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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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개인단위에서 시작하여 이어지고 마무리된다.  삶의 주체인 개인은 물론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기에 자기 주변의 많은 사람들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관계는 개인의 목적과 선택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될 수 있지만, 그 중 가족이라는 관계는 혈연으로 이루어져, 태어날 때부터 내가 선택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고, 이성을 넘어서는 어떤 본능적 이해를 수반하는 특수한 관계이다.


  관계를 맺음에 있어 일부를 희생당해야 하거나, 희석되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개인의 존재이다.  삶은 개인인 자기자신의 것이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개인의 존재감은 어느정도 억눌림을 당해야만 한다.  조직사회에서 개인의 존재감은 구조적으로 억눌림을 강요당한다.  그것은 스스로 강렬하지만 억제해야만 하는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이익목적으로 관계를 맺은 조직사회는 이질적 관계라 본다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안에서의 관계는 존재감의 억눌림과 억눌림의 저항을 자기 안에서 내면화하여 스스로 무마시킨다는 점에서 동질적 관계라 볼 수 있다.


  혈연의 관계가 가지는 동질성은 때로는 더욱 버겁고 강압적이다.  내면화를 통하여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스스로 무마시켜야 하는 고통의 크기가 무척 크다면 말이다.  혈연간이라는 어떤 본능의 작용은 그런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에 나름의 정당성까지 부여한다.  '문제없고 고민없는 집안은 없다.'란 말을 쉽게 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억압의 폭력은 개인단위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다른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서의 것 보다도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사회적 기본단위와 혈연의 관계는, 우리에겐 가장 아늑한 안식처임과 동시에 가장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런 가족을 구성하는 개인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을 분리하여 분석한다.  그 과정은 가족이라는 가장 간단한 단위안에서 존재하는 거대한 이해와 관계의 복잡함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때로는 이성과 보편적 이해를 넘어서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들까지 그대로 드러내는 괴롭고 부담스러운 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사회가 보여주는 괴롭고 부담스러운 이면들은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가능하기도 한 모습들이듯이,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에 덧씌워진 어떤 보편적 규율이나 이해는 내면화하여 드러나지 않는 억압과 폭력을 공공연한 비밀로 존재케하는 틀인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들을 반전과 암시로 구성하려는 작가의 노력은 엿보이지만, 조금은 엉성했달까?  반전을 받아들이고 돌아보면 앞선 이야기들에 이런저런 궁금증만 남는다.  가족을 하나하나 개별화하여 분석하는데에 문장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좀 더 주력했다면 매우 의미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재미는 조금 덜 해지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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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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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철학적인 책은 어렵기만 하다.  철학적 사유가 철학적으로만 깊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들로 넘쳐난다면, 철학은 스스로 소통을 거부한 꼴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말의 장벽이 생기면 수없는 말들의 나열은 그 안에서 알아듣는 사람들끼리만의 주고받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한병철의 책들이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나의 이해수준이 부족한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사유는 아무래도 일반의 사람들과 소통하기가 무척 어려워보인다.  나는 그의 사유를 이해하고 공유하고 싶지만, 쉽게 다가서기가 매우 어렵다.  처음 접한 피로사회는 사회과학서적들을 조금 읽어본 입장에서 그나마 이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내 머릿속을 뒤흔들다가 결국 거리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나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시간의 가속화에 대한 분석과 노동의 이해에 대한 역사적 변화부분이었다.  분주하기만 한 현대인들의 시간은 무척 빠르게 지나가며 축적되는 것 같지만, 지나온 시간의 흔적은 분절화되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목적도 축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번잡하게만 여기저기 밟고 지나온 모습들, 그것을 3자적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현대인의 모습은 시간이 존재하는 허공에서 빵빵한 풍선이 바람을 내뱉으며 정신없이 흩날리듯 방향을 상실한 채로 여기로저기로 날아가는 형국일 것이다.  우리가 바쁜 것은 우리 스스로의 보람으로 쌓이지 않는다.  모모가 살던 도시의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려 바쁘게 살지만 시간도둑의 계략으로 허무와 탈진만 남았듯,  우리의 현재도 무언가에 의해 허무와 탈진만 가득하다.


