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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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읽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그닥 잘 읽어내는 편은 아니다.  문장, 구절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더라도 곧잘 잊어버리거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통독으로 일관하는, 그것도 짬짬히 읽어가는 다독의 독서습관은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치명적 단점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들을 읽는 습관은 잡학의 의미에서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행위이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그 분야의 기본지식없이 책을 읽음으로서 기본적인 맥락의 파악조차도 못하고 어거지로 읽기만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통독의 습관으로 기본지식없는 특정분야의 책을 어거지로 읽어내는 일은 생각해보면 독서의 아주 좋지않은 모습이지만, 뒤돌아보면 나는 이런 재앙적 독서를 종종 해왔던 것 같다.


  책을 제대로 읽어낸다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해내며, 독자의 경험과 지식이 책의 내용과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결정을 온전하게 담아두는 의미일 것이다.  고전의 경우가 그러한 독서에 가장 잘 맞는 독서의 대상이 아닐까.  시대와 인생의 의미가 작가의 의도로서 선명히 드러나며, 독자의 경험과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의미와 의도를 쉽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튼 박웅현의 독서법은 이런 나로 하여금 독서의 새로운 방식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짬짬히 읽는 습관은 어찌할 수 없겠지만, 다독보다는 단 한권의 책이라도 좀 더 자세히 읽는 습관을 들이며, 깨끗하게 책을 읽어나가는 것보다는 중요하다 생각하는 부분에 줄을 쳐 가면서 읽고 그것을 나중에 다시 타이핑함으로써 다시 한 번 의미를 상기하는 방식 말이다.  한가지 더 붙인다면 일반적인 책보다는 좀 더 근간적인, 어려워도 깊은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책들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단어 또는 학문의 정의가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책이 '인문학 강독회'라는 말에 과연 어울릴 것인가 하는 의문을 읽는 내내 품고 있었다.  '나는 책을 어떻게 읽었다'는 의미에서 강독이라는 말은 납득할 만 하지만, 내용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읽은 책의 구절을 풀어읽는 정도의 설명을 인문학적 책읽기라 하기엔 너무 약한 느낌이다.  독법이란 다양하지만 그의 독법이 일반적인 범주안에서 특이하지는 않고, 광고인의 입장에서 딱 그 정도의 깊이와 시선으로 책의 문장을 바라보는 모습이 분명한데, 이를 인문학적이라는 수사까지 써 가며 홍보하는 것은 그의 의도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의도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하다. 


  물론 나의 깜냥에 그의 독법은 분명 본받을만한 방식이고, 박웅현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져서 집어든 책이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기엔 조금 부족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독했다 하지만, 독법이 부족한 입장에서 책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뭐라 할 깜냥도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의 강독은 인문학적이라 표현할 만한 감수성을 깨우기에는 많이 부족해보인다.  다만, 독서근력을 이제 막 키우려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독법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훌륭한 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의 독법을 통해 내 독서방식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로만 남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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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인, 미친 부동산을 말하다
선대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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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집이 필요하다.  가정을 이루고 나름 정착의 삶을 꿈꾸는 입장에서 내 맘 편하게 내가 원하는 공간을 가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파트라는 획일적이고 성냥갑같은 구조물에서 벗어나, 적당한 크기의 마당과 거주공간이 있는 주택에서 사는 것이 꿈이다.  삶의 모습에 대한 동경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체로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삶의 모습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공간을 투기의 목적이 아닌 안착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라면 말이다.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나에겐 크게 두 가지의 어려운 벽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모아두거나 물려받거나 물려받을 만한 재산이 없다.  수련과정을 거쳐 사회로 나온 순간부터 나름 모은다고 모으긴 했으나, 집이란 커다란 재산을 구입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액수이다.  두번째는 우리나라에서 집이란 어떤 이유로든 무척 비싸서, 대출을 끼지 않고서는 웬만해서 인생의 중반 이전에 마련하기 힘든 커다란 재산이다.  따라서 대출을 끼고 집을 장만하고 싶지 않은 순진한 내 머리속에서 집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한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턱없이 높기만 한 집값의 원인에는 투기와 거품이 상당부분 차지한다는 사실에는 내 꿈이 유린당하는 기분이고 차곡차곡 모아가는 지금의 삶에 허탈감만 남을 뿐이다.


