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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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일간 비가 내렸다. 화려하게 꽃망울을 터트리자마자 비에 젖어 풀이 죽었던 벚꽃들이 이젠 질퍽질퍽한 빗길에 천덕꾸러기마냥 지천에 나뒹굴고 있다. 그러고는 벚꽃의 비참한 최후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며칠 견디지도 못할 운명이면서 가벼운 빗방울에도 못이길 것을 그들은 왜 그토록 화려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어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제 14권 '그리스도의 승리'를 읽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거의 500년 이상 팍스 로마나를 일구어낸 로마 문명이지만,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문명이었지만, 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들도 벚꽃만큼이나 허망하게 그 운명을 끝내고 만다. '로마인 이야기' 14권은 몰락의 길로 접어든 로마문명의 씁슬한 뒷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제 2권에서 한니발에게 쑥대밭이 되어버렸던 기원전 3세기의 로마와 비교하면, 서기 4세기의 로마는 힘으로 보나 풍요로움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훨씬 문명화되어 있었지만, 젊을을 소실한 한 노파가 무너져가는 대저택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벚꽃은 피기전의 설레임이 아름답다. 막 피어나려는 꽃망울이 눈부신 햇살을 만나는 것처럼, 젊었던 로마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만난 것은 로마의 행운이었다. 1776년 당시 아메리카에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제임스 메디슨이 있었던 것이 미국의 행운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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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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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루소, 마르크스와 헤겔, 마르크스와 바쿠닌, 마르크스와 다윈, 마르크스와 레닌.........


마르크스는 1818년에 독일의 트리어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유럽은 보나파르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빈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군주들이 겨우 한 숨을 돌리던 시기이며,  혁명의 실패로 인해 계몽주의의 회의와 함께 ‘로맨티시즘’이 대두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베를린 대학시절은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이 주류를 이루던 때로 마르크스 역시 청년 헤겔주의자로서 변증법을 사상적 기초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유물론자였다.  마르크스는 30세도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비평가로서 편집인으로서 혁명가로서 상당히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프랑스로, 벨기에로 그리고 영국으로 평생 동안의 고달픈 망명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하게 된다. 1848년 프랑스 혁명으로 서둘러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꿈꾸며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는 등 전승기를 구가하지만 루이 보나파르트가 집권하면서 결국 마지막 피난처인 런던으로 망명하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34년동안 런던에서의 망명생활은 4명의 자녀를 잃을 정도의 극심한 가난과 엉덩이의 종기, 간질환, 만성 기관지염, 결국에는 폐암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20년간의 지긋지긋한 연구 끝에 1867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 <자본>을 출간하게 된다.  노동자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위대한 스승이었던 마르크스는 1883년 폐종양으로 사망할 때까지 비록 그 자신의 삶은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았지만,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유토피아를 완성하기 위한 집념을 불태웠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학문적 자위에 지나지 않는 점을 강조하면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40년 동안 마르크스의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마르크스는 실천적 이론을 강조하였지만, 그의 삶은 결코 실천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열망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생활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그는 세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나오는 ‘폴스타프’같은 인간밖에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어떻게 천재를 질투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천재란 아주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재주가 없는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이 얻을 수 없는 권리임을 알 수 있지. 그런 것을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이 엄청나게 속 좁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꼴밖에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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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0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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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상 - 2월혁명의 발발과 이중권력의 수립
레온 트로츠키 지음, 최규진 옮김 / 풀무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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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이제 겨우 3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 해가 지나기 전에 이 책을 다 읽으려던 나의 계획이 이루어져서 기쁜 마음으로 새해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진해로 내려온 이후로 예년과 다르게 올해 연말은 비교적 책과 함께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방에서의 생활은 약간 적적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내적 성숙의 기회인 것만은 확실하다.


1권 <2월 혁명의 발발과 이중 권력의 수립>, 2권 <반 혁명세력의 준동>, 3권 <노동자 국가의 수립> 으로 이루어진 총 1600페이지 분량의 <러시아 혁명사>는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 중심에 있었던 저자 트로츠키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 졌기 때문에 어떤 혁명사보다도 사실성이 뛰어나다. 또한 혁명가답지 않은 화려한 문장과 행간에서 흘러나오는 문필력은 당시 가장 오른쪽에서 위대한 정치가이자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 비유될 만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스탈린에 대한 지나친 반감과 볼셰비키당 중에서도 가장 왼편에 서있었던 혁명가로서의 편견은 역사서로서의 중립성을 다소 해손 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왕실의 골칫거리였던 라스푸틴의 암살과 함께 부패한 로마로프 왕가의 축배로 시작된 러시아의 1917년은 비록 제국주의 전쟁인 세계 1차 대전 중이긴 하였지만, 짜르의 통치와 봉건 귀족들에겐 나름대로 희망찬 새해였다. 