  노동을 통하여 인간성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말을 저자는 믿지 않는다.  하긴, 시간의 가속화로 허무와 탈진만 남아있는 우리가 그 시간에 하는 일이란 바로 노동이기도 하다.  고대의 인간들은 노동보다 사색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저자도 인간의 역사는 노동할때 발전하지 않았고, 사색을 통하여 발전했다 이야기한다.  노동의 가치를 최고로 만든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노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함은 하나의 축복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로 여기고 노동하는 사람에 혁명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은 그 시절과는 다르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형태로 변했다.  저자가 노동에 대한 기존의 철학을 뒤짚고 비판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현재의 노동은 축복과 보람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또는 누군가에 의한 착취와 예속이 되어버렸다.


  휴식역시 그렇다.  휴식이 다음의 노동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휴식이 아니라 노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일시적 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노동을 멈추고 사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주장한다.  움직임이 자기파괴의 형태를 취하고, 그것이 체계와 치밀함을 지닌다면 일단 멈추는 것이 옳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사회의 구조와 순환, 그 안에서 노동을 포함한 모든 행동의 의미가 점점 왜곡의 형태로 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보람과 즐거움을 찾고자 내 스스로 벌여놓은 수많은 오지랖들..  책을 읽고나니 내가 생각하고 내가 벌인 일들에 대해 다시금 뒤돌아보게 되었다.  사회구조 안에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본질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일을 나는 현실을 이유로 방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벌이는 일들이 누군가의 눈에는 바람빠지며 어수선하게 날리기만 하는 풍선의 모습은 아닐지..  어려운 말들의 나열 속에서 가까스로 찾은 성찰의 순간이었다.  이 책이 피로사회보다 먼저 씌여진 책이라니 이해력이 좀 더 깊은 사람이라면 이 책 이후의 피로사회가 비교적 쉽게 다가올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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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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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와 명예는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이 때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생과 주변의 모든 것을 생각하여 볼 때, 극단의 선택을 가능케 하는 숭고한 이유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사무라이가 활약하던 일본의 과거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대의란 무척 많이 존재했었던 듯 하다.  전장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을 포함하여 무사의 정신에 손상을 입히거나 더럽히면 할복이라는 방법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으니 소설 속의 내용대로 '목숨 날아갈까봐 뭐 하나 제대로 해볼 수 없을 지경'의 세상이었다.  무사가 스무살 즈음에 어떤 이유로든 죽어나가는 일이 많았으니 서른을 넘기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피어나자마자 꽃잎을 떨구고 죽는 벚꽃에 비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무사도정신을 강조한 일본의 과거라도 사람사는 세상이었다.  처자식이 있고 행여 가족들이 굶을까봐 걱정하는 아비가 있는 인간사회였다.  대의를 지키는 것이 가족과 자신을 충분히 먹여살리는 일이 아닌 이상, 무사 각자의 고민과 어려움은 생계와 직결될 수 밖에 없다.  칼을 휘두르는 이유가 내가 베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베기 때문임과 동시에, 칼을 휘두르고 인정을 받아야만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허한 대의보다는 이런 현실적인 이유를 대의로 활약한 상상의 무사 요시무라 간이치로(신센구미에 대한 기록에는 유시무라 간이치로라는 이름의 실제 무사가 등장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소설속의 내용은 순전 작가의 상상이었으리라.)의 자취를 따라 나서는 여정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문과 무에 있어 누구보다도 뛰어난 말단무사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계급과 직위때문에 능력과 상관없이 가난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염치나 체면을 포기하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대의는 가족에게 있음을 은연중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그 앞에서 대의를 내세우고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다른 무사들 역시 그를 무시할 수가 없다.  가끔씩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접하기도 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그의 대의 앞에서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사도정신에 어긋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켰고 그 변화에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포함된다.  무사도정신을 강조하던 사무라이시대에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를 엮어나간 것도 메이지유신의 물결을 타고 변화한 시대에 과거의 사람들도 솔직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칼을 멋있게 휘두르고 무사도정신을 강조하는 부리부리한 눈의 신센구미 사무라이 이야기들이 난무하던 시대에 아사다 지로가 보여주는 인자하고 가족적인 무사 간이치로의 이야기는 소설이거니와 주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독특한 이야기일 수는 있겠으나, 어느 시대 어느 순간에도 사람들이 저마다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다양하면서, 그 안에서 각자의 대의는 어디에든 둘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마다 처한 현실상황이 각자의 대의를 만들게 할 수 있음도 보여준다.  벚꽃처럼 피자마자 떨어져 죽어야 했던 사무라이의 세상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을 헤쳐나가는 데, 무사도라는 대의는 많은 무사들에 있어 쉽게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생의 순간순간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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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로드 - 여행의 순간을 황홀하게 만드는 한 잔의 술
탁재형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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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술은 일상의 어느 부분이다.  술이 목적은 아니지만, 일상의 무언가를 할 때 술은 언제나 기분과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수단이었고 위로와 안정을 주는 친구였다.  다음날엔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몸과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마시는 순간만큼은 내 옆의 든든한 무언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럽으로 학회를 가는 친구에게 압생트를 부탁하여 마셔본 일이 있었다.  그땐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과 작품에 관심이 증폭되었을 때라, 때마침 유럽에 다녀오는 친구에게 압생트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녹색을 띄는 투명한 액체에서는 강렬한 알코올의 기운과 허브향이 올라왔다.  압생트가 담긴 잔 위에 티스푼을 걸쳐놓고 그 위에 각설탕을 놓은 다음 증류수를 천천히 방울방울 떨어뜨리면 설탕과 증류수에 희석되는 녹색의 액체는 어느순간 투박한 색으로 변하며 또다른 느낌의 술이 된다.  깔끔함은 달달함이 섞인 투박함으로 변하고 희석된 알코올은 조금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아니스와 쑥향은 약간은 거부감이 들게 하면서도 은근히 잔을 입으로 가져가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였다.  고흐가 황반에 변성이 일어나도록 마셔댄 이유가 이런거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아브신트 쑥의 독성으로 제조법과 재료가 바뀌었지만, 압생트와는 첫만남은 무척 매력적이고 신선했었다. 

