이 경험의 발생적 요소들 사이의 변별적 관계와 차이 자체는 주관적 감성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초월적 관념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별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차이 자체의 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차이는 그것을 통해 소여가 주어지고 그것으로 다양이 주어진다. 즉 차이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의 예지체에 가깝다.
들뢰즈는 차이 자체를 <이념>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예지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이념 또는 예지체는 지성적으로 직관될 수 있는 것도 형이상학적 실재도 아니다. 이념은 하나도 다수도 아니다. 그것은 다수성으로, 변별적 요소들을 구성하고 이 요소들 사이에 변별적 관계를 맺어주며, 이 관계에 대응하는 특정성을 구성한다. ---- 이 세 가지 차원, 즉 요소들, 관계들, 특정성들은 이념적인 시간적 차원(감성)에 투사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념에 대한 경험론이 존재한다. <요소들>은 경험의 발생적 구성 요소를 가리키며 <관계들>은 이 요소들 사이에 성립하는 변별적 관계들을 말하고, <특정성들>은 이로부터 발생하는 강도적 크기로서의 경험을 일컫는다.
3 개념의 획득 문제 : 능력들의 일치와 도식 작용론의 한계
들뢰즈는 <우리는 조건을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실재 경험의 조건으로서 세워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변별적 지각들이라는 선험적 근거로부터 경험 가운데 실재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실재는 질료일 뿐 하나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성 가운데 나타난 강도적 크기에 사유가 개입하여 대상들에 대한 개념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종적인 마음의 능력들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능력들의 일치란 우선 대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성과 감성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이다.
칸트의 도식론에서 상상력은 지성의 종속된 능력이기 때문에 상상력은 지성이 상상력을 규정하고 인도하는 한에서만 도식 작용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도식론은 능력들의 일치 문제에 해답이 될 수 없다.
4 《판단력 비판》의 매개적 의미 : 능력들의 일치와 숭고
능력들의 일치는 그 근원적 일치를 바로 숭고 분석에서 발견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에서 도식 작용은 지성의 입법적 임무에 종속된 활동일 뿐이므로, 도식 작용을 수행할 때, 상상력 그 자체만의 순수한 자태는 은폐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반면 숭고는, 이성이 사변적 관심을 가질 때는 은폐되어 버리는 이러한 상상력의 비밀을, 즉 그것의 근원적 자유를 드러내 준다. 숭고란 어떤 대상의 표상이, 자연이 [이성의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이념의 현시를 달성한 것이라고 마음이 생각하게끔 규정할 경우 그 대상을 말한다. 대상에 대한 상상력은 이성이 전체성의 이념을 현시할 것을 요구하지만 감성적 직관이란 본래 총괄의 극한을 지니기 때문에 상상력은 한계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자신이 이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시한다. 자연 가운데서 이성의 이념에 도달할 수 없음 자체가 바로 이성의 이념의 현시이며, 이렇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현시된 자연 안의 대상을 숭고하다고 부른다. [이념의 현시를 통해] 자신의 감성적 경계를 제거함으로써, 상상력은 스스로가 무한함을 감지한다.
우선 능력들의 일치라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의 관계는 불일치이다. 여기서 칸트는 이성과 상상력 사이의 불일치의 일치를 이 능력들의 불일치의 일치는 임의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 안의 위력적인 대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음으로 해서 각각의 능력들이 규정되지 않고 제각기 활동하면서 이룬 일치이다.
5 초월적 경험론의 모델로서 숭고 분석
우리는 발생적으로 감성에 주어진 <대상없는 형상>이 어떻게 개념을 획득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뢰즈의 능력들의 일치 문제와 숭고 분석을 끌어들였다. 이제 숭고의 사유 방식과 인식론을 하나의 그릇에 담으려 한다. 숭고의 경우 <감성에 대해 위협적인 것>이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우리 정신은 강요당한 듯 발생적으로 사유(상상력과 이성의 불일치의 일치)하게 된다. 사유하게끔 감성을 자극해서 이 감성의 미지의 - 지성 개념에 의해 매개ᆞ표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지의> - 형상으로부터 개념의 출현을 발생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들뢰즈 철학은 경험론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유의 발생을 기술할 때 감각적 기호(마들렌 과자)가 감성을 자극했을 때, 이에 응하는 능력은 <비자발적 기억력>이며, 이 능력의 기능은 공명을 발견해 내는데 있다. 우리는 공명을 <비의존적인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공명의 효과가 발생하는가이다. 두 항 사이에 공명이 있다는 것은 이미 두 항을 서로 독립시켜 주는 개념(정체성)과 두 항을 서로 관계 맺어주는 개념(유사성)이 탄생했다는 뜻이다. 그 공명을 가능케하는 선험적 근거를 묻고 있기에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차이 자체>이다. 바로 이런 즉자적 과거,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가 경험상의, 과거와 현재의 콩브레(혹은 과거와 현재의 미들렌) 사이의 차이, 유사성, 동일성의 선험적 근거를 이룬다. 바로 이런 선험적 근거로 인하여 우리의 감성 가운데 나타난 <하나의 개념 없는 형상>은 시간적 차원을 부여받고(과거의 미들렌, 현재의 미들렌), 그 시간적 차원 안에서 비로서 유사성, 동일성, 차이성의 경험 구성적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차이 자체는 하나의 <이념>이라고 말하였다. 들뢰즈가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를 이해하는 방식은 카트가 숭고 분석에서 이념을 이해하는 방식에 가깝다. 감각적 기호는 마치 본질[차이 자체의 이념]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이때 능력들은 초재적인 실행을 하게 된다. 능력들의 <초재적 실행>은 차이 자체를 각각 경험 가운데 현시한다. 능력들의 실행은 결코 감성화할 수 없는 것의 현시가 사명이므로, <초재적> 혹은 <초감성적>이라 불려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경험론에서] 최종적으로 목적들은 자연의 목적들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목적들은 오로지 이성에 고유한 목적들이다. 이성의 이념(전체성의 이념)의 부정적 현시로 인하여 자연은 목적론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의 전체성의 이념과 달리 들뢰즈의 차이 자체의 이념에는 어떤 목적론적 함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감성적인 것들이 결코 통일되지 않는 차이를 지니고 계속 공명하도록 해주는 <분열의 원리>인 것이다.
6 경험의 필연성 문제
초월적 경험론은 경험의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들뢰즈는 줄곧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을 [기호와의]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서 긍정된다>라고 강조한다.
