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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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바라본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으로 가능하다.  토건업자에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제주의 풍광이 삽질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일 것이고, 여행자의 시선으로는 이대로 두고 다시 또 찾아오고 싶은 보석의 땅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주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 정착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후로는 시선의 깊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바라본 제주에의 시선이 수평적이었다면, 이제는 수직적 깊이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은 4.3의 이해였고 더 나아가 이영권 선생님이 쓴 '제주사'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후 손에 잡히는 제주에 관한 책들을 몇 권 더 접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유홍준 선생님의 이 책 역시 그런 의미에서 내 손에 쥐게 된 책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는 단 한권 읽었을까 하는 정도인데 제주에 관한 7권째는 스스로 구입하여 손에 들었던 걸 보면 말이다.


  유적과 문화유산등등을 통한 제주를 바라보는 일은 이미 말 한대로 깊이를 더하는 작업이다.  내가 사는 곳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고 이 땅의 수만년 시간을 느낀다는 사람이 있듯, 내 주변의 잘 눈에 띄지 않는 듯한 문화유적에 깃든 시간과 의미는 알면 알 수록 무척 흥미롭고 이 곳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장 내가 사는 곳 부근의 동자복이나 김만덕 묘비, 그리고 오현단에 대해서 부끄럽게도 알고 있는 것 하나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 그 의미와 역사를 알고 난 이후로 나는 이 땅에 조금 더 포근하게 담기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는 곳의 역사와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애정을 더하는 일이다.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던 이력만큼 유적과 자연에 대한 시선이 무척 분석적이면서 정교하고 따뜻하다.  동시에 매우 비판적이다.  비판적이라 함은 현재 문화재가 관리되고 있는 실정에 대한 비판이다.  역사적 시선면에서는 중도를 유지하려 애쓴 노력이 보인다.  이는 이영권선생님의 제주사와 비교하여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최대한 문화유산의 객관적 의미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설명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자신의 역사적 시선과 의미를 담아주었으면 아쉬움이 남았다.  


  책을 정말 아끼면서 읽어나갔다.  재밌다고 한꺼번에 읽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도 재미지만,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의 정겨운 입담같은 글이 너무 포근하고 아늑했기 때문이다.  학자의 글이,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한 모습이 역력한 글이 이렇게 정겹고 포근할 수 있을까.  읽는 순간엔 책 바깥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고민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을 받곤 하였다.  이렇게 정다운 느낌으로 내가 사는 곳을 상세히 설명해주니 재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고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이영권 선생님의 제주역사기행과 함께 이 책의 경로대로 제주를 다시금 돌아보고 싶어졌다.  재미와 흥미도 흥미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제주에 살고 싶어하는 나는 제주를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은 따뜻하고 면밀하고 재밌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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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 - 길 내는 여자 서명숙 먹으멍 세상을 떠돌다
서명숙 지음 / 시사IN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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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하루 세 끼 먹는 일로 연관짓자면, 시간을 흐르는 인생은 먹는 일과 연관짓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저절로 울리는 배꼽시계에 민감해하고, 사람과의 만남을 먹는 일과 함께 하는 것도 무척 자연스럽다.  그것은 하나의 관계가 되고 삶의 모습이 되고 때로는 인간사회의 사건이 되기도 한다.  먹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삶의 한 흐름이다.  먹는 일만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은 과거의 추억에서 현재의 순간을 거쳐 미래의 바램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먹는 일은 좋든 싫든 간의 수많은 내 삶의 모습속에 담겨 있다.  부모님의 호된 꾸중에 눈물을 머금으며 밥술을 떠야만 했던 일이 있었던가 하면, 새로나온 컵라면을 먹어보겠다며 친구들과 온 시내를 반나절동안 돌아다니던 일도 있었다.  어른들의 집안싸움에 결국 엎어져버린 밥상을 보며 입맛을 싹 잃어버린 일도 있었던가 하면, 감기로 인한 신열에 들떠 기운을 차리지 못할 때, 어머니가 떠 주시던 뜨거운 물에 말아 신김치조각을 올려 떠먹여주던 밥술에 입맛을 온전히 되찾았던 일이 있었다.  먹는다는 것은 삶을 표현하고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자, 맛과는 별개로 마음을 차갑게 식히거나 뜨겁게 달구는 주관적이면서도 매력넘치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자인 서명숙 올레이사장의 삶은, 그녀가 스스로 말했듯 풍만한 식탐이 함께했던 열정의 시간이다.  삶의 에너지가 요동칠때마다 그녀의 식탐은 언제 어디서건 시의적절하게 작동함으로서 에너지의 요동을 진정시키거나 고갈상태를 채워넣고 과열을 식혀주는 본능적 조절장치로 보여진다.  거기엔 누구나 맛있다는 맛집이야기나, 스스로 자랑할만한 맛있는 요리법이 있지 않다.  맛은 때마다의 상태를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위로하는 음식에 주어지는 평이었고, 요리법은 추억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흔적속에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식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맛집이나 맛있는 레시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위로가 되는 음식과 추억속의 흔적이 주는 아련함이며, 한가지를 더하자면 내가 가진 삶의 재료속에서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낼 영감을 제공하는 본능의 촉매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름 맛집을 찾아 포스팅하는 맛집 블로거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입장에서, 맛에 대한 이야기의 진정성은 바로 이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맛의 객관적 기준이라는 것이 모호하기도 하지만, 주관성에서도 너무 제각각인 면이 다분한지라, 맛집을 주제로 하는 나의 이야기가 과연 실질적인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고민이 무척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식탐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난 책 안에서 제주의 맛집정보를 기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용은 미리 언질했듯이 그런 책이 아니었다.  먹는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한 사람의 삶과 흐름, 그 굴곡마다 만난 진정성 어린 음식들..  난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하는 자책과 맛에 대한 새록한 깨달음이 다가왔다.