  나의 일상의 든든한 동료이자 친구인 알코올이 이런 매력적이고 신선한, 또는 다양한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얼마나 더 행복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화학증류주인 소주와 밍밍한 맥주, 그리고 아스파탐 가득 달달한 막걸리에 익숙해져버린 나의 입이 어느순간 안스럽다는 생각이 든 건 이 책을 읽어가면서였다.  스피릿로드에 진열된 수많은 술들을 전부 만날 수는 없지만 개중에 보이는 반가운 술들은 구하려면 한없이 비싸기만 하다.  그동안 나에게 행복과 위안을 준 술들이 케미컬들과 밍밍함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니 순간 우울함이 엄습한다.  물론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의 일상의 행복과 위안은 대체 무엇때문에, 언제부터 이렇게 싸구려로 취급받았던 걸까?

  이야기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경험은 시선과 느낌이 만나 말과 글로서 표현이 된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한 이가 말이나 글에 재능까지 겸비하고 있으면 나로서는 무척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책의 내용과 별도로, 저자에게 내가 가지는 부러움이다.  단지 술에 대한 설명만 있다면 단락이 명확하게 나뉘는 이런 형식의 책은 사실 좀 지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술을 통해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안다.  마치 비어라오를 한 병 쥐어주고 메콩강의 모래밭으로 데려가거나 쓰라 써를 한 통 쥐어들게 하고 오지의 마을 무덤을 돌며 망자의 인생을 함께 감상하고자 하는 듯 하다.  술과 이야기가 같은 비중으로 균형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한 권의 책은 풍성하고 든든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언뜻 설명중에 보이는 ‘신의 물방울’식의 느끼한 과다망상형 비유는 적당한 선에서 끊고 중지하는 센스까지 몇 곳에서 보인다.

