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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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의한 자연스러운 행동, 그리고 이와 대립하는 사회의 규범과 제도, 이 둘 사이의 대립관계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개인적인 화두였다.  물론 둘 사이에서의 어떤 '타협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은 채, 보편자연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보편본능은 인간사회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이 역시 말 그대로 '개인적 믿음'일 뿐이다.  아직까지는..


  '한발짝 선을 넘는'이란 다분히 선정적인 표현을 쓰는 저자이지만, 제도권 안에서 충실하게 순종하며 성장하여 제도권안에서 자리를 잡은 이 답게, 선을 넘는 방법과 모습은 다분히 소극적이고 소프트하다.  과감함이란 언뜻 느껴지지 않는다.  이 모습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도권 안에서 충실하게 성장하여 제도권의 안정적인 위치에서 세상의 선을 조금 넘어도 된다 말하는 나 자신은 저자보다도 더 소극적이며 위선적이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담은 생각보다 말이 점점 줄어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스스로가 '선을 넘어보며 건넬 수 있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란 고민을 가지다보면, 때론 한정된 경험과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아쉬워질 때도 있다.


  조심스럽고 주저해하며 자기방어기제를 최대한 펼쳐놓고 건네는 이 '대담하지 못한' 이야기가 언뜻 재밌고 공감이 간다.  대담하지 못해서인지 통쾌하지는 않지만, 녹아들듯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선을 넘어도 되는' 규범과 제도의 사회라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욕망하라'가 아닌 '욕망해도 괜찮다'는 가벼운 단정의 제안이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공감되는 사회라면 우리는 무척 경직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개인적으로도 우리사회는 '선을 충분히 넘어도 되는' 사회라 생각한다.  어릴적부터 받아온 제도교육과 전 세대들을 지배한 사회인식은 '무엇이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인가'라는 고민의 싹 자체를 말살해버렸고, 성인의 과정에서 스스로 찾고 깨닫지 못하면 생각의 시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의 경직은 관습을 위한 세상과 권력을 거머쥔 소수만을 위한 세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었다.


  다시 고민해본다.  욕망을 통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과연 어디까지 존중받아야 하는가.  제도와 규범은 인간을 어디까지 통제하는 것이 적당한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유의지가 무조건 통제당하는 방법이, 올바르고 안전한 사회를 위해 과연 합당한 방법인가.  다양한 자연계가 공존하는 가이아의 세계에서 인간본위의 복잡성이 가중되며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 만들어지며 발생하는 자유의지의 비정형적 변질을 우린 제대로 깨달아가고 있는가.  여전히 어려운 고민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리도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제안, '욕망해도 괜찮다'는 제안이 격한 공감을 끌어내는 세상은, 분명 '욕망하는 세상'으로 변해야만 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글들도 좀 더 대담해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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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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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많이 들어서 유명한 제목의 작품을 읽고 난 후의 어떤 혼란과 허탈함이랄까, 유명세에 따른 어떤 기대감이 그런 허탈함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파격감도 무시못할 느낌이다.  골격만이 주어지고 그것에 살을 붙이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서 붙여보아라 하는듯한, 과제물을 건네받은 어떤 학생의 기분과도 같다.  나는 여기에 어떤 살을 붙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방식과 재료에 있어서 너무도 방대하기에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늙어서 노쇠한 두 남자의 막연한 기다림, 실체없는 대상을 기다리는 답답함과 애매함.  가끔은 포기해버릴까도 싶지만 실체도 무엇도 없는 '고도'에 대한 기대감은 두 사람을 고목나무 아래에 발을 묶어놓는다.  대체 무얼까 싶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추측마저도 불가한 상황이다. 


  나름의 추론을 해보면 이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가 중립국민의 지위를 이용하여 2차대전시 나찌에 대항하여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다.  기다림은 전쟁의 끝에 대한 기다림이었고, 고도는 자신이 바라는 종전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는 종전의 모습은 나찌를 이겨낸 모습을 믿었던 것 같다.  작품속에서 '고도'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소식을 전하는 소년을 통해서 고도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실체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다림은 작품속의 늙어버린 노인들처럼 지치고 노쇠했지만, 희망과 바램은 언제나 잃지 않았기에 고도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은 언제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암시였다.  물론, 작가는 '고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속에 썼을 것'이라는 답을 남겼다.


