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인 ㅣ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귄 반 친구인데 좋아하는 것이 비슷해서 그런지 지금도 자주 만난다. 올해 그 친구의 생일에, 그 친구가 서점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읽고 싶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서 그 책을 선물해 주었다. 마침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때 그 작품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가 상영되어 그 친구와 보러가려고 했으나 안타깝게 예매에 실패하기도 했다. 며칠 뒤, 책을 다 읽었는지 친구는 아주 아주 재밌다면서 요시다 슈이치에 대한 찬양론을 살짝 읊기도 했다. 또 그때 마침 요시다 슈이치의 신간 '요노스케 이야기'가 서평 이벤트에 자주 올라서 신청하기도 했다.(떨어졌지만…) 그리고 한 달 뒤 내 생일에 그 친구에게서 선물을 받았는데 바로 이 책, 요시다 슈이치가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한 '악인'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한 동안 계속 요시다 슈이치와 얽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 사실 시바 료타로, 히가시노 게이고 외의 일본 작가는 접해 본 적이 별로 없던 터라 요시다 슈이치는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일본 작가로 손꼽히지만 접해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악인'이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었다.
뒤표지를 보고 대강의 줄거리를 예상하고 글을 읽어나갔다. 시종일관 흥미진진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책은 이야기의 구성이나 흐름이 비교적 평이하다. 사람이 죽어서 범인을 찾고, 범행동기와 방법을 찾아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평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을 때처럼 빨리 뒷내용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단숨에 읽어지지도 않았다.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나빴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좀 더 내용에 집중하고 싶게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의 평이함은 사건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을 묘사하는데서 왔기 때문이다. 만남 사이트를 통해 남자를 만나서 가볍게 관계를 맺고 돈을 받으면서 그 사실을 만만한 친구에게 자랑까지 하다 결국 짧은 인생을 끝낸 요시노, 어릴 적 상처를 외면한 채 살아오다 어느 날 사람을 죽이고 난 뒤에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고 경찰에 붙잡힌 유이치, 그리고 무료한 생활을 되풀이하다가 경험한 일탈에서 사랑을 느끼지만,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선 같이 도망가기를 결심한 미쓰요, 이 세 명의 주요 인물들뿐만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은 슬픔도 모자라 딸에 대한 비난을 감당해야하는 이시바시 부부. 사건 당일 요시노를 고개에 내버려두어 살인용의자로 몰려 도망치기도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뒤 무용담이라도 들려주는 듯 그 사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마쓰오. 우연히 만난 요시노의 아버지에게서 삶의 향기를 느끼고 그를 친구 마쓰오에게 데려다 주는 쓰루다 등등 다 나열할 수도 없이 많은 인물들의 사건 뒤 겪는 심적, 환경적 변화들이 묘사돼 있다. 다른 소설에선 그냥 넘어갈 듯한 주변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히 되어있어 전체적인 사건에 대한 이해가 한 층 깊어지고 그에 따라 공감도 커지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곱씹는 동안 가장 많이 생각 한 건 '악인惡人이 존재하는 가'이다. 악인을 풀어보면 말 그대로 '나쁜 놈'이다. 나쁜 놈이라는 말은 자주 쓰는 탓인지 악함이 덜하게 느껴지지만 '악인'하면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난 연쇄살인범 김영철이 떠오른다.) 매스컴에서는 유이치와 같은 살인자를 아주 쉽게 '악인'으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악인이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유이치는 살인자이기도 하지만 미쓰요와 유이치의 할머니에겐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이 사실을 넓혀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들도 누군가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요시노는 나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요시노는 사건의 피해자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파헤쳐진 그녀의 진짜 모습은 만남 사이트를 통해 만난 남자들과 관계를 맺고 돈을 받아온 결코 '도덕적'이거나 '모범적'일 수 없는 여자다. 이 사실이 밝혀져 그녀의 부모는 전 국민에게 비난을 받고, 심지어 전화와 우편을 통해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어 수모를 당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요시노는 엄연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었다. 죽기 전 요시노가 유이치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유이치를 악인으로 만든 피해자인 요시노가 더 악인같게 느껴지게 했다. 유이치는 요시노를 살해함으로써 악인이 되었지만, 난 왠지 요시노가 유이치보다 더 악인으로 느껴졌다.