경험론적 견지에서 사실로서 확인되고 원리로서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카오스이므로, 어떤 우연적 요소가 경험 가운데 출현하든 그것은 세계의 원리(카오스)로부터 근거를 부여받은 필연적인 출현일 수밖에 없다. 이런 뜻에서 경험의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우연성, 더 정확히 카오스이다.
보론
경험론과 철학 ---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
1)경험론은 현전의 형이상학인가? (레비나스, 데리다)
레비나스는 자기 철학을 <외재성의 가르침을 신뢰할 철저한 경험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선 <흔적>이라 불리는 레비나스의 경험 개념의 본성을 숙고한다. 레비나스의 경험은 이념의 <말소>와 <현전>을 동시에 이루어내는 <대리 보충>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대리 보충의 결과는 외부의 대상이 <타인>으로 <경험>되는 일이 그 귀결이다. 타인에 대한 경험은 감성에 주어진 흔적이 대리 보충 기능을 통해 무한의 이념을 현시함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한의 이념은 우리의 선험적 근저로부터 오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경험이다>. 외부의 감각적인 것을 단지 대상이 아니라 <타인>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무한의 이념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현상은 기호에 의한 근원적인 오몀을 전제한다>. 여기서 기호란 현상(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대리 보충의 기능을 하는 흔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흔적이 레비나스에게서는 감성적인 것이다. 타인은 결과로서의 경험이며, 흔히 <근원적 현상>이라 일컫는 감성 가운데 주어진 흔적은 근거로서의 경험이다. 따라서 근원적 경험은 대리 보충의 논리와 모순되지도 않고 그 자체는 타인이 아니라 타인의 근거이므로, 즉 현전이 아니라 현전의 근거이므로, 그것은 <현전의 형이상학으로서의 경험>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데리다는 이 흔적이 왜 감성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2)경험론과 존재 사유(레비나스, 데리다)
레비나스 경험론에서 데리다는 흔적은 어떻게 무한을 현시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데리다가 타자의 무한성이 절대적으로 적극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규정으로부터도 독립해 있고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그것을 <무엇>이라고부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데리다는 무한은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부정성이 아니라 유한 아님으로서의 무한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 스스로도 무한은 절대적 부정성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즉 경험을 통한 부정적 현시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유한 안에 무한이 있다는 것, 혹은 유한을 통해 무한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무한이 유한성의 지평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감성 중의 경험은 우선 존재 사건을 통해 출현한 존재하는 것, 즉 유한한 존재자에 대한 경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은 부정적으로 현시하는 감성 중의 <얼굴>, <흔적> 등의 이름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가리키는 은유로서의 언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존재자적 규정들의 아래로 물러서면서도 존재할 수 있기>때문이다.
3)경험론에서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이다(들뢰즈, 데리다)
데리다는 경험론의 성립 불가능성의 메시지를 보낸다.
여기서 레비나스의 논의에 대한 이해를 하자면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본질인 <존재>를, 존재자의 모든 이기적 권력의 원천으로 본다. 그러므로 참다운 윤리의 가능성은 <존재와 다르게> 라는 부사구를 통해서 타인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비로서 희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언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가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비판의 요지이다. 이러한 비판이 경험론에 대해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결코 얻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존재>라는 계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도 <존재와 다른 것>이기는 커녕, 어떤 식으로든 이미 존재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타자들을 그들의 진리 속에 ‘내맡겨져‘ 있게끔 하는 유일한 것>이 존재이다. 데리다는 동사 <존재한다>는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험론의 근본정신을 말하고 있는 이 구절들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라는 것이다. 계사는 존재 동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임을 밝히는 것, 그것이 경험론의 핵심이다.
4)경험론은 철학인가? 혹은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그리스인인가?
데리다는 경험론을 <사실 경험론은 단 하나의 잘못을 범했을 뿐인데, 그것은 자신을 철학이라고 공표한 철학적 잘못이다>라고 말한다. 철학이 로고스, 즉 존재 사유를 일컫는 것인 한 철학을 부정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어쩔 수 없이 존재 동사가 이미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철학을 해야 한다면, 철학을 해야 한다. 철학을 해선 안 된다고 해도, (그 사실을 말하고 사유하기 위해) 여전히 철학을 해야 한다. 언제나 철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다는 사실이 그 배후에 존재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철학자는 생각하지만, 철학이 아닌 경험론이 보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비그리스적 언어, 즉 존재 동사가 배후에 은폐되어 있지 않은 언어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은 이런 언어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말함>과 <말해진 것>을 구별하는데, 말해진 것은 타자를 주제화하는 언어, <존재론화>하는 언어, 즉 우리가 타자를 지배하기 위행사용하는 언어인 반면, 말함은 바로 비그리스적 언어, 비철학적 언어, 존재와는 다른 타자에게서 오는 언어이다.
들뢰즈는 형사에 대한 사유, 곧 경험론이 절대적으로 비그리스적임을, 즉 비철학적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들은 개념을 획득하며, 획득한 것을 믿었다. 획득은 소유와 대립한다. 애초에 소유하고 있지 않은 개념의 획득은 경험을 통해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획득된 경험을 기술하는 언어는 본성상 결코 존재 사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2 차이의 논리
데리다의 <차연>과 들뢰즈의 <차이 자체>, 프로이트의 사후성
프로이트의 <사후성>의 논리는 데리다의 <차연>개념과 들뢰즈의 <차이 자체>개념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이다.
1)데리다 : 대리 보충으로서 사후성의 논리
데리다는 어떻게 프로이트의 사후성의 논리에서 자신의 대리 보충의 논리를 발견하는가? 흔히 <자기 촉발>이라 불리는 현전의 형이상학에서 자기 촉발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외재적이고 이질적인 요소(차이)의 매개, 즉 외재적이고 이질적인 요소에 의한 <대리>와 <보충>을 거쳐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촉발은 그 말의 뜻에서부터 나타나듯 이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촉발과 양립 불가능하다. 데리다의 전략은 바로 현전의 형이상학은 이런 모순 위에서 존립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꿈의 관계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는 이것을 사후성의 논리, 혹은 동치인 <연기>의 논리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오로지 꿈은 꿈(원인)으로써 무의식 속의 기억 흔적(결과)은 꿈속에서만 사후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무의식이란 이처럼 사후에 <뒤늦게>, 늘 연기된 형태로만 꿈속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기억 흔적이란 결코 현재였던 적이 없는 <태생적 과거>이다. 현전하는 시니피에는 언제나 뒤늦게, 사후적으로, 때늦게, ‘대리 보충적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대리 보충에의 호소는 근원적인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자신의 핵심 용어인 대리 보충이 프로이트의 사후성과 정확히 동일한 것임을 명시한다.
