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알약 - 증보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레데릭 페테르스 글.그림, 유영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견이라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무지에서 기인한다.  그 사실을 언제나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편견의 대상을 다른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엔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거나 단정짓는 경향이 있어 편견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편견의 대상은 언제나 상대적인 소수자들이었으니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누군가를 다른 시선으로 회피하거나 멸시하는 시간의 나열이기도 하다. 
 

  그런 편견들 중에 HIV감염자에 대한 편견은 아마도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 많은 편견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우리에게 HIV는 우선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만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HIV 양성반응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그 자체로 각자의 능력을 무시당한 채 사회적 활동 자체를 차단당한다.  HIV에 대한 무지가 사회적인 원천차단이라는 형태의 편견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회는 HIV 양성반응자에 대한 조심과 관리만을 강조할 뿐,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의사인 나 조차도 병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적 조치나 관리차원의 일 외에 HIV 양성반응자들의 사회적, 개인적 삶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사실 부끄럽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상상, 괴로움, 죄책감, 번거로움 등은 특별한 상황에서나 겪는 감정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 겪어야만 하는 감정인데 나는 마치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듯 속으로 '그렇구나'만을 연발하며 읽어내려간 것이다.  나는 얼마나 더 분발하고 알아가야 좀 더 나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

 

  편견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HIV양성반응자들도 그렇지만 B형간염 양성반응자들도 그렇고 동성애자들, 그리고 장애우들..  장애우들에 대한 시선과 편견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그닥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얼마나 경직되고 편향된 사고속에 살며, 숨쉴 틈없이 번잡하기만 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느낀다.  그런 번잡속을 같이 헤매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런 편견속의 사람들일 진대,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HIV양성인 카티를 사랑하는 주인공이기도 한 작가의 마음이 단순히 작가만의 마음일까?  나 역시 어떤 편견의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일 수 있다.  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으로 실재할 수 있음을 망각하고 산다.  그것이 생물학적이거나 인습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든 말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갈 때나, 길을 걸을 때면 마주칠지도 모르는 흰 코뿔소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 자신을 편견의 시선속에 스스로 가두고 암연속에서 침전하겠다는 결기에 찬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편견을 걷어보려는 노력은 다함께 사는 삶의 최소한의 조건이자 당연한 노력이 아닐까.  이 작품은 HIV 양성인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아가며 가지는 고민의 기록이지만, 그 고민을 다른 모든 편견의 문제속에 대입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한, 수많은 생각을 이끌어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경제행위의 발전과 변화에 있어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자본주의체제하에서 현재사회는 자본이라는 것을 매개로 생산, 소비를 계량화 구체화 하고, 이윤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며, 생산소비활동은 필요를 넘어선 호기심과 욕구차원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서 겉으로 보이는 결과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인데 과연 이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좀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자 노력하는 행위는 존중되어야 하고, 그런 노력의 경쟁은 어쩌면 보호되어야 하는 사회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논리하에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회현상들은 인간의 삶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최적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여러 경제지표가 좋아졌다고 자화자찬하는 위정자들의 호들갑과는 달리 전보다 더욱 척박해지기만 하고 어딘가 불안하기만 하다.  세상엔 그저 잘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만 난무하는 가운데 대체 이 불안과 척박의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체제는 나쁘지만 다른 경제체제는 더욱 나쁘다고..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야만 하는데 이를 더욱 공고화하고 심화시키는 자유시장적 자본주의 체제는 그나마의 자본주의를 더욱 나쁘게 만들기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지는 양심적이고 논리적인 경제학자인 저자가 제목대로 23가지 예를 들어 책에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으니 읽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그것은 마치 지금 우리가 지금의 정부와 대립하는 이유들과 흡사하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려 하는 위정자들과, 그들과 야합하여 이윤을 획득하려 하는 상위 소수의 물욕에 반하여 모두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 하는 다수의 논리적 주장과 비슷한 부분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나쁜 자본주의가 더 나쁜 모습으로 변화하지 않게 하는 지점에서 머무른다.  그것은 저자가 이야기한대로, 자신은 자본주의가 가장 나은 경제체제라 믿는 경제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를 양심적인 학자로 보지만 개인적으로는 결국 이 지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번째, 다양한 현상들이 맞물려 이루어지는 사회현상을 경제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관찰하며 가질 수 밖에 없는 시야폭의 한계, 두번째는 자신 스스로도 인정한 나쁜 자본주의의 결과가 지금 환경적 재앙으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재체제에서 성장한 한국경제의 이면에 공존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무조건적 희생과 갑작스런 성장에 비례하여 성장하지 못한 의식들은 경제학자의 시선으로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부분일런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까지 저자를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가진, 의아해하는 시선의 이유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상 자원과 노동력으로 생산과 소비를 무한반복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지구적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것이 30년간의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아닌 200여년간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산물임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의 유지와 인간이라는 종의 지속적인 생존의 차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속히 극복되어야만 하는 상당한 문제를 지닌 체제인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야만 생명의 유지와 종속이 가능하다면 자본주의가 좀 더 착해지고 나빠지고 하는 논의와 주장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양심적 차원에서 존중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일말의 허무함을 지울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환경의 파괴는 이 책이 쓰여진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매 마찬가지인 일이라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수많은 경고와 파괴에 따른 명백한 반응들이 현실로 나타났음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자연의 파괴를 일삼고 있으니 오히려 파괴행위 자체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행위를 지속한다는 점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니 환경과 자연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이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이 책을 읽고 두 가지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두가지 내용도 인간과 지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함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놀랍긴 하다.  첫째는 과학이라는 진실을 기반으로 객관적이어야 하는 학문이 기업의 자본과 권력의 요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데에 있어 권력은 사람들을 기만하고 정책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의 배후에는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과연 객관적 진실을 밝혀내는 학문인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우선은 진실에 근접하고자 노력하는 학문이라는 정의엔 그닥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로워야 할 과학이라는 학문이 맹목적인 확신에 휩싸인 채, 자본과 권력에 휘둘릴 때에 그것은 치명적 무기가 된다.  우리는 이미 2차대전때의 원폭투하를 보며 순수한 과학적 결실이 어떻게 자본과 권력에 의해 막강한 치명적 무기가 될 수 있는가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경험은 겸손과 성찰을 낳지 못하고 냉전체제 속에서 핵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책의 내용같이 화학살충제에 대한 맹신이 생명파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고, 현재까지도 과학은 유전자변형 식품같은 수많은 분야에서 검증되지 않은 채로 자본과 권력에 의해 진실과는 다른 형태로 이용당하고 있다.  

