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공주
김선우 지음, 정경심 그림 / 열림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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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해 전부터, 동화나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 단지 ‘예쁘고 착해서’ 고을 사또의 눈에 띄인 뒤 그와 혼인하는 콩쥐나, 유리 구두와 화려한 옷을 입고 왕자와 춤췄기 때문에 왕비가 된 신데렐라처럼 -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생김새’ 때문에 ‘돈과 권력을 지닌 잘 생긴 남성’의 마음을 사 자신의 ‘팔자’를 고치는 ‘운 좋은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뻔뻔한(!) 이야기들을 ‘명작’이라고 생각했고 우리의 아이나 조카에게 들려 주지 않았던가?

그 결과 선입견과 악감정은 끊이지 않은 채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고 이 이야기를 배운 남성들은 어느새 여성을 ‘실속도 없으면서 생김새만 내세우는 족속’이나 ‘어떻게든 돈과 권력, 빼어난 외모를 지닌 남성을 붙들려고 발버둥치는 것들’로 낙인찍게 되었다.

우리는 왕자님이 공주님을 만나 커다란 궁전에서 자기들끼리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나머지 이런 사실에 결코 화를 내지 못할 정도로 둔감해졌는가?

옛 사람들은 이런 인식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여성은 꽁꽁 묶인 채 ‘무사님, 구해주세요.’라는 말만 외치는 나약한 존재이며, 여성과 무사가 대궐 같은 집에서 남은 챙기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란 말인가?

이 의문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너무 깊이 실망한 나머지 아예 ‘옛날 이야기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마 한국과 조선(:이북)의 구비서사시인「바릿데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니 그 신화를 새롭게 풀어 쓴 <바리공주>라는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희망을 찾는 여행을 멈추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으리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동화와 소설에 나오는 여성상을 속시원하게 깨뜨려 버렸으며, 여느 영웅담이나 신화와는 달리 칼을 휘두르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꽃’과 ‘생명수’를 든 여자 주인공이 나와 ‘전쟁’이 아닌 ‘살림(:소생)으로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특성을 지닌 이야기.「바릿데기」는 나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와 내 거친 넋(:영혼)을 어루만지고, 나를 희망이라는 서천 꽃밭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들이 아니라서’ 버림받고 ‘핏줄’이 아닌 비럭공덕할멈과 비럭공덕할아범의 손에서 자라난 바리공주. 그녀는 ‘핏줄’에게서는 버림받고 ‘남’이 구해서 살아난다. 사랑 없는 핏줄만큼 무거운 멍에가 어디 있으랴? 낯선 이를 보듬는 손길처럼 고귀한 것이 어디 있으랴? <바리공주>는 이런 첫머리만으로도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려고 무쇠 갓과 무쇠 신발을 구해 먼 길을 떠나는 바리. 자신이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지닌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구해야 하기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이의 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왕자나 기사가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나는 내가 지킨다.’고 다짐하며 멀고 먼 서역으로 걸어가는 바리공주에게서는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다. 참된 ‘아름다움’이란 이런 용감함과 당당함에서, ‘홀로 서는 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약수를 구하러 서천서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할머니가 빨래를 해 달라고 말해 빨래를 하다 보니, 그 할머니가 약수(:죽은 사람도 살리는 물)가 있는 곳을 아는 ‘마고’할멈이었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기적이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때에만 일어나는 기쁜 일임을 깨달을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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