2)프로이트 : 트라우마, 지각, 종교 현상에서 사후성의 논리
무의식은 그 기원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 오로지 사후성의 논리, 지연됨의 논리, 즉 대리 보충의 논리일 뿐이지 순수한 원천으로서 무의식이 아니다.
무의식상의 기억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지각에 개입하는 것일까?
지각은 외부로부터만 도래한 순수한 지각은 없으며, 지각은 늘 무의식상의 기억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에서 기억은 <나타남(의식상의 지각)>을 가능케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종교에서의 사후성의 논리는 잠재되어 있는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죄의식을 예수의 처형이라는 계기를 통해 신의 살해라는 주제 속에서 현실화시켰다. <원죄>라는 교리적 주제는 바로 잠재된 아버지 살해의 죄의식이 <왜곡>된 형태로 현실화한 것이다. 그래서 사후성의 논리는 원죄에 대한 죄의식과 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교리 속에 굴절된 형태로, 과거로서, 사후적으로 첨가된 것이다.
3)들뢰즈 : 공명과 사후성의 논리
데리다의 작업은 경험 혹은 현상성의 근원에는 그것의 근거로서 차연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와 동일하게 들뢰즈의 모든 작업은 경험의 근원에는 그것의 선험적 근거로서 차이 자체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들뢰즈는 이질적인 두 개 이상의 항들 사이 ㅣ 조화를 공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들뢰즈는 두 사건이 공명할 수 있는 근거는 둘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유사성은 공명의 조건이기는커녕 차이에 근거한 공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사성뿐 아니라 이미 인용했듯 경험을 구성하는 개념들 -- 동일성, 차이성, 유비성, 대립 -- 이 경험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차이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우리가 보았듯 프로이트에서는 <사후적 회귀>의 조건이 두 항 사이의 유사성이었던데 반해, 들뢰즈에서는 차이에 의해서 비로서 두 항간의 유사성과 공명이 결과물로서 생산된다.
사후성 논리의 특성은 <지체 현상>, <거꾸로 된 인과성>, <연기>, <사후적 첨가>. <결코 그 자체로 현전한 적이 없었던 과거> 등오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런 특성은 사후성의 논리만이 지닌 독특한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필연적 시간[잠복기의 시간]에서 연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두 항 사이의 공명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공명을 가능케 해주는 차이 자체가 무엇인지 매우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세 개의 항이 분류되고 있다. 서로 공명하는 항은 성인기의 두 항이며, 이 두 항을 공명하게 하는 차이 자체, <어두운 전조>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사건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공명하는 것은 유아기의 사건과 성인기의 사건이 아니라 성인기의 두 사건이며, 유아기의 사건은 성인기의 두 사건이 공명하게 해주는 차이 자체로 역할한다. 차이 자체와 잠복기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 논점 -- 1)사후성, 2)차이 자체의 초월적 지위, 3)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의 영향 -- 을 이해 해야만 한다.
1)사후성은 비현전적 과거(유아기의 사건)는 <연기>된 채 잠복기를 거쳐, 두 개의 사건을 서로 유사하게 만들어주는 <근거>로서 사후적으로 기능한다.
2)차이 자체로 인하여 출현한 두 항이 일으키는 경험상의 실재적 효과는 바로 공명이며, 그 공명이란 개념적으로 표현하면 <유사성>의 생산이다. 결국 유사성이란 내적 차이의 산물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차이 자체는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경험적 개념, 즉 유사성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이기에 <궁극적 차이>라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3)유사성 개념을 통해 엮어 준다는 것, 즉 하나의 초개인적 계열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성되는 특정한 계열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하고 다른 경험들과 연결되며, 주관을 초월해 있는 실재를 향해 열린다. 개인적 주관을 초월해 있는 실재란 인류의 본성을 말한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하려는 것은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ᆞ집단적인 것이며, 수많은 세대를 매개로 잠복기를 거치며 반복적으로 각성하는 것이다.
4 사후성의 논리를 넘어서
《앙띠 오이디푸스》에 와서 들뢰즈는 잠복기의 논리를 정면으로 이렇게 부정한다. <확실히 이 잠복기는 정신 분석의 가장 큰 속임수이다>
잠복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들로즈의 비판은 프로이트의 이론 가운데 오이디푸스론에 제한되며, 이런 배경 아래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잠복기를 오이디푸스 형성의 본질적 계기로 이해하고 오이디푸스를 -- 니체적 의미에서 -- 힘(욕망)의 반응적 형태, 즉 힘이 억압되고 왜곡된 결과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잠복기와 그 결과로서 갖게 되는 오이디푸스는 정상적인 인간 욕망이라면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 아니라, 욕망을 억압하는 파시스트적 기제라는 것이다.
<위대한 인간이란 그의 인격과 그가 내세우는 이념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라고 정의된다. 위대한 인간은 아버지의 변형이다. 이 위대한 인간에 대한 증오와 살해, 기억 흔적으로 잠재되어 버리는 살해 사건, 잠복기 동안의 가책과 죄의식, 그리고 궁극적인 사후적 복종이 프로이트가 서술한 집단 욕망의 오이디푸스적 형성 과정이다. 프로이트의 잠복기 이론이 이론으로 성립할 수 있기 위해 불가결하게 요구되는 개념인 위대한 인간은,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 예속적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고는 인정될 수 없는 개념이다.
들뢰즈는 <무의식 체계 속의 영속적이며 변함없기까지 한 흔적>을 비판한다. 이제 들뢰즈는 사라지지 않는 흔적, 트라우마와 대립하여, 적극적인 힘인 <망각 능력>을 찬양한다.
3 일의성의 존재론, 그리고 오이디푸스 비판
들뢰즈의 니체적 배경
<들뢰즈는 니체의 텍스트를, 그러므로 니체의 고유한 개념들과 이론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리고 <니체에 대한 그 해석은 이른바 들뢰즈 자신의 철학이라는 것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
1) 들뢰즈의 존재론과 니체 : 차이와 반복, 존재의 일의성
1>존재자들의 차이와 반복
들뢰즈 존재론의 핵심 개념인 존재의 <일의성> 및 개별자(존재자)들의 <차이>와 <반복>이, 니체의 <힘의 의지>와 <영원 회귀>에 대한 연구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이다.
(1)개념적 차이와 개념없는 차이
들뢰즈는 <차이 자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려고 한다.