 

루이 16세 만큼이나 무능했던 니콜라이 2세는 2월 혁명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던 날에도 그의 황후에게 “아주 좋은 날씨, 당신이 건강하고 평온하길 비오....부드러운 사랑을 당신에게...”라는 전보를 보낼 정도로 위기의 상황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혁명과 반 혁명세력간의 이중권력, 혁명세력의 봉기와 반혁명세력의 쿠데타, 보나파르트와 케렌스키 등 여러 면에서 러시아 혁명은 120년 전의 프랑스 혁명과 너무도 유사한 과정을 겪게 된다.  단지, 프랑스 혁명은 결국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그친 반면,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2월 25일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총파업과 방위군 연대들의 반란으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수립하게 된다. 노동자, 병사 계급으로 이루어진 소비에트와 자본가 계층과 민주주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연립정부로 구성된 이중권력의 엉성한 체제를 형성하게 되고, 혁명세력의 ‘7월 시기’를 거처 코르닐로프를 수반으로 한 반 혁명세력의 ‘8월의 쿠데타’로 일진일퇴를 거듭한 후, 보나파르트체제를 꿈꾸었던 동궁의 주인 케렌스키를 향해 볼셰비키 당의 무장봉기를 촉구한 레닌에 의해서 10월 혁명은 인류역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노동자 소비에트 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사는 그 어떤 혁명사보다도 역동적이며 유기적인 변증법적 역사흐름을 보인다. 이런 유기적 흐름을 지배하는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혁명가가 아니라 바로 인민 대중이었다. 대중은 혁명의 법칙을 인식하진 못하지만, 2월 혁명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민의 봉기는 자연 발생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소수였던 볼셰비키 당에게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절대적 지지를 보낸 대중의 인식 변화는 우연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혁명의 과정은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른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주장한다.


지난 과거에 있어서 소비에트체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이자 발현 체 가운데 하나였다. 인류의 다양한 불평등들, 계급문제, 종교문제, 여성의 권익문제와 민족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던 10월 혁명이 러시아 대중에게 선물한 소비에트체제는 비록 그 유토피아적 이상의 종착점인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20세기 내내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충실한 감독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신성한 사적 소요권’에 대한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소비에트체제는 무너지고 전 세계가 자본민족주의 체제로 돌입한 21세기에는 다시 종교와 민족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인류역사는 이렇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신의 모순 속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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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 역사 명저 시리즈 2
스탠리 월퍼트 지음, 이창식 신현승 옮김 / 가람기획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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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페이지도 않되는 역사책이라는 선입관에 쉽게 생각하고 책을 들었다. 하지만, 역시 세계적인 인도사의 석학인 스탠리의 책은 그 첫 장부터가 달랐다.


인도의 강, 열, 몬순, 산을 통해서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간 인도 지역적 특성의 개략적인 설명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으며, 특히, 인도의 생명줄과도 같은 몬순(6-9월 사이에 인도에 불어오는 우기)의 항로를 따라 펼쳐지는 자연의 위대함은 나의 숨을 멎게 했다.


인도의 역사는 신화의 역사이다. 지금까지도 인도인의 정신에 고스란히 스며있는 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그 신화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빛내고, 그리스 신들의 마지막 전쟁인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기원전 1000년 무렵, 인도의 모든 신화를 간직한 인더스강 유역의 선주민을 북방의 아리아인이 침범하면서 인도의 장엄한 역사는 시작된다.


그 후, 수세기가 흐르고 알렉산더 대왕이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인더스 강을 건너면서 제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게 된 어린 찬드라 굽타는 중국 초대 통일 왕조인 진나라가 일어나기 1세기 전, 기원전 324년에 마침내 처음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를 탄생시킨다.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진시황제가 중국 대륙을 분서갱유의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을 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대륙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아쇼카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이 후, 불교문화는 너무도 찬란했기에 그 불꽃을 금방 소멸한 채, 기원 후 300년경에 두 번째 통일 왕조인 굽타 왕조에 의해서 통합된 힌두교가 인도인의 정신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솔로몬에 의해서 유대의 성전이 건립되고, 유대교 통합이 이루어지자마자, 유대 12지파의 분열과 바빌론의 유수를 시작으로 2500년 동안의 유랑생활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가 인도인의 정신적 통합을 가져오자마자, 서방에서 아라비아 해와 이란 고원을 넘어 이슬람 정복자들이 코란을 들고 물밀듯이 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유대인은 그 삶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것에  비해, 인도인들은 그 삶의 터전 뿐 만아니라, 정신적인 터전도 함께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의 마지막 이슬람 정복 왕조인 무굴왕조는 나름대로 현명한 군주들을 배출한 왕조였다는 것이다. 무굴왕조는 징기즈칸의 화신이라 주장하는 절름발이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에 의해서 1530년경에 건립된 후, 1858년에 세포이 반란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기 직전까지 델리의 권좌를 누리게 된다.