  나의 해석도 물론 나의 자의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작가는 분명 저항적이다.  소련독재에 항거하다가 소련에 억류된 체코의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에게 '파국'이라는 작품을 헌정하는 모습은 그가 지닌 어떤 저항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기다림과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골격을 받아 든 나는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이 작품은 그런 작품이다.  마지막장을 덮었다고 결론적인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두 노인앞에 나타난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이 지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내가 이 작품의 골격에 붙일 수 있는 살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이어본다.  내가 늙고 노쇠해 가면서까지 지치지 않고 기다릴 '고도'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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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K, 교회를 나가다 - 한국 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
김진호 지음 / 현암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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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종교적 영성이 사회 안에서 어떤 긍정성을 발휘하는 모습을 크게 느껴본 적은 없다.  단지 종교로 인한 개인의 긍정적 사고가 사회시스템 속의 성실한 톱니바퀴로서 열심히 움직이게 하고 그럼으로서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든 '잘 굴러가는' 모습만을 자주 보았을 뿐이다.  이게 긍정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개인이라는 톱니바퀴들이 모여 작동중인 사회시스템의 모습, 그리고 굴러가는 방향에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과 개인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종교적 영성은 사회성에 대입함에 있어 어떤 맞지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영성을 가르치고 키우는 종교시설 - 그러니까 여기서는개신교로서의 교회 - 은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작동한다.  영성과 교회와 사회, 이 세가지의 존재적 입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뭔가 딜레마스런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  


  영성의 문제는 개인적인 특질도 가지고 있기에 일단 뒤로 미루어두고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요즘엔 교회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오며 '교회사업의 위기'가 회자되고 있어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구한말 선교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종교가 사회속에서 어떻게 역할해왔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현재의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왔는지를 알려면 이 책이 아주 요긴해보인다.  


  종교의 형태적 모습으로서 교회는 분명 한국사회의 역사안에서 불안과 위기로 응어리진 인민의 답답함을 안으로 품고 위로함으로서 스스로의 사회적 역할을 해 낸 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부터 독재시대를 거쳐 90년대까지도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긍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인민들의 답답함과 응어리를 품어서 어떠한 사회적 열망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삭아내려 주기만 하던 교회는 서서히 답답함과 응어리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간다.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사회의 모습을 닮은 교회는 더이상 인민들의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자본에 의해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속에서 적응에 실패한 채 결국 비판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지금 보는 교회의 모습은 자본을 거머쥔 기업이 생존해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


  이 책이 그리는 교회에는 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사회안에서 교회의 역할만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영성의 문제는 일단 철저히 배제시킨 채, 한국근대의 역사속의 교회부터 철저히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저자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비판의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고 교회의 위기속에서 하나 둘 피어나는 작은 대안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솔직히 나는 영성의 문제에 있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어떤 영적 체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성적 사고를 가져보려 노력한 때도 있었지만 내겐 쉬운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에는 사회성이 결여된 영성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민해본다.  영성과 교회와 사회의 공존에 있어 딜레마스럽다고는 했지만, 개인의 영성과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그런 요소들이 모인 사회의 구성을 생각해보면 세가지는 반드시 딜레마를 품어서는 안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딜레마를 극복하는 일이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의 바른모습과도 일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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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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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한없이 끌어들이는 이 소설을 딱히 간결하게 표현할 길은 없다.  사람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는 파도속에서 무참히 휘둘리지만 그 재미와 매력에 빠져 바다속에서 나오질 않는 초보서퍼의 마음처럼 형식도 내용도 종잡을 수 없는 격랑속에서 읽는 사람은 책을 내려놓기가 힘들다.