플라톤 형이상학의 세 가지 항인 이데아, 모사물, 시뮬라크르의 경우를 보자. 이데아는 저 스스로는 규정을 받지 않는 <동일적인 것>이다.이데아에 종속됨으로써 이성적 대상이 되는 개별자를 <모사물>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동일적인 것(이데아)에 대한 개별자의 종속은 무엇을 통해 보장받는가?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개별자는 이데아와 유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동일성 개념은 유사성 개념과 상보적이다. 플라톤의 변증법은 개별자들을 유사 개념의 매개에 따라 동일성 또는 전체성에 귀속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동일적인 개념(이데아)에 귀속되어 있는 차이, 즉 <개념적 차이>라 부른다. 반면에 이 동일적인 개념에의 개별자의 귀속을 표현해 주는 유사성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존재자들(시뮬라크르) 사이의 차이는 <차이 자체>, <개념없는 차이, 매개되지 않는 차이>라 부른다.
들뢰즈 존재론의 기획 전체는 바로 이런 표상적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차이, 표상을 매개로 삼지 않는 차이,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개념 없는 차이>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차이 자체>를 표상으로, 즉 개념적 차이로 환원하는 장치들을, 동일성, 유사성, 대립(부정), 유비의 네 가지로 정리하고 <차이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변증법은 처음에는 서로 차이나는 것들, 즉 대립적인 것을 제시하지만 결국엔 부정의 부정, 정반합의 운동을 통해 차이를 동질적인 것, 전체성에 종속시키는 작업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들뢰즈의 니체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뼈대란, 궁극적으로 차이를 동일자에 종속시키는 변증법의 <부정의 부정>에 대항해, 차이가 차이 그 자체로서 계속 반복하게끔 하는 니체의 <긍정의 긍정> 개념을 확립시켜 보자는 것이다.
(2) 힘의 의지
차이 자체의 의미를 복원하고자 들뢰즈는 니체의 <힘의 의지>와 <영원 회귀>의 의미에 대해 물어나감으로써 달성된다. 힘의 의지란 무엇인가? 우선 힘의 의지는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가 아니라 <각각의 힘 안에 있는 의지> 혹은 <힘이 지닌 한 측면>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힘의 의지는 <이런 힘들을 발생하게(생겨나게) 하는 동시에 이 힘들간의 관계를 결정해주는 요소>라고 정의된다.
(3) 적극적 - 반응적, 긍정적 - 부정적, <법>의 의미
힘의 의지가 긍정적일 때 그 힘은 적극적이고, 부정적일 때 그 힘은 반응적이다. 즉 적극적과 반응적은 힘의 성질이며 긍정과 부정은 힘의 의지의 활동이다. <반응적>은 어떤 힘이 할 수 있는 바로부터 그 힘이 분리되었을 때의 힘의 상태를 가리키며, <적극적>은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가 온전히 유지 되었을 때 의 힘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면 왜 의지가 힘의 본 모습을 부정하는 일이 생기는가? 힘에 대해서 외부적인 <법>이 힘의 의지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힘을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일반을 통틀어 들뢰즈는 <법>이라 부른다. 힘을 왜곡시키는 <법>에 대한 비판이 들뢰즈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 다양한 법들이 각 분야에서 어떻게 힘의 의지를 억압하여, 그 의지의 힘을 부정하게 하는가, 그리하여 반응적인 힘으로 만드는가를 추적한다.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은 반응적 힘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 기반을 두고 있다.들뢰즈가 욕망이라 부르는 것은 니체의 힘의 의지 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이 오이디푸스라는 억압 장치 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일을 비판하는 것이다.
(4) 적극적 힘과 차이
힘의 의지가 <긍정>을 할 때의 힘, 곧 적극적 힘이란 그 힘을 제약하는 법, 즉 그 힘을 그 힘이 할 수 있는 바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힘이다. 요컨대 법은 외부적 강제로서 힘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며, 의지의 긍정은 힘의 내적 요소로서 힘들 사이의 관계를 자발적으로 발생시킨다.
들뢰즈는 힘의 의지를 <시뮬라크르 안의 기능>이라 일컫는다.
(5)반복의 의미, 이접적 종합
반복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반복 개념은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니체의 영원 회귀와 정확하게 동일한 개념이다. 들뢰즈는 영원 회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영원 회귀는 다양 그 자체의 재생산의 원리, 차이의 반복의 원리이다>.
들뢰즈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개념 없는 차이)는 상위의 동일성을 향한 목적론적 운동 속에서 지양되지 않는다. 의지의 긍정이 힘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긍정인 이상 그 힘들 사이의 차이가 영원히 <반복>해서 생산될 뿐이다. 반복은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반복은 차이 자체로부터 생산되며 따라서 <반복은 개념 없는 차이로 정의된다>.
들뢰즈는 이런 반복을 힘들의 <종합>이라고 일컫는다. 그가 말하는 종합은 <분리(이접)>, 혹은 <이질적 종합>을 뜻한다. 서로 차이 나는 상태로만, 서로 이접된(분리된) 형태로만 관계 맺는 힘들은 서로 이접적 종합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종합>이란 <차이로 맺어진 관계>를 뜻한다.
2> 존재의 일의성
(1) 일의성의 의미와 스피노자
일의성의 철학은 기존 철학 <존재의 유비>에 즉 <존재는 여러 의미로 말해지며 그 의미들 사이엔 유비적 관계밖에 없다>는 사상에 도전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존재가 말해지는 대상은 다의적인 반면 존재 자체는 일의적이다. 이것이 일의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들뢰즈의 일의성의 철학은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에게서 완성된 모습을 발견하므로 우리의 탐구도 스피노자에서 출발해야 한다. 스피노자에서 <신은 자신의 속성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속성들은 그 속성들에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 그러므로 신의 유일한 표현적 이름들, 신이 유일한 표현들은 속성들이다. 즉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말해지는 공통 형식은 속성들이다>. 즉 속성들은 < 존재론적으로 일자이며 형식적으로는 다수라는 것, 이것이 속성들의 지위이다>.말했듯이 양태들(개별자)은 속성들의 표현이며, 따라서 양태들에게도 존재는 하나의 유일한 실체만을 의미한다. 결론지으면 <속성들은 실질적으로, 질적으로 차이나는 의미들처럼 작동한다. 이 속성들은 하나의 동일한 지시체와 관련되듯 실체와 관련된다. 그리고 실체는 그 실체를 표현하는 양태들과 관련해서, 존재론적으로 유일한 의미로서 작동한다>.
속성들은 유일한 실체(존재)의 표현이고 양태들은 이 속성에 의존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철학이다.