  '먹는다'는 일은 사람들이 지닌 추억속에 존재하는 비중있는 행위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그만큼 가장 쉽게 떠올리며 가장 풍부한 감정과 감성으로 말할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런 주제가 구수한 글솜씨를 만나 감칠맛나고 풍부한 삶을 이야기한다.  먹는 일과 연관한 글들은 무수히 많기도 했지만, 제주에 살아서 그런지 현무암 바위위로 부는 습한 바닷바람과 짭짤함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이 글이 더욱 정감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좀 더 정이 붙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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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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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해하는 시선은 다양하다.  우리가 교과서로 배운 위정자들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철저하게 인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사서술이 있고, 그 사이에서 시선배분을 적절히 조절한 역사서술도 있다.  알려진 사실과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하는 서술자의 해석차는 이를 공부하는 이의 조율에 달린 문제이다.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계급적 다양성이 존재한다면, 다르게는 문화사회적 현상의 복잡성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바라보아야 할 다양한 원인, 다양한 전개, 그리고 다양한 결과를 분석해보는 것이다.  한 시점을 중심으로 시대를 흐르는 중심사상과 좌우앞뒤의 전개를 통해 그 시점을 분석이해하고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어 성찰하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강유원선생님의 강의는 깊은 가치를 지닌다. 


  교과서 공부에만 치중했던 우리가 그런 입체적인 사고를 지니기는 힘들다.  게다가 요즘은 입시에 밀려 역사 자체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세상에 역사에서 우리가 성찰물을 걸러내는 작업 자체에 익숙함이 없다.  역사를 바라보지 않고 성찰하지 않다보니 21세기에 어찌되었든 배만은 불릴 수 있었던 어두운 40년전의 현대사를 다시 체현하려 하는지 모른다.  역사적 성찰의 부재와 시대의 흐름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머리의 성장을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배부른 돼지의 늘어진 뱃살만 잃어버릴 일만 남을 것이다. 