약간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난 여기서, 오스만 제국(1299∼1922)과 무굴왕조(1526∼1857)그리고 청나라(1636∼1912) 의 그 비슷한 탄생과 성장 그리고 종말에 대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드 2세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빈 공성전을 끝으로 쇠퇴하기 까지 100년 동안의 전성기를 누린다. 무굴제국의 위대한 통치자 아크바르(1556-1605)로부터 시작된 전성기는 1650년대 샤 자한의 타지마할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청나라는 저 유명한 강희제와 옹전제와 견륭제에 이르는 1660년대부터 약 100년간의 전성기 동안 명나라 때 보다 4배나 많은 영토 확장과 함께 찬란한 문명을 꽃 피우게 된다. 100년간의 시차를 두고, 아랍, 인도, 중국에서 릴레이 하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오스만, 무굴, 청 제국이 19세기가 접어들면서 너무도 허무하게 서구 열강에 의해서 늙은 병자의 취급을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너무나 큰 덩치 때문이었던지  이스탐플과 델리와 베이징에서는 자기 살이 썩어가고 있는데도 왜 그 아픔마저 느끼지 못했을까? 정말 역사가 만들어 놓은 드라마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1858년 세포이 폭동이 영국의 승리와 함께 무굴의 막을 내리면서, 영국의 100년간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런 암흑기에도 두 명의 훌륭한 변호사이자, 위대한 지도자인 무슬림의 모하마드 진나와 힌두교도의 마하트라 간디가 있어 미약하나마 인도의 위대한 정신을 세계에 빛내기도 하였지만, “두 나라 이론”에서 시작된 두 종파간의 갈등은 결국 진나로 하여금 파키스탄의 독립을 독촉하게 만들었으며, 종교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면서 무슬림, 시크교, 힌두교를 모두 함께 그의 가슴속에 아우르려고 했던 간디는 1948년 1월30일 뉴델리의 하늘에서 해가 질 무렵, 자신의 종파인 광적 힌두 브라만의 총격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50년 인도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50년동안 38년 동안을 통치한 네루 가문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인도 최초의 수상이며,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 준 <세계사 편력>의 저자이기도 한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현대사에서 간디 다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뒤를 이여 17년간 수상직을 맡았던 딸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에게 저격당하면서 그녀의 업적위에 순교라는 훈장을 더 달게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 역시 5년간의 통치동안 나름대로 성실함을 보였다. 네루의 아버지이자 식민통치하의 초창기 국민회의 의장이었던  모틸랄 네루부터 친다면 근 80년 가까이 인도의 실질적인 지도적 집안인 네루 가문은 진정으로 인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큼 인도의 독립과 민족적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네루는 너무도 완벽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척박한 인도라는 땅위에 뿌리 내리지 못하였으며, 인디라 간디는 장기간의 집권에 따른 권력 집착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네루와 인디라 간디는 현대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현재에도 대부분의 인도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위대한 지도자를 둔 인도는 독립한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연간 국민소득 천 달러도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로 머물고 있을까? 그들은 수천 년 전에 비해 큰 차이가 없는 지금의 모습을 인식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인식하고 있는데도, 지금 현재의 가난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그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기준이 잘 못된 것일까? 아니, 그러는 우리는 가난하지 않고 행복한 것인가? 이런 물음들이 더욱 나를 인도로 끌고 간다. 


이 책은 이런 역사적인 서술이외에도 신화, 종교, 철학, 문화, 사회, 과학 등의 각 분야에 대해 차분한 관찰을 해 나가고 있다. 저자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억제한 채, 행간에 흘러드는 인도에 대한 각 분야의 애정이 담겨있다.


애초에 인도라는 말은 강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강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자와할랄 네루는 자신의 유언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한다.

“ 나는 단지 한 줌의 재로 변한 내 육신이 아무런 종교적 의미도 지니지 않은 채, 알라하바드의 갠지스 강에 뿌려지기를 원할 뿐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알라하바드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의 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인도의 강이며, 인도의 장구한 문화와 문명의 상징인 갠지스 강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항상 같은 모습으로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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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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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주말 TV에서 ‘징기즈칸’이라는 중국판 대하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서점에서는 징기즈칸 관련 소설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을 알자는 현 시류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이런 시류에 편성해 난 며칠 전 중국관련 서적 10여권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다 읽을 수나 있으련지 모르겠다.


