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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
김선우 지음, 정경심 그림 / 열림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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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에서 계속...

서천 꽃밭에서 목숨을 살리는 꽃들과 약수를 구해 온 바리공주가 오구대왕을 살린 뒤 “나라도 필요없고 재산도 싫습니다. 저는 버려짐으로써 사랑을 얻은 존재이니 버려진 것들의 원과 혼을 이끄는 이가 되겠나이다. 처처에(:곳곳에 - 옮긴이) 가득한 슬픔을 위로하고 억울한 혼령들 쓰다듬어 씻기는 만신의 인로왕이 되겠나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나는 공주이니 호화로운 곳에서 살아야겠으며, 그동안 못 받은 혜택도 다 받아내야겠다.’는 속물 근성과는 거리가 먼 성인(聖人)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원수’이기도 한 아비가 주는 댓가를 물리침으로써, ‘효도’와 ‘가족주의’라는 신화에 빠지지 않은 채 자신의 긍지를 지켜낸다. 사실 그녀가 오구대왕을 살린 까닭은 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살려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마음을 모르고 물질 - 나라의 땅, 재물 - 로만 보상하려고 한 오구대왕은 비판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남편인 무장승(이 사람이 서천서역에서 약수를 지키다가 바리를 만난다)과 그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데리고, 신분도, 부귀영화도, 포상도, 대궐도 다 버리고 자유롭게 떠나가는 바리. 그녀는 모든 혜택을 양부모인 비럭공덕할멈과 비럭공덕할아범에게 베풀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공주님은 왕자님을 만나서 궁전에 들어간 뒤 잘 먹고 잘 살았더랍니다.”라는 지루한 끝맻음에서 벗어나 ‘내가 살았으니 남도 살리겠다.’고 마음먹고 세상 밖으로 나간 거룩한 주인공. 우리는 그 때문에라도 바리공주 이야기를 신화(神話)이기 이전에 사람들한테 ‘희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인간의 이야기’로, 우리 마음 속에 움튼 새싹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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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
김선우 지음, 정경심 그림 / 열림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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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동화나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 단지 ‘예쁘고 착해서’ 고을 사또의 눈에 띄인 뒤 그와 혼인하는 콩쥐나, 유리 구두와 화려한 옷을 입고 왕자와 춤췄기 때문에 왕비가 된 신데렐라처럼 -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생김새’ 때문에 ‘돈과 권력을 지닌 잘 생긴 남성’의 마음을 사 자신의 ‘팔자’를 고치는 ‘운 좋은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뻔뻔한(!) 이야기들을 ‘명작’이라고 생각했고 우리의 아이나 조카에게 들려 주지 않았던가?

그 결과 선입견과 악감정은 끊이지 않은 채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고 이 이야기를 배운 남성들은 어느새 여성을 ‘실속도 없으면서 생김새만 내세우는 족속’이나 ‘어떻게든 돈과 권력, 빼어난 외모를 지닌 남성을 붙들려고 발버둥치는 것들’로 낙인찍게 되었다.

우리는 왕자님이 공주님을 만나 커다란 궁전에서 자기들끼리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나머지 이런 사실에 결코 화를 내지 못할 정도로 둔감해졌는가?

옛 사람들은 이런 인식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여성은 꽁꽁 묶인 채 ‘무사님, 구해주세요.’라는 말만 외치는 나약한 존재이며, 여성과 무사가 대궐 같은 집에서 남은 챙기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란 말인가?