  저자의 성찰의 능력과 책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레퍼런스의 조합은 역사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르게 하며, 거기에 살을 붙이는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 방식의 복잡다양함과 요구하는 끈기는 조금 버겁기는 하지만, 제대로 공부한다는 것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역사를 해설하면서 동시에 공부하는 방법의 개념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강유원 선생님은 삶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무명의 존재로 태어나 공부를 하고 공부를 통해 인류의 위상을 높이고 위상을 높인 후 무명으로 죽는다.'  그것이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며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일 것이다.  언뜻 보면 별다른 의미를 모를 수도 있겠지만, 헤겔의 말대로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엔 언제나 악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래서 역사의 순간순간에 무척 불행한 일이 많았으며, 지금 우리의 삶을 40여년전의 암담한 세월로 스스로 돌려놓은 시점에 그 의미가 마음에 닿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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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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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제 3세계라는 나라들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미안함을 느끼거나 응원을 하는 것도 이제는 무척 민망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여지는 긍정적인 작은변화들은 언제나 외부에서의 지원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처절한 저항에서 기인했다.  대체, 이러한 류의 책을 읽고 마음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은 먹고살며 사유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입장에서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저자의 편지가 말하는 아이티의 현실은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어떻게 점령하고 관리하고 식민지화시키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내부의 기득권력이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을 다루는 전형도 보여준다.  어려울 것이 없다.  기득권은 강대국 외세세력을 등에 진 채 내부의 부를 독식하고, 약소국의 식민지화에 눈독을 들이는 강대국은 약소국의 기득세력을 매수하여 매우 정교한 체계로 자신들에 유리한 산업환경을 만들어놓는다.  단지 마구잡이로 빼앗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손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환경으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군사력으로 억압하던 20세기 초반의 식민지 시절보다 무척 정교해진 점령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동시에 이런 수탈과 억압의 구조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틀은 '인민의 무지와 문맹'이라는 매우 중요한 시사적 특징이 존재한다.  그래서 아리스티드가 벌이는 문맹퇴치와 교육사업은 어떤 시선에서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문맹퇴치운동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21세기의 발전했다는 세상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존엄한 가난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리스티드의 이름마저도 발설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억압의 암담함 속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일 것이다.  인민의 저항은 언제나 기본에서 시작한다.  그들의 존엄함과 폭력에 대항하는 비폭력 저항으로 행동의 정당성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폭력과 억압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기득세력 앞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하지만, 역사속의 모든 곳에서 인민의 저항은 진실에의 앎과 함께 존엄의 요구, 비폭력으로 시작하였고 수많은 희생이라는 아픈 댓가를 치른 다음에야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런 저항을 이끄는 아이티의 신부이자 전 대통령이기도 했던 아리스티드의 전 세계 인민들에 보내는 나직한 호소인 것이다.


  다시 민망함으로 돌아간다.  21세기의 발전했다는 세상에 내가 풍요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80%에 육박하는 세계인민의 가난에 기인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구조에 어떤 모습으로든 간접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런 현실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만큼 복잡해서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민망함 말이다.  내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내부의 문제에 골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런 전 지구적 구조에 대한 민망함을 간직하고 의식하기만 하는 일은 언제나 좀 더 구체적인 고민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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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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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과 게이샤간의 사랑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이들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문체의 아름다움.  번역서로서 읽어 원작의 느낌은 어떠할 지 말할 수 없으나, 번역서에서도 느껴지는 문체의 유려함, 묘사의 부드러움이 있다.  나지막한 지붕에 소박하게 쌓인 눈더미, 하얗게 안겨버린 마을의 정경에서 느껴지는 정적의 흐름..  아마도 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배경의 느낌은 대략 이런 것이겠다.


  눈덮인 마을을 바라보는 먼 시선은 주인공들 간의 감정의 흐름과 설핏 닮아있다.  설경이 주는 정적의 고요함과 포근함은 다가가면 차가움과 불편함으로 변하듯이, 받아안으면 괴로워질게 뻔한 한량과 게이샤의 사랑.  그래서 그 둘은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못하는 그런 감정의 교류를 주고받기만 하는 것이었을까.


  작품의 내용을 일본에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읽으면 작품의 아름다운 본질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겠지만,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이다.  그래서 살짝 불편해지기도 하는데, 그것이 묘사와 문체의 유려함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작품이 탄생한 시대와 배경이 고려되기도 했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비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이 작품이 탄생한 일본의 역사적 배경도 궁금해졌다.  1937년에 시작하여 1948년에 완결판 설국으로 탄생된 이력을 생각해보자면 이를 패망에 따른 허무주의적 사조와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단지 모든 것 위에서 설명되는 회화적 언어, 시적이고 우아한 문체, 그래서 수상한 노벨문학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 작품의 가치와 평가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  다시금 읽어봄으로써 포근함과 아름다움에 안기고 싶을만큼 훌륭한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읽고 난 후 자잘한 의문들에 머릿속이 깔끔해지지 않는 자잘한 감정들이 남는 것 역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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