  집안의 어른들은 뵐 때마다 집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일단 대출을 끼고 장만하는 것이 답이라 말씀하신다.  이제까지의 한국사회에선 그것이 답이었다.  대출받아 부동산을 구입하면 알아서 가격이 올라주니 대출을 갚아가면서 오른 부동산 차익에 마음이 든든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에 솔깃해져서 대출을 받아볼라 치면, 빚지고는 살고싶지 않다는 이제까지의 순진함이 고개를 들어 생각을 접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더욱 암담해지는 것이, 이제는 거품낀 부동산이 정점을 넘어 후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 때문이다.  지금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하는 행위는 하우스푸어로 전락할 위험이 상당하다는 분석은, 나로 하여금 꼼짝없이 차곡차곡 모아가며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선대인의 분석이 맞다면, 내가 부리는 집욕심은 급할수록 손해이며, 언제일지를 알 수 없는 구입적기까지 적절한 주거조건을 찾아다니며 버텨보는 수 밖에 없게 된다.  


  선대인의 분석이 무조건 옳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예측이라는 것은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현재에 대한 분석은 상당한 부분 존중할 만 하다.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될 내용인, 지금의 한국 부동산시장은 일본의 경착륙에 의한 부동산 장기침체보다도 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아가고 있다.  이에 선대인은 거품과 위기를 인정하고 연착륙 또는 견착륙을 유도하여 거품을 서서히 줄여나가야 한다 강조한다.  그런 상황분석 속에서 나의 집에 대한 욕심은 현시점에서 막차에 오르는 행운의 결과일 것인가,  아니면 하우스푸어의 고통과 떨어지는 집값에 속쓰림의 이중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인가 하는 괴로운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집이 투기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의 삶의 기본요소로서 존중되는 사회였다면, 나는 이런 괴로운 고민에 빠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손낙구의 저서 부동산 계급사회에서는 2006년 통계로 분석해보면 한가구당 아파트 한 채씩을 공급해도 이미 100만채가 남는 상황이라는 분석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강연에서 물과 공기를 누군가가 독점하여 소유하거나 거래를 통해 분배의 불공평을 만들어내지 않듯이 땅도 마찬가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주어져야 할 의식주라는 기본의 하나인 땅과 거주공간은 어째서 기본이 되지 못하고 없는 이들의 고통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왜 내가 가진 것을 가늠해가며 시기를 계산해 구입해야 할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의 나름 기득권층에 속해있다는 나도 이렇게 머리아프고 복잡한데, 정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그 크기가 대체 얼마만큼이란 말인가.  삶의 기본을 투기시장에서 굴리는 그 영악함때문에, 어린 누군가는 불붙은 비닐하우스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우는 불붙은 판자집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나 문득 돌아본다.


  부동산 예측서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빨리 읽어야 그만큼 가치적이다.  현 시점을 기분으로 분석한 책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는 적어지고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맞아떨어졌나 돌아보는 호기심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칭 부동산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체에 나와 주장하는 내용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누가 더 설득력있는 주장을 하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다만, 단기적 예측이 부정적인 내용속에서 집장만을 꿈꾸는 이들은 마음이 많이 아파진다.  하지만 어쩌랴, 한국 부동산시장은 자체로 아파서 곪아터지기 직전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아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 것을..  나 역시 집장만에 대한 생각에 좀 더 여유를 가져야겠다는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살짝 진정시키며, 함께 수렁에 빠지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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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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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건축을 아예 모른다.  그러니까 집을 짓는 법이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읽고 해석할 줄 모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저자가 꾸준하게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나 사유의 기호로서 건축을 바라보는 일은 애초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습관이나 감각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적 소양이란 것은 직접 찾아 배워야만 갖출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소양을 바탕으로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보면 건축도 예외없이 사유에서 소외되어버린 대상일 것이다.


  우리에게 건축은 사유의 대상보다는 자본의 대상이었다.  토건족의 부흥이 곧 국가부흥이었던 시절에 건축이 사유의 대상이 될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건축자재가 만들어내는 공간 하나하나가 곧 돈인 상황에서 고려할 것이라고는 공간의 밀집과 기껏해야 그 안에 존재할 인간의 편리정도였을 것이다.  건축의 의미 공간의 조화, 구조물과 건축물들간의 어울림, 도시계획 자체가 자본의 밀집과 순환을 고려하고 거기에 더하여 거품경제까지 끼어들어 인간이 만든 건축과 건축물들은 인간적인 읽힘이 별로 가능하지 않은 삭막함 자체이다.  실제로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은 삭막해지고, 효율적이라지만 분주함만 가득함을 느낀다.  사유의 방식과 대상이라는 걸 모르니 우리는 그런 공간이 우리의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어가는지도 몰랐다.  그게 우리사회의 건축이라는 분야의 모습이다.


