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ㅣ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평점 :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철학책을 가까이 뒀는데 체계적인 학습이 부족하면 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적다고 할 수 있다. 때론 그런 철학적 해석이 살면서 확고해지는 관념과의 차이를 더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는 철학적 사고는 난해한 철학의 논리도 어렴풋이 그럴듯하게 들려 온다. 슬쩍, 눈으로만 이해되는 수긍하지 못하는 바닥이라고나 할까.
역사적 유물론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그의 역사철학은 역사의 서사적 연속성을 중단시켰고, 과거의 이미지로 현재성을 강조했으며, 억압받는 자의 전통을 읽어야 했다.
해제
철학적 비평의 대상이 입증해야 하는 것은 예술형식의 기능이 모든 중요한 작품의 근저에 놓인 역사적 사실내용을 철학적 진리내용으로 만드는데 있다는 점이다.
중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가려고 했던 벤야민은 정신사적 문예학과 예술학에서 숭상하던 정신 개념의 추상성과 신화적 성격을 비판한다. 사회는 이제 지식인들에게 관조적 사유의 여지를 더는 남겨두지 않는 상황으로 변해가는데도 여전히 또는 그만큼 더 악착같이 ‘정신 지배주의‘ 적 태도에 매몰된 지식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작품들을 그것들의 시대의 연관 속에서 서술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이 탄생한 시대 속에서 그것들을 인식한 시대, 즉 우리 자신의 시대를 기술하는 일이다. 이로써 문학은 역사의 기관이 되며, 문학을 바로 그렇게 만드는 일이야 말로 바로 문학사의 과제이다.
벤야민의 ˝사유이미지˝들은 많은 부분 그 자신의 경험, 특히 어린시절의 경험에 원천을 두고 있다. 그의 인식론 내지 인식 비판, 모더니즘, 서사이론 역시 그의 경험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벤야민은 경험을 ˝살았던 유사성˝이라고 정의한다.
견고한 자기동일성을 해체하고 현실의 물리적 시간을 지양하는 것은 ‘무의지적 기억‘을 통해 (비감각적) 유사성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미메시스 능력‘ 또는 상상력이 바로 이러한 미적 경험의 기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프루스트적 ‘무의지적 기억‘이나 초현실적 현실에 미메시스적으로 침잠하여 유사성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벤야민에게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초현실주의적 꿈의 세계는 벤야인에 와서 ‘각성‘된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꿈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재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진보의 신화에 대한 과격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이 진보의 신화에 의해 억압되어온 역사 전체를 구제하는 구제비평적 시각으로 특징지어진다.
주지하다시피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신화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온 계몽의 역사이자 동시에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발전해오면서 계몽이 다시 신화로 퇴행하는 부정적 변증법으로 점철된 역사로 보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이러한 이성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찾으려 한다.
역사 속에서 부정적 형태로 지속되는 신화적 폭력에 대한 비판은 벤야민의 문학학적 연구와 비평의 중심 주제였다.
상징적 예술 개념에 의해 억압되어온 알레고리의 구제, 영원한 동질적 시간의 연속체를 폭파할 필요성에 대한 통찰, 앞서 지적한 물화된 문화사 개념, 나아가 ‘원래 어떠했는가‘를 역사적 인식의 목표로 삼는 역사주의 방법 및 영원회귀의 사상에 대한 비판 등도 같은 신화의 비판의 맥락에 속한다. 신화의 극복은 역사를 그 신화에 추상적으로 대결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작용하는 신화적 이의성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사유를 통해 현상이 구제된다.
