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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평점 :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건축을 아예 모른다. 그러니까 집을 짓는 법이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읽고 해석할 줄 모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저자가 꾸준하게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나 사유의 기호로서 건축을 바라보는 일은 애초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습관이나 감각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적 소양이란 것은 직접 찾아 배워야만 갖출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소양을 바탕으로 모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보면 건축도 예외없이 사유에서 소외되어버린 대상일 것이다.
우리에게 건축은 사유의 대상보다는 자본의 대상이었다. 토건족의 부흥이 곧 국가부흥이었던 시절에 건축이 사유의 대상이 될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건축자재가 만들어내는 공간 하나하나가 곧 돈인 상황에서 고려할 것이라고는 공간의 밀집과 기껏해야 그 안에 존재할 인간의 편리정도였을 것이다. 건축의 의미 공간의 조화, 구조물과 건축물들간의 어울림, 도시계획 자체가 자본의 밀집과 순환을 고려하고 거기에 더하여 거품경제까지 끼어들어 인간이 만든 건축과 건축물들은 인간적인 읽힘이 별로 가능하지 않은 삭막함 자체이다. 실제로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은 삭막해지고, 효율적이라지만 분주함만 가득함을 느낀다. 사유의 방식과 대상이라는 걸 모르니 우리는 그런 공간이 우리의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어가는지도 몰랐다. 그게 우리사회의 건축이라는 분야의 모습이다.
건축기행문인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건축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 물론 사유한다고 해서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기에 소개된 건축물들의 의미를 읽다보면 하나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건축이 가지는 공간과 자연과 사회와의 조화가 무척 흥미롭게 다가오지만, 인간의 신념과 감성역시 그 안에 온전하게 담길 수 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주세페 테라니의 코모 파시스트의 집이 보여주는 인간의 신념표현은 매우 강렬하고, 시구르트 레베렌츠가 구상한 우드랜드 공동묘지는 삶과 죽음사이의 연결과 조화가 매우 감성적이다. 그리고 건축 역시 시대의 흐름안에서 존재하기에 지금은 그닥 인상적이지 않아도, 이 책이 설명하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당시의 그 건축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변화는 역사속에서 의미를 가져왔던 철학을 공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남겨준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를 수렴하며, 건축 역시 그 안에서 이해되고 꾸려지는 한 요소여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겐 조금 어색한 메세지를 깨닫게 된다.
다 읽고나면 건축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가 어느정도 생긴다. 하지만 여전히 건축은 우리의 실생활과 거리가 먼 생소한 분야로 남는다. 공공건축이야 사유충만한 건축가와 팀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겠지만, 개개인의 삶이 머무르는 곳도 건축에 의해 만들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감성과 사유보다는 자본의 장벽에 거리감만 더 크게 느껴진다. 아파트의 효율과 건축방식의 유행 등등의 현실적 상황속에서 우리의 감성을 공간구조에 녹아들게 하기엔 자본이라는 벽이 너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유 이전에 건축은 이미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탓도 있다. 하지만, 당장에 저자의 건축을 내가 사는 섬에서 찾아보면 유일한 건축물도 대기업의 소유 안에서 존재하는 모습은 그 건축의 의미여부를 생각하기도 전에 거리감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개개인의 삶의 공간은 과연 얼마만큼의 자본이 함께 해야 사유의 기호로서 고려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애초에 그럴 수 없는 현실안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다보니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의문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