  건축기행문인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건축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  물론 사유한다고 해서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기에 소개된 건축물들의 의미를 읽다보면 하나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건축이 가지는 공간과 자연과 사회와의 조화가 무척 흥미롭게 다가오지만, 인간의 신념과 감성역시 그 안에 온전하게 담길 수 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주세페 테라니의 코모 파시스트의 집이 보여주는 인간의 신념표현은 매우 강렬하고, 시구르트 레베렌츠가 구상한 우드랜드 공동묘지는 삶과 죽음사이의 연결과 조화가 매우 감성적이다.  그리고 건축 역시 시대의 흐름안에서 존재하기에 지금은 그닥 인상적이지 않아도, 이 책이 설명하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당시의 그 건축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변화는 역사속에서 의미를 가져왔던 철학을 공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남겨준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를 수렴하며, 건축 역시 그 안에서 이해되고 꾸려지는 한 요소여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겐 조금 어색한 메세지를 깨닫게 된다.


  다 읽고나면 건축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가 어느정도 생긴다.  하지만 여전히 건축은 우리의 실생활과 거리가 먼 생소한 분야로 남는다.  공공건축이야 사유충만한 건축가와 팀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겠지만, 개개인의 삶이 머무르는 곳도 건축에 의해 만들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감성과 사유보다는 자본의 장벽에 거리감만 더 크게 느껴진다.  아파트의 효율과 건축방식의 유행 등등의 현실적 상황속에서 우리의 감성을 공간구조에 녹아들게 하기엔 자본이라는 벽이 너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유 이전에 건축은 이미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탓도 있다.  하지만, 당장에 저자의 건축을 내가 사는 섬에서 찾아보면 유일한 건축물도 대기업의 소유 안에서 존재하는 모습은 그 건축의 의미여부를 생각하기도 전에 거리감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개개인의 삶의 공간은 과연 얼마만큼의 자본이 함께 해야 사유의 기호로서 고려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애초에 그럴 수 없는 현실안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다보니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의문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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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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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까지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다양한 소수자의 삶을 만나고 보아왔다.  한국사회의 일반인식의 틀 안에서 안주하기를 거부하거나 안주할 수 없는 사람들, 또는 외부에서 그 틀안으로 들어와 거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은 무척 순탄치 않았다.  그 순탄치 않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의 시선은 그리 편하지 않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사회는 그들의 존재와 삶이 많이 알려지고 이해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힘들며 불행을 강요하는 곳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은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차별을 강요하며, 제도는 그런 그들의 불행을 해소시켜주기엔 너무도 굼뜨고 소심하다.  인간의 보편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도 많은 헛점들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또다른 소수자들을 만나야 한다.  바로 난민이라 불리는 외부인들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저자들을 소개하는 책의 날개들만 읽고서도 답답함이 밀려왔다.


  곳곳에 소개되는 난민에 대한 이러저러한 정보들은 구체적이면서도 답답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내용들이었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포용력있는 사회라면 나의 답답함은 조금 줄어들었을까?  어쩌다 이런 척박한 나라까지 흘러들어와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은 아마도 내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욤비는 한국으로 들어온 난민들 중에 운이 좋은 케이스라 스스로도 말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이미 그는 한국사회에서 머무르는 소수자들이 겪을 수 있는 고생이란 고생은 거의 겪어보고, 부실하고 냉담한 제도의 폐해도 충분히 겪은 후였다.  이 책의 내용을 보편적으로 풀어보자면, 한국사회에서 소수민이 겪는 고통과 소외,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돕고 그들을 적대시하는 내부의 인식과 제도들과 함께 싸워주는 이들에 대한 작은 기록이기도 하다.