벤야민에서 역사는 무엇보다 이미지로서, 그것도 위기의 순간에 읽히는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모습이다. 또한 벤야민의 미메시스적ㆍ마법적 읽기는 대상을 탈신비화하는 자기변증법적 구조를 지닌다. 그가 해체하고자 한 부정적 의미의 마법에는 역사시대에 개인과 집단에게 운명적 힘으로 작용하는 각종 법적 폭력, 휴머니즘의 전통, 미적 가상, 자율적 인간과 예술 개념, 관조적 감상에 집착하는 태도와 이를 파시즘적으로 이용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예술과 미학을 역사철학적이고 사회비판적인 사유의 매개체로서 변증법적으로 고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운명과 성격
운명과 성격의 언어적 의미를 성찰하며, 더불어 표현되는 법, 종교, 도덕, 희극,비극 등의 개념도 파악한다.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궁극적으로 성격의 기능으로 통용되고, 무엇이 운명의 기능으로 통용되어야 하는지 어느 경우에도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이 대면하는 외부는 얼마든지 그의 내부로, 또 그의 내부는 얼마든지 그의 외부로 원칙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원칙적으로 그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p68
폭력비판을 위하여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에만 정향할 뿐인 시선은 기껏해야 법정립적인 것과 법보존적인 것으로서의 폭력의 형상들에서 변증법적 부침정도를 감지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 변증법적 부침의 변동법칙은 모든 법보존적 폭력은 그것이 지속되면서 그것 속에 대표되는 법정립적 폭력을 적대적 대항세력들을 억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약화시킨다. p115
종국에는 국가권력[국가폭력]을 탈정립하는 데서,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 p116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종교가 존재의 개혁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인 점.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 역사가 되는 형태.#절망이 종교적 보편 상태로까지 확대.
신학적ㆍ정치적 단편 (1921)
메시아 자신이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행복의 이념에 정향해야 한다. #자신의 길을 가는 어떤 힘이 반대로 향한 길에 있는 다른 힘을 촉진할 수 있는 것처럼 세속적인 것의 세속적 질서 역시 메시아적 왕국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
꿈 키치
사물이 꿈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면은 키치이다. 한 사람이 현실적으로 말할 줄 알면 알수록, 그만큼 사람들은 그를 더 완벽하게 오해하게 된다. 키치는 우리를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
초현실주의 - 유럽 지식인들의 최근 스냅 사진 (1929)
파리의 낡은 공간에서 부르조아의 반감에 따른 이미지가 생성된다. 그 이미지 공간은 보편적이고 완전한 현재성의 세계이다. 범속한 각성은 우리를 친숙하게 하는 그 이미지 공간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은 그 이미지를 실천적 행위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과 빈곤
누가 자기 경험을 얘기하면서 젊은이와 대적할 엄두를 내기라도 하는가?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 위에 전혀 새로운 빈곤이 닥쳤다. 경험의 빈곤은 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끈다. 새롭게 시작하기, 적은 것으로 견디어내기, 적은 것으로부터 구성하고 이때 좌도 우도 보지 않기이다.
19세기 수도 파리 <파사주>독일어판 개요(1935)
1.푸리에 혹은 파사주들
파리의 파사주들은 1822년부터 생겨난다.파사주들이 등장하게 된 조건은 섬유산업의 호황과 철조 건축의 시작이다.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집단의식 속에 이미지들을 산출하는데, 이 이미지들 속에서 새것은 옛것과 상호 침투한다. 다음 이미지들이 꿈 속에 등장하는데, 이 꿈 속에서 다가올 시대는 원사의 요소들, 계급없는 사회의 요소들과 혼용되어 나타난다. 이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경험들은 집단적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고, 이 경험들은 새로운 것과 상호 침투하여 유토피아를 빚어낸다. 이 유토피아는 오랫동안 남는 건축물에서 시작하여 신속하게 지나가버리는 유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삶의 형상들 속에 그 흔적을 남겼다.
2. 다게르 혹은 파노라마
건축이 철을 사용하면서 예술을 넘어 성장하기 시작하듯이 회화 역시 파노라마를 통해 예술을 벗어나게 된다. 예술과 기술의 관계가 전도될 것을 예고하는 이 파노라마들은 동시에 새로운 생활감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라고는 한 의회 연설에서 사진을 선보인다. 사진기의 렌즈가 갖는 의미는 새롭게 열리는 기술과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여 회화와 그래픽의 정보에서 주관적 요소가 애매하게 느껴지는 그만큼 더욱더 커지게 된다.