  이런저런 삶의 입장이나 일상을 꾸려가다보니 알코올과의 만남도 서서히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더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싸구려 화학주나 밍밍한 맥주에 대한 서운함이 커지니 이 땅에서는 알코올과의 만남을 즐길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신, 스피릿로드에 진열된 술들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전부 도수가 만만찮은 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나서 내 인생의 위안과 행복을 좀 더 나은 친구들과 느끼고 즐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우선은 송명섭 장인의 죽력고부터 찾아보아야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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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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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나온지 이미 오래된 이 동화를 나는 이제서야 읽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책읽는 일 외의 다른 일에 바쁘거나 관심있거나 했던 내 과거의 한 때에 이 책이 번역되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노래로까지 인용되어 불리던 이 책의 이름정도는 듣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좋은 책을 뒤늦게 읽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일말의 후회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조금 달랐다.  저자인 미하엘 엔데가 이야기하려 했던, 이 동화속에 배어있는 경제적 관념을 조금 이해하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이 아니라 내용에 담긴 의미를 조금 더 알고 이야기를 접한다는 일은 좀 더 깊은 이해에 다가가는 일이다.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준다는 신비로운 아이 모모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바쁘기만 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왜 이렇게 바쁘기만 해야하는가를 반문하며 여유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유한다.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한 해석과 권유이지만, 이 책이 나오고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여유로움에 대한 생각은 커녕 더 바빠지기만 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이 동화에서 교훈을 실천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한 듯 하다.  의미해석이 너무 피상적이었던 탓은 아니었을까..


  엔데는 이 동화에 경제학적 관념을 녹여놓았다.  물론 주류경제학의 관념은 아니다.  엔데는 실비오 게젤과 루돌프 슈타이너의 경제관념을 말한다.  실비오 게젤은 '돈의 노화론'을 주창한 경제학자이다.  그는 돈으로 산 물건이 시간이 지나며 닿아 없어지거나 가치가 감소하듯, 돈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감소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사상가로서 사회라는 유기체를 3분절로 나누어보는 사회삼층론을 세웠다.  그에 의하면 정신생활에서는 자유가, 법생활에서는 평등이, 경제에서는 상호부조의 힘이 기본이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경제부문은 경쟁이 아니라, 우애의 원리와 사회연대를 기본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모모가 활약하는 세상을 경제학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주류경제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일정서류만 만들어지는, 그러니까 실체는 없고 허상뿐인 돈과 그것을 부채로 빌려 갚을 때에는 이자를 붙여야만 하는 채무자들..  채무자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단순교환가치와 건전한 경제순환수단으로서 활용되었을 때, 돈에는 부채도 이자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모모와 싸우는 회색인간들은 이자들인 셈이고, 회색인간들이 사람들의 시간을 뺏어 훔쳐 자신들의 존재수단인 시간의 꽃으로 보관하는 것은 허상의 돈인 부채인 셈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혼란속에 오해하고 회색인간들이 만들어낸 부채의 경제순환속으로 빨려들어가 끊임없이 부채를 갚고 이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 모습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것을 여유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일하고 애써도 우리에겐 왜 여유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접근할 수 없는 피상적인 설명일 뿐이었다.  엔데는 그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경제를 대입하고, 그가 생각하는 돈과 경제의 본질을 실비오 게젤과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론에 대입하여 제시한 것이다.


  모모는 마이스터 호라 박사에게 질문한다. '만일 시간을 도둑질할 수 없게 된다면 회색인간들은 어떻게 되나요?'  호라박사는 대답한다.  '그러면 원래의 무로 돌아가 소멸되고 말아.'  이만큼 우리가 현재에 처한 경제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비유가 있을까.  동시에 이 경제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적어도 매년 3%의 경제성장을 하지 않되면 안되는, 그래서 여유를 포기하고 일해야만 하는 우리의 삶은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받고 있는 것일까?  허상을 위해 움직이고 결과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할 수 밖에 없어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의 심화를 낳기만 하는 이 시스템에서, 미하엘 엔데는 모모를 통해 경제관념을 담아 사회에 대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니 던졌다.  우리는 그의 질문을 이해했던 것일까?  지금의 사회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렇게 똑똑하거나 용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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