이 의문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너무 깊이 실망한 나머지 아예 ‘옛날 이야기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마 한국과 조선(:이북)의 구비서사시인「바릿데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니 그 신화를 새롭게 풀어 쓴 <바리공주>라는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희망을 찾는 여행을 멈추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으리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동화와 소설에 나오는 여성상을 속시원하게 깨뜨려 버렸으며, 여느 영웅담이나 신화와는 달리 칼을 휘두르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꽃’과 ‘생명수’를 든 여자 주인공이 나와 ‘전쟁’이 아닌 ‘살림(:소생)으로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특성을 지닌 이야기.「바릿데기」는 나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와 내 거친 넋(:영혼)을 어루만지고, 나를 희망이라는 서천 꽃밭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들이 아니라서’ 버림받고 ‘핏줄’이 아닌 비럭공덕할멈과 비럭공덕할아범의 손에서 자라난 바리공주. 그녀는 ‘핏줄’에게서는 버림받고 ‘남’이 구해서 살아난다. 사랑 없는 핏줄만큼 무거운 멍에가 어디 있으랴? 낯선 이를 보듬는 손길처럼 고귀한 것이 어디 있으랴? <바리공주>는 이런 첫머리만으로도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려고 무쇠 갓과 무쇠 신발을 구해 먼 길을 떠나는 바리. 자신이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지닌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구해야 하기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이의 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왕자나 기사가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나는 내가 지킨다.’고 다짐하며 멀고 먼 서역으로 걸어가는 바리공주에게서는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다. 참된 ‘아름다움’이란 이런 용감함과 당당함에서, ‘홀로 서는 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약수를 구하러 서천서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할머니가 빨래를 해 달라고 말해 빨래를 하다 보니, 그 할머니가 약수(:죽은 사람도 살리는 물)가 있는 곳을 아는 ‘마고’할멈이었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기적이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때에만 일어나는 기쁜 일임을 깨달을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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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의 몰락 -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
모리스 버만 지음, 심현식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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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 내내 착잡했고,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다만 그 느낌을 다 옮기지는 못하겠기에,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한국 사회는 버만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미국에 대한 열등감을 씻어내고 ‘제국’의 몰락을 ‘남의 일’로 여길 만큼 여유로운가? “우린 달라. 우리는 무너지지 않아.”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국어와 역사 과목을 필수 과목이 아닌 ‘선택 과목’으로 정해 사실상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기로 한 교육부의 정책, ‘부자가 되는 법’을 다룬 책이나 ‘살 빼는 방법’을 다룬 책이 많이 팔리는 현실, 사회 보장 제도와 노조를 무조건 반대하며 ‘의무’와 ‘희생’만 강요하는 재벌, ‘웃기는’ 영화만 만드는 영화사, 같은 아시아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모르는 한국인 대학생이 한국을 찾은 이란인 감독한테 '아프가니스탄이 뭐예요?'라고 묻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버만 교수가 지적한 내용과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은 ‘세계화’란 구호를 내걸고 무작정 미국을 따라했으니 해악이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잘못된 정책을 따라하다가 병들어버린 한국 사회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며, 아울러 이 책은 단순한 ‘반미’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탈미(:미국을 벗어남. 사실 이 말은 글쓴이가 만들어낸 말이다)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다만 책에 실린 내용 가운데 ‘운동기구나 정치 사상 자체는 문화를 되살리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은 (어떤 일을 밀고 나가려면 조직이나 사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고, 우리 현실에도 맞지 않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사실을 유의하며 읽기 바란다. 또 버만 교수가 '예'로 든 사례도 중세 유럽의 수도사이다 보니, 구미인이 아닌 우리에게는 좀 생소하다는 점도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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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에 던지는 질문 - 인디언, 황야, 프런티어, 그리고 국가의 영혼 세미나리움 총서 7
프레더릭 E. 혹시, 피터 아이버스 엮음 | 유시주 옮김 / 영림카디널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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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은 '깃털모자를 쓰고 알록달록하게 물감으로 얼굴을 칠한 뒤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말을 달리는 미개인'이다.

최근 이런 인식이 많이 고쳐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원주민은 '이상할 정도로 미개하게 산 착한 야만인'이나, '19세기 이래로 사라져 버린 별 볼일 없는 것들'로 여겨지고 있다.(그래서 최근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원주민 관계 서적'도 대부분 19세기에 일어난 일만 다루며, 그들이 '알쏭달쏭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자연친화적인 말만 하는 '착한 바보'들이었거나, 그 반대로 멍청한 야만인이었다고 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우리네 역사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미 원주민을 '예나 지금이나 자연만 사랑하며 현대문명을 뿌리치고 사냥과 채집만 하고 사는 사람들'로 여긴다면, 한국(과 흔히 우리가 이북以北이라고 부르는 '조선') 사람들도 '21세기인 지금도 농사만 짓고 흙으로 만든 초갓집에서 살며 가족주의와 유교만 받든 채 절대로 바뀌지 않는 족속'이라고 불러야 할 테니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고, 그동안 '잘 모르는 영역'으로 남아있던 '20세기의 원주민 역사'(이자 서구 문명과 갈등하며 스스로를 바꿔왔던 우리와 비슷한 사라들의 이야기)를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가르쳐 주는 보고서이다.