이번 책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 하다>라는 책의 저자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레이황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이 책을 읽기 1달 전에 백양의 <맨얼굴의 중국사>를 읽은 후여서, 두 중국 역사가-사실 백양은 역사가는 아니지만-의 사관을 비교할 수 있는 재미를 덤으로 얻은 셈이다.  레이황이 중국 역사의 거시적인 흐름을 유물론적 사관으로 접근한 것에 비해, 백양은 유심론적 사관으로 일관했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벗어날 수가 없는가 보다. 쟝제스 밑에서 국민당 군대 하에서 10년 정도의 군 생활을 지내다 미국으로 도피하여 설거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만학도로서 역사가의 길을 걷게 된 레이황 으로서는 당연히 유물론적 사관을 가질 수 밖 에는 없었으며,  대만의 국민당 일당 독재 하에서 반 체재인사로 분류되어 10여년의 감옥생활을 지낸 백양으로서는 필연적으로 유심론적 사관을 가질 수 밖 에는 없지 않았을까? 


레이황은 중국의 계층 구조를 ‘햄버거‘에 비유하면서, 유교사관에 입각한 정체된 사대부 관료의 상층구조와 중국 대륙의 생산적 지지 기반인 소규모 자작농의 하층 구조로 설명한다. 한나라 이후로 건립된 왕조들은 이 두 집단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떠한 제도적 장치-유교적 인본주의, 왕도 정치, 인의사상, 과거제도등-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에 따라 그 왕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두 계층 구조의 본질적인 구성원은 2000년 가까이 정체된 상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며, 그 주원인을 고대 중국의 토지제도와 세율제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반면, 백양은 중국의 상부 계층을 ‘된장독‘에 비유하면서, 어떠한 변화도 없이 유교라는 관념론에 빠져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상부 구조의 정체성에서 근대 중국의 후진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두 가지 설명 다 설득력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기원전 200년경 로마의 스키피오가 자마회전에서 한니발을 물리쳐 지중해상 세력을 장악하면서 대 제국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인도에서도 이 시기에 찬드라굽타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가 건립된다. 이 시기가 바로 중국 시황제 진나라가 건립된 때였다. 어쩌면, 역사는 동서 문명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출발을 시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자의 역량에 의해 서로 갈 길은 달랐다고 할 수 밖에는 없다. 로마가 법과 군율에 의해서 제국을 유지 하였다면, 중국은 유교사상과 비옥한 황토에 의해서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법과 군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해야 했으며, 이것이 정체되는 순간 로마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사상이라는 것은 좀처럼 흔들림 없이-아니 황하의 퇴적물처럼 점점 더 싸여만 갔고, 비옥한 황토는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진나라 때는 시기적으로 보나 제도적으로 보나 로마와 비슷하게 모든 것을 법으로 다스릴 려는 법가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방이 한나라를 건립하면서, 유교제도가 국가적인 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당나라로 접어들면서 과거 제도의 도입으로, 귀족세력의 소멸과 함께 지식계층인 사대부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당나라 이세민의 균전제 실시는 봉건제 하의 농노적 위치에서 소규모 자작농이 중국 인민의 주류를 이루는 생산 기반이 되었다. 7세기경인 이 시대만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서양에서는 아직 로마 붕괴 후, 아직 나라나 민족 관념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아랍지역은 마호메드라는 예언자의 힘으로 이슬람 통일을 위한 피를 흘리고 있을 때에 중국은 벌써 인민 대부분이 자유민으로서의 하층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고, 능력에 의해 상층 구조로의 신분상승이 가능한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과거 제도가 이미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하부계층과 상부계층의 갈등을 해소해주는 사상적 배경으로 유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권위와 상층구조에 대한 존엄을 합법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고이지 않고, 흐르는 법이다. 근대 중국을 한낱 종이호랑이로 만든 것은 바로 과거제도와 사대부라는 된장독이었으며, 소규모 자작농의 지위를 천년 넘게 유지한 중국인민의 시민정신의 결여에 있다고 하겠다. 그에 대한 대가로 1940년 아편전쟁이후부터 문화 대혁명까지 150년간 중국은 처절한 개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현재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 성장세는 과히 위협적이라고 할 만하다. 옛날,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중국이라는 큰 용광로에만 들어가면 스스로가 녹아버렸던 것처럼, 지금 세계의 모든 자원과 자본이 중국으로 빨려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선진국이 가지고 있는 시민정신이나, 자본주의에 입각한 사유재산 시스템의 정립이 중국에서는 아직 모호한 상태로 억제 받고 있다.


과연, 현재 중국은 서구 문명사회로 가기위한 개혁과 혁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일까? 아니면,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와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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