(2) 니체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긍정의 긍정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양태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양태들은 실체에 의존적이다. 이것은 양태와 실체가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스피노자는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존재가 그 자신 안에 존재할 때 그것은 실체를 일컫고, 존재가 다른 것 안에 존재할 때 그것은 양태를 일컫는다.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 실재성,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를 표현한다.
이와 반대로 들뢰즈의 일의성의 철학은 존재가 (실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양태들에 대해서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니체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이라 불리는 사고방식의 전환은 양태들(존재자들)의 반복되는 생성, 즉 영원 회귀 자체를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 그 유명한 부정의 부정에 대항하는 긍정의 긍정> 즉 이중의 긍정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첫번째 긍정은 차이 나는 개별자들의 계속되는 생성을 가능케하는 힘의 의지의 긍정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긍정의 결과물은 생성이다. 두번째 긍정은 이 생성을 대상으로 하는 긍정이다. 즉 별도의 동일성을 가진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생성만이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존재는 개별자들의 생성이라는 일차적 원리에 뒤따라오는 <이차적 원리>일 뿐이다.
(3) 환영으로서의 존재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 개념을 요약하면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시뮬라크르)들의 생성 자체가 곧 존재이다. 이 존재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자들이 차이를 지니며 생성되는 상태, 곧 반복을 의미할 뿐이다.
2)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과 니체 : 가책 혹은 내면의 식민지
니체의 가책 비판은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의 밑그림이요 원천이다. 가책은 신 때문에 생겨나고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신과 아버지는 힘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에 대한 신앙(기독교)과 아버지에 대한 신앙(정신 분석학)은 힘을 반응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허구적인 구조인 것이다. 신(기독교)과 아버지가 허구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들뢰즈는 <오이디푸스는 내면의 식민지>라고 단언한다. 오이디푸스가 내면의 식민지라 하면 이것은 가족주의를 통한 욕망의 지배와 실재하는 경제 형태로서의 식민지의 공모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1> 니체의 가책 비판과 들뢰즈의 오이디푸스 비판
(1) 가책의 정의
가책이란 반응적 힘의 일종이다.
니체의 가책의 경우를 고려했을 때 그 허구적인 억압 기제는 기독교의 <원죄> 개념이요, 인간 내면으로의 힘의 방향 전환, 바로 내면적 고통, 죄의식으로서 가책의 발생이다. 그러므로 <가책의 첫째가는 정의는 ‘힘의 내재화에 의한, 내부로의 힘의 투사에 의힐 고통의 증대‘이다>. 가책의 고통은 원죄라는 허구적 장치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현존 자체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고통이다.
(2) 프로이트의 오류 추리
프로이트의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법이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를 근친사간으로 몰아가는 자연적 본능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근친상간이 가리키는 바는 물론 오이디푸스의 존재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주장은 <오류 추리>에 불과하고 여기에는 하나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다. 이 속임수는 이렇게 작동한다. <법이 욕망 혹은 ‘본능들‘의 영역에서 완전히 허구적인 어떤 것을 금지하고는 자신이 백성들(본능들)이 이 허구에 대응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생긴다>. 이와 같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허구적인 법이 욕망을 변질시킴으로써 생겨난 것이기에, <욕망의 덫>이며 <멍에>이자 <날조된 이미지>이고 <올가미 혹은 왜곡된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오이디푸스 비판을 니체의 가책 이론을 적용시켜 비판하고 있다. ‘니체의 가책과 들뢰즈의 오이디푸스는 모두 허구적인 장치들을 통해 <적극적인 힘 - 욕망>이 <반응적 힘 - 죄의식>으로 변질된 모습들이다.‘
3) 오이디푸스 비판은 언제부터 기획되었는가?
2> 니체와 들뢰즈의 민족학 ---- 부채 이론 : 해방으로서의 고통과 가채으로서의 고통
(1) 정신 분석학은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청신 분석학의 불미스러운 점은, 욕망을 길들이게끔 고안된 허구적인 장치들에 대항하는 비판으로 나가기는 커녕,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도록 <옮겨 놓인> 욕망에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주고 그것을 당연한 인간의 본성으로서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가 <허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욕망의 본성에서 유래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뜻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있는 곳엔 언제나 오이디푸스가 존재한다. 이렇게 오이디푸스에 대해 말한다.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며, 이는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의 결과라고 하는 특정한 의미에서이다>.
(2) 민족학적 연구의 필요성
들뢰즈는 오이디푸스의 탄생을 민족학적 관점에서 기술하기 위해 니체의 기술을 모방하고 있다. 그것이 니체의 부채 이론이다.
(3) 니체의 부채 이론
가책이라 신에 대한 일종의 부채 의식인데, 이러한 면모는 <대속>개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것을 겪음으로써 부채를 갚게 되는 그런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그것에 묶고,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가책이 마음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정서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선, 채무자에게 죄의식의 올가미를 씌우기보다는 오히려 <채무자를 해방시키는 부채>가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니체는 그러한 가능성을 축제로서의 고대 형벌 제도에서 찾는다. 처벌의 본성은 결코 고통받는 자가 내면으로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고통을 보는 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처벌은 하나의 진정한 축제이다>.
(4) 교환주의에 반대해서
들뢰즈는 오이디푸스가 욕망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 니체의 부채 이론을 응용한다. 들뢰즈는 부채를 교환가치의 일종으로 보는 구조 인류학의 기본 관점을 거부한다. <욕망은 교환에 대해선 무지하다. ‘욕망은 도둑질과 선물(증여)하기밖에 모른다‘>.
(5) 들뢰즈의 부채 이론
구르망체족의 성년식이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해 고통을 끼침으로써 상쇄하는 의식이다.
본래적인 처벌과 고통은 죄의식, 곧 오이디푸스와는 상관이 없으며 오로지 남이 보고 즐기는 데에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6) 잠복기에 대한 비판과 니체적 트라우마
이러한 외적 상처와 해방으로서의 고통은 프로이트적인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잠복기를 거쳐 출현하는 프로이트의 기억 흔적은 반응적 힘의 일종이다. 잠복기를 통해 탄생하는 이 반응적 힘은 원한이며, 가책, 죄의식이다.
그러나 이제 니체의 망각이, 잠복기를 통해 가책의 형태로 도래할 기회를 노리는 프로이트의 기억 흔적을 대체한다. 니체적 트라우마, 즉 남이 보고 즐기기 위한 외적 상처는 부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고통, 즉 부채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기 위한 고통인 것이다.이 고통 속에서 부채에 대한 책임은 결코 채권자에 대한 죄의식으로 발전하는 법이 없다.
