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소위 제 3세계라는 나라들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미안함을 느끼거나 응원을 하는 것도 이제는 무척 민망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여지는 긍정적인 작은변화들은 언제나 외부에서의 지원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처절한 저항에서 기인했다.  대체, 이러한 류의 책을 읽고 마음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은 먹고살며 사유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입장에서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저자의 편지가 말하는 아이티의 현실은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어떻게 점령하고 관리하고 식민지화시키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내부의 기득권력이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을 다루는 전형도 보여준다.  어려울 것이 없다.  기득권은 강대국 외세세력을 등에 진 채 내부의 부를 독식하고, 약소국의 식민지화에 눈독을 들이는 강대국은 약소국의 기득세력을 매수하여 매우 정교한 체계로 자신들에 유리한 산업환경을 만들어놓는다.  단지 마구잡이로 빼앗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손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환경으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군사력으로 억압하던 20세기 초반의 식민지 시절보다 무척 정교해진 점령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동시에 이런 수탈과 억압의 구조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틀은 '인민의 무지와 문맹'이라는 매우 중요한 시사적 특징이 존재한다.  그래서 아리스티드가 벌이는 문맹퇴치와 교육사업은 어떤 시선에서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문맹퇴치운동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21세기의 발전했다는 세상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존엄한 가난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리스티드의 이름마저도 발설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억압의 암담함 속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일 것이다.  인민의 저항은 언제나 기본에서 시작한다.  그들의 존엄함과 폭력에 대항하는 비폭력 저항으로 행동의 정당성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폭력과 억압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기득세력 앞에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하지만, 역사속의 모든 곳에서 인민의 저항은 진실에의 앎과 함께 존엄의 요구, 비폭력으로 시작하였고 수많은 희생이라는 아픈 댓가를 치른 다음에야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런 저항을 이끄는 아이티의 신부이자 전 대통령이기도 했던 아리스티드의 전 세계 인민들에 보내는 나직한 호소인 것이다.


  다시 민망함으로 돌아간다.  21세기의 발전했다는 세상에 내가 풍요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80%에 육박하는 세계인민의 가난에 기인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구조에 어떤 모습으로든 간접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런 현실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만큼 복잡해서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민망함 말이다.  내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내부의 문제에 골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런 전 지구적 구조에 대한 민망함을 간직하고 의식하기만 하는 일은 언제나 좀 더 구체적인 고민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