  난민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국가주의의 폐해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콩고의 독재체제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권거래 등등의 사이에서 저항하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난민이 된 욤비의 경우는 국가주의로 표현되는 한정된 영토안에서의 권력은 정의롭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억압해도 될 만큼 정당한 존재인가 하는 익숙한 고민을 자아낸다.  동시에, 그런 핍박을 피해 도착한 욤비가 마주한 한국이라는 국가는 그를 아무렇지 않게 거부하거나 그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어도 될 만큼 한 인간에 대해 폭력적이어도 되는가 하는 고민역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시에 국가라는 테두리 또는 지형적 특성으로 그려지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사회의 인식은 과연 인간적인가 하는 고민은 또다른 시선에서 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권력과 지협적 사회인식이 이루는 어떤 조합에서는 난민이라는 핍박에 의해 유랑을 강요당하는 인간에 대해 매우 가혹한 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는데, 한국이라는 국가사회는 그런 가혹한 환경 중 하나임은 욤비를 통해 증명된 바나 다름없고, 따라서 위에서 말한 답답증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는 기분으로 남게 된다.  한국사회 안에서 자의식이 있는 개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기분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생각해야 하는 소수자의 범위는 이제 좀 더 넓어졌다.  그리고 난민이라는, 우리사회에서의 새로운 소수자의 개념은 우리가 알고 인식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사실 사유를 할 줄 안다면, 성정체성적 소수자들을 통해서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에서 그들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통해서는 자본의 흐름에 따른 국가별 부의 차이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과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이해하려 할 것이다.  경제적 약자들을 통해서는 한 사회내에서의 부의 차별적 분배가 인간의 삶과 사회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켜가는 것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난민이라는 소수자들을 통해, 국가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인간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지만, 끊임없이 각인되는 인식의 틀과 경계지음의 습관은 우리를 사유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셈이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부분이지 않을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엔 이후의 욤비의 삶과, 욤비 이후의 한국사회에 거주하는 난민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욤비는 고난했지만 긍정적인 삶을 이어나가려 한다.  욤비 이후의 난민들은 좋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팍팍한 제도에 가로막혀 고난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국가라는 틀에 의해 인간의 삶과 존엄은 언제까지 무시당하고 핍박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난민이라 불리는 이들이 소수자들의 하나라는 이유로 한국사회에서 상처받는 일이 점점 줄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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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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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본능적인 방법이나 이성적 의지로 조절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노년의 성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생각은 노년의 성이라는 주제를 벗어나 가지를 치기 시작하더니 결혼이라는 제도와 인간관계의 자유로움을 거쳐 결국엔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라는 매우 이상적이며 혼란스러운 주제에까지 닿게 되었다.  자유로운 인간의 상호관계는 상호호혜적이며 평화롭다는, 나름의 내 생각이 가 닿고자 하는 잠정적 결론은 말 그대로 '이상적이며 혼란스럽'기에 쉽게 설명을 이어나갈 수는 없지만, 우연히 집어든 이 소설을 통해 고민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었음은 새로운 자극이었다.


  통제는 욕망을 더욱 자극한다.  시인 이적요의 욕구가 '늙은이의 주책'이라 스스로나 타인에게 재단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통제해가건만 은교에 대한 그의 욕망은 결국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과정에서 그의 몸과 마음은 은교에 대한 욕망에 가감없이 반응하고 표현한다.  제도와 사회의 금기가 과연 본능에의 금기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그 부분에서 끊임없는 자기갈등을 힘겹게 겪어내다가 결국 둘 사이의 관계를 질투한 서지우의 계략에 의해 절망에 빠진다.  노랑머리 사나이의 거침없는 모멸적 발언에 자신의 늙은 육신의 초라함과 주책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다시금 정당화하려는 노시인의 이후 행보는 무척 정밀하고 무서워진다.  제자의 젊은 육신마저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투쟁하며, 마음을 다해 아끼고 사랑하던 은교가 제자의 젊은 육신에 의해 농락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치밀한 방법으로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절제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자기싸움과 인식의 틀 언저리에서 괴롭게 갈등하던 노시인은 결국 자신의 육신과 자신의 제자를 극단으로 몰아넣고야 만다.  노시인의 마음과 행위는 어떻게 이야기되어져야 할 것인가..  나에겐 그의 갈등과 사랑과 욕망과 분노는 애절한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 소설의 구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시인 이적요와 은교,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 그리고 서지우와 은교..  그리고 작가가 소설안에서 얼핏 보여주는 문학계의 통상적인 모습..  문학계의 통상적인 모습은 여느 사회나 다름없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음으로 이해한다면,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관계는 사회의 인식틀 안에서 해석하자면 주책맞거나 사뭇 변태적이거나 위법적이다.  사회의 인식틀 안에서 이 소설을 평하자면 읽어서는 안 될 유해물이 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갈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갈등과 괴로움을 겪어내야만 하는 인간의 본능과 마음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된다.  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욕망과 사회제도/인식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마찰이, 때로 부담스러운 부피나 극단의 모습을 지닌 비인간적 행위나 마음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노시인 이적요의 욕망은 자연스러웠기에, 생의 주기를 떠나 그것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적나라한 성애 묘사에 대한 호기심을 떠나, 인간 전반을 지배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본능, 그리고 인식의 갈등 또는 마찰에 대해,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깊은 고민을 이끌어내고 있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다는 갈망은 이런 고민과 연결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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