 

  그렇게 왜곡된 과학은 자본에 결탁한 권력에 의해 정책화되어 이용된다.  정책화가 되고 시행이 되고 결과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엇비슷하다.  정책화가 되기까지 자본과의 뒷거래는 은폐된 채 언제나 국민이나 지역민들에 경제적 이득을 줄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며 지지를 얻어내고 결국 정책화되고 시행된다.  시행되며 나타나는 수많은 부작용은 은폐되거나 이미 시작했으니 멈출 수 없다 이야기한다.  파괴된 자연을 바탕으로 끝을 본 뒤에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재정비를 하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남는 것은 파괴된 자연뿐,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이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권력과 소수 자본가에 엄청난 이득이 남겨질 뿐..  새만금이 그러했고 시화방조제가 그러했고 수많은 토건족들이 벌인 일들이 그러했다.  지금 우리는 납득할만한 이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채, 엄청나게 파괴되고 있는 4대강 죽이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왜곡된 과학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삶과 그 터전의 파괴..  인간은 이렇게 끝까지 우매함을 버리지 못한다.  객관적이어야만 할 과학에 힘이 있었던가?  우리는 4대강 죽이기 사업이전, 대운하라는 명목하에 벌어졌던 과학의 싸움을 목도하였다.  수많은 양심적 과학자들과 친정부적인 어용과학자들의 싸움..  하나의 진실아래 객관적이어야만 할 과학은 이렇게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순간마냥 죽지않으려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60여년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파괴의 이면에 자행되는 과학의 왜곡과 잘못된 맹신,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결탁에 따른 과학의 오용은 지금도 전혀 달라진 것 없는 여전한 일이다.  추천사에서 이 책에 소개된 화학살충제의 남용은 이제는 더이상 벌어지지 않는 과거의 우매함이었다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과학이 오용되는 매커니즘은 여전하다.  그리고 더 은밀하고 조용하게 환경과 생명의 파괴는 자행되고 있다.  힘없는 인민들이 믿어야 할 것은 그저 자연 스스로 치유하는 회복력이어야만 할까?  사실 자연의 회복력도 이제는 임계점을 넘어선 듯 하다.  결국 지구는 한계에 임박한 것이다.  과학을 명분삼아 자행되는 파괴도 당장 멈추어야 하지만, 이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권력과 자본이라는 인간사회의 시스템이 먼저 제지를 당해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닐까?  끊임없이 죽어가는 뭇생명들이 안타깝지만, 뭇생명들을 죽이고 있는 인간사회의 시스템을 여전히 바라보고 체념하고 있는 우리 자신도 안타까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60년전에 쓰여진 이 책에서 나는 현재에 대한 그런 안타까움을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해서 외롭고 소외받는 이들을 위로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가진자의 자선, 복지제도의 도움, 또는 막연한 사회구성원들의 관심.. 많은 것들이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정작 위로가 되는 것은 같은 처지의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끼리 어울려 나누고 다투고 위로하며 공감하고 교류함으로 서로를 감싸안는다.  물론 자본의 마수가 덜 닿는 지점으로 모일 수 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그들은 그들끼리 모이는 건지도 모른다. 
 

