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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ㅣ 발터 벤야민 선집 3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읽는다. 단편중에는 유독 짧은 글도 있다. 읽는다. 다시 읽는다. 저자는 여기에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 생각해본다. 인터넷을 통해 이곳 저곳 찾아본다. 저자의 철학을 놓칠까 조바심이 난 것일까? 알듯 말듯 의미가 조금씩 다가온다. 참 조심스럽기도, 부담스럽기도 한 책이다.
이어서 <베를린 연대기>를 읽는다. 앞의 단편적 이미지를 서사적으로 풀어내니 읽기가 편하기도 하지만 이야기 속에 스며드니 유년의 경험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요약>
역사적 경험과 인식의 계기를 얻기 위해 유년시절에 대한 이미지를 포착한다. p9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함으로써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p33
나의 대도시 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은 아마 미래의 역사적 경험을 미리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p34
티어가르텐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 아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에서 길을 읺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헤매는 사람에게 거리의 이름들이 마치 마른 잔가지들이 뚝 부러지는 소리처럼들려오고, 움푹 패인 산의 분지 처럼 시내의 골목들이 그에게 하루의 시간 변화를 분명히 알려줄 정도가 되어야 도시를 헤맨다고 말할 수 있다.
카이저 파노라마
내 삶의 어느 때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에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올리브색 햇빛이 쏟아지는 그곳 미라보 광장에서 놀았던 적이 있다고
전승기념탑
즉 그들은 회오리바람에 채찍질당하고, 수액을 흘리는 나무 그루터기에 베이고, 빙하 덩어리에 갇혀 꽁꽁 언 채 어두컴컴한 깔때기 같은 지옥에서 허덕이는 무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전화기
그것은 밤의 소음들이었다. 그소음이 들려오던 밤은 모든 진정한 탄생에 앞서 오는 밤과 같았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 태어나는 것은 전화기 안에 잠들어 있었던 목소리였다.
나비채집
나는 눈치 채이지 않게 사냥감에 다가가 낚아채기 위해 내 자신이 아예 빛이나 공기 속으로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마지 않겠는가.
여행과 귀환
식구들이 아직 자고 있지 않은 여행 전날, 침실의 문틈 사이로 비쳐든 불빛 띠는 여행의 첫 신호가 아니었던가?
슈테글리츠에서 겐티너로 가는 길모퉁이
내가 들어서면 언제나 그곳은 이 작고 까만 새의 지저귐으로 가득차 있었다.
찬장
나이 어린 돈 후안이 된 내 손은 이윽고 찬장의 칸을 구석구석 더듬어 나갔다. 내 손길 뒤에는 무언가 층층이 새어나오고 다량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손은 아무런 탄식도 하지 않고 늘 새로워지는 처녀성이라고나 할까.
부고
흘러간 삶의 어둠 속에서 어느 땐가 울렸던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들은 하나의 소리 형태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그러한 소리(단어)들을 놓고간 미래이다.
숨을 곳들
무거운 가면을 쓴 마법의 사제가 되어 아무 생각도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들켰을 때 나는 큰 소리를 질러 나를 변모시킨 악령이 빠져나가게끔 했던 것이다.
두개의 수수께끼 이미지들
텅빈 무덤과 충천한 용기. 란다우의 죽음과 기사의 노래.
블루메스호프 12번지
현관이 그들의 여주인과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의 파도 위에서 춤추기라도 하듯, 집안의 페르시아 양탄자에 여전히 사마르칸트의 먼지가 끼어 있기라도 한 듯.
무메레렌
오해는 내게 세상을 오해시켰다. 즉 오해는 세상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사교모임
그 장신구는 사실상 어머니에 장식띠에 자리 잡고 있는 사교모임이었다. 또한 내게 바깥세상의 위험한 모든 것으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해주는 부적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날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실지를 이야기해주시면 나는 인형을 가지고 가듯이 그 이야기 선물을 곤한 잠 속으로 가지고 가면서 위로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천사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장에 보내 가난한 집 아이들로부터 모직으로 된 양을 사게 하거나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하기에 쑥스러운 적선을 아이들에게 시켰다.
로지아
골목마당으로 통하던 그늘진 로지아에서 시간은 낡아갔다.
도시의 신이 현존해 있는 그곳에서는 덧없이 흘러가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못한다.
크루메 가
붉은색 니스가 칠해진 수영장, 맞은편에는 전당포, 서쪽 편에는 문방구, 멀지 않은 곳에 열람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난 것을 조심스럽게 집으로, 나의 불빛 아래로 가져갈 수 있었다.
달
그 방은 달 이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달은 이 세상의 존재와 가벼운 유희를 벌이고 있었다.
유년시절에 경험했던 달의 지배는 돌아오는 다음 시대에도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꼽추 난쟁이
모든 사물은 오그라들었다. 마치 그들에게 혹이 생겨 아주 오랫동안 난쟁이의 세계에 동화라도 된 것처럼.
내가 사물에 다가갈 때마다 망각의 창고에 저장하기 위해 거기서 절반을 회수해가는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