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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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루소, 마르크스와 헤겔, 마르크스와 바쿠닌, 마르크스와 다윈, 마르크스와 레닌.........


마르크스는 1818년에 독일의 트리어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유럽은 보나파르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빈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군주들이 겨우 한 숨을 돌리던 시기이며,  혁명의 실패로 인해 계몽주의의 회의와 함께 ‘로맨티시즘’이 대두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베를린 대학시절은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이 주류를 이루던 때로 마르크스 역시 청년 헤겔주의자로서 변증법을 사상적 기초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유물론자였다.  마르크스는 30세도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비평가로서 편집인으로서 혁명가로서 상당히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프랑스로, 벨기에로 그리고 영국으로 평생 동안의 고달픈 망명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하게 된다. 1848년 프랑스 혁명으로 서둘러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꿈꾸며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는 등 전승기를 구가하지만 루이 보나파르트가 집권하면서 결국 마지막 피난처인 런던으로 망명하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34년동안 런던에서의 망명생활은 4명의 자녀를 잃을 정도의 극심한 가난과 엉덩이의 종기, 간질환, 만성 기관지염, 결국에는 폐암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20년간의 지긋지긋한 연구 끝에 1867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 <자본>을 출간하게 된다.  노동자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위대한 스승이었던 마르크스는 1883년 폐종양으로 사망할 때까지 비록 그 자신의 삶은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았지만,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유토피아를 완성하기 위한 집념을 불태웠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학문적 자위에 지나지 않는 점을 강조하면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40년 동안 마르크스의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마르크스는 실천적 이론을 강조하였지만, 그의 삶은 결코 실천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열망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생활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그는 세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 나오는 ‘폴스타프’같은 인간밖에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엥겔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어떻게 천재를 질투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천재란 아주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재주가 없는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이 얻을 수 없는 권리임을 알 수 있지. 그런 것을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이 엄청나게 속 좁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꼴밖에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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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0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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