  같은 그들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공감, 그것은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절절함과 어려움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슬프다, 절절하다, 아련하다 등의 감성의 나열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감동적이다라는 식의 거리감을 전제로 하는 표현 역시 하고 싶지 않다.  나로써는 스스로 찾아들어가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가난의 아픔, 그들의 외로움, 스스로 삶을 일구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하루하루의 생활,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공동체의 꿈이 있기 때문이다.  제도의 틀에 적응하고 제도 안에서 먹고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어 더 이상의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그들의 삶을 어떤 알량한 수사나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 대한 무례이며 또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가난의 풍경에서 우울함과 감상만 드러내지 않는다.  가난의 풍경을 주변으로 어울려 뛰노는 아이들 속에서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그리기도 하고, 자본과 권력에 의해 무참히 뜯겨나가 줄어들기만 하는 판자촌 동네에서 여전히 비가 새는 지붕을 메우러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스팔트 귀퉁이 갈라진 틈에서 기어이 올라오고 마는 민들레같은 강인하고 영속적인 인간의 삶을 그리기도 한다.  가난한 동네의 비좁은 지붕틈을 타고 들어온 햇빛을 받고 앉아있는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깊이있는 연륜을 느끼고, 공동체 안 작은학교에 모여 놀고 공부하는 아이들의 미소와 성장의 모습에서 제도의 틀에 갇혀 시들어가는 다른 아이들에게서와는 다른, 싱싱하고 강인한 희망을 바라본다.

 

  무게감있는 사진과 글들 속에서 저자는 언뜻언뜻 자신의 생각을 내비친다.  그것은 판자촌 어떤동네의 사람들이 돈 많이 벌어 좋은집,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거나, 동네아이들이 좋은 학교 좋은 성적으로 세상의 어떤 기득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 가난해져 이들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꿈이다.  자발적 가난, 어려우면서도 이제는 거의 모든것이 파괴된 한정된 지구안에서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삶의 모습이다.  어떤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며,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않는 공동체를 꾸려가고 유지하며 삶을 그려내는 저자의 사는 모습이 너무도 존경스럽다.  나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란 틀에 갇혀 다가갈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그네들의 삶,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기에 책을 덮고 난 순간은 스스로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국가는 과연 정당성을 가진 통제집단인가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듯 하면서도 쉽게 답을 말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어느 국가의 국민인가라는 결정은 단지 나를 낳아준 부모가 어느나라 사람인가 또는 어느 지역에서 낳았느냐에 달려있고,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려하는 집단을 정당이라 말하는 데, 이 역시 국가를 이루는 국민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따지기보다는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일일텐데,이 역시도 고민이 되는 것은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 또는 폭력권한은 어디서 부여받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국가권력 또는 폭력은 그나라 국민들이 부여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지난 100년간 국가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이 약 2억명인데 그 중 1억 3천만명이 자국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시 쉽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그런 국가가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고, 자신의 영역이라 주장하는 지역에서 마음대로 개발을 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강제로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도 들 수 밖에 없다.  여튼간에, 국가라는 존재는 이렇게 불분명한 근원의 정당성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라는 이해에서 논리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국가에 대한 정당성 또는 어떤 의문은 다른 부분에서도 제기할 수 있다.  바로 국가가 주도하여 벌이고 있는 경제성장, 발전이라는 행위인데, 과연 그런 성장과 발전으로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고, 지금까지의 성장으로 전보다 더 행복한가라는 질문에서 역시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국가간의 경제권력경쟁, 각 나라마다의 발전은 결국 환경파괴와 빈부의 격차, 그리고 국가간의 분배불균형과 착취의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다.  지구 자체의 손상에 의한 환경의 변화, 결국 우리는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스스로 파괴하고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장과 발전의 논리, '파이가 커지면 조각도 커진다' 또는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논리는 자체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논리였던 것이다.  파이는 커지면 조각도 커지겠지만, 지구는 더이상 커지지않는 한정된 공간과 자원이며, 부자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것은 -기실은 착취이지만 설령 진정한 의미에서 돕는다 치더라도- 결국 한정된 지구를 더욱 빠른 속도로 파괴하겠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타이타닉이 빙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형국, 타이타닉호는 빙산이 있음을 모르고 돌진했지만 우리는 앞에 빙산이 있음을 알고도 엔진을 멈추지 않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이 순간 차라리 엔진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일진대, 국가로 대변되는 권력은 성장과 개발을 명목으로 연료구에 계속 석탄을 넣어 엔진을 가동시키기를 주문한다.  과연 국가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존재인가.

 

  생태적인 의미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책이다.  알다시피 생태주의는 단순한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히 급진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극우나 우파의 맹목적인 개발의 논리를 벗어나 생태주의의 급진적 사고를 가져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당장의 생명에의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생태적 위기는 지금 현실이다.  그리고 그 위기의 중심에는 국가와 우리가 속한 사회의 제도등이 존재한다.  다시금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저자는 평이한 이야기들로 상세히 설명해준다.  부록에 실린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는 영어속에 담긴 사대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어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  쓰여진 지는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절실히 다가오는 내용들이기에 결코 진부하지 않다.  남는 것은 진심가득한 공감과 행동에 대한 고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