(7) 니체의 상징들과 역사관
들뢰즈는 오이디푸스를 탄생시키는 파괴적인 요소를 니체의 역사관에 의존해 해명하고 있다.
가책은 교회의 등장과 더불어 탄생한다. 교회를 국가의 일종으로 규정하므로 가책의 원인은 국가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얻전 역사적 필연성이 국가를 탄생하게 한 것이 아니며, 합목적성이나 합법칙성 없이 역사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니체의 역사관이다. 그렇기에 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이와 함께 선교사들이 끌어들인 기독교는 전통 사회의 철저한 파괴적인 기능만을 할 뿐이다.
(8) 오이디푸스화, 자본주의화, 식민지화
이제 금발의 야수(식민 자본주의)들에 의한 자본주의 창설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혼인에 의한 씨족간의 결연은, 여자들의 순환을 통한 노동력의 재분배라는 사회적 생산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뜻에서 가족의 성원들은 사회 경제적 체제로부터 고립되어있는 사적인 인물들이 아니다. 그런데 국가의 창설자들이 가져온 자본주의는 오이디푸스와 공모하여 가족에 대해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욕망을 변질시킨다. 이러한 욕망의 가족화 혹은 가족이란 단위의 사회 체제로부터의 고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1)들뢰즈는 우선 이 고립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 형상 개념을 도입해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말하면 가족은 이제 경제적 재생산의 자율적인 사회적 형태에 종속하고 이 사회적 형태가 할당해 주는 장소에 있게 되는, 인간의 질료 혹은 재료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자본주의 체제의 한 장소, 자본주의가 마련해 준 한 <형상>을 채워주는 질료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을 떠맡고 이제 가족은 이 생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이 (질료>로서의 아이는 자라나, 자본이 들어선 대지로 가서 노동자의 <형상>을 입는다.
(2)그런데 가족화한, 혹은 사유화한 욕망은 어떻게 그렇게 순순히 자본주의의 하층 계급의 <형상>을 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가?
가족이 사회 체제의 <외부에> 놓여 오이디푸스화하는 일은 가족 체제와 사회 체제가 <들어맞게> 되는 일과 함께 진행된다. 그래서 모든 욕망의 대상은 그것이 지닌 사회적 함의가 제거되어 버린 채 가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 오이디푸스가 욕망의 본질로 고려되는 한, 가족 무대로서의 자본주의 또한 <욕망의 본질에 합당한 형태>로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빗장을 부셔버려서는 안되는 것도 내 욕망의 숙명이다.
니체가 기술했던 상황, 채무자에게 해방을 주던 형벌의 고통이, 가책이라는 내면의 고통으로 변질되는 상황이 오이디푸스를 통해 다시 한번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3) 거꾸로 선 비판을 두 발로 서게 하기
들뢰즈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요약하면 그것은 <표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다. 그것을 주관하는 최고의 원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니체가 수행하는,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와 이미 건립되어 있는 갗들을 다시 알아보는 일>이다.
칸트의 비판의 칼날은 인식과 도덕 자체에 가 닿지 않고 인식과 도덕에 관여하는 마음의 능력들의 <사용>에 가 닿는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은 과연 비판이 이런 것이어도 좋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가치들에 거짓이 있다며 새로운 가치들을 수립하는 것이 철학이 궁극적으로 떠맡아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니체의 비판 철학의 이념이다.
누가 비판을 수행하는가? <비판의 최종 심급>은 무엇인가? 니체에게 <비판의 심급은 힘의 의지이고 비판적 관점은 힘의 의지의 관점이다>. 비판의 최종 심급에서 힘의 의지(욕망)는 무엇인가를 욕망할 때마다 그 욕망하는 일이 무한히 계속 반복(영원 회귀)되어도 좋은지 매 순간 물어나간다. 따라서 우주의 질서로서 영원 회귀 자체가 힘의 의지의 <윤리적 선택>의 귀결이나 다름없다.
4 새로운 욕망 이론을 향하여
들뢰즈의 스피노자적 욕망 이론과 라캉
1) 그토록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욕망 이론은 라캉의 <분열된 주체> 개념과 라캉에게 그토록 중요한 <시니피앙>과 대립한다.
들뢰즈 욕망 이론의 한 정점을 이루는 《앙띠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세 가지 핵심 개념인 <욕망하는 기계>, <기관들 없는 신체>, <독신 기계>를 어떻게 스피노자 철학의 인도 아래 라캉의 욕망 이론이 들뢰즈적 개념들의 성립에 개입하는지 추적할 것이다.
2) 라캉의 충동 이론
1> 부분 충동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개념은 라캉의 <부분 충동>개념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라캉은 <심리적 실재의 과정 속에 나타난 충동은 [언제나] 부분 충동들이다>라고 말한다.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들일뿐 서로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법이 없다. 들뢰즈는 라캉과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기계들, 즉 충동들의 파편성 또는 전체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충동들은 그 대상들과 함께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향해 발전하게 하는, 충동들의 진화란 없다. 또 충동들이 그로부터 생겨나는 원초적 전체성이란 것도 없다.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동의 원천, 대상, 목적, 그리고 그것이 만족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각각의 충동에는 그 원천으로서 각각의 <기관>이 상응하는데 이 기관이 바로 <성감대>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동들에 대응하는 대상이 바로 <대상 a>라 불리는 것으로 이 대상 a는 통일적인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아니라, 부분 충동에 대응하는 파편적 조각이므로 <부분 대상>이라 불린다. 또한 충동의 목적은 <기관의 즐거움>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성애>의 형식 속에서 실현된다. 다시 말해서 충동의 원천은 기관(성감대)이고 충동은 대상a로 향하지만 대상 a는 충동이 진정으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은 기관 자체이므로 충동은 다시 기관으로 되돌아온다. 요컨데 하나의 기관은 충동의 원천이며, 동시에 충동의 운동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런데 무엇을 충동의 목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또 그것은 충동의 목표와 어떻게 구분하는가?
충동의 목적은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이지만, 그 기관 자체에 도달할 것이 충동의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충동의 목적은 성감대로부터 출발해 다시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자신의 순환적인 여정을 계속 생산해 내는 것이며,바로 이로부터 만족을 얻는 것이다.
2> 충동은 욕망과 어떻게 다른가?