3. 그랑빌 혹은 만국박람회
만국박람회는 상품이라는 물신을 찾아가는 순례지이다. 만국박람회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미화한다. 박람회는 상품의 사용가치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하나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판타스마고리아를 열어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정신을 분산시키며 즐기기 위해 판타스고리아 속으로 들어간다. 만국박람회는 상품들의 우주를 구축한다. 상품적 성격을 우주로 확산시킨다. 유행은 상품이라는 물신이 경배받고자하는 의식을 규정해준다.
4. 루이 필리프 혹은 실내장식
실내장식은 사적 개인의 우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담아두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5. 브틀레르 혹은 파리의 거리들
도시를 바라보는 알레고리 작가의 시선은 소외된 자의 시선이고 거리 산보자의 시선이다. 그는 군중 속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현대는 보들레르 시의 중심을 이룬다. 그 현대가 언제나 원사를 인용한다. 여기서 인용은 이의성을 통해 일어나는데, 이의성은 이 시대의 사회적 상황과 산물들에 고유한 법칙이다.
거리 산보자의 마지막 여행은 죽음이다. 이 여행의 목적지는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속성이다. 새로움은 허위의식의 정수이고, 유행은 그 허위의식의 지칠 줄 모르는 매개자가 된다. 예술은 이제 새로움을 자신의 최고의 가치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속물이 예술에서 새로운 것을 판단하는 자가 된다.
5. 오스망 혹은 바리케이드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초창기를 지배했던 판타스마고리아를 종식시키게 된다. 부르조아 계급과 손에 손을 잡고 1789년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라는 허상은 파리 코뮌을 통해 사라지게 된다. 19세기 생산력의 발달은 형상화의 형식들을 예술로부터 해방했다. 이러한 해방 과정의 시초를 연 것은 엔지니어 구조물로서의 건축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진에 의한 자연의 재현이다. 판타지의 창조력은 광고 그래픽으로 실용화된 태세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문학은 신문 문예란에서 몽타주에 예속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나온 것이 파사주, 실내장식, 박람회장, 그리고 파노라마이다. 이것들은 꿈의 세계의 잔재들이다. 깨어날 때 꿈의 요소들을 활용하는 일은 변증법적 사유의 본보기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사유는 역사적 깨어남의 기관이다. 모든 시대는 다가올 시대를 꿈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면서 깨어나기를 조급하게 기다린다.
19세기의 수도 <파사주>프랑스어판 개요(1939)
서문
우리가 지난 세기에 얻어낸 새로운 삶의 형식들, 그리고 경제적ㆍ기술적 토대 위에서 구축한 창조물들이, 이처럼 문화가 물화된 형태로 재현된 결과, 판타스마고리아의 우주로 진입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창조물들은 감각적 현전의 직접성 속에서 겪는다. 그것들은 판다스마고리아들로 나타난다. 파사주, 만국박람회, 거리산보자의 경험이 그러하다.
인류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새로운 것이 예전부터 늘 있어왔던 현실임이 드러난다.
결론
모든 인간 존재는 자신의 존재의 매 순간 영원하다. 그들은 영속화된 현실이다. 여기에 심각한 결점은 진보가 없다는 것이다. 영원성은 무한 속에서 똑같은 표상들을 태연하게 연출하고 있다. 19세기는 새로운 기술적 잠재성들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판타스마고리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가 모더니티이다. 블랑키의 비전은 모더니티 안으로 우주 전체를 집어넣었다.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1. 에두아르트푹스의 시대는 최근의 과거에 속하며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이론의 최근사이기도 하다. 푹스는 유물론적 예술 관찰의 개척자로서 수집가였다. 그의 시대의 역사적 유물론은 이렇게 표현한다. 역사는 그에게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이루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때그때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제시한다. 사적 유물론은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하는 현재의 의식을 향하고 있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940)
경과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간이 멈춰서 정지해버린 현재라는 개념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재 개념이야말로 그가 자기의 인격을 걸고 역사를 기술하는 현재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와의 유일한 경험을 제시한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