글을 쓰던 중 얼마 전 본 '집행자'라는 영화의 한 인물이 생각났다. 한 가족을 죽인 살인강도죄로 사형수를 의미하는 빨간 명찰을 달고나오는 '성환'이라는 이름의 죄수다. 그는 교도소에서 김 교위(박인환)와 매일 장기를 두며 30년 동안 우정을 쌓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하게 부녀자들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장용두가 잡혀서 사형수로서 교도소에 복역하게 된다. 매스컴과 여론은 그의 사형집행을 서두르라고 한다.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장용두와 함께 성환에게도 사형 집행명령이 떨어진다. 워낙 오랜 기간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터라 그 교도소에 김 교위말고는 사형집행을 해본 교도관이 없었다. 그래서 김 교위가 사형집행 명령을 받게되고, 30년 지기 친구를 죽이게 된 김 교위는 괴로워한다. 같이 집행을 맡은 교도관 배종호(조재현)는 괴로워하는 김 교위에게 '사람을 세 명이나 죽인 살인범이라고요'라고 말하지만, 그에 반박하듯 김 교위는 '그 놈, 여기서 산지가 30년이 넘었어... 지금 그 놈 손에 칼 쥐워줘봤자 개미새끼 한 마리 못 죽일 놈이라구우.....'라고 울음 섞인 절규를 토해낸다. (대사 내용은 내 기억을 더듬어서 쓴 거라 정확하지 않다.) 영화의 후반부, 극장 안을 훌쩍훌쩍 거리는 소리로 채우면서 결국 성환은 김 교위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실수였는지 사고였는지 계획된 범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죄를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악인'이었다. 적어도 피해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악인'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사건 30년 후의 그는 너무나도 선량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유이치 또한 매스컴을 통해 알게된 보통 사람들, 그리고 요시노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악인'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누군가에게는 '악인'인 이들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악인惡人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악의'를 품을 수는 있더라도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선인善人'또한 없는 것이다. 물론 악의를 품더라도 그것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을 가다듬고 훈련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래서 악의보다는 선의를 더 많이 마음속에 품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그저 사람일뿐이다. 사람은 악인 혹은 선인으로 구분 할 수 없는 그냥 '사람'일 뿐이다. 그 안에 '악의惡意'를 품을 수도, '선의善意'를 품을 수도 있는 그저 사람일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책들에 비해 읽고 난 뒤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끝내 작가의 집필의도를 짐작 할 수가 없다.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 서문이나 작가노트 같은 것을 남겨주었다면 조금이나마 짐작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마저 없으니 답답하다.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에서, '그들은 사람이란 얼마나 약하고, 악하고, 외롭고, 강하고 그리고 우아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며, 우리는 그들에게서 고귀함과 나약함이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엿본다. 《악인》은 이렇듯 하찮은 것, 천박한 것, 그래서 차마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인간의 감춰진 모습들을 품위와 우아함으로 녹여내며 독자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베어들게 한다. 그동안 작가에게 감지되던 강력한 힘이 유감 없이 발휘된 걸작이라 할 수 있다'며 이 책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렇게 문제를 던져놓고, 아무런 힌트조차 없이 입을 닫고 있는 작가에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개운하지가 않다. 중간에 답지를 들춰보고 싶은 걸 참고 수학문제를 열심히 풀어서 답을 구했는데, 답지가 없어 답을 맞춰보지 못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 스스로 답을 찾아냈기에, 그의 답이 없어도 상관은 없다. 독자들이 모두 자신의 답을 정답으로 삼길 바래서 입을 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너무 생각 없이 사는 듯 한 내 일상에 문제를 던져준 작가에게 고맙다.
그런데 도망만 치던 하루하루가‥‥‥,
등대 오두막에 숨어 떨던 하루하루가‥‥‥,
눈이 내려 두 사람이 얼어붙었던 하루하루가 아직도 그리워요.
정말이지 바보처럼 아직도 그 생각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요.
분명 저 혼자만, 혼자서만 들떠 있었던 거겠죠?
요시노 씨를 죽인 사람인데요, 나를 죽이려 했던 사람인데요.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 뿐이죠. 네? 그런 거죠?
-474~4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