충동, 욕망을 대상 a의 관점에서 구별하려고 할 경우 그 둘의 차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망의 대상은 또한 충동의 대상>이며, 그 둘 모두에게 이 대상 a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잃어버린 대상>, 결여, 결핍, 상실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본성상 이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고자 하나, 숙명적으로 이 대상 a는 이처럼 상징계 안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욕망이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이 대상 a의 <모방물>이거나 <대체물>일 뿐이다. 결핍과 불만족에서 오는 갈증은 오로지 대상 a를 거머쥘 때에만 해소될 수 있으므로, 욕망은 대상 a를 모방(대체)하고 있는 상징계의 한 시니피앙에서 다른 시니피앙으로 옮겨 가는 덧없는 유랑을 계속할 뿐이다.
이런 뜻에서 라캉은 충동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명시한다. < ----- 구순 충동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영원히 결여되어 있는 대상 주위를 도는 것이다>
3) 결여로서의 욕망과 생산으로서의 욕망
1> 욕망의 신학화에 반대하여
욕망은 늘 불만으로, 혹은 결핍으로 정의된다.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선의 이데아를 향한 모든 존재자들의 운동과 똑같이, 결여되어 있는 대상 a를 향한 욕망의 운동은 목적론적 형태를 띠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 이론은 일종의 신학이 된다. <결여는 순수하게 신화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정 신학의 일자와 같은 것이다>. 욕망에 대한 이러한 목적론적ᆞ부정 신학적 해석이 플라톤부터 레비나스에 이르는 서양 철학을 지배한다. 결국 결여로서의 욕망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욕망의 신학화>에 대한 비판이다.
2> 생산으로서의 욕망과 충동 ----- <생산>과 <기계>의 뜻
생산으로서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욕망을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칸트는 <이 능력은 자신의 표상을 통해서 표상들의 대상들을 실재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산의 관점에서 욕망을 정의한다. 생산하는 욕망 개념은 칸트보다는 스피노자의 <힘> 개념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의 힘은 신의 본질 자체이다>. 여기서 본질, 즉 힘이 바로 생산하는 일을 한다. <이 힘에 의해서, 신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 본질이 바로 속성들이다. <속성들은 실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은 속성들이며 이 힘이 하는 일은 자기 자신과 사물들의 <생산>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속성, 라캉의 충동,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모두 생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며, 그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즉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들뢰즈가 욕망(충동)을 가리키기 위해서 왜 <기계>라는 말을 사용하였는지 라캉의 충동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기계라는 말은 목적론에 맞선 개념이다. 욕망의 운동이 목적론적인데 비해 충동의 운동은 기계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순환만을 고집하는 운동일 뿐, 원인도 목적도 없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를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으로 정의한다.
4)욕망하는 기계와 기관들 없는 신체
1>충동들의 파편성(라캉)과 속성들의 이접성(스피노자)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매개로 라캉의 부분 충동과 관계할 수 있는지 해명해 보자. 충동들의 비유기체적인 부분적 성격, 즉 파편성은 두 요소간의 관련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무의식의 환원 불가능한 궁극적 항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유기체를 이루지 않는 이 요소들의 종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궁극적 요소들(무한한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에 반대 관계도 모순 관계도 없기 때문에,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실체 자체요, 부분 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즉 궁극적 요소들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각각의 속성들은 유일 실체에게만 귀속되며, 질적으로 서로 다른 속성들간에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속성들간에는 <이접적 관계> 혹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자면 <비관계>만이 있다. 이렇듯 서로 이접적인 속성들이 유일 실체에 귀속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귀속된다.
2> 기관들 없는 신체와 스피노자의 신
기관들 없는 신체는 무엇인가? 들뢰즈는 이 신체를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들뢰즈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칸트가 신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칸트는 신이 <실재의 총체>로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객체에 술어를 귀속시키는 방식, 즉 판단을 산출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재(술어)의 총체라는 칸트의 신 개념은 의외로 스피노자의 신 개념과 유사하다. 스피노자에게서도 모든 속성의 총체가 신이다. 스피노자의 개별자, 즉 양태들은 언제나 이 속성들을 통해서 존립한다. 칸트에게서, 개별자들은 신이 보유하고 있는 술어들을 통해서 하나의 판단 속에서 나타날 수 있듯이 말이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의 힘을 <리비도>라고 부르고, 이것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 그 힘을 신적인 힘, 즉 <누멘>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난데없는 명칭 또한 스피노자를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왜 이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누멘)를 신적이라 부르는가? 칸트에게서 만물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술어들 혹은 속성들을 이 실재의 총체로부터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총체는 신이라 불릴 만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별자가 지닐 수 있는 모든 힘의 원천인 욕망하는 기계들 전부가 귀속되어 있는 총체라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신적이며, 그것의 에너지는 신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3> 라캉의 알과 들뢰즈의 알, 라멜르
들뢰즈의 기관들 없는 신체와 라캉의 욕망 이론의 친화성은 <알>의 메타포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들뢰즈는 <우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기관들이 기관화[유기체화]되기 이전의, 그리고 층들이 형성되기 이전의 알로 다룬다>. 알은 아직 유기체를 형성하지 않은 단계이므로, 비유기체적인 기관들 없는 신체를 표현해 주는 은유로 사용되는 것이다.
라캉도 <알>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 이 알은 <부분 충동들의 발생>을 설명해 준다. 즉 껍데기 밖으로 흘러나온 알 같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라멜르>이다. 이 깨진 알, 즉 라멜르는 아직 성이 분화되기 이전 상태의 생명체인 것이다. 여기서 순수한 생존 본능에 지배되어 있는 라멜르가 성감대들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순간이 바로 부분 충동들이 탄생하는 시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는 한 신체 안의 성감대(부분 충동들의 기관)의 분포를 <비유기체적인 상태>, 바로 기관들 없는 신체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데서도 환인된다. <비유기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개체 이전의, 또 인물 이전의 특정성들의 분포가 ‘성감대[성적 신체들]‘이다. 부분 충동들의 기관인 성감대는 유기체를 이루지 않고 이접적 종합의 상태로 기관들 없는 신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5) 독신 기계 --- 부분적 주체 이론
1> 파생적 주체
속성에 해당하는 욕망하는 기계들과 실체에 대항할 기관들 없는 신체 뒤에 오는 양태에 해당하는 개별자들의 발생을 기술해야 한다.
서로 이접적인 비유기체적인 부분 충동들 각각에 주체 개념을 부여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자기 자신으로 환원되는 반성적 구조,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 동일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 자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현실적인 개별적 존재자가 주체로서 가지는 위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우리가 기술하려는 주체는 하나의 현실적 개별성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파생하는 개체로서의 주체이다.
