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듣기엔 꽤 멋진 말이었지만, 아등바등 살아도모자란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잊고 지냈을 겁니다. 그땐 다들 청춘이었으니까요.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 P5
물론 이것은 허무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기에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른다면 비애도 없다. 인간 존재의 모순과 그에 따른 불안,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로흔들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인간은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 이 시가 허무와 비애로만 끝나는 것 같지않은 이유, 이 시를 읽고 나서 잠시만 눈을 감고 음미하노라면은근히 고개가 끄덕여지며 미소가 번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몰랐다"라는 표현은 결국 ‘이제는 안다‘란 뜻이 되기 때문이다. 허무를 모르는 것도 제대로 된 인생은 아니지만 허무에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것 역시 아직은 성숙에 도달한 인생이라고 보기 어렵다. - P20
그렇다면 가난한 사랑‘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가난도 못숨기고 사랑도 못 숨긴다. 가난도 못 참고 사랑도 못 참는다. 그런데 가난을 못 숨기기 때문에 사랑을 참아야 한다. 사랑을 못 숨기기 때문에 가난 따위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숨길 수없기 때문에 결국 사랑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것이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분하고 슬프다. - P29
나이가 드는 탓일까? 갈수록 나는 목련 쪽으로 기운다. 목련의자의식, 그 존재의 중량감이 돋보이는 터다. 목련의 낙화를 일컬어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한사코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리며 산 대가이기도 하다. 냉큼죽지 않는 것도 미련을 떨어서가 아니라,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고통을 다 바치는 생에 대한 외경과 성실 탓이다. 느린 대신무겁다. 아니, 무겁기 때문에 느릴 뿐이다. - P67
일단 가난은 슬픔이고 슬픔은 고통이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짐짓 외면한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자본과 상품과 정보와 일상 속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가 할 수있는 일이 달리 없다는 이유로, 간단히 그들의 가난에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때로 우리는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거라 말하면서도, 그 피할 수 없는 게 왜 하필 그들이고 왜 당신은 아니냐는 질문에는 슬쩍 답을 피해 간다. 빈부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하면서도나라가 당신의 세금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날이면 당장에 흥분을한다. 자기한테 세금의 혜택이 돌아오는 것은 공평한 일이고 자기돈이 타인의 혜택으로 돌아가면 불공평하다고 여기기 일쑤다. 더가공할 일은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시선, 곧 무관심이다. 그것은또 다른 가난, 곧 마음의 가난이다. - P90
통증을 모르면 우리는 죽는다. 심지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자는 정녕 복이 있도다. 슬픔은 슬픔을고칠 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감의 능력이사라진 사회는 죽은지도 모르고 있는 이미 죽은 사회다. 그래서신은, 그리고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에게 슬픔을 선물로 주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해 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은, 그러므로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 - P90
그렇다. 사람을 보면 절망하게 된다고 하지만 역시 희망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남을 탓하고 절망하기 전에, 자신을 바로 세우고 희망을 놓치지 않고 부여잡는사람, 바로 그런 사람만이 희망인 것이다. 남에게서 희망을 찾고남에게서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은 절망이다. 우리 각자가 희망을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슬픔의 시인 정호승도 우리에게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이렇듯 살뜰히 권하지 않았던가. - P96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택하느라 기다림을 버린다. 하지만 기다리지 못해 사랑을 버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는 사랑을 기다림과 맞바꾸었지, 사랑을 맹목이나 욕정이나 소유나 조급함과 바꾸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사랑, 뜨겁다 식어지는 그런 사랑 버리고, 아니 그런 사랑과 기다림을 맞바꾸었으니 이런 사랑이 어디 있을까. - P114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 안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끝내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다 아버지의 그늘 탓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해도 결국 닮고 만인생, 닮지 않는 데 성공했으나 그 역시 성공이 아닌 삶임을 인정하는 사람, 스스로는 성공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그의 자식이또 그렇게 살지는 않겠노라며 곁을 떠나간 경우 들은 또 얼마나많던가. - P207
불행한 사실은 그같이 존귀한 존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악다구니같이 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삶을 위한투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다. 성공의 조건은 부와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들의 실현 정도에 따라 가늠된다.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면 행복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런 가치 속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정말이지 가슴 아픈 일이다.세속적 행복을 누린 자의 편에선 그 행복을 놓고 가야 하니 슬플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의 편에선 평생 불행하게만 살다 생을 마감하고 마니 슬플 것이다.하지만 인생을 잠시 놀다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시인은 그래서 인생을 소풍 나온다고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 P255
논쟁이라고 해서 반드시 거기에 갈등만 있을 리는 없다. ‘너‘로인하여 ‘나‘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너‘를 아는 것은 결국 ‘나‘를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만 갇힐 때 우리는 아집에 빠지고, 그저 남의 견해에 순응할 때 우리는 무지에 빠진다. 논쟁과대화의 목적은 차이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더 잘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우리 자신과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위한 데 있다. 요컨대 사이와 차이는 우리를 오히려 관용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그리하여 사이와 차이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둡던 눈이 떠지는 개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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