  어쩌면 그 옛날 공연장의 만담가의 실없는 농담에 폭소를 터뜨리며 한없이 빠져드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집어낼 수 없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이렇게 빠져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시니컬한 그림체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시작하여 정감넘치는 선의 정신없이 움직이는 근대민화의 느낌을 거친 뒤 부드럽고 소박한 색채로 그린 수채화의 감성으로 끝나는 형식의 느낌도 그렇고 현실성과 비현실성, 본능과 이성이 뒤섞이다가 뭔가 이상할때쯤 작가의 첨언으로 가벼이 눙치고 지나가는 뻔뻔함..  마치 어두워진 시장터 막걸리집에서 막걸리 한잔 마시며 듣는 이야기처럼 가볍고 재밌고 능글맞다.


  그러나 아무리 글에 재능있는 천재라도 쉽게 써내어 좋은 글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은 써내려가는 이의 직간접적 경험과 생각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아직은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내려가고 있는 중이지만 '나의삼촌 부르스리'와 엮어서 생각해보자면 작품들 안에 간접적으로 녹아있어 배경이 되는 근대사적 역사, 그 역사의 폭력과 뻔뻔함을 등장인물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또하나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 생각하는데 육체의 가장 근본에서 발산하는 본능과 본능에 따른 충동성이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는 성범죄자로나 낙인찍혔을 일들이 소설속에서는 자연스럽고 이해가능한 일로 서술된다.  본능은 구체적인 향기나 분위기 또는 모습으로 서술된다.  본능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충동질하여 관계를 엮어간다.  그 본능에도 작가특유의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본능에 의해 관계가 형성되고 관계는 사건을 만들어가며 번잡하고 현란한 인생사의 모습을 만든다는 데에 있어서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심사평의 한 대목, 전통적 소설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빚진게 별로 없다는 말에 극히 공감했다.  물론 내가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위한 작품같이 어렵기만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 소설보다는 재미를 추구하고 때로는 개똥철학으로 눙치면서도 흐름을 잃지않고 전반적으로 녹아흐르는 생각의 배경과 적당한 무게감을 유지하는 형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내가 요즘 '천명관'이라는 작가의 작품들 속에 푹 빠져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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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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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이라는 것, 무턱대고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이제껏 간과라기보다는 애써 무시해 온 일이다.  분명 내가 놓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던가, 지금 읽고 있는 책 이전에 읽어야 할 다른 책이 있다던가 하는 그런 느낌..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것이 지금까지의 글읽기였다.  짬짬의 시간에 책을 읽는 이유로 정독이 아닌 통독에 가까운 독서와 함께 내가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나는 마음 안에서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난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 책이 쓰여진 시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때로는 이해를 위한 배경지식을 요하는 일임을 책의 곳곳에서 읽는 일은, 그래서 시대마다의 고전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깨닫는 일은 이제껏 내가 '읽는다는 행위'를 얼마나 무식하게 해왔던 것인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도 못하고 독후감을 씀으로서 '읽었다는 흔적'이상도 이하도 아닌 끄적거림에 불과한 짓을 해왔는지 절절하게 깨달아야 했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도 통찰이 필요한 일임을 깨닫게 한다.  그 통찰은 입체적이다.  하나의 고전이 가지는 의미가 역사적 시점을 중심으로 한 일정범위 안에서의 통찰을 요하는 일이라면, 시간을 따라 현재로 오면서 만나는 시대마다의 고전은 역사의 흐름안에서 인간의 생각과 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라는 통찰을 요하고 동시에 통찰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동시에 독서는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하는 일임을 알게 해준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책의 내용중에 잠깐 나오고 마는, 내용의 의미와는 다른 단어가 마치 중심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호도되어 자본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유지에 이용되듯, 책읽기는 내용의 분명한 이해를 획득해야 하는 일이다.  읽다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수많은 책의 내용을 근거로 제시된 개념이나 단어들이 실은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누군가의 의도로 호도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힘과 깊이가 있고 폭넓은 통찰이 있으면서도 강의의 흐름속에 긴장과 짜임새가 있어 어렵지 않게 읽혀진다.  고전은 그 자체로 읽기가 무척 어렵지만, 저자가 이야기해주는 고전은 무척 친근하고 깔끔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책읽기라는 행위에 대한 제안은 무척 소중하게 다가온다.  모든게 그렇듯, 책을 읽는다는 것도 쉽고 가볍지만은 않은 일이다.  호되면서도 후련하게 내려치는 꾸지람이 그래서 더욱 큰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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