이 책에서는 주문을 외우며 괴성을 지르는 '족장'이나, 가죽옷을 입고 도끼를 든 원주민 전사나, 말 타고 사냥하는 원주민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 다른 인종이나 민족보다 탐욕스럽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깨끗하지도 않은 -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빼앗긴 땅을 변호사와 접촉해서 되찾으려고 하고, 잃어버린 옛 문화와 현대 문명을 어떻게든 접붙이려고 하며, 언론과 영화를 통해 잘못 알려진 인상을 고치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아울러 그들 사회가 외부인(WASP, 멕시코계, 미국 흑인)과 접촉하면서 어떻게 갈등했는지, 그들 가운데 전통과 현대로 갈라져 싸운 사람들은 '왜' 싸웠는지, 그들은 어떻게 농사짓고 집을 지으며 물고기를 잡고 살아갔는지(서부영화나 '초기 청교도를 다룬 영화'[:예 - <주홍 글씨>, <포카혼타스>]에서 이런 원주민을 만난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들 사회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나 백인에 대한 열등 의식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신적인 야만인'으로 알려지기만 한(!) 그들의 물질생활은 어떠했는지를 이 책만큼 깔끔하게(!) 설명해 준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책은 바로 이 때문에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있으며, 무조건 미화하는 복고주의와도 거리가 있다. '솔직 담백하게' 문제점을 짚어내면서 환상과 인식의 '거품'을 걷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도'하면 - 컴퓨터 산업을 제쳐놓고 - 무작정 '정신과 요가'만 떠올리는, '아랍'하면 - 컴퓨터 기사나 교수, 학자[:예 - 에드워드 사이드]를 배출하고 '알 자지라' 같은 방송국을 만드는 '저항'을 제쳐놓고 - '광신과 무지함'만을 떠올리는, '아프리카'하면 - 20세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독립과 민주화[:예 - 넬슨 만델라와 anc가 이끌어낸 민주화], 중세에 유럽 못지 않게 발전한 왕국[:가나, 말리, 아비니시아, 베닌]을 무시하고 - 동물이 뛰노는 공원이나 '미개인'들, 가난만 떠올리는 우리에게,

이 책은 '환상'을 깨뜨리고 현실을 바로 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길라잡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아울러 '미 원주민'하면 '야만'과 '착한 현자'라는 극단적인 두 공식만 지니고 있는 인식에도 이 책은 '약'이 되어줄 것이다!)

미 원주민 뿐 아니라 다른 원주민들(예 : 폴리네시아 원주민이나 대만 원주민, 남미 원주민, 아프리카의 수렵민족들)을 다룬 책에도 이런 걸작이 나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아, 그리고 이 책은 '선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침략 사실'만을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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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지라
모하메드 엘나와위 & 아델 이스칸다르 지음, 김용현 옮김 / 홍익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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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3년 전부터, 언제나 불만이던 게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비(非) 서구세계의 언론이 너무(!) 자기를 미화하고 감추는데만 급급하다는 사실이었다.(예외는 있다. 한국이나 인도의 언론은 무자비하게 자아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아니올시다다)

미국의 흑인 민족주의자들이 이끄는 언론은 LA 폭동 때 '모든 건 한국놈 탓'이라고 소리를 질렀고,(사실 이 점은 멕시코계 미국인이 이끄는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아랍의 언론사들은 '모든 것은 서양놈이나 힌두교도 탓'이라고 악을 쓰기에 바빴으며 한족漢族이나 화교 언론은 역겨울 정도로 자화자찬하며 이들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너도 잘못이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역겨운 서구 추종'이라는 낙인을 서슴없이 찍어버렸다. 그들의 정의는 '모든 것은 네 탓이다.'였고 자아비판이나 성찰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비(非) 서구세계의 언론은 서구 언론 못지않게 썩었고 그들의 세뇌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여겨 절망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한 아랍 방송국이 이런 내 생각을 싹(!) 도려내 주었다! 미국의 아프간 공격 때 갑자기(!) 모든 비(非) 무슬림(:이슬람교도)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 방송사는 '비 서구세계의 언론사는 자화자찬하기에 바쁘다.'는 공식을 서슴없이(!) 비웃으며 제국주의와 아랍 안의 인습, 종교권력을 똑같이(!) 도마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방송국이 좋다. cnn처럼 자화자찬하며 다른 세계를 '박물관의 유물기행'하듯이 훑어서 보여주지 않고, 그러면서도 다른 방송국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악습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훑어보면서' [알 자지라]는 아랍 언론계, 아니 아랍 - 북아프리카 세계의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며, 비단 아랍이나 이슬람 세계 뿐 아니라 모든(!) 비 서구세계의 새로운 모범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아랍'하면 아직도 낙타, 당나귀, 진흙으로 된 집만 떠올리는 당신에게, 그곳에도 우리처럼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여 갈등하는(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공정한 언론'이라는 새로운 길을 닦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인도의 '새로운 얼굴'이 컴퓨터 산업이듯이, 아랍의 새로운 얼굴은 '알 자지라' 방송국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섬'(아랍어로 '알'은 영어의 'The'나 독일어의 'Der'처럼 특별한 뜻이 없는 정관사이며, '자지라'는 '섬'이라는 뜻이다)이여, 부디 자유와 새로운 희망을 지키는 보루가 되어 주시길! 새로운 '사바흐'(아랍어로 새벽)를 여는 곳이 되기를! 총 대신 카메라와 펜을 들고 새로운 '타우라(혁명)'를 치뤄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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