2> 소비의 연접적 종합과 볼룹타스
주체는 욕앙하는 기계들, 즉 부분 충동들의 종합을 통해 생산된다. 들뢰즈는 이 종합을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소비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주체의 발생에 사용(소비)된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본래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접적인 다수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현실적 개별자를 낳는다는 뜻에서 연접적 종합이다. 주체란 그 안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강림해서 하나의 현실적 상태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는 떠나가곤 하는 껍데기 같은 것일 뿐이다. 주체가 분열증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주체가 이접적인 상태들 다수를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성질들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동일성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 주체를 규정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분열증적 주체에 <독신 기계>라는 이름을 붙이며, 이 기계의 에너지를 <볼룹타스(즐거움)>라고 부른다. 그런데 독신 기계, 즉 주체의 힘은 왜 불룹타스라 불리는가? 들뢰즈는 말한다. <욕망하는 기계의 체계는 종국에는 행복하게 되는 일반적이고 생산적인 분열증이다. --- ‘참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기계. 즐거움을 누린다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자유이다‘>. 분열증적 주체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임상적 의미의 정신 분열자(환자)와 진정한 의미의 분열증, 즉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구별할 때 우리는 주체의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주체의 자유란 바로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즉 수많은 상태들을 횡단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실현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과정의 계속이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3> 라캉과 전제 군주 시니피앙
라캉의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라캉이 말하듯 <시니피앙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대타자는 시니피앙의 질서라는 법의 체계로서, 욕망이 오이디푸스적 인간적인 형태인 아이의 욕망이 향해야 할 지점을 지정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욕망에 대한 욕망[대타자의 욕망에 응하는 욕망]이며, 대타자의 욕망>이다.
들뢰즈는 라캉이 정말 하고자 했던 바는 시니피앙의 질서 속에서, 오이디푸스와 시니피앙을 비판하고 그 이면에 은폐된 <욕망의 실재계적인 비유기체성>, 즉 비인격적이고 비유기체적인 부분 충동들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의식이 시니피앙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전제 군주적 체계의 도구임을 밝혀내는 것을 라캉의 업적으로 평가한다.
4> 라캉과 부분적 주체
주체는 근원에 자리하는 통일성의 원천 같은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들의 끊임없는 운동의 부산물이다. 즉 기계의 잔류물로서, 기계에 부속한, 인접한 부분으로 생산된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분적 주체가 라캉이 보이고자 한 진정한 주체 개념이다.
6) 욕망과 혁명 --- 결국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는
1> 비인물적 욕망들의 연결과 집단 동작주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줄 결연의 문제를 보자.
욕망을 인물들의 욕망으로 이해하는 이상 혹은 인물들의 혼인을 욕망들 사이의 결연의 불가결한 형태로 이해하는 이상 결연을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오로지 <‘성을 인간의 형체로 표상하는 것‘을 붕괴시킬>때에만, 즉 욕망을 비인물적인 부분 충동의 층위에서 이해할 때에만 찾아낼 수 있다.
주체성을 규정하는 개념들을 말살하고 욕망을 비인간적 층위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 <각자에게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을 돌려주는 것, 각자에게 그의 여러 성을 돌려주는 것>이 들뢰즈 욕망 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인물이라는 허구적 표상에 기반을 두는 분열된 주체(언표 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를 깨뜨리면 나타나는 <집단적 동인들>이란 바로 비인격적인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부분 충동들이며, 언표 일반은 바로 이 익명적인 욕망들의 표현이다.
라캉은 오히려 오이디푸스 개념을 이용해 혼인 질서를 규명하려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물들과 그 인물들을 지배하는 상징계적 법칙(오이디푸스)을 라캉은 <완전히>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실재와 만나는 방식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점을 조명하는데 먼저 부분 충동과 대상 a의 관계를 보는 둘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는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이 <실재로> 연결 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물들의 혼인을 대신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은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의 실재적 연결을 상정했을 때에만 유효하다. 반대로 라캉은 충동의 운동은 대상 a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돌아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자기 성애적> 형태를 띤다.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둘 때 라캉은 어떤 대상이든 사물의 빈자리[실재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은 오로지 환영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실재가 주체 앞에 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들인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정신 분석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번역하고, 모든 것을 환상에다 팔아먹으며, 환상을 보존하며, 특히 실재계를 놓치고 만다>. 즉 실재와의 만남은 실재상 일어나는 사건이지 환영이 아니다 라고 비판했다.
3>혁명에 관해서
들뢰즈는 두 종류의 혁명을 구별한다.1)의도적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것, 즉 <새로운 사회적 개체를 추진하는 원인들과 목적들의 질서 속에서 자기들의 활동을 하는> 혁명과, 2)<이와 반대로, 갑자기 돌출해 원인들 및 목적들과 관계를 끊고 사회적 개체를 다른 국면으로 되돌리는 욕망>에 의한 혁명이 그것이다.
여기에 가장 위험스러운 방식이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혁명 세력 자체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즉 <오이디푸스, 미르크스-아버지, 레닌-아버지, 브러주네프-아버지>가 생겨나고, 이에따라 혁명 집단은 자본주의적 지배 체제와 동일하게 부성적 주체 집단과 그 밑의 예속 집단으로 변질된다.
따라서 들뢰즈는 혁명의 가능성을, 혁명의 표상을 추구하는 집단에서가 아니라, 욕망(부분 충동)의 본성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욕망의 본성이 어떤 것이기에 그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일 수 있는가? 바로 실재계의 부분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 때문에 애초에 욕망은 <상징계에 대해서> 혁명적이다. 욕망이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오이디푸스적으로 차인 자본주의적 상징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심한 별들이 그렇듯, 기억될 만한 사상이란 그것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진리를 기르는 자들의 옆에서 늘 성가시게 빛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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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Meaning of Life 시리즈 8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비트겐슈타인 평전
선데이 타임스에서 ‘몽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을 철학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에서 탁월하게 직조해냈다‘ 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글을 읽고 책을 덮을 때 두께 만큼이나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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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레이 몽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읽는다. <논리-철학 논고>는 번호가 있고, 짧게 쓰여지고, 내용이 연결되어 있으니 그럭저럭 이해도 된다. 여기 저자의 설명까지 있으니 쉽게 다가온다.
딱! 거기까지다. 철학이 갖는 언어적 논리의 오류.
모르겠다.
비트겐슈타인에 더 빠져드는 이유가 이렇게 모르겠으니 자꾸 뒤적뒤적하나 보다.
겪어온 여정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관심갖게 된다.
이 책이 그렇다. 많이 이해되지만 더욱 알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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